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28일 목요일

중단되지...

행15:36-16: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이 복음을 전한곳에 다시 방문할 계획을 세웠습니다(36).  예루살렘 교회 결정 사항을 알리고 그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마가요한을 데리고 가는 문제로 서로 의견 다툼이 있었고(37-38), 결국은 서로 갈라서게 되었습니다(39).

위대한 사도들도 이렇게 의견이 맞지 않을때 다툴수도 있고, 서로 헤어질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불완전한 우리에게도 역시 위안이 됩니다.

바울은 실라의 설교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것 같습니다(32). 그래서 실라와 동역을 했으면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는 실라와 함께 떠납니다(40).

바나바는 자신의 조카인 마가에게 한 버 더 기회를 주고자 했습니다. 그는 마가를 데리고 떠납니다(39).

바울의 새로운 동역자가 된 실라는 유대 예루살렘교회의 대표적인 사람가운데 한 사람입니다(22). 그리고 바울은 수리아안디옥 교회 소속입니다. 이들은 갈라디아 남쪽지역의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이때 디모데도 바울의 선교팀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16:2-3).

이렇게 오랜 동역자인 바나바와 헤어지는 아픔이 있었지만 이 아픔은 복음전파에 방해가 될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바울대로 바나바는 바나바대로 선교의 열정을 계속 불태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불일치, 때로는 불완전함에도 그들을 도구로 계속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인간의 연약함때문에 중단되지 않습니다.


2013년 2월 27일 수요일

문제해결

행15:22-3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세번에 걸쳐 베드로(6), 야고보(13), 예루살렘 교회의 모든지도자들(22)들은 새로 믿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도록(28) 결정을 하였습니다.

결정후 교회의 대표들을 안디옥 교회로 파송하기로 했습니다(22). 파송자들은 서로 다른 소속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교회(2), 예루살렘교회는  선지자 유다와 실라를(22) 대표로 위임했습니다.

후에 실라는 바울의 동역자가 됩니다(40).

이들이 가지고 간 편지는 안디옥 교회 교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31).
새로 믿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세워주었습니다(32).

성장에는 위기가 있습니다. 성장에는 아픔이 있습니다.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위기와 아픔이 지난 후 교회는 더욱 견고해지고 성숙해졌습니다. 성장을 계속해나갔습니다.

교회내부  분열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완전한 교회가 없기때문입니다. 완전한 교회는 천국에만 있습니다. 죄인들이 모인곳엔 항상 가변성(可變性)이 있습니다.

 만일 교회 문제가 일어났을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으로 돌아가야합니다.
우리의 삶과 교회의 모든 기준은 성경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복음으로  하나된 결정을 내렸듯이 우리도 진리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아닌 사람들의 이말 저말에 따라 흔들리면 교회는 더욱 흔들리게 됩니다.

초대교회가 좋은 모델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2013년 2월 26일 화요일

새로 믿는 성도들

행15:13-2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첫번째 모인 예루살렘 교회의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에 이어서 야고보가 의견을 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었고, 당시 교회의 영향력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야고보의 말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의 짐을 지어서는 안된다는 것 입니다(19). 그러면서 몇가지 지킬것을 말합니다(20). 이것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반감을 감소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이방신전은 음행과 연회(宴會)가 동시에 열렸던 곳 입니다. 연회시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먹는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먹는다면 합당한 일이 아닐것입니다. 야고보는 이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회안에도  세속적인 문화에서 살았던  새로 믿는 성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는 믿었지만 아직' 비(非)복음적'인 요소가 많이 남아 있기때문입니다.

처음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 받은 것도 중요하지만 더나아가 이들을  복음적인 생활과  기독교 문화속으로 이끌고  제자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영적인 돌봄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다.

2013년 2월 25일 월요일

교회는

행15:1-1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 할례파 유대인들이 내려와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잘못된 교리를 교인들에게 전파했습니다(1).

바울과 바나바와 이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문제를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위임하기로 하고 교회대표로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교인대표 몇사람을 예루살렘 교회로 파송을 했습니다.

초대교회에  영향력이 있었던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 즉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했던(행11) 것에 비추어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입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것(7),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를 원하셨다는 것(7), 하나님은 모든이들의 마음을 아신다는 것(8),  하나님은 유대인들과 같이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성령을 주셨다는 것입니다(8-9).

바울과 바나바 역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통해 이방인들 가운데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다는 것을 증거하였습니다(12).

논쟁이 일어날때 모든 촛점을 하나님께 맟추면 해결됩니다. 인간의 생각 보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물론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자 들의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한 회의였지만 이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모든 교회회의의 촛점도 사람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이  뜻과 인도를 구하는데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킬려고 하다보니  교회에 갈등이 생기고 시험에 듭니다. 교회는 세력단체가 아니라 예배와 복음증거 성령 공동체이기때문입니다.

2013년 2월 24일 일요일

감사와 찬송

시편57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 시편은 표제어에 있는 것 처럼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동굴에 숨어 있었을때 쓴 말씀입니다(삼상22:1;24:2).

늘 도망해야 하는 도망자의 신세, 참 삶이 피곤하고 힘듭니다. 더구나 큰 위험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절박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기도 합니다(1). 그의 기도를 보면 당시 그의 마음 상태를 엿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5절과 11절에 보면 이런 절박한 기도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높힘을 받게 해달라는 간구로 바뀌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마음이 확정되었다고 합니다(7). 확정되었다는 것은 마음이 견고해졌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마음에 깊은 평안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입니다.

그의 평안은 절대적인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 것 입니다. 그는 이 믿음으로 자신의 영혼을 깨우고 있습니다(8). 그리고 새벽중에 일어나(8)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송할것이라고 했습니다(9).

인간인지라 두려움과 염려의 감정이 교차될때도 있지만(1) 신앙인의 결론은 본 시편기자처럼 감사와 찬송입니다(10-11).

오늘도 감사와 찬송의 하루가 되기를 기도 합니다. 샬롬!

2013년 2월 23일 토요일

기도가 필요한...

행14:21-2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쓰러졌던 바울은 다시 일어나 루스드라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더베로 떠납니다(19-20). 생명의 위협을 느꼈음에도 그의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가로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더베에서 많은 전도의 열매를 맺고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그리고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돌아가서(21), 새로 믿은이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에는 많은 고난이 있음을 말합니다(22).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은 고난이 따르는 삶입니다. 주님도, 사도들도 고난을 받았듯이 우리 역시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복음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우리 믿음의 형제들..
현재 시리아에서는 내전으로 약 7만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중에도 시리아의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을 말로 표현할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에게 자행되는  납치,폭력, 살인등..

어떤 그리스도인은 피부가 다 벗겨지고  두  눈이 뽑힌 상태에서 죽음을 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전 세계의 박해 받는 교회들이 있기에 그들을 위한 기도를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

이제 바울은 각 지역 교회에 리더들을 선택해서 그들의 사역을 주님께 위탁을 합니다(23).
또한 자신들을 파송한  수리아 안디옥에 도착을 해서 선교보고를 하였습니다(27).

감격에 넘쳐 하나님께서 이방 선교의 문을 어떻게 여셨는지를 보고하는 바울과 바나바의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이들의 고백대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이 믿음의 문을 여셨기에(27)" 사역의 열매가 있었지 이들의 힘만으로는 실패 했을 것입니다.

선교의 문을 여시는 하나님!
모슬렘, 힌두교, 불교권의 사람들의 믿음의 문을 여시고, 전 세계에 복음때문에  박해받는 형제, 자매들에게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

2013년 2월 22일 금요일

가장 큰 은혜

행14:8-2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루스드라는 주전 6년에 아우스쿠스투스에 의해 로마의 속령(屬領)이 된 도시입니다. 문화적으로는 매우 정체되어 있었고 여러 우상들을 섬기던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바울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고쳐준 것을 계기로 이 도시 사람들은 신들이 환생을 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를 로마의 최고의 신인 제우스(Jupiter:Zeus)라고 했고, 바울을 제우스의 대변인인 헤르메스(Mercury:Hermes)라고 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두사람에게 제사를 드릴려고 했습니다(8-13).

이에대해 바울의 반응은 강경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14).
이들의 영적무지가 얼마나 안타깝고 화가 났으면 자신의 옷을 찢었겠습니까?

바울은 이들의 눈을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렸습니다(15). 하나님의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주시는 일반은총을 강론했습니다(16-17). 이런 하나님의 일반은총이 있기에 이 세상이 유지가 되고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이 가장 큰 은혜이지만, 이 세상에 살면서 살수 있도록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또한 큰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호흡하면서 살아가면서도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 죄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루스드라는 이고니온에서 약 29키로 떨어진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한 곳입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루스드라에 있는 줄 알고 이곳까지 찾아와 사람들을 충동 시킵니다(19). 그러자 얼마전까지 바울과 바나바에게 예배를 드릴려고 하였던 이들은 금방 태도가 돌변해 바울에게 돌을 던져 기절을 시켰습니다(19).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것은 무지입니다. 그중에도 가장 큰  불행은 영적무지입니다. 영적무지는 온갖 죄악의 뿌리입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 되어 이런 무지에서 벗어난 것이 얼마나 감사일인지요? 이것이 가장 큰 은혜입니다.

2013년 2월 21일 목요일

이 책임을

행14: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도착한곳은 이고니온입니다. 이고니온 갈라디아 지역의 위치한 그리이스 도시이며, 매우 독립적이고 로마에 저항적이 기류가 강하게 흐르는 도시였습니다.
이런 저항적 기류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강하게 결속 시켰습니다.

바울은 그의 습관대로 가장 먼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았습니다(1).
그곳에서 행한 바울의 설교는 강하게 결속되었던 이들 두 구룹을 나누게 하였고(2), 혼란하게 하였고(4), 바울과 바나바를 적대시 하게 만들었습니다(5).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아랑곳 하지않고 그들이 더이상 머물수 없는 위험한 상황이(5)  오기전까지 새로 믿는 성도들과 함께 오래머물며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냈습니다(3).

특이한 것은 누가는 이들 두 사람을 "사도"(4,14)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사도" 혹은 "이방인의 사도"(롬1:1,5;고전9:1-2;갈1:1)했지만 열두제자 구룹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때로는 그의 사도권에 대해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열두제자 못지 않는 복음의 전파에 대한 식지않는 열정과 복음을 위해  말할 수 없는 많은 고난(고후11장)을 감수 했습니다.

본문에도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때문에 박해를 받는 모습이 나옵니다.세상은 복음에 적대적이기에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박해가 따릅니다. 주님도 이미 그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때문에 고난당하는 선교사님들과 박해받는 교회들(모슬렘, 북한의 지하교회)위해 더욱 힘써 기도해야 할 책임을 느낍니다.

오늘 이 책임을 감당하지 않겠습니까?

2013년 2월 20일 수요일

준비가

행13:42-5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의 첫 번 대중 설교의 반응은 매우 좋았습니다. 사람들이 다음 안식일에도  말씀을 전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 보면  준비된 영혼들이(48) 있음을  자주 경험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영접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신앙이 잘 성장하도록 용기를 주었습니다(43). 바울은 항상  전도와 목회적 돌봄을 균형있게 하였습니다.

그다음 안식일이 되자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자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들이 거의 다 모였습니다(44). 복음이 강력하게 전파되는 곳에는 사탄의 방해 또한 강력합니다.

일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시기심이 일어나 바울의 설교를 반박하고 비방하며 방해하였습니다(45). 설교자가 설교를 하는데 누가 큰 소리를 비방하며 방해를 한다면 얼마나 난처하겠습니까?

이에 바울의 반응을 누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먼저 유대인들이 복음을 들어야 하는데 그들이 복음의 말씀을 거부하기에 자신들은 이방인 선교로 향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순간적인 나쁜 감정으로 내뱉은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임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이사야서를 인용하며 이방인 선교는 이사야의 예언 성취라고 했습니다(사49:6).
이사야서에 나오는 '종'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 종은 이방을 비추는 빛이십니다(눅2:32).

그렇다고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절대로 복음을 전하지 않겠는것이 아닙니다(14:1).
단지 그의 전도사역의 초점을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궤도 수정한 것 뿐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사역의 방향을 궤도 수정 시킬 때가 있습니다.
또한 인생을 살면서 앞으로 나아갈 길에 궤도수정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일반적인 뜻과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한다고 구제척으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원리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성과 상식을 사용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해주시고, 나의 지성과 상식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시며, 인도하십니댜ㅏ.

오늘도 성령님의 인도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2013년 2월 19일 화요일

바울의 설교

행13:13-4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첫 번 대중설교(눅4장), 베드로의 대중설교(행2장), 그리고 바울의 첫 번 대중 설교를 기록 했습니다.

바울의 설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언급함으로 시작합니다(17-22). 이것은 회당에서 그의 설교를 듣고 있는 유대인들이 공감할수 있는 내용으로 시작하였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의 설교에 사무엘서와 시편(22;삼상13:14;시89:20)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또한 다윗의 후손에 대해 언급(23)하다가 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의 중심무대에 올려놓고 있습니다(27-37).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임을 강조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반응을 끌어내도록 도전하고 있습니다(38-41).

그의 설교를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 반감을 가질줄 알았는데 그들은 바울의 설교를 경청하였습니다.

설교는 인간이 하지만 역사하시는 분 은 성령님이십니다. 아무리 본문 연구를 많이하고, 준비를 많이 했다 할지라도 기도 없이 하는 설교는 영혼을 더 메마르게 합니다. 성령님의 감동이 없이는  강팍한 심령에 말씀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늘 겸손해야 하고 늘 기도에 젖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의 설교는 능력이 있는 설교였지만 그의 지혜가 돋보였습니다. 청중들이 공감할수 있는 역사 이야기를 시작으로 점점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촛점을 맞추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에게서 배울수 있는것은 주변에 믿지 않는  이웃들에게  그들이 공감할수 있는 말로 어떻게 접근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해줍니다.

성령님께 그 지혜를 구해봅니다.

2013년 2월 18일 월요일

성령님의 인도

행13:1-1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은 세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파울로스)는 헬라식 이름이고, 사울은 유대식이름이고, 로마시민권자로서 라틴 이름은 파울루스(Paulus) 입니다.

누가는 본문에서 그의 이름을 '바울'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바울' 이란 이름은 헬라 문화속에 살고 있던  이방인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이름이었습니다.

핍박자에서 전도자로 변신한 바울은 수리아안디옥 교회에서 일년동안 가르치는 사역에 헌신하고 있었습니다(11:25-26).

이제는 때가 되어 성령님께서 교회로 하여금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인 선교사로 임명하도록 인도 하셨습니다(2).

이들은 성령님의 보내심을 받았습니다(4). 교회가 그들을 보낸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보내셨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계획으로 길을  떠난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계획에 따라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성령님의 행하심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또한 성령님은 이들을 먼저 유대인들의 회당으로 인도 하셨습니다(5).

그런다음 구브로의 총독인 이방인 정치인과 만나게 하셨습니다(6-7).

성령님께서는 바울을 도구로 삼아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마술사 엘루마를 소경으로 만들었습니다(8-11).

성령님의 보내심을 받았지만 바울과 바나바에게는 앞으로 말할수 없는 난관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방해에도 바울과 바나바가 기쁘게 이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인도에는 마음에 평화가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에 평화가 있으면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님의 인도에는 항상 마음에 평화가 따릅니다.
오늘 나에게도 이런 평화가 있습니까?

2013년 2월 17일 일요일

난관 가운데서..

시56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모든 난관을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웬지 절로 용기가 솟을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과만 생각하기 쉽지 그 과정 가운데 많은 마음의 고통과 눈물을 쉽게 간과해버릴 수 있습니다.

본 시편기자(다윗)도 여러 난관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의 상황은 매우 심각합니다.
잔인한 추격자가 그를 계속 좇고 있고(1-2), 주변에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비방하고 그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5-6).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시편기자는 한가지 결심을 합니다.
영어 성경(NIV)에는 " I will"이 반복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주를 의지 하겠다는" 것(3), "내가 두려워 하지 않겠다는 것(4,11)," "내가 감사제를 드리겠다는 것."(12) 강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는 자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의지 하겠다는 결심을 더 두텁게 하고 있습니다.

어떤 난관을 만나면 보이지는 않으시는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믿음으로 보기보다는 그 환경에 쉽게 갇히게 됩니다. 그때는 마치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숨어 계시거나, 아니면 침묵하시는 것 처럼 보여집니다

물론 이런 감정을 부인하는 것은 거짓일것입니다. 오죽하면 시편기자도 이런 고난 속에서 흘렸던 많은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 달라고 했겠습니까?(8)

하지만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런 감정에 지배 받지 않고 믿음으로  은혜와 사랑과  능력으로 우리의 삶을 이끄시는 하나님께 감사 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믿음은 난관중에서 일어나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치유하는 치료제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감사제'(12)를 드릴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2013년 2월 16일 토요일

우리의 기도

출11:1-1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로는 모세를 자기 앞에서 내쫓으면서  다시는 자기의 얼굴을 보지 말라고 했고,  보는 날에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10:28).

그럼에도 모세는 바로를 찾아가 애굽전역에 내릴 마지막 재앙을 알립니다(4-5). 그동안 내렸던  9가지 재앙들은  재앙이 임했다가도 바로의 마음이 누그러지면 거두어 가시고 다시 마음이 강팍해지면 다시 내리고.. 하는 일이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 성격이 다릅니다.

이전에 애굽왕이 이스라엘 남자 아이를 죽이라고 한 명령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애굽의 남자 아이(장자)들,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들을 다 죽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행했던대로 그대로 행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마지막 재앙을 예고하는 모세는 이전과는 달리 바로의 교만에 대해 화를 내고 그 앞을 떠났습니다(8).

하나님은  바로와 애굽에 대해 인내하셨습니다. 바로에게  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바로와 애굽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압제, 폭행, 학살등 온갖 악행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내리는 마지막 재앙은 애굽인들이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아픔을 줄 것입니다. 자식이 죽는 아픔이 부모에게 얼마나 큰 것입니까?

애굽인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재앙은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임을 다시 상기 시켜줍니다. 그분의 공의가 있기에 세상의 질서가 유지가 됩니다.

물론 아직도 세상 곳곳에는  온갖 악행, 불의, 압제함(시리아, 북한 등등)이 있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믿기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세계 평화와 하나님의공의와 압제당하는 사람들을위해  날마다 기도해야함을 믿습니다.


2013년 2월 15일 금요일

하나님의 위대하심

출10:21-2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애굽에 내리는 재앙은 일정한 유형(類型)이 있습니다. 재앙중에 두 가지 재앙은 예고한 다음 내려졌고, 다른 재앙들은 예고없이 내려졌습니다.

바로의 마음이 강팍해질수록 애굽의 상황은 심각해졌습니다.
예고없이 내린 재앙가운데 흑암재앙은 마지막 재앙입니다.

온 애굽전역에 흑암이 3일동안 임했습니다(22). 아마 애굽 사람들은 공포와 전율을 느꼈을것입니다. 빛이 없는 곳에서 3일동안 살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밤에 전기가 몇시간만 나가도 깝깝하고 답답합니다. 하물며 3일동안 해가 가려진  깜깜한 암흑속에서 생활한다고 한다면...더구나 미신을 믿는 애굽 사람들은 더욱 두려움에 떨었을것입니다.

결국 바로는 모세를 불러 우리 땅을 떠나 하나님을 섬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축들은 남겨두고 가라고 합니다(24). 바로의 고집은 완전한 포기가 아닌 항상 여지를 남겨둡니다.

모세가 바로의 제안을 거절하자 바로는 다시 마음이 강팍해졌습니다. 여지를 남겨두었다는것은 언제든지 강팍한 마음으로 돌아올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앙이 올때 마다 바로의 마음은 일시적으로 조금 누그졌다가 다시 완학해지고  이런 일이 반복됩니다. 바로를 탓할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그런것 같습니다. 상황이 조금 좋아지면 쉽게 교만해질수 있는 근성이 인간에게는 누구나 있습니다.

바로의 모습은 곧 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뭏튼 하나님은 애굽들이 가장 경외하는  최고의 신인 태양신 라(Ra)에게  재앙을 내림으로 하나님만이 참된 신임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첫 재앙은 애굽인들이 가장 신성시 하는 나일강에 내려졌고, 지금은 애굽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태양을 3일동안 보이지 않게 함으로 하나님의 위대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늘 나의삶속에서, 일터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어떻게 보여 주실것입니까?

2013년 2월 14일 목요일

바로와 하나님

출9:13-3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로는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습니다. 재앙이 닥치면 재앙을 거두어 달라고 간청을 하고, 재앙이 멈추고 조금 살만해지면 다시 강팍해지고..

하나님에 대해 잘 모르는 바로는 하나님의 능력은 한계가 있기에 버티다 보면  이겨낼수 있다고 생각한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음을 처절하게 깨닫기까지 (8:18,19;9:11;10:7),  하나님과 계속 겨루어 보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거의 백기를 들때까지 (10:8-11), 하나님과의  줄다리기는 계속 됩니다.
하나님은 바로에게 '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닌 모든 세상의 하나님이심을 보이시기를 원하셨습니다(8:22).

이 무서운 재앙중에도 하나님은 애굽인들과 구별해서 이스라엘은 보호하셨습니다(8:23;9:6-7,26).  세상을 살면서 아무리 힘든일을 만나도 늘 든든한것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늘 우리를  보호하시는 그분의 손길을 믿기에...

바로는  피로 변한 나일강에서 자신의 궁전으로 피하였지만, 하나님의 재앙은 궁전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8:3,24). 그럼에도 바로는 애굽의 신들보다 하나님이 참신임을 받아들일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 앞에 굴복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바로의 모습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세상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우박에 대한 경고는(19) 바로에게 영향력이 작았던것 같습니다. 그러나 메뚜기 재앙이 오자 더이상 황폐함을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바로는 그의 교만과 고집을 꺽지않고, 하나님과의 힘겨루기는 계속 되어갔습니다.

애굽에는 더 큰 고난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나의 삶속에서 하나님앞에서 아직 꺽지않은 고집은 없습니까?

2013년 2월 13일 수요일

나일강

출7:14-2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애굽인들은 나일강을 의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나일강은 애굽인들의 삶의 중심이요, 생명줄입니다. 나일은 이들의 축제와 경배의 대상입니다.

당시 애굽에서는 매일 나일에서 종교적 예식이 치루어 지고 있습니다. 모세가 바로를 나일에서 자주 만나는 것을 보면  그것을 알수 있습니다(8:20;9:13).

바로를 만날려면 나일에 가면 만날수 있습니다. 본문에도 모세는 바로를 나일강에서 만났습니다(15).

이렇게 애굽인들이 신성시 하며 생명줄 처럼 여겼던 나일강을 피로 바꾸는 첫 번째 재앙을 하나님이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재앙을 통해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네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17).

나일강이 피로 변하자 수많은 물고기들이 죽게 되었고, 부패해진 강에서 악취가 진동했을것입니다. 나일뿐만 아니라 애굽인들이 파놓은 운하와 못, 호수 등  물이 있는 모든곳에는 같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19)

애굽의 술사들도 조금이나마 하나님의 흉내를 내보았지만(22), 그것이 어찌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같겠습니까?(24) 그럼에도 바로의 마음은 계속 강팍한 상태였습니다(22).

그는 왕궁으로 돌아갔으나 물을 마실수 없었고 아마 물대신 포도주를 마셨을것 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 하나님의 권위 앞에 굴복하지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재앙은  애굽인들이 가장 믿었던 곳에  내려졌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도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신뢰하는 다른 대상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결국 나를 실망시키고, 아픔과 상처를 주도록 하나님은 만드실 것 입니다.

혹시 내 마음에 나일은 없습니까?

2013년 2월 12일 화요일

바로의 마음

출6:28-7:1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말씀을 읽으면 이해하기 힘들때가 있습니다.

7장3절에서  하나님은 "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라고 하셨는데, 13절에서는 "바로가 마음이 완악"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8장15,32절에도 바로가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어떤때는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강하게하셨고, 어떤때는 바로가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조화'라고 표현해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우리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만일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구절대로 생각한다면 '바로의 완악함'은 바로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악을 만드시는 분 이 되십니다. 
이 일이 가능한 일입니까?하나님의 속성으로 볼 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바로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음에도  그것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심(롬1장)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재앙을 통해 바로가 그의 마음을 돌이키기를 원하셨는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잘못해석한다면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어떤 사건이나 아픔을 통해 나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용서는 하나님이 하시지만 회개는 내가 해야합니다.

나를 상실한 마음대로 두지 않으시고 회개케 하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013년 2월 11일 월요일

교만

출5:22-6:1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로와 첫 대면에서 실망한 모세는 하나님앞에 나아가 그 모든 사정을 아뢰고 있습니다(5:22-23).

하나님은 모세에게 " 나는 여호와"라고 세번 강조하고 계십니다(6:2,6,8).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3),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스스로 계신분으로 자신을  나타내보이셨습니다.

모세의 절망은  전능하신 하나님보다 바로의 위세앞에 위축되었고 그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우리를 위축시킬때가 많습니다. 당장 눈앞에 닥친것들이 나를 낙담케 할때가 많습니다.

모세역시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은 네 힘이 아닌 오직 나의 손으로만이 가능하다. 나는 너희 조상과 맺은 약속을 잊지않고 있다. 또한 그들이 고난을 받을것을 이미 말했고, 이제는 시간이 되어 나의 손으로 그들을 구원한다. 나는 '여호와'다 내가 이일을 행할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간과 한것이 모세의 실수 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행하심에 따라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모세는 백성들의 반응(9)과 앞으로 바로가 보일 반응에 미리 민감해 하고 있습니다(12).

그가 왜 민감해합니까? 자신의 영역이 아닌 하나님의 영역을 자신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할수 없는것을 나의 것인냥 절망하고 낙담할때가 있습니다. 나의 영역과 하나님의 영역을 구분하지 못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이런 교만은 없습니까?

2013년 2월 10일 일요일

하나님 한 분

시55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이 우리를 실망시킬때가 있습니다. 어떤때는 노골적으로 나를 무시하며 상처를 줄때가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아마 이런 상처를 받았던것 같습니다(2-3).

오죽했으면 새가 되어 날아가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어했을까요?(4-8). 특히 그의 가슴을 더욱 쓰리게 만든것은 친구의 배신입니다(12-14).

전에 그렇게 가까운 친구였는데 이제는 그를  찌르는 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자는 그를 향해 분노하고 있습니다(20-21).

물론 다른 힘든일들이 많지만, 그를 더욱 벼랑끝으로 몰아넣은것은 배신자의 위협이었습니다.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을 지켜달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8).

교회안에 영적전쟁은 외부에서 오는것 보다 서로 가까이 교제하는 성도들안에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더 큰 상처를 입을수 있습니다.

이럴때 본문의 시편기자처럼 주저함없이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있는그대로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상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며, 용서와 새로운 관계를 위해 간구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든일을 당해도 오직 우리가 신뢰할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2013년 2월 9일 토요일

날마다

출5:1-2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4장 마지막 부분에는 장로들과 백성들이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겠다고 하는 모세의 말을 믿고 하나님을 경배했다고 하였습니다(4:30-31).

모든일들이 순조롭게 잘되어가는 것 처럼 보여집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는 반전(反轉)이 되고 있습니다. 그 반전의 주인공은 '바로'입니다.

세상 권력의 상징이라 할수있는 바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보내달라고 하는 모세와 아론의 이야기를 듣고  더 완악한 정책을 씁니다.몇배나 가증된 노역을  시킵니다.

벽돌에 쓸 짚을 이전처럼 주지 않고 벽돌을 만들어야 할 양은 같게 하였습니다(7-9). 악한자들이 행하는 전형적인 '야비한' 수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 하루가 숨이 턱 막히는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모세의 바로와의 첫 대면은 실패한것 처럼 보여집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미 모세에게 바로가 그의 말을 듣지 않을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3:18-20;4:21-23).

또한 바로를 대한는 모세의 자세도 하나님의 종다운 자세가 아닌 어정쩡한 자세였습니다.

만일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칼과 전염병으로 애굽을 칠것이요 이렇게 말하지 않고  애굽이 아닌 이스라엘을 칠것이라고 정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3).

그는 내심 하나님의 능력보다 바로를 더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더욱 심한 노역에 시달리게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 또한 모세에 대한 분노로 가득차 있습니다(21). 모세는 그들에게 아무말도 할수가 없었습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믿음이 없이 하는 일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나면 일시적으로 감동을 받지만(4:31), 조금 어려움이 오면 금방 절망과, 불평으로 돌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도 이 은혜를 간구합니다.

2013년 2월 8일 금요일

어느부분이

출4:18-3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모세의 첫 아들은 게르솜입니다. 게르솜이란 '내가 이방땅에서 이방인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2:22). 모세는 오랜 나그네 생활로 인해 자신은 더 이상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을 가졌는지지 모릅니다.

이유가 어떻든, 모세는 유대인들이 태어난지 8일만에 시행하는 할례를 자신의 아들에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할례를 받지 못한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취급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창17:14).

이일로 하나님이 모세를 죽일려고 하셨습니다(24). 그러자 그의 아내가  급히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고(25), 하나님이 모세를 용서하셨습니다(26).

모세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던것은 이방인 아내의 영향도 있었던것 같습니다. 신앙이 연약한 사람이나, 불신앙적인 사람들의 충동적인 언동에 영향을 받아 움직이면 반드시 가슴아픈 실패를 경험합니다.

교회가 세속의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존재 가치가 없어집니다. 교회는 두가지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을 향해 복음을 증거할 책임과 다른 하나는 세상의 오염으로 자신을 지키는 것 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걸림이 제거되자 하나님은 모세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일을 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지만, 그  부르심에 거부하는 모세를 설득하셨지만, 하나님은 모세가 자기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자 모세를 죽일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모순적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철처한 자기 부인과 순종의 뒷받침이 없이는 그분의 도구가 될수 없다는 사실을 본문을 통해 볼수 있습니다.

나의 삶에 어느부분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2013년 2월 7일 목요일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

출4:1-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모세와 하나님이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할려는 모세, 그일을 감당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할려는 모세는 합당한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를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오랫동안 그들을 떠나 있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만났다는것을 그들에게 어떻게 증명합니까?'들어보면 타당한 이유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표징을 보여주십니다. 첫번째 표징은 모세의 지팡이가 뱀으로 바뀌는 것입니다(2-3). 두번째의 표징은  그의 손에 문둥병이 생기는 것입니다(6-7).

그럼에도 모세는 또 다른 이유를 대며 계속 사양을 합니다
' 나는 말을 잘 못하는 사람입니다(10)'

다른 사람을 보내시는 것이 낫겠습니다(13).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화를 내셨습니다(14). 모세는 하나님이 전능하신분임을 알았지만 아직 그분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것과 신뢰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아는것과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은 다른 것 입니다.
다른 말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빠져나 갈곳을 찾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아론을 붙혀서 그를 돕게 하십니다(13-14). 모세를 포하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얼마든지 모세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내실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모세를 계속 고집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택함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택하신자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 하나님의 고집을 꺽을 존재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그분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내가 나된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2013년 2월 6일 수요일

모세의 두려움

출3:1-2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 가운데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실려고 하십니다. 물론, 이들이 애굽에서 고난을 받은것 역시 하나님의 작정속에서 된 일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시간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도구로 모세를 선택하셨습니다.
지금 모세는  자신감으로 가득찬 애굽의 왕자가 아닌, 변방(邊方 )미디안땅에서 조용히 양을 치는 촌로(村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자  그가 한 첫 질문은 "내가 누구이기에"(11) 였습니다.
나는 살인자가 아닙니까? 나는 도망자가 아닙니까? 이전에 '이스라엘을 해방시킬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한 사람이 아닙니까?

당신은 사람을 잘못 선택하셨습니다. 내가 이일을 어떻게할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 "내가 누구이기에"에 포함된 질문입니다.

곧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는 누구냐'(13) 하면 어떻게 합니까? 하며 계속 핑계를 댑니다.

그는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2:14)-  거부당한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없었습니다. 자신은 이일을 감당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모세의 질문은 계속됩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내가 무슨 권한과 권위로 이 일을 할수 있습니까?(13)

사실 모세에게는 질문이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하면 될 뿐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실패의 경험이 그를 주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과거의 나쁜 기억이 나의 행동을 제한할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거의  실패의 두려움을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할려고 할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닌 두려움 때문입니다. 

오늘 나에게도  이런 모세의 두려움은 없습니까?

2013년 2월 5일 화요일

하나님의 시간

출2:1-2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기전 모세는 왕성한 혈기와 민족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이스라엘 사람을 폭행하는 애굽을 사람을 목격하고 그를 죽입니다(12).
그는 자기 민족의 사정에 대해 누구보다 관심이 많았고 민족을 구하고 싶은 열정이 넘쳤습니다.

곧이어 두 히브리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그들의 싸움을 중재합니다(13).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그가 생각했던 것 과 전혀 다른것이었습니다.오히려 모세가 애굽을 죽인 사건을 이야기 하며 왜 남의 일에 참견하느냐 하는 태도를 보입니다(14).

모세는 자신의 일이 탄로난것을 알고 두려워 그 길로 도망을 칩니다. 모세는  애굽의 궁궐에  살았지만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열정은 누구 못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지도자로서 준비는 덜 된 상태였습니다.

그는 고집이셌고, 충동적이고, 폭력적이었습니다.
모세는 다시는 궁궐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은채, 그가 누렸던 모든 부귀영화를 뒤로 한채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모세의 마음과 기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목민들 가운데는 힘센자가 우물을 차지 했던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한 여자가 이런 불량배와 같은 목자들에게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고 도와줌으로 (17), 모세는 그집의 사위가 되어 목자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모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화려한 궁궐이 아닌 소박한 목자로서 삶을 살고 있습니다.그것도 40년이라는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는 참 답답한 시간입니다. 한창 젊은 나이에...

하나님은 때로는 나의 가던길을 막으실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인간적으로  답답함을 느끼게 되고 , 해야야 할 일이 많은데 왜 저를 이렇게 가두어 놓으십니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나의 시간과 다릅니다. 열정과 자질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열정이나 자질이 아닌 철저히 자기 부인이 이루어질때까지... 오직 하나님만 의지 하도록 하시기까지 기다리십니다. . 이 사실을  모세를 통해 볼수 있습니다.

2013년 2월 4일 월요일

어떤 두려움

출1:1-2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애굽의 새로운 왕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동안 요셉으로 인해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에서 큰 환대속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게 되었습니다(8).

70명이었던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사람들이 통제할수 없을정도로 그 수가 불어났습니다(7).
이제는 가족 단위가 아닌  민족 단위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이들의 수가 불어나자 애굽왕은 전쟁이 일어나면 이들이 적군과 합세해 자신들을 치고 애굽에서 떠날수 있다는 생각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최고 권력자의 두려움은 곧 이스라엘을 압제함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을 노예로 부리며 그들의 노동력으로 두개의 도시를 지었습니다(11).

하지만 이스라엘은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의 은혜로 더욱 번성했습니다(12).
그러자 바로는 더욱 악한 꾀를 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인 남자는 혹독한 노동으로 괴롭게 하였고 남자 아이는 태어나면 산파들로 하여금 죽이도록 하였습니다(16).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을 말살할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산파들은 왕의 명령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계속 불어났고 왕의 명령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 했던 산파들을 하나님은 축복하셨습니다(20-21).

본문에는 두가지 두려움이 나옵니다. 첫째는 바로의 두려움이요, 둘째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산파들의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혜가 생깁니다. 그러나 사람을 두려워하면 나약, 비겁, 판단력을 상실합니다. 이것이 '바로'의 두려움입니다.

 믿음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삶입니다.
나에게는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까?

2013년 2월 3일 일요일

생각해보십시오.

시54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누구나 주변 사람들로 부터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을 것 입니다. 특히 가장 믿었던 사람들로 받은 상처는 아픔이 더 합니다. 이런 아픔을 경험하는 상황에서 나를 위로 해줄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의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받으며 유다의 한 동굴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더 외롭게 만들고 아픔을 주는 것은 자신을 도와줄줄 알았던 사람들의 잇따른 배신이었습니다.

시편52편에서는 에돔사람 도엑이 배신을 합니다.
시편55편에서는 다윗의 친구가 그를 배신합니다.
본 시편에서는 십사람들이 그가 있는 곳을 사울에게 밀고를 합니다.

사실 유대의 남쪽에 살고 있는 십사람들은 다윗과 친척 관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배신이 다윗의 마음을 닫게 만들었고, 다윗은 그들을 가리켜 " 낯선 자들이  자신을 친다"고(3)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배신들은 가까운 친구들을 잃어버리는 아픔과 인간에 대한 신뢰감을 완전히 상실해버리게 만듭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다윗은 어떻게 행하고 있습니까?
과연 누구를 믿어야 합니까?

그러나 4절에 보면 전혀 다른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는 하나님은 자신을 돕는 분 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분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고난속에 있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옆에 늘 함께 하심을 느꼈습니다.
아니 다윗의 전생애를 통해 하나님은 항상 자신과 함께 하셨음을 수없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을 배신하였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그를 배신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안전한 장소이셨고, 그의 힘이셨습니다.

경우는 다르지만 우리도 다윗과 같은 상황을 만난적이 있었을 것 입니다. 그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호하셨고, 인도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2013년 2월 2일 토요일

참 유대인

롬2:17-2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간혹 자종차 뒤에 '물고기 표시(?)'를 붙이고 다닌분들이 있습니다. '물고기 표시'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표시하는 마크입니다. 이런 표시판을 붙히고 다니면서 과격한 운전이나, 교통법규를 위반한다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일이 아닐것 입니다.

이런 부담때문에 이런 마크를 붙히고 다니는것을 꺼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일것 입니다(제 생각으로)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요지가 바로 이것입니다(24).

바울은 율법을 가지고 율법을 자랑하면서 막상 율법을 지키지 않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고발하고 있습니다(17-24).

바울의 이 가르침은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것 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라는 자체만으로도 구원에 대해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그들의 마음이요, 내면적인 삶이었습니다(29).

마음이 변화되는 것은  율법의 조문(27) 이 아닌 성령의 사역입니다(29).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그리스도) 아래에 있습니다.  육신의 소욕을 좇지 않고 성경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옛사람이 아닌 새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변화된 삶을 통해 복음이 증거됩니다.
물고기 표지판(?)도 중요하지만 변화된 삶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증거됨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복음적 삶이요, 참 유대인인것입니다(28-29).

2013년 2월 1일 금요일

판단

롬2:1-1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이 짓고 있는 죄들(1:18-32)로 부터 관심을 돌려 그의 독자들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주석가들마다 해석이 조금씩 다르지만 본문의 바울의 경고가 로마교회안에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말한것인지? 아니면 어떤 특별한 유대인들을 향한것인지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어찌되었던 자신도 죄를 지으면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나 이방인들처럼  부도덕한 죄를 짓는 사람(1:18-32)들이나 하나님앞에서는 같은 죄인들입니다.

이들 두 구룹은 하나님을 알지만(1:19;2:2), 둘 다 하나님을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1:28,32;2:4-5).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사람들이고, 죄의 질량을 따질것 없는  동등한 죄인들입니다(1:29;2:5)

본문을 읽으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때로는 남과 나를 비교하면서 그래도 비교적' 나는 괜찮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이 바로 그런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줍니다.

내안에 숨겨진 죄가 있으면서 겉으로는 안그런척 '외식' 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그분의 진노를 받을 수 밖에 없는 동일한  죄인들입니다. 하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2:16), 죄의 심판에서 면제된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쉽게 남을 비교하고 판단하지는 아니한지요?
남을 판단하기전에 먼저 나의 죄를 날마다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