2012년 4월 30일 월요일

본향

사32:18"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화평한집, 안전한 거처, 조용히 쉬는곳  이 세가지를 연상하면 가장 행복한 곳이 생각 됩니다.
아무리 좋은집에 살아도  화평이 없으면, 무슨 행복이 깃들겠습니까
그리고 안전하지 않는곳에 살면 늘 불안하겠지요.
조용히 쉬는곳은 참 안식을 주는곳입니다.
이곳은 천국을 연상케 해줍니다. 그리스도안에서 구원 받은 사람이 갈 천국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상상할수 없는 아름답고 행복한곳이겠지만, 아뭏튼 평화로운곳, 안전한곳, 충만한 쉼이 넘치는곳이겠지요. 벌써 부터 이곳이 그리워집니다. 전쟁과, 테러, 자연재해, 살인, 폭력, 죄가 가득찬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모하는 본향이니까요.

보내시는 하나님

The living God of the Bible is a sending God,which is what 'mission' means.
He sent the prophets to Isreael.
He sent his son into the world.
His son sent out the apostles, and the seventy, and the church.
He also sent the spirit to the church and sends him into our hearts today.

성경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은 보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의 의미입니다.
그분은 선지자들을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분의 아드님은 사도들과 70인과 교회를 보내셨습니다.
그는 또한 성령님을 교회에 보내셨고, 그리고 우리 심령속에 보내셨습니다.
-John Stott-

* 하나님은 끊임없이 보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선교사들을 보내시고, 우리를 삶의 현장속에
복음의 증인으로 보내십니다. 주님의 이 부르심에 응답
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더러운 자국

히브리서9장11절에서 22절 말씀을 묵상한 내용입니다
매월 전기세 청구서를 받으면 납기일까지 그 금액을 내야 합니다. 만일 내지 않는다면 전기가 끊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법입니다. 그러나 결혼 기념일이나, 생일을 맞이하면 선물을 줍니다. 이것은 강요된 법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옵니다.구약시대에 성막에서 제사장들이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일년에 한번 다가오는 속죄일이 되면 대 제사장이 희생제사를드립니다. 이것 역시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13). 이렇게 제사장들과 대 제사장이 속죄의 제물을 드렸지만, 근본적인 인간의 죄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마치 오랜 나무에 더러운 자국이 남아 있으면 지워지지 않듯이...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더러운 자국을 깨끗이 지워주셨습니다(13-14). 그리스도의 이러한 희생은 자원하여 사랑으로 행하신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나의 더러운 모든것, 지워지지 않았던 더러운 죄의 자국들을 주님의 피로 다 깨끗하게 하심을 찬양 드립니다.

2012년 4월 28일 토요일

시한부 인생

"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39:4)

누구나 한정된 시간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한부 인생' 이라는 말은 비단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것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해 누구나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조금 일찌기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좀 더 오랫동안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어 하나님이 부르시면 영락없이 가야 할 인생입니다.  이것을  늘 인식하며 살면 겸손하게 살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망각병에 걸려 이것을 자주 자주 잊어 버리데 있습니다.그래서 현재 조금 가지면, 조금 건강하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종말과 자신에게 주어신 시간이 한정적임을 늘 깨우쳐 달라고 기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뿐 아니라 모든 인간은 연약한 존재임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한정된 시간이 주어진  존재요, 연약한 존재 입니다. 이것만이라도 매일 매일 잊지 않고 살았으면 합니다.

예배

히브리서9장1절에서 10절의 묵상 내용입니다.
세상에 속한 성소가 나옵니다. 이것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소로 이 성소에서는 온전한 속죄가 이루어질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온전한 속죄의 제물이 되신다는 내용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나아갈려면 엄격한 규율과 통제를 따라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만들게 하신 성막에서 보여 주듯이 아주 복잡하고 엄격하였습니다. 손으로 지은 성소에서는 온전한 속죄가 이루어질수 없습니다. 일반 제사장은 성소에 들어갈수 있었지만 지성소에는 들어갈수 없었읍니다. 지성소는 대 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 들어갈수 있었지, 대 제사장 조차도  아무때나 갈수 없었지요. 이렇게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매우 통제된 규칙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지금이 구약 시대라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상상할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가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어디에서나 주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 교제하며, 그분을 찬양 할수 있고, 예배 할수 있고, 더욱 감사 한것은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늘 우리를 돕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고, 마음의 평안과,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넘치도록 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얼마나 귀중한것인지 모릅니다. 더우기 자유의 땅에 살고 있는  저 같이 북미에 사는 사람,아니  자유의 나라 대한민국에 살게 하셔서 마음껏 주님을 예배하게 하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저 북한땅에서는 예배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수 없습니다. 주님이 주신 이 귀중한 영적인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정권에 의해 그 자유가 제한 받고 있습니다. 예배 때 마다 그 자유를 통제 받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 그래서 더욱 힘써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것 입니다.


2012년 4월 27일 금요일

부요한자

계2:8-9 "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환난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부요한 자니라.."

서머나 교회는 부자 교회였습니다. 물질적인 부요함이 아니라 영적인 부요함이 넘치는 교회엿습니다. 건물도 화려하고, 교인들 숫자도 많고, 교회재정도 넉넉함에 불구하고 가난한 교회가 있고, 사람들 보기에는 작고 연약한 교회로 보일지라도, 주님 보시기에는 부요한 교회가 있습니다. 사람의 판단과 주님의 판단은 다릅니다. 서머나 교회는 환난을 당하고 물질적인 궁핍함을 당한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영적인 부요가 넘쳐서 그 부요함으로 그들의 모든 어려운 환경을 넉넉히 이길수 있는 교회였습니다. .. 지금 전 세계에 핍박 받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슬렘권에서 저 북한 땅에서 모진 박해를 견디며, 신앙 생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유로운 이땅에서 마음껏 주님께 예배 드리는 우리들 보다 영적으로 더 부요할수 있습니다. 그 영적인 부요함이 그들로 하여금 그 모진 핍박을 넉넉히 이길수 있는 디딤돌이 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모습은 우리 교회의 모습은 주님 보시기에 영적으로 부요한자인지, 아니면 보잘것 없이 가난한자 인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마음에 큰 도전이 일어납니다.


복음의 역설적 성향

복음에는 역설적인 성향이 있습니다. 핍박이 오면 신앙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강건해집니다. 반면에 평안하면 안일함과, 나약함과 부패함에 빠질수 있습니다. 이것은 2천년 교회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의 사람

히브리서8장 7-13 말씀을 묵상한 내용입니다.
첫 언약과 새 언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언약은 모세의 율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언약(율법)은 엄격한 율법에 무조건적인 순종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 관한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씀합니다. 우리는 첫 언약의 사람이 아니라, 새 언약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새 언약의 사람이지만 사고방식은 아직도 첫 언약을 따르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워 내 주위의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지는 아니한가? 특히 설교하는 목회자가 쉽게 빠질수 있는 함정입니다.. 새 언약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사랑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축복하고, 용기를 주고, 이해하고 ,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주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갈망이 그 내면에 차고 넘치는 사람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간음 현장중에 잡힌 여인에게 "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8:11) 하신것 처럼 용서와 사랑과 치유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2012년 4월 26일 목요일

예배

히브리서 8장1절에서 6절 말씀을 묵상한 내용입니다. 이 말씀도 우리의 영원한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서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대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지극히 크신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씀합니다(1). 땅의 제사장들(구약시대)은 하늘에 계신이의 모형과 그림자 일뿐입니다.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그 제사를 절대로 완성하지 못했습니다(10:11). 그들의 제사는 인간의 죄를 완전히 속죄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번에 영원히 우리의 죄를 다 속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에서 " 다 이루었다"(요19:30)고 하신것 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린 그리스도의 모형인것 입니다. 마찬가지로 땅에서 드리는 우리의 예배는 장차 우리가 들어갈 천국에서 드릴 영원한 예배의 모형이요,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배 자체를 기뻐 하십니다. 그러나 그 예배가 하나님에게 촛점을 맞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한다거나, 마치 현대의 마케팅 교회 같이 세속 심리학이 홍수를 이루고, 정신과 정서의 건강을  마치 영적인것과 동일시 한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참다운 예배가 없어질것 입니다. 이땅에서의 예배는 천국 예배의 모형이요, 그림자입니다.

2012년 4월 25일 수요일

복음의 능력

복음의 능력은 단순하게 믿어야 나타납니다. 우리가 무능한 이유, 나약한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

히브리서 7장 23절 이하에서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했습니다(25). 구약의 제사장들과 제사제도는 불완전했습니다. 그들도 역시 죄인들었고,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먼저 속죄를 한후 백성들을 위해 속죄제사를 드릴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죄가 없으시고, 거룩하시고, 악이 없으시고, 더러움이 없으시고, 죄인에게서 떠나계신분이십니다(26). 그리고 그분은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수 있는 영원한 길을 만드셨습니다(27). 그분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갈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제사장이십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에서나 어느 시간이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수 있습니다. 나의 고된 삶속에서, 병마와 싸우는 그 현장에도, 내가 기도 하는 그 시간과 장소에도, 나의 일터에서도, 나의 가정에서도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거기에 계십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중보 하시고 계십니다.

2012년 4월 24일 화요일

하나님의 소리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유는 우리 심령에 세상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히브리서 7장 11절 이하에는 멜기세덱과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온전함을 얻을수 있었으면 어찌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는가?"(히7:11)하면서 반문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구절을 묵상하면서 제사장의 인격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즉   레위지파는 그 혈통에 따라 저절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이란 위치가 그 사람의 인격을 만들어주는것이 아닙니다.목회자가 되었다고 저절로 고상한 인격이 되는것이 아닙니다. 어떤 포지션이 그사람을 보증해주는것이 아닙니다.특히 성경에는 모든 성도들이 다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제사장은 남을 위해 중보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위해 중보하는 사람, 특히 중보기도 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막힘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온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기도가 막히지 않습니다. 

2012년 4월 23일 월요일

평화

오늘 아침 묵상한 히브리서7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한 멜기세덱이 나옵니다  멜기세덱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두가지뜻이 복합되어 있습니다. 즉 멜기는 '왕'이이라는 말이고, 세덱은 '의롭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살렘왕(히7:2)이라고 했습니다. 살렘은 평화를 의미하지요. 다시 말해 그는 그는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입니다. 그런데 재미 있는것은 의가 평강보다 먼저 나옵니다. 즉 의롭다 여김을 받아야 평화가 임하는것입니다. 평화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과 바른관계를 맺어야 평화가 임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않고 평화 평화 외쳐봐야 그 평화는 거짓이고 속임수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나타납니다(롬5:1).
그럼에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 평화를 찾기 위해 때로는 마약, , 섹스(결혼외에)를 통해 얻어 볼려고 합니다.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면 요가나 명상을 통해 평화를 얻어볼려고 합니다. 그러나 참된 평화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참 평화는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오는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은자만이 그리고 그리스도와 늘 동행하는 사람만이 누릴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의와 평강의 왕인 멜기세덱을 보면서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2012년 4월 22일 일요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


시편 15편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장막에 머무를자, 주의 성산에 사는자에 대해 말씀하면서...그 가운데  " 이자를 받고 돈을  꾸어주지 아니하며..(5)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경제정의에 관한 말씀입니다. 간혹 신문을 보면 이자에 이자를 붙히는 악덕 사채를 끌어 쓰다가 갚을길이 없어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을 볼수 있습니다. 비단 이것  뿐만 아니라 투기 붐을 조장해서 부동산 값을 올려서 서민들은 아예 내 집 장만하기를 포기 해야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것들이 한 마디로 경제 정의가 실천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사회의 구조적인 악인것입니다. 특히 교회는  건전한 사회참여로 경제 정의를 실천하고 계몽하는 일에도 앞장서야 합니다...투기와 돈놀이는 인간의 비뚤어진 탐욕에서 나오는것입니다...  땀흘려 일해서 정당한 부를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성경은 한번도 정당한 부를 정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노동을 신성시 하였고, 노동과 저축을 최고의 미덕 가운데 하나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방법으로 돈을 벌려고 하다 보니까  문제가 생기고, 죄가 번성하게 되는것 입니다. 그래서 이런것들을 두고 성경은 돈은 일만악의 뿌리라고 하는것입니다. .. 하나님을 경외합니까? 그렇다면 돈에 대해 정직해야 하고,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장막에 머무는자, 주의 성산에 사는자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2012년 4월 21일 토요일

믿음의 가정

오늘 아침에는 창세기23장을 묵상했습니다. 사라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라는 127세동안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부부가 함께 오랫동안 살다가 한쪽이 먼저 가면 그 슬픔과 외로움은 이루말할수 없을것입니다. 얼마전에 제 아내가 한국을 3주 동안 방문했을때 처음에는 모르다가 시간이 흐르니까 뭔가 모르는 깊은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동안 여행을 가도 늘 함께 갔고 한번도 떨어져본적이 없었는데, 그래서 그때 생각하기를 오랫동안 부부가 함께 살다가 한분이 먼저 가시면, 그분들의 외로움은 참으로 뭐라 말할수 없겠구나 하는 마음을 조금이나 헤아릴수 있었습니다... 아뭏튼  사라는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11:13). 그리고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이 되었습니다(12:1).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 처럼 믿음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믿음의 가정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요즈음  고국에  학교 폭력으로 심지어 자살하는 아이들까지 생기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이 왜 이렇게 사나워졌는가?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한 사회의 건강은 바로 가정에서 나옵니다.즉 건강한 가정이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건강한 가정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가정에서 출발합니다.믿음의 아버지, 믿음의 어머니 밑에서 믿음으로 자란 아이들이 어떻게 학교에서 폭력을 휘두르고, 막말을 하고, 저질 스러운 행동을 할수가 있겠습니까? 사회를 탓하지 말고, 먼저 우리 가정이 건강한 가정인지, 참 믿음의 가정인지를 생각해봄이 더욱 바람직합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죽은 사라를 생각하면서 건강한 믿음의 가정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2012년 4월 20일 금요일

단순성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는 시험을 통해 원하셨던 것은 단 한가지 였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의 독자까지 아끼지 않을정도로...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분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셨던것 처럼 말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던 이유는 주님 보다 그의 재물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두 주인을 섬길수 없다고 말씀하셨지요... 세상에 살다보면 어느덧 나의 마음에는 여러종류의  우상들이 자리를 잡고 앉을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우상들을 제거하고  오직 하나님 한분에만 촞점을 맞추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즉 단순성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 단순성은  나의 영혼의 순결함을 지키는 방패막이기도 합니다.

2012년 4월 19일 목요일

건강한 가정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한것이지,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신성합니다. 가정이 신성합니다. 이혼율이 점점 높아지는 이때 깨어진 가정들을 주위에 보면 안타까울때가 많습니다. 사회가 건강할려면 사회의 기초 단위인 가정이 건강해야 합니다. 역기능 가정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병들게 됩니다. 모든 악은 순환 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 여러 고질병 시달리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 할때가 많습니다. 학교 폭력, 남의 논문 무양심표절, 막말 조롱, 등 건강한 가정이 뒷받침 된 사회라면 이런 일들이 줄어들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생활은 풍요로워졌지만, 건강한 인간관계는 예전보다 못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 건강한 인간관계와 건전한 인격의 형성의 기초인 가정이 건강해야함는 재론할 여지가 없습니다.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하는데 가정의 달을 맞이하면서 모든 가정이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브라함의 순종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하십니다.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존재가 바로 자녀입니다. 그것도 독자라면 이루말할수 없겠지요. 이 시험을 통해 하나님은 그분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를 위해 주신 그 사랑을 암시적으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아뭏튼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약속의 자녀요, 노년에 낳은 아들이요(창21:2), 가장 사랑하는 독자(창22:2) 였습니다.이런 고통스러운 요구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다 고했습니다다(창22:3). 그는 하나님에게 왜 제아들을 바쳐야 합니까? 하며 불평하거나 논쟁하였다는 말씀이 없습니다.오히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리아로 길을 떠났습니다. 3일이 걸리는 모리아로 가는 그길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이요, 그의 생애에 가장 지옥 같은 시간이었을것입니다(창22:4).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오갔겠습니까?이것은 비단 아브라함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때로는 많은 갈등속에서 신앙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위대했던 것은 그 가운데서도 굵은 선을 따라 걸었습니다. 그 굵은 선이란 바로 하나님의 뜻앞에 순종하는 삶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한치의 흔들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믿음이 위대한것입니다...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삶에 불순물을 제거 하기 위해 이런 어려운 시간들을 주실때가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때로는 이해할수 없는 일들과, 시간을 주실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섭리를 믿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인줄 압니다.왜냐하면 믿음이란 말이 아니라 행함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인격

건강한 인격은 자기를 수용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수용할줄 아는 사람이 건전한 자아를 가진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건강한 자존감이 나옵니다. 건강한 자존감속에서 남을 수용하고, 이해할수 있는 사람이 될수 있는 것입니다.

2012년 4월 18일 수요일

진정한 부흥

창세기21장22절 이하에는 아비멜렉이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와 언약을 맺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특히 제마음에 와닿은 부분은 아비멜렉에 아브라함을 볼때 "... 네가 무슨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는도다"(21:22)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이방사람의 눈에 비친 아브라함은 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두려워 하여 그를 먼저 찾아와 언약을 맺는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위 사람들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를 생각해보았습나다. 특히 믿는이들이 아닌 나를 아는 불신자들의 눈에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비치는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룩함과 순수함과 영적위엄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것입니다... 19세기 유명한 전도자였던 디엘 무디가 어느날 이발을 하러 갔을때 이발소에서 음담패설을 하던 사람들이 디엘 무디가 들어서자 어떤 영적인 거룩한 힘에 눌려 조용해졌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영적인 힘입니다.... 오늘 교회가 거룩한 힘을 잃는다면 그것은 가장 비참한 모습일것입니다. 마치 머리가 밀린 삼손이 힘을 잃고 블레셋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었듯이 ... 그러나 교회가 불신자들의 눈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거룩한 공동체로 비치어 질때 진정한 부흥이 일어날것입니다. 주여 이 부흥을 주옵소서!!.

2012년 4월 17일 화요일

하나님 마음대로

4,11 총선을 보고 어떤분이 이렇게 평을 하였습니다. " 세상일이 엿장수 마음대로 되나요?" 참 명언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일이 엿장수 마음대로 되는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되는것입니다.

기다림

창세기 21장에 드리어 사라가 이삭을 낳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린 아들입니까? 하나님은 그분의 시간에 정확하게 약속하신것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때에 아브라함의 나이100세였습니다. 사라는 아이를 낳고는 너무 기뻐서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21:6) 하며, 감격에겨워 이렇게 외쳤습니다. 사실 무엇을 막론하고 기다림이란 힘드는 일입니다. 기다림에는 소망과 인내와 믿음이 었어야 합니다. 조급한 사람은 조금 기다리다가 참지 못하고 불평하고, 막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하지 않고, 믿고 견디면서 기다리면 분명히 무슨 결과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특히 대부분의 하나님의 일들은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신실한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다 보면  반드시 우리를 웃게 만드실것 입니다. 마치 사라를 웃게 하셨듯이 말입니다.

2012년 4월 16일 월요일

하나님의 은혜

창20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랄땅에 거류할때에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는 내용이 나옵니다.그래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할려고 데리고 가지요.아브라함은 위기가 닥칠때 마다 상습범 처럼 자기 부인을 누이라고 속입니다. 애굽에 가서도 그러하더니 그랄에서도 그러합니다. 위기때마다 늘 부인 뒤에 숨는 비겁한 남자! 얼마나 비겁하고 못났으면 자기 부인하나 당당하게 지키지 못합니까? 그런데 재미 있는것은 이런 남편의 말을 그대로 순종하는 사라의 모습도 특이합니다. 착한것인지? 아니면 좀 바보인지? 아뭏튼 아브라함은  어떤때는  담대하고 두려움이 없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의 모습을 보이고(318명을 이끌고 포로된 조카 롯을 구할때), 어떤때는 가장 나약하고, 비겁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것이 연약한 인간의 양면성입니다. 그러나 이일에 하나님이 개입 하셔서 결국 아브라함의 가정을 지켜주십니다. 이렇게 인간의 부족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오늘도 부족한 나의 삶을 지탱하시고 나의 불순종으로 꼬이게 되는 환경도 결국 선으로 바꾸시는 이해할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양 드립니다.

2012년 4월 14일 토요일

대한민국의 힘

창세기19장을 묵상하다 보면 29절에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 소돔성을 멸망시킨다는 천사의 말을 듣고도 롯은 지체하였습니다. 소돔에서 쌓은 그의 부, 그의 위치, 안락한 삶에 대한 미련이 있었지요. 그러나 롯이 지체하니까 천사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밖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에게 자비하심을 더하신것 입니다... 어제 북한이 장거리 로켓 은하3호를 발사했지만 공중에서 폭발을 해버려서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습니다. 일본에서는 4월11일국회의원 수십명과 고위 관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독도영유권 관련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들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끈질기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직도 침략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중국대로 G2 국가로 발전하여 때로는 안하무인으로 행동할때가 많습니다... 늘 호전적인 북한,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횡포, 이런 일들은 비단,오늘의 문제만이 아닌 역사적으로 오래된 문제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대한민국의 힘은 경제력이나, 높은 교육수준이나, 한국인들의 탁월한 두뇌에 있는것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 늘 눈물로 기도하는 조국의그리스도인들의 기도의 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분들의 기도가 있기에  하나님은 대한민국을 붙잡고 계시고, 계속 번영하게 하시고, 결국은 통일을 주셔서 마지막 시대에 통일 조국의 우리 민족을 통해 땅끝까지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민족으로 삼으시리라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하나님이 진실로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기억하사....

2012년 4월 13일 금요일

아름다움

제가 섬기는 서양 교회는 젊은이들 보다 노인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노인이 되면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얼굴들이 다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노안은 다 비슷합니다. 물론 그 가운데도 젊은 시절 그 얼굴이 아름답고 고왔을것 같은 할머니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노인이 된 그분들의 모습은 다 거기서 거기인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31장30절 말씀이 떠오릅니다."고운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참 그렇습니다. 고운것도, 아름다운것도 삶에 있어서 잠깐인것 같습니다. 가장 아름다운것은 내면의 아름다움일것입니다. 그 내면의 아름다움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데서 부터 나타나지요.

머리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고 했습니다.(엡5:23) 그리고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십니다(고전11:3) 그럼에도 성부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동등하십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고 했습니다(엡5:23) 그러나 남편은 아내와 동등합니다. 이것은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리더십의 문제요, 책임의 문제 입니다. 마찬가지로 목사와 성도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목사는 성도의 머리가 아닙니다. 목사와 성도는 그리스도안에서 동등한 한 형제입니다. 단지 차이는 리더십의 차이요, 책임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망각하고 목사가 성도의 머리인것처럼 은연중에 생각하거나 행동한다던지 즉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목소리와 걸음걸이를 과장하거나,  몸에 힘이 들어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관과 직분에 대한 커다란 오류를 범하는것이요, 그리스도께서 주신 섬김의 리더십을 크게 훼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창세기19장에는 두 천사가 소돔성을 찾아와 롯의 집에 머물고 소돔을 심판하신다는 하나님의 멧세지를 듣는 내용이 나옵니다. 당시 소돔은 얼마나 음란한곳인지 모릅니다. 천사들과 성적 관계를 맺겠다고 찾아온 젊은이들과 심지어는 늙은이들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창19:5)
성적문란, 특히 동성애가 횡횡한 음란한 문화 속에서 롯이 살고 있었음을 압니다... 이  문화라는것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것인지 모릅니다. 문화가 사람의 사고 방식을 형성하거든요. 그렇다면 현대의 물질 만능 문화, 소비주의 문화라는 거대한 문화의 제국속에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물질 만능주의와 소비주의 문화에 동화 되지 않고, 도리어 물질 문화에 오염된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를 늘 기도하며 복음을 전해야 하는것이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삶인것 같습니다.


2012년 4월 12일 목요일

긍휼

창세기 18장에는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보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당시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놈들 잘되었다! 하지 않고 그들을 향한 긍휼한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그래서 그들을 위해 중보했지만 의인 10명이 없어서 결국은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중보하는 마음은 참으로 아름답게 보입니다. 남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긍휼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긍휼한 마음이 없이는 중보기도를 할수 없습니다.이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면서 조국의 현실을 보았습니다.지금 조국은 마치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음행과 음란 문화이 성행하고  성폭행이 일상화처럼 일어나고, 지역 갈등, 양극화 현상, 포퓰리즘 정치, 그리고 종북 좌파세력들의 선동 등 정치적 혼란이 있고 마치 정체성을 잃어버린 느낌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극단적인 이기주의, 오직 살빼는데만 관심을 갖는 웰빙주의 등.. 그러나 바로 휴전선 위에 북에는 늘 호전적인 김씨 왕조 정권이 있고, 그 밑에 억압과 굶주림으로 고생하는 사랑하는 북한 동포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것들이 어떻게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짊어져야 할 짐인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긍휼한 마음을 넘치도록 주셔서 비록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을 적대시 하지 말고, 도리어 그들을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위해 먼저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나라와 이 민족을 치유하는 길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안에서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4월15일(주일)은 ,전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북한의 그리스도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 하는 날입니다. 사랑하는 대한민국과 사랑하는 북한 동포들과 탈북자들과  북한에 지하 교회 형제 자매들(약40만 Open Door 추정)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시지 않겠습니까?
 4월15일!!

2012년 4월 11일 수요일

복음전파

복음 전파로 교회가 형성이 되고 형성된 교회는 다시 복음을 전하고 이렇게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것이 복음 사역이요, 주님의 명령입니다.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마28:19)

교회의 사회적 책임

창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세분의 나그네를 접대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그야 말로 극진하게 접대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 나그네 세분중에 둘은 천사였고 한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부지중에 천사와 하나님을 대접한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백성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나타납니다. 또한 더 나아가 교회가 사회적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것인가를 생각 해보았습니다.
교회는 주변에 가난한 사람, Homeles나 사회의 경제적 약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도울려고 힘을 써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십일조를 내어서 레위인들, 이방인들, 그리고 고와와 과부들을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돈을 빌려주어도 이자를 받지 않았습니다. 고용주는 고용인에게 정당한 임금을  제날짜에 지불했고, 농사짓는 사람은 열매를 거둘때 다 거두지 않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을 위해 남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매 3년 마다 소산의 십일조를 드려 레위인와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을 돕도록 했습니다... 당시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져야할 기본적인 윤리요, 도덕적인 책임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을때 늘 가난한 사람들, 사회에서 소외 당한 사람들을 친구로 삼으시고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땅을 투기하거나, 사채를 한다던가, 직원들에게 줘야 할 임금을 제때 주지 않거나 정당하게 주지 않는다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커다란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난한 자를 도울뿐만 아니라  경제정의가 실현되도록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복음을 전할뿐만 아니라 사회적 책임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2012년 4월 10일 화요일

기다림

오늘 아침에는 창세기17장을 묵상하였는데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창17:17). 아브라함에게 100세때 까지 자녀가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뜻과 간섭이 있었음을 압니다. 다시 말해  신앙안에서 기다림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거기에는 인내와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인내와 순종을 이루기 위해서는 믿음과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있는것이지요(히4:16).오늘도 이런 기다림속에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2012년 4월 9일 월요일

도덕적 수준

오늘 아침 묵상말씀 창17장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 흠없이 행하라(영어성경NIV 2011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찌 흠없이 살수야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노력하는 마음을 하나님을 보실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높은 도덕적인 수준을 원하십니다. 소위 그리스도인이란 세상과 구별된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어릴적에 그리스도인들은 당시는 그리스도인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고, 고상한 도덕적인 수준이 있었습니다. 요즈음에는 과거 보다 훨씬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많아졌지만 그리스도인이나 세상사람들이 거기서 거기 같은 느낌을 지울수 없습니다(물론 다그런것은 아니지만) 목사 아들이라는 사람이 국회의원 후보에 나와서 공개적으로 저질 막말, 욕설을 일삼고, 그러면서 혼자 의인인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이렇게 까지 막가는 세상이 되었나 하는 개탄하는 마음을 금할수 없습니다. 이제는 전도는 커녕,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안타까운 조국의 현실이 더욱 슬프게 만듭니다. 이것이 나만의 생각인가요?

인권

모든 인간은 존중받아야 할 존재 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아버지 이시고, 엄밀히 따지면 모든 인간은 한형제들이요, 자매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분의 형상에 따라 창조하셨고(창1:27) 그것도 존귀하게 아름답게 (시8:5) 창조 하셨습니다.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동등한 권리와 존중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바로 인권이 출발하는것 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죽이거나, 사람을 억압하거나,아니면 노예로 삼는것은 죄악중에도 큰 죄악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계의 압제당하는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그들의 인권 향상을 위해 앞장서야 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사명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2012년 4월 8일 일요일

4월15일

주님이 부활 하셨습니다. 초대 교회를 형성한 사도들은 부활의 주님을 목격했지만 우리는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주님의 부활을 봅니다. 이 부활을 목격했기에 사도들이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순교도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2천년이 이어져 오고 있는것 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때 까지 우리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이 교회에 주신 명령이기에 그러합니다. 이 부활의 큰 기쁨이 저 북한땅에서 압제 당하는 우리 동포들과 그리고 지하 교회에서 숨죽이며 신앙 생활하는 형제 자매들에게도, 그리고 저 모슬렘권에서 모진 박해를 당하면서 신앙 생활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 심령속에 넘치기를 기도 드립니다. 그리고  Open Door 이라는 전세계 핍박 받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그들을 돕는 선교 단체가 있습니다.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악한 정권을 북한정권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특히 4월15일(주일)은 금식 하며 북한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로 정했습니다. 세계의 이 Open Door과 협력하는 모든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4월15일 북한의 우리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할것 입니다. 외국인들도 이렇게 하는데  같은 민족인 한국 교회가 가만히 있으면 되겠습니까? 4월15일 북한에서 압제 당하는 우리 동포들,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 형제 자매들을 위해 금식 하며 기도합시다! 하루 빨리 사탄 정권의 압제하에서 풀어 주시도록, 눈물을 흘리며, 금식하며 주님앞으로 나아갑시다. 사랑하는 우리 동포들을 위해, 사랑하는 지하교회의 우리 형제, 자매들을 위해 함께 기도합시다.
http://www.opendoorsca.org/

2012년 4월 7일 토요일

섬김

이해타산이 빠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해되는일이 있다면 피하는 시대입니다. 이기주의가 만연한 시대에 섬김을 실천하는것이 얼마나 시대 정신과 역행하는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때 예수님을 장사지낸다는것은 웬만한 용기가 없으면 할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종교지도자들을 비롯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조롱하고 모욕하는것이 정상적인일이었기때문입니다. 소위 예수님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데 예수님을 감쌌다가는 신변에 위험이 생길지 모르는것이기에 그러합니다. 정치인들도 대세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금방 말을 바꾸기가 일수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은  당시 공회원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타인들의 눈총이나 생각에 아랑곳 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시신을 정성스럽게 준비한 세마포로 감싸서 자신 소유의 무덤에 장사를 지냅니다(막15:46) 또한 주님의 시신에 바를려고 향품을 준비해서 안식후 첫날 새벽에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막16:1-2).. 이분들을 보면서 섬김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해줍니다. 섬김이란 어떤손해나 위험을 감수하고라고 행하는것이 아닌가 합니다.그러나 이들의 섬김을 통해 받은 축복은 이루말할수가 없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아름다운 이름과 부활의 첫 증인이 된 여인들! 이들이 있었기에 주님의 부활이 더욱 빛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귀먹은 교회

귀가 먹은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다면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주장이 가득차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살아있는것 같지만 죽은 교회입니다. 교회가 성경을 떠나게 되면 귀머거리가 되지요. 그래서 주님이 "귀있는자는 들으지어다" 하시며 경고하신것 같습니다.

2012년 4월 6일 금요일

하나님의 아픔

이 세상의 모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무엇과 비길수 없을것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사랑하는 자녀!  그 자녀를 위해서는 무엇이던 희생할려고 하는 부모의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하나님에게도 독생자 아드님이 바로 그런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아드님이 십자가에서 처절한 고통을 당하시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울부짖습니다(막15:34)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그의 아드님을 철저하게 외면하시는 하나님! 여기에 하나님의 고통과 아픔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고통을 통해 나타나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사랑,
그 은혜가 있기에 오늘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있는것 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아픔의 산물입니다.

2012년 4월 5일 목요일

십자가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해본적이 있습니까? 누군가가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든지, 나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좀 다혈질적인 사람은 즉각 반응을 보여 상대방이 멱살을 잡든지 할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순간은 참지만 나에게 모욕을 준 사람을 마음속 깊이 심어 넣고 그 사람을 계속 묵상할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때가 되면 그 사람에게 반드시 좋지 않는 반응을 보이거나 앙갚음을 할려고 할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연 스러운 감정이요, 반응입니다.그러나 오늘 아침 마가복음 15장16-20절 내용을 묵상하면, 주님은 정말 인간적으로 견디게 어려운 멸시와 모욕을 다하셨지만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천치 바보와 같은 모습을 보이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치를 보시고 그들을 내어 좇으셨던 그 기개와 의분은 어디 가셨는지? 끝까지 참으시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박히러 끌려 가시는 주님!
사도바울은 주님의 이 모습을 생각하면서 " ..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롬12:17)고 한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악으로 악을 이기는것이 아닌 선으로 모든 악을 이기는 가장 큰 상징의 표현이요, 악을 이기는 가장 큰 능력입니다.
"십자가에 가까이 의지하고 서서 천국이를 때까지  항상 머물게 하소서"

2012년 4월 4일 수요일

고난주간에

고난주간에도 역시 많은 일들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네요. 시리아에는 유혈 사태가 계속 되고 있고, 소말리아에서는 폭탄 테러가 일어났고, 미국 텍사스주에는 토네이도가 불어서 많은 재산 피해를 냈고, 미국 어느 기독교 대학에서는 한국계 미국인이 총으로 7명의 사람들을 죽이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매일 매일 세계 곳곳에는 태러와 살인, 자연 재해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루도 평안이 없는 세상.. 언제쯤 완전한 평화가 이 세상에 임할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이 재림하셔야 나타나겠지요. 고난 주간에 벌어진 이런 사건들을 보지만 그 가운데 희망이 있는것은 이 죄 많은 세상을 위해 주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리고 삼일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다시 재림 하신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운 세상이지만 그리스도안에서 소망이 넘치는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외쳤던 것 처럼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22:20). 오늘도 이렇게 기도해봅니다.

개혁주의 신앙

로마캐톨릭 교회에서는 '교회가 말씀을 형성했다'고 해서 교회의 권위를 말씀 위에다 놓습니다.그러나 종교 개혁자들과 개신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형성했음'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절대권위로 생각합니다. 성경을 교회나, 어떤 전통보다 최고의 권위로 믿는것이 바로 개신교 신앙이요, 올바른 신앙입니다. 오순절 사도들에 의해 성령충만함으로 전해진 복음의 말씀을 통해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가 형성이 된것 처럼, 오늘날도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전해지는곳 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겨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형성되는것이고, 또한 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속해서 성경적인 교회로 개혁되어 가야 합니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앙입니다.

2012년 4월 3일 화요일

진짜 와 가짜

진짜는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을 않해도 진짜이기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짜일수록 자기를 알아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법입니다. 빌라도 앞에서 침묵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막15:4-5)

2012년 4월 2일 월요일

생각과 실천

오늘 아침 마가복음14장을 묵상하다가 66절 이하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 하는 내용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위험을 무릎쓰고 붙잡히신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는 두려워서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실은 세번을 부인합니다. 이것을 통해 생각과 실천의 큰 차이가 있음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위험앞에서는 예수님의 제자임을 고백하지 못하고 저주하면 맹세까지 하며 부인합니다. 평소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지만 막상 어떤 상황에서는 성경대로 실천하기는 매우 힘들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 답게 행동하는 용기와 신앙이 나약해질때가 있습니다. 생각과 실천 사이는 이만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고난주간에 십자가만 묵상하며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모든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실천하는 그런 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