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31일 목요일

탄식하며

사64:1-1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의 중보기도의 내용입니다.
 이사야는 자기 민족을 구원하시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임하실때 산들이 흔들리고 민족들이 그분 앞에서 떨게 된다고 그는 말합니다(1-3).

하나님이 임하심은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들을 위함입니다(4).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지만 하나님을 앙망하기에 참을수 있습니다.
힘든 가운데도 그분을 늘 바라봅니다.

이사야는 자기 민족의 죄악을 인해 탄식합니다(6-7).
그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지해 기도하고 있습니다(8-12).

하나님!너무 분노하지 마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 사실을 보아달라고!

그러면서 왜 아직 우리에게 잠잠하시는지
우리가 당하는 괴로움을 왜 그냥 나두시지는지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기도는 탄식의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탄식하며 그분에게 나아와 부르짖는 자에게 임하십니다.

주님께서도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잔 자들에게 내게로 오라" 하셨습니다(마11:28)




2013년 10월 29일 화요일

성령의 기름부으심

사61:1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의 성령님이 이사야에게 기름 붓듯이 임하셨습니다(1).
기름은 상처를 완하 시키고, 치료하기도 하고 기계가 잘돌아가도록 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아야  세상을 이길수 있습니다.
교회사역도 기름부으심이 있어야 열매가 있습니다.

기름부으심이 없이 하는 사역은 열심히 하기는 하나 헛돌다가 탈진해버리고 맙니다.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의 목적은 무엇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치유하기 위함입니다.
압제당하고 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기 위함입니다.

주변에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들이 많습니다.
뭔가 모르게 눌려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영혼을 구하고,
그들의 심령을 치유케하고
그들에게 참된 자유함을 주기 위해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이 필요합니다.
오늘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을 사모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느니라"(고후3:1`7)





2013년 10월 28일 월요일

회복케 하시는

사60:1-1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벨론은 두렵고 포악한 나라였습니다.
하바국 선지자는 바벨론에 대해서 " 사납고 성급한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들의 힘을 자신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합1:6,11).

얼마나 사납고 교만하고 오만한 사람들이었는지 짐작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징계 하셨으니 당시 그들의 고통이 어떠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베론의 침략에 대해 " 어둠이 땅을 덮고 캄캄한 만민을 가린다"고 표현 했습니다(2). 어두움이 세상을 지배하고  포악하고 악한 사람들의 세상 같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다스리시고 지배하시는 분은 바벨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의 막대기인 도구에 불과합니다.

오늘 세상에도 세계의 열강들이 그들의 힘을 과시해도  우스운 일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캄캄한 암흑속에 살고 있다고 느끼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소망의 소식을 말씀합니다.

빛이 임할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것입니다(1).

오랫동안 잊혀진것 같은 시온에서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경륜과 역사가 일어날것입니다.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앞으로 오게 될것입니다(5-7).

이스라엘의 고통이  은총과 축복으로 바뀔것입니다(10)

예루살렘을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감상이 아닌 은혜로 인함입니다(10).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분의 시간에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계21:5).






2013년 10월 25일 금요일

하나님의 것

고전3:1-2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신앙적으로 어린아이와 같다고 단언합니다(1).
고린도 교회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질투로 분쟁이 있었습니다(3).

바울을 따르는 이들이 있었고 아볼로를 따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더 위대하다고 하는 사람들, 아볼로가 더 낫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있었습니다(4).

아볼로는 아볼로대로 바울은 바울대로 각자 주신 사명과 은사대로 사역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의 씨를 심은자라면 아볼로는 물을 준자입니다.
그러나 결국 신앙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5-7).

사람이 믿음을 줄수 없고, 사람이 믿음을 자라게 할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만이 주십니다.

교회가  경쟁을 하고 목회자들을 서로 비교한다면 고린도 교회와 다를바 없습니다.
교회가 유명해지고 목사가 유명해지고 자랑을 한다면 바울이 말한대로 어린아이와 같은 교회입니다.

각자 주신 은사대로 사명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터위에(11).
터를  잘 닦고, 조심스럽게 세워가는 것이(10) 사역자가 할 일이요,

그에 대한 상급은 훗날 하나님앞에서 나타날것입니다(12-15).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모든 사역자들은 성도들을 위해 존재합니다(22).
그리고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23).

결론은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2013년 10월 24일 목요일

성령이 주시는 것

고전2:6-1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육의 사람은 육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육신의 감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들을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성령이 주시는 깨달음으로 삽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게 하시기 때문입니다(10)
영적인 분별과 통찰력을 주십니다(14).

영의 일은 육으로는 알수 없습니다.
도리어 어리석어 보입니다(행2:13,14).

영적인 것은 영으로만이 알수 있습니다(13).

세상이 악합니다.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별이 잘 되지 않는 세상입니다.

육신에 사람은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과 이 세상을 다스리심과,
주님이 다시오심을 알고 시대를 분별하며 살아갑니다.

이 깊은 통찰력은 오직 성령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2013년 10월 23일 수요일

십자가

고전1:18-2: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 말씀합니다.
십자가를 통한 구원은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입니다(18).

유대인들은 항상 기적을 구했습니다. 헬라인들은 항상 지혜를 찾았습니다(22).
사람들이 찾는 것은 항상 동일입니다. 모양은 다른것 같지만 내용은 항상 같습니다.
기적과 지혜를 찾는 인간의 눈에는 수치와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는 참으로 어리석어 보일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언제나 동일하십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십니다(24;2:2).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우리의 '의' '거룩함' '구원'이십니다(30)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의로워지고 거룩해지고 구원을 받는  세가지가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바울은 단순했습니다.
십자가만 전했습니다(2:2),
성령님만 의지했습니다(2:4)

세상엔 지혜로운 자가 많고 지식이 있는 자가 많지만 주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만을 전하면 됩니다.

그러면 구원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이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이 세상 어떤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이 세상 어떤 존재보다 강하시기 때문입니다(28).

십자가를 묵상하고 십자가의 복음속에 사는 자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속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2013년 10월 22일 화요일

우리의 모든 중심은

고저1:10-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내부적으로 분열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지도자들을 존경한 일은 좋은 일있었지만  이것이 지나쳐 파당이 생겼습니다(12).

이일은 바울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같은 마음으로 서로 합하라고 강력히 권명합니다(10)

 바울은 사람들이 자신을 너무 위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14-15).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것 외에는 아무것도 한것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17).
복음을 전할때도 화려한 언변으로 전하지 않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17).

인간의 지혜와 화려한 언변을 앞세우다 보면 십자가의 복음보다 그것이 더 중심이 될수 있기때문입니다. 그것을 경계하였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오직 복음만을 생각하는 바울의 자세는 큰 본을 보여줍니다.

베드로, 바울, 아볼로, 루터, 칼빈 위대한 영적지도들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와 차별이 없는 한 형제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중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2013년 10월 18일 금요일

피할길을 주시는

삼상29:1-1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투가 임박했습니다(1). 다윗도 어쩔수 없이 그의 부하들과 이스라엘과 전투대열에 서게 되었습니다(2).

막상 전투가 일어나면 다윗이 이스라엘을 상대로 싸워야 하겠습니까?
 다윗은 상당히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아기스는  다윗을 상당히 신뢰했습니다. 그에게 망명처를 제공해던 은인이기도 합니다(3).
다윗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왕의 생각과 신하들의 생각이 달랐습니다(4).
신하들은 여전히 다윗을 의심의 눈으로 보았고 그를 전쟁에 못나오도록 왕에게 건의를 했습니다(4).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 아기스왕은 결국 다윗을 전쟁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6-11)

다윗의 고민이 한순간에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었습니다.

삶을 살다보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만날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할길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2013년 10월 17일 목요일

절망하는 사람

삼상28:1-2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절망의 시간에 절망하는 한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는 사울왕입니다.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략해왔습니다(1,4).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였던 사무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3).
사무엘이 살아 있었을 때는 그나마 뭔가 모르는 위안이 있었지만 이젠 그것 마져 사라졌습니다.

블레셋 군대를 직면한 사울은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침묵하셨습니다(6).

하나님의 침묵은 그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더 큰불안에 빠지게 했습니다.
결국 자신이 몰아낸 무당을 찾아갑니다(3,6).

엔돌에 사는  신접한 여인은 죽은 사무엘을 불러올렸습니다(13-14).
이해가 잘안되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죽은 사무엘의 영을 통해 하나님은 사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전쟁에 패할것이고 죽음을 당할것이라는 말씀입니다(19).

그러면 하나님이 왜 이런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사울에게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죽은자들과 산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 물질세계나 영의 세계 모든것이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사탄도 하나님이 도구로 사용하실수 있습니다.

사울은 이 말을 듣고 절망합니다. 하나님을 떠난자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겐 하나님은  도움이시요 방패가 되십니다(시115:11).

2013년 10월 16일 수요일

하나님의...

삼상27:1-1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신뢰할수가 없었습니다.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피신했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21:10).

첫 번째는 혼자의 몸으로 갔었지만 이번에는 600명의 부하들과 함께 갔습니다.

그러면 왜 다윗이 아기스에게 갔습니까?
믿음이 약해져서 그런것입니까?
블레셋땅으로 피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보호해 주시지 않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사울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셨듯이 블레셋 사람들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시리라는 믿음이 있어서 입니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다윗이 기도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1).

그가 블레셋땅으로 피한것은 하나님께 기도해서 움직인것이 아닌 그의 생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순간적으로 약해졌음이 분명합니다.

믿음의 사람도 순간적으로 약해져 인간적인 수단에 의지할때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앞에 정당화 될수 없습니다. 그에 대한 댓가를 하나님이 치루게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분의 선택하신 사람에게 떠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잘못된 동기로 행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가운데도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시23:6)라고 고백한 것 같습니다.

오늘도 나의 삶속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는줄 믿습니다.

2013년 10월 15일 화요일

결국은..

삼상26:17-2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고 대신 그의 창을 가져갔습니다(22).
창은 사울의 권력을 상징합니다.

사울은 이 창으로 다윗을 죽일려고 했습니다(18:11;19:10).

사울이 다윗을 죽일려고 좇아다녔지만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속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25)

다윗이 왕이 되어야함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으신자를 자신의 손으로 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맡겼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사는 사람은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모든것을 맡깁니다.

모든 시간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결국은 의가 승리합니다. 이것을 다윗을 통해 볼수 있습니다.

" ...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2013년 10월 14일 월요일

하나님의 시간

삼상26:1-2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일수 있는 두 번째의 기회를 맞이했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 두번의 기회를 주심으로 다윗을 시험(Test)하시는지 모릅니다.

첫 번째의 경우는 사울이 다윗이 숨어 있는 동굴에 들어와서 쉬고 있었을 때 입니다(삼상24).
본문은 사울이 다윗을 잡을려고 광야로 들어온 경우입니다.

다윗은 그들을 먼저 공격함으로 제압할수 있었습니다(6-8).
첫 번경우와 달리 이번에는 마음이 흔들리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이 행하시기게끔 계속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부하의 말(8)을 따르지 않았습니다(9).
오직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렸습니다(10).

하나님의 방법의 순종하기 위해서는 댓가를 계속 치루어야 합니다.
 위험과 도피생활을 계속해야 하는 힘든 생활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역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고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나에게도 역시 그것을 보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하나님의 시간)가 이르면 거두게 하실것입니다(갈6:9).

2013년 10월 11일 금요일

오늘도

요17:6-1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사도들을 위해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특히 주님은 자신의 기도가 세상을 위한 기도가 아님을 강조하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사도들 혹은 내게 주신자(택한자)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9).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해야하지만(행1:8),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님에게 주신자(택한자)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세상에서 보호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11).
주님의 기도처럼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은 성도들의 삶에 향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키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11).
이단이 아닌 이상 교회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인이 하나가 되는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바울도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빌2:2).

또한 이들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16).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어서 세상에서 이들을 데려 가달라고 하시지 않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그들의 삶속에서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삶을 살도록 기도하셨습니다(17-19).

이천년전 주님의 기도는  여전히 오늘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셔서(골3:1, 히1:3,히10:12),
  우리를 위해 여전히 중보기도 하시고 계십니다(히7:25).

주님의 중보기도가 있기에 오늘도 그분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2013년 10월 10일 목요일

하나님의 자녀는

요17:1-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기도가 기록된 장입니다.
주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기도하셨습니다(1). 아무 꺼리낌 없이 기도하시는 모습입니다.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하고 기도했지만(눅18:13) 주님은 거침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으로서 기도하시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기도하시면서 자신이 십자가에 죽을 때를 아셨습니다(1).
주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창세전에 이미 예정된 사건입니다.

그것을 위해 세상에 오셨고, 그때가 이르렀음을 아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심을 아셨습니다.

인간의 눈에 십자가는 수치스럽고,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은 십자가외에는 자랑할것이 없다고 했습니다(갈6:14)

주님은 영생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영생은 참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3).

참되신 하나님을 아는 길은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14:6).
그리스도만이 중보자이십니다(딤전2:5)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모시는 삶을 살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삶이 영생입니다. 우리가 죽어 들어갈 천국에서는 영원히 하나님을 모시는 삶을 사는 곳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삶의 촛점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성을 엿볼수 있습니다.
성자하나님은 성부하나님을 높이시고, 성부하나님은 성자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고,
성령 하나님은 성자하나님을 증거하시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본받아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빌2:3)
존경하기를 먼저해야합니다(롬12:10)


2013년 10월 9일 수요일

같은 말씀을

요16:25-3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오셨고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28-30).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셔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적절한 시기임을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온 것임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27).

깊은 진리의 말씀이라도 듣는 사람이 수용 능력이 있을때 해야 합니다.
때에 맞는 말을 해야합니다(잠25:11).

주님은 잠시 후 자신이 받으실 고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잡히시면 제자들은 패닉 상태에 빠지겠고,  각기 제살길을 찾아 도망갈것이라고 하셨습니다(32).

3년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주님을 따랐던 그들이었지만 막상 위험한 일을 당하면 도망을 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나 불변하십니다.
그들은 다 도망가지만 아버지는 주님과 여전히 함께 계심을 말씀하셨습니다(32).

그럼에도 주님은 제자들을 격려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이해할수 없는 힘든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셨던 같은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도 주십니다.

"..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

2013년 10월 8일 화요일

주님의 이름으로

요16:16-2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제자들을 떠나신다는 주님의 말씀에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고,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16).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에겐 더욱 이해가 될리가 없습니다(17).

이 말씀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하심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승천하심으로 육의 눈으로는 더이상 주님을 볼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가심으로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영의 눈을 열게 하셔서 영의 눈으로 주님을 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영의 눈으로 매일 보면서 살아갑니다.
영으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주님이 조금 있으면 이라고 하셨습니다.
짧은 시간을 말합니다.

사람의 생각에는 긴 시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잠간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것도 잠간입니다(약4:14).
잠간 후면 주님을 만날 시간이 옵니다.
그때 기쁨이 충만할것입니다. 그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을것입니다(22).

그리고 무엇이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하면 하나님아버지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23). 기도응답의 기쁨은 비길데 없이 큽니다(24)

오늘도 주님의 약속하신바를 믿고 전능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아버지앞에 나아갑니다.

2013년 10월 7일 월요일

성령님

요16:5-1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아버지께 돌아가실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5).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감히 물어보지 못하고 근심에 쌓였습니다(6).

이것을 아신 주님은 제자들을 위로하십니다. 그러면서 또 한 분을 소개하십니다.
그분은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주님은 성령님이 오셔서 하실 일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성령님은 책망하시는 일을 하십니다(8).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면 뭔가 마음에 불편함을 주십니다.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책망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13).
말씀을 읽고 묵상할때 나의 심령에 말씀을 조명해주십니다.
성경은 머리로 읽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심령으로 읽는 책입니다.
성령님이 조명해주시지 아니하시면 성경을 수없이 많이 읽어도  알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세상의 다른 책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딤후3:16).

또한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냅니다(14).
그리스도가 아닌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가 아무리 훌륭하게 보여도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성령님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드러내십니다.


2013년 10월 5일 토요일

진심으로

요15:18-16: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박해를 받는 것을 좋아 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박해가 임할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했습니다(18).

주님을 따르면 뭔가 큰 이익을 보겠지. 세상적으로 출세를 하겠지 생각했다면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실제 야고보와 요한이 그런 생각을 가졌습니다(막10:35-37).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것은 미움을 받는 길입니다.
세상과 그리스도는 정반대기이기 때문입니다(요7:7).

주님은 빛이시지만 세상은 어두움입니다(요8:12).
어두움은 빛을 미워합니다. 불의함은 의로움을 적대시 합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불의한  유대인들에게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둘다 같지않았기 때문입니다.

참 선지자(이사야, 예레미야등)들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고난을 당했습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적당히 믿으면 미움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19).
하지만 주님이 경고 하신 것 처럼 진실로 주님을 따르면 박해를 받습니다(16:1-4).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진실로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주님이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때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막8:38;눅9:26).

신자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2013년 10월 3일 목요일

열매

요15: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참 빛(요1:9), 생명의 떡(요6:35,48), 살아있는 떡(요6:51),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요6:69),길과 진리, 생명(요14:6) 그리고 본문에서는 참 포도나무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했습니다(시80:8).
그러나 이 포도나무는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참포도나무라고 하셨습니다(1)

포도나무에는 가지들이 있습니다. 가지들 가운데 열매를 맺는 가지고 있고 맺지 못하는 가지가 있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농부(하나님)가 제거해버립니다(2).
주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주님에게 붙어있지 않는 외식하는 사람들이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입니다.

열매를 맺는 참된 성도가 있습니다.
이들은 진실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가지 스스로 열매를 맺을수 없다고 하셨습니다(4)
죄성이 있는 인간은 늘 생각을 해도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생각만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롬8:7-8).

그러므로 주님안에 거할때에, 주님에게 붙어 있을때에(5-6)만이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는 성령의 은혜로 맺어지는 신앙 인격의 열매요(갈5:22-23),
다른 영혼을 주님앞으로 인도하는 열매입니다(잠11:30).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는 것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삶속에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분은 농부이시기 때문입니다(1)

농부가 바라는 것은 열매입니다.

2013년 10월 1일 화요일

천국의 길

요14:1-1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나그네와 행인에게는 머물곳이 필요합니다. 안식할 곳이 필요합니다.
베드로는 우리를 '나그네와 행인" 같다고 말씀했습니다(벧전2:11).

이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닙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갈 집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우리가 갈집이 하늘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집은 주님이 친히 우리를 위해 준비하셨다고 하셨습니다(2-3).

그 집에서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을 것입니다(3).
하나님께서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보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시116:15).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짐이 더 좋다고 했습니다(빌1:23).
그집에서 영원히 안식할 것입니다(계14:13).

그 집으로 가는 길이 바로 주님이시라고 하셨습니다(6).

천국의 길이시고, 진리가 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찬양합니다(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