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30일 화요일

성경대로

요6:60-7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첫째는 주님을 따르면 이익을 생길것 같해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느껴지지 않으면 주님을 떠납니다(66).

다른 하나는 주님이 메시야이시고, 생명을 주실분임을 믿고 따르는 사람입니다.베드로가 그러했습니다(68-69). 베드로는 매우 단순하고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따랐습니다.

본문의 베드로의 고백은(69)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행한 그의 신앙고백과 엇비슷합니다(막8:29).

많은 사람들이 밀물처럼 주님을 따랐다가 썰물처럼 주님을 떠났지만 주님은 초연하셨습니다.
12제자만 남았지만 그 가운데도 주님을 배반할 가룟 유다가 있었습니다(64,70-71).

목회를 하다보면 목회자는 숫자에 관심을 가질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교회는 숫자가 많고 적음에 있는것이 아니라 얼마나 살아있고 건강한가에 있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진리 기운데 서있느냐가 중요함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12명의 제자 가운데 가룟유다가 있는것을 보면 사람을 믿고 목회를 하면 반드시 실패함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믿을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분 이시고, 사람은 믿을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성경대로 목회를 하다보면 주님이 그를 붙잡으시고, 그의 사역을 축복 하실줄 믿습니다. 아- 멘

2013년 4월 29일 월요일

그리스도앞으로..

요6:41-5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자 유대인들은 수근 거렸습니다(41).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가족 배경을  알고 있었습니다(42).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렸을것입니다.

유대인들 사이에는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자주 토론이 있었습니다(7:41-43).
예수님에 대해 수근(원망) 거리는 이들은 광야에서 먹을것이 없다고 수근 거리던 그들의 조상 이스라엘을 연상케 합니다(출16). 이들의 유전자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수근거리는 사람은 항상 수근댑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은 수근거리기 쉽습니다. 아담의 유전인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살전5:18).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영적 유전인자가 바뀌었음을 말합니다.

수근대는 이들에게 주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48).
그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함을 말씀하셨습니다(53).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질적 만나를 먹어야 광야에서 살아남듯이, 영적인 하늘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할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늘의 떡이신 예수님을 몰랐지만,  나로  하늘의 떡이신 예수님을 알게하시고, 믿게하시고 영생을 얻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지 않으면 그분을 알지못하고 믿을수 없기 때문입니다(44).

나를 그리스도앞으로 이끄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오늘을 시작합니다.

2013년 4월 28일 일요일

하나님께

시64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 시편기자인 다윗은 원수들로 부터 많은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에게 제일 먼저 간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들을 복수할려는 마음이 아닌 순전하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간구하고 있습니다(1-2).

다윗은 원수들의 특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3-4).
자신을 해할려는 은밀한 계획을 세우고,  자신에 대해 독한 말을  하고, 어떻게든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그들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습니까? 대부분  다윗이 가진 그런 원수들이 없을것 입니다.
그럼에도 주변에 나를 적대시 하고,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들이 있을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주변에 남겨두신 이유는  나로 나태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입니다.나의 신앙을 연단시키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편하면 방종해지기 쉽습니다.
적당한 긴장이 필요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나의 감정을 정직하게 하나님께 가져가십시오(7).
하나님만이 의롭고, 정의롭게 해결해주실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 하게 될것입니다(10)


2013년 4월 27일 토요일

생명의 떡

요6:25-4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죄악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것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돈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돈을 사랑하는 탐심이 죄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는 이유는 떡을 먹고 배부른 이유라고 하셨습니다(26).
이것보다 한 차원 높은 것을 찾기를 원하셨습니다.

5천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떡을 먹이신 기적 그 자체가 아닌 그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물질만 찾는 삶, 보이는것에만  만족하는 삶은 저급한 삶입니다.
인간의 죄성이 저급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주님은 육신의 떡만을 찾은 이들의 관심을 영생의 문제로 돌리셨습니다.
영생의 문제야말로 인간의 가장 원초적(原初的)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35).
왜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를 믿는 것은 이론이나 지식으로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 맛을 느끼는것 처럼 예수를 믿는 것 역시 맛을 느끼것 같은 체험적인 일입니다.
떡(음식)을 먹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하는 하루가 되십시오. 아-멘

2013년 4월 26일 금요일

위기의 시간

요6:16-2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의 상황은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곧이어 바다위로 걸어오신 주님은 풍랑을 만나 애를 쓰는 제자들의 배를 타시고 가버나움에 도착하십니다.

풍랑을 만난배와 바다위를 걸어오시는 주님!
바다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19)
제자들과 배를 타고 가버나움에 도착하는 장면.. 한눈에 그려집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먼저 가버나움을 보내신 이유는 기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고, 사람들이 임금으로 삼을려고 하자  산으로 피하셨습니다(15).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고 왕으로 삼을려고 할때 주님은 성공에 도취되지 않으셨습니다.
그 시간이 위험의 시간임을 아셨습니다. 더욱 기도에 힘을 쓰셨습니다(마14:23)

매일의 생활이 바쁘십니까?
원하는 일들이 차질없이 잘되어 갑니까?
위험의 시간일수 있습니다.
기도에 더욱 힘을 쓰십시오.
주님이 오늘 이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2013년 4월 25일 목요일

제자로서..

요6:1-1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기적이 일어난 후 사람들의 반응을 엿볼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모세가 예언한 선지자라고 생각했습니다(14, 신18:15).
이들이 생각한 선지자는 정치적 메시야임을 말합니다.

이들은 우리를 로마에서 구원할 메시야가 오셨다고 환호하며 예수님을 왕으로 삼을려고 했습니다(15). 이들의 이런 행동에 예수님은 산으로 몸을 숨기셨습니다(15).

예수님을 왕으로  삼을려고 했던 이들은 나중에 주님을 십자가에 못으라고 앞장서서 소리쳤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요19:15).

이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을려고 했던것은 자신들의 물질문제를 해결해주실 분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놓고 저마다 다른 각도로 접근합니다.
나의 필요를 채워주실분
나의 성공을 도와주실분
나의 병을 고쳐주실분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주실분으로만 생각한다면 본문의 유대인들과 다를바 없습니다.
상황이 변하면 돌변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성공에 멘토가 아니라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구원자이시고, 주님이시고, 만왕의 왕이십니다.
찬양과 예배를 드리고 말씀에 순종할뿐닙니다.
내필요에 의해서 따르는자가 아닌 제자로서의 삶을 살겠습니다.


2013년 4월 24일 수요일

증언

요5:31-4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법정에서 진실을 밝힐때 증인을 세웁니다. 증인의 증언은 재판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확실한 증인들의  증언들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부 하나님의 증언입니다(32,37-38),
성부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 많은 증거를 하셨습니다.

두번째 증언은 세례(침례) 요한입니다(33-35).
세례요한이 세상에 온 목적은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온것입니다

세번째 증언은 주님의 행하시는 표적이 곧 증거가 됩니다(36). 치유하시고(5:15), 먹이셨습니다(6:1-15).

네번째 성경이 주님이 진리이심을 증언합니다(39).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구원자이시고, 그리스도이십니다.
천하 인간중에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적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진리이시고 생명이심을 지금도 증거 하시고 계십니다.
이런 많은 증거가 있고, 하나님이 증거하심에도 아직 나의 가족가운데, 친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2013년 4월 23일 화요일

심판

요5:16-3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치셨다고 박해를 했습니다(15).
오랜 병마에 시달린 사람이 새 생명을 얻은것을 기뻐하기 보다는  안식일을 어겼다고 불쾌함을 드러내는 유대인들의 모습은  어그러져 있습니다.

이들을 더욱  화나게 한 것은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과 동일시 하시는 말씀 때문입니다(16-18).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인간으로 오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 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스스로  계시 하셨습니다(19-20).

 세상의 마지막 심판이 그분에게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27).

세상의 법정에서 내리는 사람의 심판은 불완전합니다.
가장 정의로우시고(30), 공평하신 주님의 심판은 완벽하십니다.

성부하나님께서 주님에게 심판권을 주셨습니다.
세상의 종말의 시간이 되면 주님이 오셔서 공의롭게 심판 하실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본문의 유대인들을 처럼 내가 남을 심판할려고 하지 마십시오.
공의로우시고, 공평하신 주님의 손에 맡기십시오.
모든 심판하는 권한은 주님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2013년 4월 22일 월요일

일어나라

요5:1-1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만나시는 주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이 38년이지 당시 예수님이 나이보다 더 많은 햇수를 병으로 앓고 있던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 사람에게  "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6).
이 병자가 병이 낫고자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사람은 주님의 질문에 다른말로 대답 하였습니다(7).
이만큼 그는 깊은 절망에 있었습니다. 자신의 병이 나을수 있다는 확신이 전혀 없었습니다.

고생을 많이하고 상처가 많은 사람은 의심이 많고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이 될수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주님은 "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고 하셨습니다.

"일어나라"는 말씀이 큰 위안을 줍니다.

우리주변에 낙심과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십시오.
" 일어나라"

" 일어나라"는 동일한 음성이 나에게도 주십니다.
오늘도 일어나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 아-멘-

2013년 4월 21일 일요일

하나님에게만

시63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 시편은 다윗이 유다 광야에서 쓴 시편입니다. 지금 다윗은 압살롬의 난을 피해 광야에 와 있습니다. 그에게는 그 어느때 보다 괴로운 시간입니다.

사람이 괴로울때는 주님을 찾기도 하지만 어떤때는 기도할 힘 조차 없을때도 있습니다.
아들이 자신을 죽일려고 하는 아버지로서의 고통, 그런 고통속에서 그는 자신의 상황을 바꾸어 달라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고 있습니다(1).

다윗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몰입하지 않고 그 상황을 보는 다른 눈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정신적, 영적 고통보다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도우셨던 때를 기억하며(7) 과거에 자신을 도우신 하나님이 미래에도 자신을 도우실것을 확신합니다.

결국 자신을 대항하는 사람들이 처해질 운명을 생각합니다(9-10).
그의 입에서는 찬송이 나왔고(3),자신의 손을 들며서 하나님을 찬양하고(4), 찬양으로 마치고 있습니다(7)

그는 낮과 밤(침상에서,6)으로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자신의 필요보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촛점을 맞추고 있고, 결국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 합니다(11).

본문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변화 시킬수 없는 상황이 아닌 모든것을 변화 시킬수 있는 하나님에게 포커스를 맞추면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2013년 4월 20일 토요일

믿음

출16:17-2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거둘때에 원칙을 주셨습니다.

매일 거두되  필요한 만큼만 거두게 하셨습니다(4,16). 안식일에는 거두지 못하게 하셨습니다(25-26).

광야에서 매일 살아간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매일 필요한 만큼만 거두었습니다.
어떤날은 분량을 초과하여 거둔 이들도 있었고, 분량보다 적게 거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얼마를 거두었던  각 사람에게 정해주신 분량 만큼만  되었습니다.
남음도 없었고, 부족함도 없었습니다(17-18).

어떤이들은  혹시 내일 주시지 않으면 어쩌나 하며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20).아침을 위해  남겨두면 반드시 벌레가 생기고 썩는 냄새가 났습니다(20).

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생활은 남음도 없고 부족함도 없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에 순종하느냐에 있습니다.

믿음이란 단순합니다.
의지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 오늘도 의지하며 순종하며 신실하신 하나님을 체험하며 살게 하소서! 아-멘

2013년 4월 18일 목요일

선한 싸움

출15:19-2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후 삼일 후 마라에 도착을 합니다(23). 마라는 홍해에서 약 150 킬로 떨어진 곳입니다.

3일동안의 여정은 짧은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매우 지쳐있었고, 배고픔과 목마름에 있었습니다.

마라의 물은 마시기에 적당한 물이 아니었습니다. 홍해를 건너 춤을 추며 감사했던 것이 삼일전이었는데 금방  원망으로 바뀌었습니다(23-24).

우리는 이스라엘을 비판할수 없습니다. 만일 나도 이스라엘의 무리속에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것입니다. 믿음과 감사가 환경이 바뀌면 쉽게 불신과 원망으로 바뀔수 있는것이 죄성을 가진 인간의 생래적( 生來的)본성입니다.

감사한것은 하나님은 우리와 같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으시다면 이 세상은 존재할수 없을 것 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25).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면 그들을 돌보실것을 약속하셨습니다(26).

나에겐 하나님을 불신했던 상황이얼마나 있었는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경험이 있는줄 압니다.

신앙생활이란  내안에 공존하는  믿음과 불신의 싸움의 여정(旅程)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를 "선한싸움" 이라 했습니다(딤후4:7).

주님! 오늘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우도록 도우소서 - 아-멘-

2013년 4월 17일 수요일

다른 사람들과..

출15:1-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홍해를 건넌후 모세는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 들을 찬양 했고(1,4-8), 앞으로 행하실 일들을 위해 찬양을 드렸습니다(13-18).

본문의 촛점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보다 하나님이 어떤분이신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 용사" 라고 표현합니다(3).
그분은 높고 영화로우신분입니다(1).인격적이신 분입니다.

2절은 " 나의" 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은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고 나의 하나님, 내 아버지의 하나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기에 거룩한 힘이 생기고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을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힘으로 그들을 인도 하실것입니다(13).

하나님은 동일하십니다. 변하기 쉬운 것이 '나'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약1:17).
그분은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13:8)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것 처럼  동일하게 우리에게  행하십니다.

날마다 그분의 전능하심과 인자하심이 있습니다.
그분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내가 행하는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의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지나고 보면 아! 하나님의 도우심이 이렇게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변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그렇습니다.

모세가 찬양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아버지 이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속에 행하셨던 일들과, 하나님이 어떤분이심을  오늘 모세처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보지 않겠습니까?






2013년 4월 16일 화요일

홍해를 가르신

출14:19-3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는 시간은 밤이었습니다. 밤에 60만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칠흙같은 어두운 바다를 건너는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밤이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쪽은 환하게 하셨고, 애굽쪽은 구름과 흑암으로 이스라엘을 따라잡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9-20).

이어 동풍을 불어 바다를 갈라지게 하셨습니다(21). 갈라진 바다 바닥은 진흙덩어리였습니다. 25절이 암시해줍니다.

이스라엘이 바다를 건너는 동안 물은 양쪽으로 갈라져 벽을 이루었습니다(22).
이들은 바다 가운데를 지나면서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그곳을 건넜습니다. 무엇이던 삼킬것 같은 바닷물이 양쪽으로 갈라졌으니 얼마나 두렵고 충격적인 일이었겠습니까?

아이들은 뒤에 좇아오는 애굽군대와 양쪽으로 갈라진 바닷물을 보며 신기해하면서 숨죽이며 건넜을것입니다. 그 가운데 이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폭탄 테러가 일어나 3명이 사망을 하고 적어도 144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란에서는 7.5의 강진이 일어나 최소 40명이 사망했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안전한곳이 없습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이는 한 순간에 날아가버립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겸손하게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주님! 테러와 자연재해, 흉악한 사건들이 매일 일어나는 홍해와 같은 세상에서 오늘도 순종과 겸손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2013년 4월 15일 월요일

나를 위해

출14:1-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블레셋쪽으로 인도하지 않으시고(13:17) 남쪽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들은 홍해 바닷가 맞은편이 도착했습니다(2).

바로는 이스라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 갇혔다는 생각을 했고, 쉽게 다시 잡을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3-4).

바로의 군대가 다시 추격해오는 것을 본 이스라엘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10).
홍해바다와 애굽군대앞에서 두려워하는 백성들을 향해 모세는 " 가만히 서서 하나님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외쳤습니다(13).

이스라엘 처럼 홍해와 애굽군대가 추격해오는것 같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날마나 이런 저런 걱정속에는 사는 우리에게 모세를 통해 주시는 말씀은 동일합니다.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14).

하나님이 나를 위해 싸우십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힘차게 사십시오. 아-멘


2013년 4월 14일 일요일

나의 영혼아

시62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시편기자는 "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란다"는 말씀을 반복하고 있습니다(1-2,5-6)).
5절에서는 자신에게 강하게 다짐합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잠잠히 하나님만 바란다는 것은  어느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만 바라봄을 말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 외에 다른 것들은 생각하지 않겠다는 자세입니다.

다른것들을 바라보니까 걱정이 생기고, 갈등이 생깁니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는 영혼은 어느 상황에서 조용한 평안을 느낍니다.

시편기자는 구원과 영광, 힘의 반석과 피난처는 하나님께만 있는 것을 알기에(7)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신뢰의 대상이 못 되는 인간을 비교하고 있습니다(9)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공의를 확신하고 있습니다(11-12).
 이 믿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해야함을 역설(力說)할수 있게 하였습니다(8).

"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라"
오늘 나도 이런 다짐을 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샬롬!

2013년 4월 13일 토요일

인도하심

출13:17-2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진기한 장면이 나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자(Gaza)와 약속의 땅으로  이끌고 있었습니다(22). 갑자기 이 기둥들이 북동쪽이 아닌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앞서가고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열을 지으며 그 기둥들을 따라가고 있습니다(18). 요셉의 유골도 함께 가지고 갔습니다(19).

본문은 하나님이 방향을 바꾸셔서 다른길로 이끄신 이유를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17).

매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며 살지만, 블레셋을 두려워하는  이들의 한계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은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길로 인도 하셨습니다.

나의 삶도 때로는 평탄한 길, 때로는 험준한 길을 만나게 하십니다.
비록 험준한 길이지만  하나님은 내가 감당할수 있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감당치 못할것을 허락지 않으시고  피할길을 주시는(고전10:13) 하나님!
오늘도 그분을 믿고 인도함을  따라 삽니다. 아-멘

2013년 4월 12일 금요일

주님의 것

출13:1-1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무엇이든 첫 것은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결혼해서 첫 아이가 태어날때 그 기쁨과 소중함을 기억할것 입니다. 집에서 키우던 짐승이 첫 새끼를 낳았을때 느끼는 소중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처음 난 모든것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
레위기에 보면 처음 추수 수확도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23:10).

하나님은 애굽의 사람이던 짐승이던 처음 난 것들을 다 죽이심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애굽인들에게도 처음 난 생명은 매우 귀한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들의 생명을 대속하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가장 귀한 존재이셨던 그분의 아드님을 우리의 죄를 위해 대속하셨습니다(요3:16).

주님의 피로 나를  사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의 생명, 나의 시간, 나에게 속한 모든것이 하나님의 것 입니다.
사나 죽으나 나는 주의 것입니다(롬14:8).

주님!오늘 주님의 것으로 살겠습니다. -아-멘-

2013년 4월 11일 목요일

하나됨

출12:43-5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은 유월절 규례를 말씀하셨습니다(43).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날때 이스라엘이 아닌 사람들도 함께 나왔습니다(38).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자손입니다(창12:3). 이스라엘이 아닌 사람들도 이스라엘 사회의 중요한 일원이었지만, 이스라엘이 아닌 이유로 유월절 잔치에 참가할수 없었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할례를 받은 후에는 유월절 잔치에 참여 할수 있습니다(43,48).
이때 이들은 서로 하나가 될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할례는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48).
그러므로 주님의 피로 사시는 교회안에도  장벽이 있을수 없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지식인나, 무식한 사람이나 십자가안에서 하나입니다.
특히 목사만 제사장인것 처럼 평신도와 구분 짓는것, 이것은 하나가 아닌 둘로 나누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무식한 사람들이 소외를 당한다면 그것 역시 하나가 아닌 둘로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거스립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둘이 아닌 하나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안에는 이런 요소는 없습니까?

2013년 4월 10일 수요일

오늘도 기억하며

출12:31-4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은  밤 중에 애굽의 장자들이  죽는 재앙을 내리셨습니다(29). 그날 밤은 애굽사람들에게는 악몽 같은 밤이었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강팍했던 바로는 완전히 항복을 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으로 자신들을 떠나줄것을 요청합니다(31).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 번 유월절 밤에 애굽을 급히 떠나야 했습니다. 발교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어깨에 메고(34), 공황상태에 빠진 애굽 사람들이 준 은, 금 패물과(35-36), 많은 생축들을 이끌고 (38), 좇겨나듯이 급히 그곳을 떠나게 됩니다.

그동안 노예처럼 애굽 사람들을 위해 일한것은 결코 공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 대한 댓가를 받도록 하셨습니다. 세상에 댓가 없는 수고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밤을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떠난 그 밤을 대대로 기억하며 지키라고 하셨습니다(42).

걱정과 근심은 나의 삶속에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잊어버릴때 생깁니다.
그러나 과거에 받은 은혜를 기억할수록  믿음이 생깁니다.

주님! 주님이 베푸신 은혜를 오늘도  기억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2013년 4월 9일 화요일

기념하라

출12:14-3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손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하신 기념하는 날로 정하셨습니다(14).

유월절에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른 이스라엘 집의 장자는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그 피를 보고 하나님은 그 집에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이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해줍니다(고전5:7).

단지 하나님의 명령대로 피를 발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집에 재앙이 임하지 않은것 처럼, 단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하나만으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피를 바른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유월절 이후 7일동안 누룩이 없는 빵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셨습니다(15).

사도바울은 누룩은 죄를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고전5:7). 누룩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어린양의 피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답게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러면 성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으로 부터 오염되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종교다원주의, 물질만능주의, 도덕적 상대주의, 개인주의등 반 기독교적 세상으로 부터 오염되지 않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두 가지 책임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 오염되지 않는 삶입니다. 무교병을 먹는것은 바로 이런 예표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유월절을 기념하고(14), 무교절을 기념하라고 했습니다(17).
이것은 주님이 제정하신 성찬을 예표해줍니다.

주님의 살을 상징하는 빵을 떼고, 주님의 피를 상징하는 잔을 마시며 기념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우리는 남의 죄는 잘 기억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잘 잊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남의 죄를 기억하며 정죄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내게 베푸신 삶을  기억하며 감사가 넘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아-멘-

2013년 4월 8일 월요일

이 길을

출12:1-1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 달로 그들의 월력의 첫 달이 됩니다.
유월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그렇게 드라마틱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 달 10일에 어린양을 선택을 합니다(3)

그리고 4일이 지난 후 14일째 자신들이 선택한 어린양을 잡습니다(6). 그 잡은 양의 피를 집 문틀 옆과 위에 바릅니다(7)

이들이 먹을 음식은 여행길을 위해 먹을 음식이고(9), 금방 길을 떠날 사람 처럼 옷을 입고 서둘로 먹어야 합니다(11).

이렇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쉽고 편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을 떠나 순례의 길을 가는 자들이 감수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비록 노예 생활이었지만, 익숙했던 곳을 떠나는 두려움, 아무 정보도 없이 애굽을 떠나 무작정 간다는 것은 그들에게 편안한 감정이 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을것이고 생각지 못한 일들도 많이 있을 것 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스라엘 백성들 처럼 순례의 길을 가는 삶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것 들이 도처에 있습니다.

하지만 출애굽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여정이었습니다.
우리의 순례의 길도 우리만이 가는 길이 아닌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함께 가시는 길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이 길을 잘 가고 있습니까? 주변에 우리가 신앙적으로 용기를 주어 순례의 길을 잘 가도록 도와야 할 형제 자매는 없습니까?

2013년 4월 7일 일요일

경건의 시간에

시61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한주간 동안 주님의 고난과 부활하심을 묵상하였습니다. 그리고 본 시편 말씀을 읽으니까 더 마음에 와 닿습니다.

시편기자는 자신의 부르짖음을 들어달라는 기도로 본문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는 과거 하나님이 자신의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을 알고(5), 자신의 부르짖음을 들어달라는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1).

특히 그의 마음의 상태는 심리적으로 매우 약한 상태에 있습니다(2). 근심 걱정 때문에 마음이 약해지면 기도할 마음조차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큰 시간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 나보다 높은 바위"(2),견고한 망대임(3)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원히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 머물기를 갈망합니다(4).
또한 적극적으로 그의 간구를 아뢰고 있습니다(6-7).

본문은 우리에게 여러가지를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때에 우리의 소리를 들으심을 믿으며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기도에 늘 귀를 기울이십니다.

우리가 예배드릴때 하나님이 어떤분임을 앎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감사 드릴때에 하나님이 과거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생가하며 감사드립니다.

매일의 삶속에서 나타나는 힘들고,어려운일들에 대해 주님의 도우심을 체험하며 감사드립니다.

기도를 들으신다는 믿음, 예배, 감사, 간구 오늘 아침 경건에 시간에 빠질수 없는 요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2013년 4월 6일 토요일

너는 나를 따르라

요21:20-2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으로 부터 새로운 소명을 받은 베드로는 금방 다른 사람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궁금했습니다.

그는  사랑하시는 제자(20,요한)에게는 앞으로 무슨일이 일어날것인지를 주님께 물었습니다(21).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단순했습니다 "그를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 였습니다(22).

우리는 다른 사람과 쉽게 비교하며  자기의 상황에 대한 위안을 찾을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주님과 비교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자 입니다. 그분을 닮기를 원하며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그분이 인도하시는 삶을 살기를 원하며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제자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에게 포커스를 맟추고 사는 자 입니다.
교회가 교회끼리 비교하고, 저분은 저렇게 굉장하게 사역을 하는데 나는 이정도 밖에 일을 못하는가? 이런 남과 비교 의식이 은근히 교회안에도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얼마나 큰 교회를 하고, 얼마나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는 소위 성공한 목회자(?)가 아닌 나에게 게 맡기신 사명을 얼마나 신실하게 감당하는냐? 얼마나 착하고 충성된 종인가? 에 있습니다.

각자 부르심의 모양과 상급이 다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를 상관하지 말고 "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이 음성이 우리에게도 들리지 않습니까?

2013년 4월 5일 금요일

주님을 사랑한다면

요21:15-1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후 주님은 갑자기 베드로에게 세번에 걸쳐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 했던 것 처럼 주님도 세 번에 걸쳐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주님의 처음 두 번의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에서 주님은 아가페(Agape)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으로 부터 온 희생적 사랑입니다(15-16).

그러나 이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두 번 역시 필레오(Phileo) 사랑으로 대답합니다.

흥미로운것은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큰 소리 쳤던 베드로가(13:37) 아가페 사랑으로 대답하기를 주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또다시 실패할까 봐 두려워서 그랬던것입니다.

베드로의 응답에 주님은   " 내 어린양을 먹이라 ,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고 하셨습니다.

다른말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다른이들을  돌보고 섬김을 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말이 필요없이 오늘 다른 사람을 돌보고 섬겨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이 맡기신 양들을 주님처럼 사랑하고 주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목회도 출발하지 않을까요?

2013년 4월 4일 목요일

베드로 스타일

요21:1-1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옛 직업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결심을 합니다(3).
그와 함께 가겠다고하는 따라나선  다른 제자들 6명과 함께 디베랴 호수에서 고기를 잡습니다..

본문의 고기잡는 모습은 베드로가 첫 번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을때의 상황과 비슷합니다(눅5:1-11).

이 두 이야기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물을 던져야 할 곳을 가르쳐 주셨고, 주님이 가르치신곳에 그물을 던지자 많은 고기를 잡을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이야기에서 베드로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눅5장에서는 주님앞에서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눅5:8)라고 하였지만, 본문에서는 주님을 향해 물로 뛰어 들었습니다(7). 역시 베드로 다운 행동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던일로 늘 죄책감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마음이 불편해 피하고 싶을텐데  본문에 베드로는 주님을 보고 너무 반가워 물로 뛰어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주님이 자신을  용서 하셨음을 알았습니다.
또한 베드로가 주님을 향해 물로 뛰어든 순간 자유함을 느꼈을 것 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들과 떡과 생선을 함께 드셨습니다(12-13).
한편의 아름다운 서정적인 그림을 보는 것 같습니다.

본문을 보면서 오늘 '베드로의 스타일'로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2013년 4월 3일 수요일

보지않고 믿는 자

요20:24-3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도마는 매우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합리적이지 않을때 그는 매우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하자 그는 자신이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25).

도마의 상식으로는 죽은 사람이 다시 부활한다는 것은 납득이 않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드레가 지난 후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던  도마가 있는곳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몸을 도마에게 확인시키셨습니다.

결국 도마는 "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며 신앙고백을 합니다(28).
전에는 주님을 단순히 선생님으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시라는 확실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흥미로운것은 도마의 경배에 주님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29).

이 말씀은 도마에게만 아닌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여지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여지는 것만 믿는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것이 더 많고, 그 보다 한 차원 놓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것을 보이는것 처럼 믿는 것입니다.
 믿으니까  보여지는 것입니다.믿음은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인간의 논리로 설명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히11:1).

주님을 직접 본적은 없지만 믿음으로 주님을 보고, 찬양하고 경배할수 있는 믿음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아-멘-

2013년 4월 2일 화요일

평강과 기쁨

요20:19-2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 22절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많습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행동은 사도행전2장의 성령강림의 상징적인 행동이라고 보는 것이 옳은 견해입니다. 또한 성령님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심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요, 주님께서 내뿜으신 숨기운 때문에 성령님이 오신것이 아니라 주님이 약속하신 말씀때문에 오신것 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는
창2:7에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때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창조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요6:63).

성령님은 영적 생명을 주시고 죄로 인해 죽은 영혼을 살리십니다(엡2:1).

또한 주님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을 두 번 반복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기쁨으로 반응을 하였습니다(20). 이순간 주님은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열매인 기쁨과 평강이(갈5:22) 제자들이 모인곳에 충만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비빌리에 만나 그것도 문을 꼭 잠그고 있던 그곳에(19)에 부활하신 주님은 친히 나타나셔서 자신을 보이시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고, 평강과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처음 제자들에게만 그렇게 행하신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평강과 기쁨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이미 이런 축복을 주셨는데 우리는 매일 주님이 주신 이 축복을 충만히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까?

오늘 주님의 평강과 기쁨을 충만히 경험하시는 하루가 되기길....

2013년 4월 1일 월요일

임재하심

요20:11-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무덤에 머물러 있던 막달라 마리아는 울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무덤앞에 놓여 있던 돌이 옮겨졌고, 시신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시신이 도난당한줄 안 마리아는 어찌할바를 모른채 울고 있었습니다(11).

곧 이어 마리아는 한 남자를 만났는데 부활하신 주님인줄 모르고 동산지기인줄 알았습니다(14-15).

그녀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학자들을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이 다른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눅24:13-35).

아니면 마리아가 주님의 부활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아뭏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난 목격자였습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습니다(10).

우리의 삶속에 늘  임재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깨닫지 못하며 바쁘게 살아갈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이 세상 끝날때까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마28:20),
 주님의 함께 하심을 잊고  살아갈때가 많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 마리아야" 하며 다정다감하게 부르셨던 것 처럼
오늘도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까?

주님! 항상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의 임재함을 더욱 풍성하게 경험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