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30일 토요일

하나님의 품

사4:2-6절 말씀 묵상내용입니다.
해 마다 한 번 씩 건강 검진을 받습니다. 검사 결과 아무 이상이 없으면 '의사' 로 부터 연락이 없는데 만일 의사가 만나자고 연락이 오면 솔직히 걱정이 앞섭니다. 나이가 들수록 혹시(?) 하는 불안감이 듭니다. 않좋은 소식을 들을 줄 알고 조금 긴장했는데 의외로  이것만 조금 조심하면 되겠다고 하면.. 아마 이런 경험을 했던 분 이면 이사야의 예언을 듣는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 "그 날에" ... 이사야는 이미 유다의 멸망에 대해 예언을 하였습니다. 멸망의 날에 바위틈에 숨어도, 깊은 동굴에 숨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을 이미 들었습니다(2:6-21). 하지만 오늘 본문의 "그 날은" 멸망의 날이 아닌 회복의 날이요, 저주가 아닌 축복의 날입니다(2). 이들이 예상했던것과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 하나님의 사랑의 양면성이 있습니다.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회개 하도록 하시고, 또한 고난 때문에 낙심 할 까봐 소망을 주십니다. 즉 징계, 약속, 격려, 위로.. 이것이 그분의 자녀들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십니다. ..  당시 유다가 부패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남겨 두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3). ..   한국교회에 부정적인 면들이  부각이 되어 지탄의 대상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목회자도 많고, 지탄을  받을 일이 생길 때에는 목회자라는 사실이 부끄러울때가 있습니다... 제가 어릴적 목사님들은  비록 지금의 목사님들 보다 교육수준은 좀 떨어졌지만 하나님앞에 진실했고, 성도들을 진실하게 사랑했고,  진실하고 정직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들에게는 영적 권위(?)가 있었습니다.  목회에 필요한 것은 학위가 아니라 소명이요, 화려한 언변이 아닌 진실함이요, 뼈속까지 파고드는 정직함(Integrity)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신실한 목회자들, 신실한 성도들이 구석에 구석에 더 많이 있음을  압니다. 성직을 직업이 아닌 소명으로, 경제적 어려움이나 모든 어려움을 감내하고도 , 그야 말로 남이 알아주던 말던 이름 없이 빛없이 주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분들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에 가장 적대적인 모슬렘 권에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 북한의 인권을 위해, 탈북자들을 위험을 무릎쓰고 돕는 분들이 더 많이 있음을 압니다. . ..  하나님은 남겨둔 이들을 정결하게, 거룩하게 영광스럽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3-4). .. 과거  광야 길을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보호 하셨습니다. 이같은 방법으로 그들을 보호 하실 것 이라고  말씀 하십니다(5). .. 집나간 탕자가  아버지집으로 돌아 가리라고 마음 먹고 돌아왔을때 아버지는 그를 박대 할 줄 알았습니다. 집안에 들이지 않고 문 밖에서 좇아 낼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아버지는 이 아들에게 달려가서  얼싸 안고 기쁨에 겨워 잔치를 벌였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일시적으로 징계하시만 죄를 회개하면  탕자의 아버지 처럼 언제든지 달려와 안아주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광야에는 찌는듯한 더위와 풍우가 있습니다. 더위를 피하고 풍우를 피할 수 있는 초막(Shelter)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그 초막이 되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6).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곳 !풍우를 피할 수 있는 곳!
광야 같은 세상을 살다보면  때로는 더위를 만나고, 풍우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피할수 있는 초막이 되시는 하나님의 품이 있음을 잊지마십시오.

2012년 6월 29일 금요일

참 아름다움

사3:13-4:1 말씀 묵상내용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건강함의 척도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의 청렴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다의 지도자들의 부패성, 부도덕성은 도를 넘었습니다. 권력을 이용해 남의 재산을 차지했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원성을 사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습니다(13-15). 또한 상류층 여자들의 교만, 허영, 사치, 높은 콧대등(16-23). 이것을 보면 당시 유다는 양극화 현상이 심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유행을 좇는 이들의  화려한 의복과 몸에 주렁주렁 달고 다녔던 온갖 보석들은 아무 소용이 없어질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거들먹 거림이 수치로 바뀔 것입니다(4:1).  사람을 보시는 하나님의 관심은 그들의 화려한 외모에 있는 것 이 아니라 마음에 있음을 다시 생각합니다. ' 성형천국' 이라는 한국에는 좀더 아름답게 보일려고 얼굴에 손댄 사람들이 제법 많은 모양입니다. 물론 유행을 따르고, 미에 관심이 있는것은 잘못 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연은총을 누리며 그것을 개발해 나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기독교는 금욕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 미'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합니다. 좋은 옷을 입고, 온갖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심지어는 성형을 한다 할지라도,..참 아름다움은 그리스도를 닮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마음에서 나오는 영적인 매력이야 말로  파리와 뉴욕의 유행보다 더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 이 아닐 것 입니다.


2012년 6월 28일 목요일

하나님 한 분 만

사2:6-22절 말씀 묵상내용입니다.
자본, 과학, 기술이 생활이 중심이 되어 버린 현대의 생활, 양질의 의료서비스가 건강을 지탱해주고, 강력한 군사력이 나라의 안보를 책임 져 준다고 믿는 현대의 삶은 마치 이사야 시대와 매우 흡사 합니다. 이사야 시대의 유다는 커다른 번영을 누렸습니다. 그 번영으로 당연히 따라오는 '부'를 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에서 기술이 우상화 된 것 처럼, 유다의 도처에도 우상숭배가 팽배 했습니다(7). 또한 " 동방 풍속이 가득했으며"(6) 즉 유대의 동방의 나라들 앗수르, 아람, 바벨론에서 온 온갖 미신들이 유행했습니다. 이러다보니 하나님을 의지 하기 보다는 점성술을 통해 점을 치며 자신들의 운명을 예견했습니다(6). 그 결과 나라의 영적 생활은 붕괴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술이 발달하고, 돈이 많아지면 하나님을 쉽게 잊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랑하는 것은 절대 영원할 수 없습니다(10). 바벨론 같은 이 세상은 절대 영원하지 않습니다. 역사를 보아도 그러합니다. 과거에 그 위용을 자랑했던 로마제국도 무너졌습니다. 세계 초 강대국이라 일컫는 미국도 저물어 가는 황혼처럼 점점 그 힘이 쇠퇴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 중국도 지금은 온갖 위세를 부리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할것 입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영원한 절대강자는 없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오직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 (Kingdom of God)입니다. '예수님의 종말론 ' 이라 불리우는 마태복음 24장에서 주님은 이미 예언 하셨습니다. 또한  성경 전체를 통해 성경은 누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심판의 날 은 반드시 올것이라고.. 그때에  인간이 자랑하던것은 다 무너질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22).
오직 하나님 한 분 만 의지 하십시오. 이것이 절대 안전한 길입니다.

2012년 6월 27일 수요일

땅에서도

사2:1-5절 묵상 내용입니다.
이사야 1장에서는  다가오는 유다의 멸망에 대한 슬픈 예언으로 가득찼습니다. 오늘 말씀은 반전이 되어 예루살렘의 회복, 세계의 평화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사야가 이 환상을 보았을때 얼마나 흥분된 마음이었을까? 짐작해봅니다. 이것은 비단 이사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우리에게도 커다란 위안을 주는 말씀입니다. 지금 세계 도처에는 전쟁, 테러, 영토분쟁, 자연재해, 유럽에서 부터 발생한 경제 위기,  종교적 갈등, 특히 모슬렘 나라에서 자행 되는 기독교인들의 테러, 시리아의 내전 상태, - 독재자 아사드가 반정부 사람들에 대한 무참한 학살, 연일 신문과 방송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도한다고 눈코 뜰새가 없습니다. 이런 뉴스들을 접할 때면 이 세상에는 어디에도 평화가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보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사야가 본 환상은 뚜렷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성령님의 역사로 나타날 세계 선교, 전 세계의 평화, 정의.. 선택의 여지없이 도래 할 메시야왕국(하나나님의 나라) 입니다. 그때에는 평강의 왕이이신 그리스도(사9:6)께서 위대한 교사가 되셔서(3) 가르치실 것이고,  그들이 그 길로 행할것이고(3) 더 이상 전쟁이 있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4). 더 이상 고통이나 슬픔, 아픔이 존재 하지 않을 것 입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본 환상에 따라 오늘도 이렇게 기도 합니다.
" 나가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2012년 6월 26일 화요일

이럴 때 더욱...

사1:21-31절 말씀 묵상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유다의 사회적 부패와 도덕적 타락을 바라보는 이사야의 탄식으로 부터 시작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은 의와 공의는 사라진지 오래 되었고 대신 살인, 뇌물, 약자들의 고통으로 대치 되었습니다. 아무도 당시 사회적 약자들이었던 고아, 과부들에게 관심을 갖는이들이 없었습니다(21,23). 이들의 진짜 적은 외부가 아닌 내부(24)에 있었던 것입니다. 한 나라가 망하는 것도 외부의 적보다는 내부의 부패와 타락의 암 덩어리가 퍼져 결국 망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가 가진 힘으로 약한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거나 고통을 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 스러운 것입니다. ..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사람들과 바른 관계를 맺지 아니하면 그 신앙은 위선일지 모릅니다. 주님도 말씀하셨지요. 두가지 큰 계명 즉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 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고 하셨지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사람과 바른 관계에서 출발합니다. 교회에서도 열심히 봉사하며,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지만 정작 사람들에게는 무례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남에 대해 교만하게 행동하면서 어떻게 주님을 사랑한다 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주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과시용 혹은 영웅심리의 동기가 짙게 깔려 있을 것 입니다. 비단 사람과의 관계뿐 아니라 정의 와 공의 그리고 공평, 정직함을 버리고 어떻게 주님을 사랑한다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값싼 은혜'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시 유다를 바라보는  이사야의 탄식이 조국의 현실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관행화 된 권력자들의 부정부패, 마치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 시키는 성적 타락, 만연화된 성폭행 사건, 살인, 등 밤이면 십자가의 불빛으로 불야성을 이루지만 도덕적 수준은 나아지는 커녕 도리어 후퇴해버린 느낌입니다. 더 위험한 것은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 있지만   유다 처럼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현실에 점점 무감각 해가고 있지는 아니한지? 이럴 때 더욱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2012년 6월 25일 월요일

진정성

사1:1-20절 묵상 내용입니다.
이사야서를 기록한 이사야 선지자는 약 60년동안 사역한 선지자 입니다. 그의 오랜 사역 기간 동안 그는 유다가 2번에 걸쳐 외세에 침략을 당한 것 을 목격합니다. 한 번 은 수리아와 에브라임 연합군이 유다를 침략했고(왕하16:5), 다른 한 번 은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을 목격 했습니다.(왕하18:13). 그런 가운데 유다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모든 위기를 무사히  넘겼습니다. 그럼에도 이 나라는 영적으로 병이 들었습니다. 이들이 모세의 율법에 따른 절기나 예배를 드리지 않아 그런것이  아닙니다(13). 문제는 이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나 지키는 절기와 다른 삶을 살았던 것이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살진 짐승들을 드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같지만 정작 그들의 삶은 예배와 정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악행과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이럴 때 가장 피해를 많이 보는 사람은 사회적약자들입니다. 당시 사회적 약자들이란 고아와 과부들이었습니다(17).  겉으로는  하나님께 무수한 제물이 받쳐지고, 안식일을 지키고, 각종 절기들을 어김없이 지켰지만 즉 자신들 스스로는 영적으로 부한자 처럼 행하였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성한데가 하나도 없던 병자들이었습니다(6). .. 육체적으로 병이 들면 자신이 병든것을 대부분이 알아채립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병든 것은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랜 믿음 생활, 전통, 건전한 교리, 많은 교인수, 화려한 예배당, 탁월한 설교...  그러나 삶은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면 예배도 남에게 보이기 위한 예배, 쇼맨십,수많은 기독교 서적 - 지당한 말씀으로 가득차 있지만 정작 행동의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이것이 하나님에게는 부담이시다는 것입니다(14, Burden-NIV). ..병든 유다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이 회개 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들이 회개하면 그들의 죄는  "..눈과 같이, 양털 같이 희게 될것"(18)이라고 하셨습니다. ..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삶의 진정성,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정성 입니다. 화려한 이면에 감춰진 위선이 아닌 진실이요, 정직함입니다. "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6,10).

2012년 6월 24일 일요일

넘치는 은혜

시22편 말씀 묵상내용입니다.
예배를 인도 하는 사람이 고민과 비탄에 쌓여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넘치는 기쁨, 은혜가 넘치는 얼굴, 마음 가득히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느껴지는 모습...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런 모습이 되어야 함을 상식적이라 생각하겠지요. 현대의 가스펠 송 도 그렇게 만들어져야 공감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 시편은 그렇치가 않습니다. 애통과 번민이 가득한 내용으로 기록 되어 있습니다.  먼저 왜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는지, 왜 자신의 깊은 번민에서 나오는 신음소리를 듣지 않으시는지(1), 자신은 마치 벌레와 같은 존재(6) 라는 것, 너무나 절망이 깊어서 자신은 " 물 같이 쏟아 졌고, 자신의 모든 뼈는 어그러졌고, 자신의 마음은 밀랍 같고 자신속에 녹았으며... (14-15). 마치 죽음이전에 거의 죽음에 가까운 깊은 절망을 표현 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다윗의 당시 심경을 잘 표현 해 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도 이렇게 절망속에서 헤메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믿음 좋은 사람은 늘 기쁘고, 늘 씩씩하고, 늘 거뜬하고,...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위선 일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잘 걸릴 수 있는 영적 질병 가운데가 하나가 위선 입니다. 특히 목회자에게는 거의 어김없이 다가오는 질병입니다. 사람은 연약한 그릇이고, 죄성이 있는 존재인데 어떻게 매일 기쁘고, 매일 담대하고, 매일 은혜가 넘친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여도 내면에는 깊은 절망이 있을 수 있고, 내면에는 불신이 존재 할 수 있고, 내면에는 받은 상처 때문에 자신의 속에 울고 있는 자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매일, 매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합니다. 또 이 시편은 주님의 고난을 모형적으로 잘 예언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물론 죄가 없으신 분 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십자가의 고난은 너무나 처철한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6)라는 말씀 처럼 잡히시고 도저히 받을 수 없는 멸시와 인격적이 모독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1),  성부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 받았다는 영적인 고통을 당하시면서 운명하셨습니다.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하셨습니다. 이 시편은 주님의 고난을 현장감이 넘치게 잘 예견해주고 있습니다. 이 시편을 묵상하면 할수록 나를 위해 고난 당하신 넘치는 주님의 은혜가 더 가슴 깊게 다가옵니다. 샬롬!

2012년 6월 23일 토요일

나의 말

막6:14-29절 묵상 내용입니다.
우리말 속담에 " 죽마고우도 말 한마디에 갈라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 사이라도 말을 함부로 하다보면 서로 사이가 벌어진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도 말에 대한 신중성을  누누히 강조 하고 있습니다. ..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살던 시대에 유대를 통치하던 헤롯왕은 매우 사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불륜의 관계를 유지했습니다(17). 하지만 세례요한은 사악한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왕의 죄를 지적함으로 오는 어떤 불이익에 대해서도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의 이런 태도가 사악한 헤롯이라도 요한을 두려워 하고, 존경하였습니다(20). 세례요한의 자세는 강단에서 설교하는 목회자들이 본 받아야 할 자세라고 생각 합니다. 교회의 세력 있는 사람(?)의 비위가 상할 까 봐 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못하고 타협(?) 할려고 하는 사탄이 주는 유혹이 늘 설교자 뒤에는 어슬렁 거리고 있습니다.. 요한의 태도는 단호했습니다. 하지만 헤로디아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자신들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요한에 대해 앙갚음을 할려고 기회만 엿 보았습니다.(19,21,24). 그러나 어정쩡한 헤롯은 마음에 원치 않으면서도 헤로디아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할려고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요한이 감옥에 갇힌 이유는 진리를 말했기 때문입니다(17-18). 충동에 따라 말하고 움직이는 헤롯왕 과(22-23) 진리에 따라 행동하고 말하는 요한, 두 사람의 모습이 극렬하게 대조가 됩니다. .. 주님은 사람은 "...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눅6:45)고 하셨습니다. 말은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대변해 줍니다. 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발설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지, 내가 얼마나 주님을 닮았는지, 나의 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 요즈음 들어  말에 실수가 많습니까? 거친 말을 하고, 불평하는 말을 많이하고,  간혹  좋지 않는 말을 하기도 합니까?  먼저 나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채워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나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충만 할 때 나의 말은 자동적으로 바뀔 것입니다.

2012년 6월 22일 금요일

안전한 방패

막6:6-13절 묵상 내용입니다.
만일 어떤 분 이 지갑, 핸드폰, 자동차 키를 몽땅 집에 나누고, 동역자와 함께 전도 여행을 떠났다고 해보십시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좇아내며, 병든 자들을 고쳤습니다. 머무는 숙소도 호텔이나 모텔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에게 부탁을 해 그 집에서 하루를 신세를 진다면...  가지고 가는 것도 "신만 신고 한 벌 옷만, 베낭이 없이 지팡이만(8).. 주님이 이렇게 가라고 요구하신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이렇게 할 것을 요구 하셨습니다. 너희들이 가서 전도 할 때에 만일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 이지, 너희들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11)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가서 주님이 말씀대로 행하였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주님과 1년 정도 같이 있으면서 그동안 보고 들은 것 들을 그대로 행하였습니다(12-13).  그러면 제자들에게 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하지만 눅22:35-37절에 보면 정 반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이 말씀과 오늘 말씀과 비교하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정 반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바뀌셨을까? 주님은  세상을 사는 데 아무 준비 없이 살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저축도 하지 말고, 미래의 대한 계획없이 하루 하루를 그냥  살라고 하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자들을 보내면서 아주 필요한 것 소량의 것만 가지고 가라고 하신 것은 그들의 사역속에 하나님이 얼마나 그들의 필요를 신실 하게 채워주시는 분 임을 입증 해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한 분 이시고, 하나님을 얼마나 신실하게 의지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이와같은 도전을 하십니다. 나는 신실하신 하나님 보다 내가 가진 돈, 직업 등을 더 의지 하는 않습니까? 이것들이 하나님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더 안전한 방패막이라고 생각하지는 아니합니까?

2012년 6월 21일 목요일

준비 된 그릇

막6:1-6절 묵상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이번 방문은 두 번 째 고향 방문 이셨습니다.  첫 번 고향 방문은 눅4:14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 방문 때는 혼자 가셨습니다. 이번에는 제자들과 동행 하셨습니다(1). 물론 초기 고향 방문 때에도 아무 환영을 받지 못하셨지요. 그래서 아무런 권능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번 두 번 째 방문 역시 큰 환영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두 번 째 방문은 첫 방문과 달리 주님의 명성이 자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을 그다지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소수의 병자들에게만 안수 하셔서 고치셨습니다(5)... 고향을 방문하시자 마침 안식일을 맞으셔서 회당에 들어가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흥미 진진해 하면서도, 매우 놀라워 했습니다.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가 행한 권능을 보라"(2). 이들의 놀라움은 경외스러움으로 하는 놀라움이 아니라 우리가 그를 잘 아는데.. 멸시 하는 마음으로 하는 말입니다. 나사렛은 사람들이 약 1만명 정도 살았던 소 도시로 이웃끼리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집의 부모는 누구인지, 아이들은 누구인지, 직업은 무엇인지, 가정 형편은 어떠한지.. "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그의 동생들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데 말이야.. 아마 집 고칠 일 이 있거나 집을 지을 일이 있으면 예수님을 고용해서 일을 시켰을 것 입니다.  .. 예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시기심, 자신들이 목수로 일을 시켰던 이 사람, 그래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이 사람,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과 다른 사람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애써 외면했습니다. 배척하였습니다(3). 그러기에 주님은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5). 그렇습니다.  나사렛의 불신이 있는 한 주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역사는 강한 열망이 있어야 나타납니다. 기도 하고 싶은 열망, 말씀을 묵상하고 싶은 열망,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망, 즉 '사모하는 마음'이 은혜를 담는 준비된 그릇이 아닐까요?

2012년 6월 20일 수요일

그 장소에..

막5:35-43절 묵상 내용입니다.
유대의 회당장은 지역 유지요, 존경 받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회당장도 딸이 병으로 죽어가자 체면, 자존심 다 팽개치고 주님 앞에 찾아갔습니다. 겸손히 자신의 딸을 살려 달라고 간청을 하였습니다(5:22-23). 공개된 장소에서, 많은 대중들 앞에서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12년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였던 여인 처럼 야이로도 큰 절망에 있었습니다. 병들어 죽어가는 딸아이를 지켜 볼 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던 아버지로서 마지막 선택.. 주님앞에 찾아가는 것, 체면이 무슨 대수 입니까?.. 주님은 야이로의 간청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야이로의 집으로 가던 중,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만나 시간이 지연되었습니다. 그러던중  딸이 죽었다는 소실을 접합니다(35).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야이로의 마음은 어떠했울까? 저는 이것이 궁금합니다. 딸이 죽어가는데,  한시가 급하였는데 .. 왜 중간에 지체하셨을까 , 결국은... 하며  원망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야이로에게 "..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36)고 안심 시키셨습니다. .. 야이로의 집에는  이미 통곡 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38). 통곡하는 그의 집에 들어가신 주님은 " 이 아이가 죽은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39)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죽음을 보시는 눈이십니다. 나사로가 죽었을때도 주님은 "나사로가 잔다"(요11:11)고 하셨습니다. 잔다는 것은  깨어날 날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음을 말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죽으면 모든것이  끝이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주님 재림시에 일어 날 영광스러운 부활을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 소녀가 잔다고 하니까 슬픔이 금방 비웃음으로 바뀌었습니다(39-40). 만일 저도 그 장소에 있었다면 저도 비웃는 군중들 속에 있었을 것 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의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니까요... 주님은  사람들을 다 보내시고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아이의 부모만 데리시고 들어가셔서 죽은 아이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40-42)...  제 주변에도 아픈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파키슨, 알츠하이머, 암, 정신질환 등  어떤분은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 효과가 없는 것 처럼 보이고, 어떤 분은 상태가 좋아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권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그 장소에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주님이 계심을 믿습니다.

2012년 6월 19일 화요일

자유케 하소서

막5:21-34절 묵상 내용입니다.
한 가련하고 불쌍한 여인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이 여인은 12년동안 혈루증(자궁출혈)에 걸려 고생을 하고 있던 여인 이었습니다. 이름이 있다고 하는 의사에게는 다 찾아 가보았지만 아무 효험이 없었습니다. 가진 것 들도 병 때문에 다 탕진 하고 말았습니다(26). 레15장에 의하면 이런 사람은 격리되어 살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 이혼을 당하였을 것 이고, 친정집에서 살 수 도 없고, 사회에서 추방 되었습니다. 회당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돌봄이나, 우정, 인간관계 이런 단어들은 이 여인에게는 이미 잊은지 오랜 단어들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대중들 앞에 나타난다는 것은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있는 간절한 소원은 12년동안 자신을 괴롭힌 이 괴악한 병에서 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잃어버린 것 들 즉 가정과 사회, 종교, 친구들을 다시 되찾고 싶어던 것 입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대중들에게 둘러 쌓인 예수님에게로 비집고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주님! 제 병을 고쳐주세요 하고 부르짖을 용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옷에만이라도 손을 대어도 낫지 않을 까 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28)...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아신 주님은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30)고 물으셨습니다. 자신이 한 행동이 발각 된 것을 안 여인은 두려움이 가득찬 얼굴로 예수님 앞에 얻드려 자신이 그렇게 했노라고 털어 놓았습니다(33). .. 예수님의 뜻 밖의 반응! "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으니 평안히 가라.."(34). 모른긴 해도 12년동안 남으로 부터 이런 땨뜻한 말을 들은적이 없었을 것 입니다. 특히 평안히 가라(Go in peace)라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늘 절망과 슬픔에 쌓여 찾아온 사람들에게 '평안'을 말씀하셨던 주님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어제는 군대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고, 오늘은 혈루증에 고통 받는 여인을 고치신 주님!
 한가지 패턴(Pattern) 이 있습니다. 육체의 질병이던, 영적 질병이던, 무엇이 되었던  주님은 그분에게 찾아오는 사람에겐  누구든 자유케 하신다는 것 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그분 앞에 손을 내 밀기를 원하십니다. 그 손은 걱정과 근심의 손일지 모릅니다. 불신의 손일지, 고독한 손 혹은 범죄한 손, 갈등과 불화의 손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의 모든 문제를 손에 담고 그분의 옷깃을 만지십시오. 나를 치유해 주실것 입니다. 자유케 하실것 입니다.
주님, 저의 모든 것을 제 손에 담아 주님께 내밉니다. 저를 치유하시고 자유케 하소서!


2012년 6월 18일 월요일

이런 마음은 없습니까?

막5:1-20절 묵상 내용입니다.
갈릴리 동쪽 해안에 위치한 '거라사인' 마을에 흉악한 귀신 들린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공동묘지에 살면서 늘 소리를 지르며 자신을 자해하며 살았습니다.(2,5). 그에겐  안식도, 삶의 목적도 없었고, 아무도 그를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지만 마치 야수처럼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초인적인 힘이 있어서 아무도 그를 제어 할 수 가 없었습니다(4). 물론 자신을 지배하는 귀신의 힘을 제어 할 능력도 스스로에게는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 사람을 돕는 방법은 단지 쇠사슬에 묶어 놓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4).  이방법도 아무 소용이 없었지요.아무리 사슬로 묶어 놓아도 금방 끊어 버렸습니다(4). ..죄악에 세력에 잡혀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  죄에 중독 된 사람들을 법으로 통제 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동성애, 마약, 포르노, 알코올에 중독 된 사람들 근본적인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 한 소용이 없습니다. 어느날  마을 사람 모두가 두려워 하고, 싫어 했던 이 사람을 주님은 친히 만나주셨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9). 그러자 그는  자신의 이름을 이상하게 대답을 합니다. "군대" 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시대의 한군단은 6천명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이는  많은 귀신들의 힘에 지배를 받는다는 의미 입니다. 아무리 많은 귀신들의 지배를 받아도 예수님 앞에서는  귀신들은  전혀 힘을 쓸수 없었습니다((7). 주님에게는 영적 권위가 있었습니다. 결국 주님은  귀신들을 돼지떼에게 보냈습니다. 이천마리의 돼지떼들이 귀신이 들어가자 발짝을 일으키며 비탈에서 바다로 향하여 내달려 몰사를 당였습니다(11-13). 귀신들린자가 고침 받은 것을 보고 기뻐 해야 할  마을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예수님에게 자신의 마을을 떠나줄것을 요구하였습니다(17). 왜 이들이 예수님에게 떠날것을 요구했을까요?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당한 경제적 손실을 감안 한다면  이유를 알수 있습니다. 이천마리의 돼지 떼 들이 몰사를 당한것은  이들에겐 큰 경제적 타격이었습니다.  돼지 사육은 이 지방의 특수 사업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먹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해! 돈이 더 중요해!  이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경제적 손실에 비해  한 영혼이 치유를 받고고, 한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은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마을에 오신것은 괜찮았지만,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으로  손해가 오자  가차 없이 예수님에게 떠날것을 요구했습니다. 구원자이신 주님 보다 돈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혹,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도 이런 마음은 없습니까?

2012년 6월 17일 일요일

동일하신 하나님

시편21장 묵상내용입니다.
어떤 일을 성취 했을 때 자신이 이루어 놓은 일에 대해 자랑하고 싶은 유혹이 들 때 가 있습니다.  다윗이 왕위에 오르자 이스라엘은 전성기를 맞이 하였습니다. 그가 하는 전쟁 마다 승리가 연속이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다윗의 통치하에 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태평성대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때가  신앙인 다윗이 유혹 받기 쉬운 때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이룬 일에 대한 성취감, 자만심, 자랑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자세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일은 자신 때문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축복으로 된 일임을 말했습니다. 자신이 왕이 된것도(3), 자신의 건강, 장수의 복(4),수 많은 전쟁에서 승리 한 것도 하나님이 도우셔서 된것이라는 것입니다(5). 그와 이스라엘이 누리는 번영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함입니다. 조금 무슨일이 잘 되어도 남에게 자랑하고 싶고, 과시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인데 그에게는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의 원수는 자신의 원수임을 나타냅니다(8,10). 다윗이라고 왜 어려움이 없었겠습니까? 그에게는 많은 대적자들이 있었고, 심지어는 간음죄를 범하기도 하였지만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는 그분의 사랑으로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7). 그의 삶속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축복이 넘치도록 나타났습니다(7)... 요즈음 신앙적으로 흔들리는 일 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분이 불변하시는 사랑을 묵상하십시오.  다윗에게 베푸신 선하심, 인자하심, 불변의 사랑, 말할 수 없는 은혜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삶도 주관 하십니다.

2012년 6월 16일 토요일

어떻게..

수24:16-33절 묵상 내용입니다.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는 백성들에게 좋은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했습니다(18). 하나님을 섬기는 것 은 일시적인 감동 때문에 되는 것 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23)에 따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25)을 실천적으로 행하는 의지적 행동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는 것은 옛 생활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 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것 들을 비교할 공간을 두지 않는 것 입니다.  값싼 은혜(Cheap grace)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흑백논리'를 싫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흑백논리'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에게는 검은것은 검은 것이고, 흰것은 흰것이지 중간은 없습니다. 중간은 쉽게 오염되기 쉬운 곳입니다.영적인 일에는 어정쩡한 자세는 없습니다.실용주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 여호수아는 110세를 살았습니다(29). 그는 수많은 어려운 고비를 넘겼습니다. 모세의 후계자가 된 후 너무나 막중한 짐을 지었습니다.  수 많은 전쟁을 치루면서 때로는 실패도 맛보았습니다(아이성 싸움). 하지만, 어떤 환경이나, 어느 순간에도 그의 눈은 늘 하나님 한 분 에게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을 당하던, 어떤 순간에도 한 번 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늘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렸습니다. 여호수아의 삶을 통해 영적 리더쉽의 진수를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영적 영향력은 당시 이스라엘로 하여금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만들었습니다(31). 그의 믿음의 삶은 참 아름답게 끝을 맺었습니다. 유종의 미를 장식했습니다.  인생을 어떻게 마치느냐?를 생각해 주는 말씀입니다.
삶의 마지막 종착점에 이르렀을때, 나를 아는 사람들로 부터 혹은 자녀들로 부터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억 되게  한점을 남기며 주님 앞에 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도록 하는 말씀입니다. 샬롬!

2012년 6월 15일 금요일

키 워드

수24:1-15절 묵상 내용입니다.
현시대의 특징을 기술, 관료, 다양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눈부시게 발달 한 기술 문명은 우리에게 많은 편리함을 주고 있습니다. 인터넷과 스마트 폰으로 대변하는 기술 문명은  클릭을 하거나, 터치 버튼만 누르면  온 갖 정보를 접할 수 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전화번호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전화 할 일이 생기면 수첩을 뒤적였는데 이제는 폰에다 모든 것을 저장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이런 기기의 도움으로 무엇이던 기억 할 일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고대 성경의 세계는 자꾸 반복해서 말하지 않고는 잊어버리기가 십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는 그가 죽기전에 다시 한번 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불러 놓고 하나님이 그동안 이스라엘을 위해서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으로 부터 시작해서 출애굽 하는 과정과 그 후 에 가나안 정복 전쟁, 그 모든것이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임을 다시 한번 강조 있습니다. ..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고 하는 말이 있듯이  받은 은혜는 쉽게 잘 잊어 버리고, 섭섭한 일 만은 잘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좋은 일 이던, 나쁜 일 이던 간에(인간의 관점에서) 모든 과정과 결과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행해야 할 것은 모든 진실함으로(All faithfulness),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겨라고 했습니다(14).
 진실함과 두려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키 워드(Key word) 라고 생각합니다.

2012년 6월 14일 목요일

요구사항보다 먼저..

수23:12-16절 묵상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부른 여호수아는 계속해서 간곡한 부탁을 합니다. 가나안에 있는 다른 민족과  가까이 지내지 말것, 그들과 혼인 관계를 맺지 말것(12),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들이 너희의 올무가 되고 너희는 그들의 덫에 빠지게 될 것이다(13)...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이 순수한 혈통을 지키기 위한 인종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이들 가운데 이미  애굽사람과 피가 섞인 혼혈족들이 있었습니다. 모세도 구스(이디오피아)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습니까? 여리고성 기생이었던 라합도  이스라엘 사람 살몬과 결혼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종교적인 문제였습니다. 신앙에 대한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가나안 에는  우상숭배와 음행이 만연 하였습니다.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제 멋대로 살았으니 오죽 했겠습니까?  사탄은 인간의 약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쉽게 영향을  받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개인도 그러하지만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것을 여호수아는  경고하였던 것 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경고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단순하게 도식화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축복이 임하고, 불순종하면 심판이 임한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간단 명료한 원리이지만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싫던 좋던간에 둘 중에 하나 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선택에 따르는 책임은 선택자에게 있습니다.  24장에 나오지만 여호수아는 "...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고 하였습니다. ..  하나님께 자주  요구사항을 말합니다. 그러나 요구사항 보다는 먼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달라고 하는 간구가 먼저가 아닐까요? ...
좋은 하루가 되십시오!

2012년 6월 13일 수요일

순종과 사랑

수23:1-11절 말씀 묵상내용입니다.
시간이 흘러 모처럼 만 에 이스라엘에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1). 어느덧 여호수아도 나이가 많아졌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약 90세 였습니다.(유대의 역사가 요셉푸스에  의하면, 애굽에서 40년, 광야 40년, 정복전쟁 7년) 세상을 떠날 날 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는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당부를 하였습니다(2).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동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회상 시켰습니다(3). 우리도 한 번 씩 과거를 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를 회상하면 그동안 나 혼자 걸어온 길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가 있었고, 그분의 돌보심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혹  하나님을 떠날까봐, 하나님을 잊어버릴까봐  걱정하는 노지도자의 모습을 봅니다. 이스라엘의 각 지파가 제비를 뽑아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을 나누었지만 그것은 오직 자신들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 임을 재차 강조 하였읍니다(3).그럼에도 이들이 하나님을 떠나 타락 할 위험이  있음을 알았습니다(7).이스라엘이 쉽게 가나안 문화에 동화  될수 있음을 알았기에.. 세상 문화는 항상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라고 하였습니다(6). 그리고  "..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을 사랑하라"(11).고 했습니다. 세상 문화의 동화되지 않는 길이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힘껏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 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입니다. 만일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기전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도와 주소서! 기도하는 것 이 먼저가 아닐까요? 왜냐하면 순종과 사랑은 서로 분리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012년 6월 12일 화요일

도피성

수20:1-9 절 말씀 묵상 내용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범죄를 저지르거나, 아니면 남에게 해를 가한적이 없을 것 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다보면 예기치 않는 일 들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도 있고,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이와같은 일 들이 있었습니다. 나의 의도와는 달리 않좋은 일 들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고로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일어 날 수 있습니다(3). 구약시대에는 보편적으로 "눈에는 눈"으로 하는 원칙이 통하는 사회였습니다(신19:21). 누가 나의 가족중 한 사람을 죽였다면 그 사람을 찾아내어 반드시 보복하는 것이 정당화 된 시대  였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첩보기관인 모사드(Mossad)가 자국민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은 반드시 찾아내어 보복 하는 원리가  여기에서 나온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사람을 죽인 경우는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서 '은신처'를 제공 하도록 하였습니다(10).  이것이 도피성입니다. .. 구약시대에 48개의 레위 성읍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6개의 도피성이 있었습니다. 3개는 요단 동쪽에 있었고, 3개는 요단 서쪽에 있었습니다. 억울한 사람이 이 도피성으로 피하면 살 수 가 있었습니다. 이 도피성은 바로 갈보리 언덕의 세워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시해주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행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우리의 모든 죄 가 사함 받을 수 있는 도피성이 그분의 십자가 입니다. 또한 도피성의 성문은 굳게 닫혀 있지 않고 항상 열려 있었습니다. 주님의 품도 항상 열려 있습니다. " ..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좇지 아니하리라"(요6:37). 죄로 고민하십니까? 주님 앞으로 오십시오. 그분은 언제든지 우리를 맞이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2012년 6월 11일 월요일

85세에..

수14:6-15절 묵상 내용입니다.
노인 인구가 급증하는 노령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노령화 사회에도 85세는 여전히 많은 나이입니다. 은퇴를 해서 연금을 받으며 유유자적하게 살 나이에 뭔가를 새로히 시도 해 본다는 것은 모험적인  일입니다. 갈렙이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85세의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일에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갈렙을  통해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확신의 사람이었습니다(7). 하나님을 온전히 좇은 사람이었습니다(14). 남이 선택하지 않는 어려운 길을 선택하였습니다(8).  선택할뿐만 아니라 그것을 갈망하였습니다(10). 그는 매우 강건하였고, 에너지가 넘쳤습니다(11).특히 하나님을 위해.. 또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는 믿음의 소유자 였습니다(9-10).  그의 믿음대로  거인족에 속하는 아낙사람중에도 가장 큰 사람들이 살고 있던 헤브론을 정복하였습니다(14). '거인중에도 거인' 족들을 대패 시켰다는 것 입니다.그중에 흥미를 끄는 구절이 있습니다. " ..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15).  갈렙이 헤브론을 정복하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가만히 있었다면  평화가 없었을텐데 갈렙이 그 땅 을 정복하자  평화가 찾아왔다는 이야기 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믿음으로 그 땅을 다 평정하였습니다. 갈렙은  볼 수록 매력이 넘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85세가 되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제 나이 85세가 되면 과연 갈렙처럼 행 할 수 있을까? ....  여러분은 어떠 하십니까?

2012년 6월 10일 일요일

믿을 것

시20:7-8 "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그들은 비틀 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 믿을 구석이 어디 있습니까? 만일 인간의 힘으로 성취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임시적인 것 입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을 분 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다윗은 그의 삶속에서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특히 전쟁터에서 .. 그가 관찰한바  전쟁에서도 병거와 말을 의지 하는 사람은 비틀 거리고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자 는 절대로 비틀거리거나, 패하지 않았습니다. 승리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 이 분 을 찬양하고 오늘도 의지 합니다. 다윗의 경험이요, 우리의 경험이었고, 신앙 고백입니다.

2012년 6월 9일 토요일

무엇이 부족한 지?

행4:32-37 묵상 내용입니다.
사도들이 풀려 난 후  함께 모여 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해지자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4:31). 이어서  서로 '하나됨'이 나타났습니다. 교회가 하나되는것은 '하나가 됩시다'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친다고 되는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하나가 됩니다. 또한 이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오너쉽을 포기했습니다(32).  자기 재산들을 팔아 판 값을 사도들에게 주면, 사도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34). 이런 연유로  교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이해 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성령님께서  이상적인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 했습니다. 믿음과 생활이 일치했습니다....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못해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습니다.  목회자로서 설교와 삶이 일치하지 못해 스스로의 모습 앞에 절망 할 때가 많습니다. 거듭된 실패에도 소망이 있는 것은  본문을 통해 성령이 충만하면  말과 행동이, 신앙과 삶이 일치할 수 있구나! 함을 재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은 일회성이 아닌 계속성임을 말씀하신것 같습니다. .. 구브로 사람인 요셉이라고 하는 바나바의 순수한 헌신이 이어졌습니다(36-37).
탐욕과 이기심이 가득찬  세상, 물질이 우상화 된 세상, 세상과 쉽게 동화 되어가는 현대 교회에 자극을 주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의 모습과 내가 섬기는 교회 모습과 비교 해 보십시오. 만일 우리 교회가 초대 교회를 많이 닮았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아니면 부족한  것들이 있다면, 무엇이 부족 한 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2012년 6월 8일 금요일

하찮은 일

행4:23-31 묵상 내용입니다.
가끔 컴퓨터에 문제가 발생 할 때가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침투했던가? 그럴때는 바이러스를 치료하면 문제가 간단히 해결 될 때 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하드드라이브에 문제가 생겨 컴퓨터가 완전히 '먹통'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경우는 하는 수 없이 윈도우를 재 설치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가끔 '먹통'이 되는 일 이 찾아옵니다. 그럴 때 반응은  자신이 해야합니다. 심한 경우 패닉(Panic) 상태에 빠질 수 있고, 아니면 누군가를 비방 할 수 있고, 아니면 새로운 길을 모색 할 수 있습니다.. 산헤드린에서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을 기다리던 형제, 자매들에게 가서 자신들이 당한 일 과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지 말라고 하는 경고의 말을 이야기 했습니다(23). 이 말을 들은 그들은 낙심하거나 두려워않고 즉시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들은 첫째,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이라 부르면서 기도 하였습니다(24).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계시의 하나님이라 불렀습니다(25-26). 시편2편의 다윗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고, 세상의 군왕들과 관리들이 함께 주와 그리스도를 대적 하였다"는 것 입니다. 셋째는 역사의 하나님이라 불렀습니다(27). 본디어 빌라도와 이방인들과 이스라엘이 합세해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결국 하나님의 역사적 섭리였습니다. .. 이것이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해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창조와 계시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이 위대하신 하나님과 자신들이 당한 일들을 비교해 볼때 그 일들은 너무나 작고, 보잘것이 없는 것 들 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권력으로 아무리 그들을 위협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보잘것 없는 하찮은 일들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그 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작고 초라하고 보잘것 없는 것 들입니다. 그것에  잡혀있지 말고, 눈을 들어 창조와 계시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 보십시오. 그것들은 아주 작고, 보잘것 없는 하찮은 일로 보일것 입니다.

2012년 6월 7일 목요일

박해

행4:13-22절 말씀 묵상내용입니다.
교회역사 2천년 동안 수 많은 사람들이 신앙때문에 모진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서의  박해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박해는 신앙을 꺽는 것이 아닌, 더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이 아무리 교회를 없앨려고 하였어도 그럴수록 교회는 더욱 생명력 있게 성장을 하였습니다. 반대로, 교회가 편안하면  영적인 힘을 잃어 버리고 부패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적당한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 같습니다. .. 1949년 중국이 공산화 되면서 6천명의 선교사들 모두가 추방을 당했습니다. 교회지도자들은 수감이 되었고, 처형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70만명이었던 중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모진 박해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50여년이 지난 오늘날 삼자교회(정부에서 인정하는)가 아닌 가정 교회의 교인 숫자는 5천만에서 7천만으로 불어났습니다. 70만명에서 100배에 해당하는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그것도 모진 박해의 시기에..  산헤드린 공회는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16).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드로가 행한 기적을 부인할 수 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방치 했다가는 더 큰 일이 일어날지 몰라 방책을 세우는 중 이들이 할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한 가지 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 예수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 말라는 것 뿐이었습니다(18).  초대교회는 모진 박해속에서도 영적인 능력을 잃어버리 않고 계속해서 성장해 갔습니다.  신앙때문에 박해를 받지 않는 땅에서 살면서 '박해'라는 말은 현장감이 덜 합니다.  그러나  자유와 안락함이 어떤면에서 신앙에 더 큰 위협적인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면에서 박해 아닌 박해가 될 수 있습니다.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는 캐나다의 교회들을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2012년 6월 6일 수요일

성령충만

행4:1-12 묵상내용입니다.
나면서 한번도 걸어본적이 없는 사람을 고친 후 베드로와 요한은 그 기적에 놀라 모여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이 소문이 종교지도자들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크게 동요됨을 두려워 한 이들은 그것을 조기에 차단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현장에 급히 도착을 했습니다(1). 성전의 치안을 유지하는 경찰관들을 시켜 이 두사도를 체포하도록 하였습니다(3). 종교적 권위의 탈을 쓰고 거들먹 거리던 제사장들과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 눈에는 이들은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여기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인간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다 해도 그것은 터진 댐을  손으로 막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을 체포했지만 복음을 체포하지 못했습니다(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자가 남자의 수만 오천명이" 되었다는 말씀만 보아도 잘 알수 있습니다... 다음 날 두 사도를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세우고  이들이 던진 질문을 보면 이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처절한 싸움을  하고 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7). 성령충만한 베드로는 이들의 질문의 전혀 꺼리낌 없이 대답을 하였습니다.
"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10), 베드로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말을 지금 세번째 하고 있습니다(2:23-24;3:15;4:10). 베드로의 이 담력은 두말할것 없이 성령충만에서 나온 것 입니다.
성령받지 못하고 하는 목회, 성령받지 못하고 하는 전도, 성령받지 못하고 하는 교회봉사는 실패할수 밖에 없습니다. 겉돌다 멈추어 버리는 고장난 기계와 같습니다. 성령충만한 은혜는 특별한 사람만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령충만을 사모하십시오.

2012년 6월 5일 화요일

자유

자유는 선택적이다.
어떤 상황, 환경에서도 자유는 선택할 수 있다.
육체적으로는 자유하지만 정신적으로  감옥에 갇힌 죄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에 육체적으로는 자유하지 못한 상황에 살지라도 정신적으로 자유한 사람들이 있다.
자유는 얼마든지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나의 선택에 따라 나는 자유인이 될 수 있고, 정신적인 죄수나 노예로 살아갈 수도 있다

성령님이 쓰시는 사람

행3:11-26절  묵상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수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후 예수님의 제자로서 첫번째 병자를 고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40여년 동안 한 번 도 걸어본적이 없는 사람을 고쳤습니다. 나은 사람이 고침을 받자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였습니다(11-12). 이때가 바로 사역자들의 위기 입니다. 가장 마귀의 유혹을 받기 쉬운 시간입니다. '스타의식'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심리에는 남에게 주목 받기를 원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간혹 연예인들이 자살 하는 경우가 있는데, 한창 남의 주목을 끌다가 어느 날 인기가 사라지면 우울증이 생기고 결국은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들을 종종 봅니다. .. 어떤이는 이런면에 병적 증세가 있어서 끊임 없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안에서도  쉽게 볼수 있는  광경입니다.그러나 베드로는 즉각 반응을 보였습니다(12,16). 이 일은 자신의 능력과 경건으로 된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촛점을 그리스도에게 맞추었습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의 관심과 영광의 유혹을 잘 이겨냈습니다. 저는 이것이 성령받은 사람의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님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분이십니다. .. 겉보기에 아무리 능력이 있는 목회자라 할지라도, 그 인격이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그의 사역이나 설교가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되지 않는다면 그는 성령님이 쓰시는 사람이 아닐것입니다.

2012년 6월 4일 월요일

이름

행3:1-10 묵상내용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 시간이 되어 성전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성전입구의 문은 은과 금으로 꾸며 놓은 문으로 일명 '미문'(Butiful Gate)라고 불리우는 문이었습니다. 이 문에서 매일  나이가 40여세(4:22) 쯤 된 걸인이 앉아서 구걸을  하였습니다.  이 분 은 40여년 동안 한 번 도 걸어본적이 없던 장애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장애를 가졌기에  누군가 도와주어야 성전 문에 올 수가 있었습니다(2). 이 때 베드로와 요한과 마추치게 됩니다. 물론 이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구걸하는 눈 빛을 보냈습니다(5). 베드로는 이 걸인을 주목하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였고(6), 그를 일으켜 세웠습니다.그는 성전에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8). 나면서 부터 앉은 뱅이를 일으킨 예수님의 이름은 평범한 이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입니다. 만왕의 왕의 이름입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는 이름입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이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무엇이던 구할 수 있는 이름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우리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더 똑똑한 것입니까? 더 오래 사는것 입니까? 아닙니다. 가장 큰 차이는 우리에게는 이 이름이 있다는것입니다... 그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의 원천이신 이 이름을 주셨습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사십시오.

2012년 6월 3일 일요일

말과 생각

시19:14 "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루동안 많은 말들을 하고 삽니다.
하루동안 많은 생각을 하며 삽니다.
많은 말들과, 많은 생각들 가운데 하나님 앞에 열납될 말들과
열납될 생각들이 얼마나 됩니까? 열납됨은 하나님이 기뻐 하심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 말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 지, 어떤 생각을 품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줍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말, 주님이 기뻐 하시는 생각을 품도록 하소서!!

2012년 6월 2일 토요일

우리교회가 따라야 할...

행2:37-47절 묵상 내용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단순하였고, 성경중심이었고, 그리스도 중심이었습니다. 그는 현란한 언어를 구사하지 않았습니다. 솔직 담백하면서, 확신에서 나오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설교는 전적으로 성령님의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자료를 읽고 묵상하여 설교를 준비하여 선포했지만 어떤때는 전혀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면에 말씀이 풀리지 않아 씨름만 하다가 이전 보다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설교를 했는데 의외로 큰 효과(?)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연구을 게을리 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같은 설교를 들어도 어떤이는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어떤이는 큰 은혜를 받는 이 가 있습니다. 설교는 임의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듣는 이 들에게 큰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우리가 어찌 할꼬.."(37). 저는 설교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듣고, 단지  목사님 설교 참 좋다 가 아닙니다. 좋은데 무엇이 좋다는 말입니까? 말을 잘한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예화에 감동을 받았다는 것 입니까? '좋다'가 아니라 '어찌 할꼬'가 되어야 합니다.. 당일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어찌 할꼬 하며 회개하며 주님을 영접한 사람이 삼천명이었습니다(41). 이렇게 시작 된 초대교회는 매우 역동적이고, 성령 충만한 공동체였습니다. 이들은 배우고(성령님은 진리에 영 이시기에 진리를 배우기에 힘써야), 사랑하고, 예배, 전도의 공동체 였습니다(42-47). 이 역동적이고, 건강한 초대교회의 모습이 21세기 우리교회가 따라야 할 모델입니다. 섬기는 교회들이 이런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합니다.


2012년 6월 1일 금요일

주권과 섭리

행2:29-36 묵상내용입니다.
매스 미디어 사회에서는 한 사람이 쉽게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요즈음 같은 세상에서는 숨길수 없고, 숨기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쉽게 노출화 될 수 있습니다. 최근 중동 지역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은 스마트 폰 덕분이라고 합니다. 쉽게 정보를  줄 수 있고, 정보를 공유 할 수 있습니다. 북한에 희망을 조금이나마 갖는 이유는 북한에도 핸드폰 사용자가 10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철권 정치로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아무리 찬단 할려고 해도 이제는 될 수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 하면서 예수님이 오시기전 1000년전에 위대한 군인이요, 탁월한 음악가요, 시인이요, 왕이었던 다윗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29,31)..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섬세하고도 영원한 계획속에 일어난 일 이라고 말씀합니다.. 사건이란 우연히 생겨 난 것 처럼 보이지만, 세상에는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연이란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연이 아닌 섭리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 ... 세상일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한번도 내 마음대로 된 적이 없습니다. 때로는  기도를 아무리 해도 응답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기도한 내용(나의 욕심이 많이 들어감)대로 응답이 되었다면, 그 응답 때문에 삶이 더 힘들어졌을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세밀하게 간섭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습니다. 그분의 주권과 섭리는 그분의 영원하신 사랑과 은혜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믿습니다.  오늘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바로 영원전 부터 계획하신 그분의 주권속에 있었고, 많은 과정속에서 나를 굴복 시켜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