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4일 화요일

하나님의 사랑

렘31:27-4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의미는 그의 백성들을 새롭게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그의 백성들과 새 언약을 맺으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31)

언약은 관계의 변화를 말합니다.
전에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졌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빈약했지만

하나님과 맺은 새언약은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케 됨을 말합니다(34)

그러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악한 사람들을 축복하십니까?(34)
어떻게 완전하신 하나님이 불완전한 사람들을 받으실수 있을까요?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의 사랑은 영구 불변하십니다.
"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2014년 11월 1일 토요일

지극히 작은 자에게

마25:31-4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심판날 양과 염소를 가르신다고 하셨습니다(31-34)
양과 염소를 가르는 방법중 하나는 형제중 지극하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40)

 지극힌 작은 자는 누구를 말합니까?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말합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제자들(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필요한 사람들을 말합니까?

그러면 왜 그들을 대하는 자세가 하나님에게 중요합니까?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세상
자아중심의 세상에서

우리가  형제들을 향한 사랑과 헌신 긍휼함 그자체가 바로 예배입니다.

25장 다음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통해 그분의 사랑과 헌신 긍휼함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름은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남을 대접해야 천국에 들어가는 행위 구원을 말씀하시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형제를 향한 사랑과 헌신 긍휼함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표현 하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입니다.

2014년 10월 31일 금요일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마25:14-3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달란트의 비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외국에 가면서 자신의 소유를 종들에게 맡겼습니다.
각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다섯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그것으로 열심히 장사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겼고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두 달란트를 남겼고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그것을 그냥 묵혀 두었습니다

본문의 의미는 명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셈할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기회는 현재의 시간입니다.

주님이 주신 것으로 열심을 품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착하고 충성된 종입니다(21,23)

충성된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주님은 충성된 사람을 착한 사람과 동일하게 보셨습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를 받고 그대로 묵혀 둔 사람은 악하고 게으른 사람입니다(26).
악하고 게으른 것은 동일합니다(25).

게으름은 모든 죄의 온상입니다.

그리고 가만히 있으면 퇴보하고 결국 있는 것 까지 빼앗기지만(28)
부지런하고 충성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더욱 풍족하게 주시고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2014년 10월 24일 금요일

종말의 시대

마24:3-1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마24장은 주님이 종말에 일어날 일에 대해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주님은 4-5절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종말에 시대에는 자칭 그리스도라는 자들과 잘못된 복음을 가르치는 자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9-13절에는 박해가 올것인데 그박해앞에서 견고하게 서라고 하셨습니다
서구나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실감하지 못하지만
이슬람권, 불교권, 흰두교권에 신앙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최고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나라는 한반도 북쪽인 북한입니다.
그리고 시리아와 이라크 소말리아 등등입니다.
이들은 마음대로 하나님을 예배할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14절에서는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질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복음의 불모지에서 신실한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한다도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말세의 징조는 현재에 일어나기도 하고 있고
앞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박해앞에서 믿음으로 견고하게 서는 것, 거짓선지자들을 주의하는 것, 복음전도에 힘쓰는 것은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가장 올바른 태도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살겠습니다

2014년 10월 17일 금요일

먼저

왕상9:1-1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솔로몬은 성전과 왕궁 건축에 큰 도움을 준 히람에게 마음에 빚을 지었습니다(10-13)
그댓가로 히람에게 성읍 20개를 주었습니다(11).

하지만 왠지 히람은 그 성읍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다시 솔로몬에게 반환했습니다(대하8:2).
도리어 금120달란트를 솔로몬에게 보냈습니다(14).
이해타산을 철저하게 따지는 국가간에 일어난 이상한(?)일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대로 그가 평강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대상22:9).
평강의 사람이 되면 원수도 없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하지만 솔로몬은 이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을 그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 보다
많은 건축물들을 지어 자신의 위용을 나타낼려고 했습니다(19).

나에게는 하나님보다 나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유혹은 없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다시 새겨봅니다.
"..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2014년 10월 15일 수요일

우리 가운데 계시는

왕상8:22-3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마친 후 그의 백성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한곳에 제한적으로 계시는 분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성전을 건축했다는 것입니다(27).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굳이 하나님이 계신 곳을 표시한다면 하늘에 계심을 말하고 있습니다(30).

솔로몬 이후 여러세대가 지난후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솔로몬의 기도를 읽고 큰 위안을 가졌을 것입니다.

성전은 폐허가 되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시기에
그곳에서 기도하면서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의 기도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용서하실 준비가 되신 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30).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들이 당하는 고난이 끝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포로생활이던지 아니면 본국으로 귀환을 하던디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 계신곳은 언제나 어디서나 소망이 넘쳐납니다.

오늘도 항상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014년 10월 13일 월요일

하나님의 섭리

왕상5:1-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지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의 통치를 강화 시켜주셨습니다(삼하7:11).

성전은 다윗이 아닌 그의 아들의 몫이었습니다(삼하7:12-13).
솔로몬은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큰 프로젝트를 세웠습니다(13-18).

그리고 이웃나라 두로의 왕인 히람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히람은  즐거이 돕기로 하고 레바논의 백향목을 공급하기로  했습니다.
히람은 백향목과 노동력을 제공하고
솔로몬은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지불했습니다(11).

두 나라와 두 사람 사이는 매우 친밀한 관계를 이루었습니다.
나라와 나라사이의 평화
인간간의 화평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합니다.

히람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아니었지만
이두사람은 파트너십이 되어 성전 건축이라는 위대한 일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합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일은 없습니까?

2014년 10월 10일 금요일

감사

추수감사절입니다(캐나다).
은혜와 감사라는 단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입니다.
은혜가 있기에 감사하고 감사하기에 더욱 은혜가 임합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은
나를 더욱 풍성하게 해줍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감사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100:4).

Happy Thanksgiving!!

2014년 10월 8일 수요일

솔로몬의 안목으로..

왕상2:1-1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임종을 맞이하는 다윗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평안한 가운데 죽음을 맞이합니다.
누그나 예외없이 죽음을 맞이하지만 평화롭게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은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시116:15).

그는 죽기전에 아들 솔로몬에게 몇가지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강한 대장부가 되라고 했습니다(2).
나약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길로 행할 것을 강력하게 조언하고 있습니다(3)
이것만큼 왕으로서 한 개인으로서 큰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해줄수 있는 최고의 조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라는 것일겁니다.

그리고 요압과 시므이를 처리함을  솔로몬의 지혜에 맡겼습니다(6,9)
이들은 믿을수 없는 사람들있고, 이들을 처리함으로 솔로몬의 왕권이 더욱 안정됨을 다윗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아버지로서 마지막 책임을 다하였습니다.

오늘도 솔로몬의 안목을 가지고
모든일에 조급하거나 어리석지 않고
지혜롭게 행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2014년 10월 6일 월요일

지도자가 되려면

왕상1:1-2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위대한 신앙인이었던 다윗은 생애의 마지막 시간을 맞이 했습니다.
늙고 쇠약하다보니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려는 계획을 알수가 없었습니다(5).
다윗은 이미 밧세바의 아들인 솔로몬에게 왕위를 계승할 것을 약속한바가 있습니다(13).
그러나 아도니야는 동생에게 왕위가 계승되기전 먼저 선수를 쳤습니다(5)

열왕기기자는 이 사건이 다윗이 늙고 쇠약해진틈에 나타난 권력의 레임덕 현상이기 보다는  아들  아도니야를 잘못 교육을 시겼기 때문에 비롯된 것임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6).

아마 다윗은 압살롬을 잃은 슬픔때문에 아도니야에게 그렇게 대했는지 모릅니다.

아도니야는 매우 미남이었고(6)
형압살롬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습니다(삼하15-19).
이것만 보아도 그는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겸손은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중 하나입니다.

겸손하기가 힘들지만  겸손할수 있기에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2014년 10월 3일 금요일

평강과 기쁨

빌4:1-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랑이 많은 교회였습니다(4:15,18).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분열조짐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함을 염려하고 있습니다(2:2;4:2)
그 대표적인 사람이 유오디아아와 순두게였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자신의 이름이 바울이 보낸 서신에 언급된 것을 알고 매우 당황했을 것입니다.

인간간의 관계는 하나님과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마음이 시기와 미움이 있다면

하나님의 평강과 기쁨도 임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과 기쁨은
남을 너그럽게 대하는 관용하는 마음과(5)
기도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6-7).

2014년 10월 2일 목요일

한가지만을 위해

빌3:12-2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경기를 앞둔 운동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이들의 모습이 얼마나 진지하며 전심을 기울여 훈련합니까?

바울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운동선수들의 모습에 비유했습니다.
 즉 주님을 향한 우리의 자세도 운동선수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뒤를 보지 않고(5-6)
오직 앞을 향해 주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해 좇아가는 것입니다(12).

단순함을 말합니다.
단순함은 하나만을 좇는 것입니다.
그러기이 힘이 있습니다.

영력은 오직 주님에게만 집중하는데서 주어집니다.

오늘도 주님을 더깊이 알기위해 애를 쓰고

 세상에 마음이 조금도 빼앗기지 않고

운동선수들 처럼 한가지 목표(주님)만을 위해
살도록 성령께서 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2014년 9월 30일 화요일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빌2:19-3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1:29)입니까?
바울은 그 실예를 디모데(21-22)와 에바브로디도(25-30)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특징은 복음전도를 위해 애를 쓰는 사람이요
자신의 유익보다 다른 이들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디모데는 진실한 사람이었고(20)
에바브로디도는 섬김의 사람이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감옥에 있는 바울을 돕기 위해 빌립보 교회가 파송한 선물이었습니다(4:18).
이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빌립보 교회로 돌려보낼려고 합니다(25).

착하고 진실한 신앙의 동역자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고독과 고난속에서 복음전도를 위해 분투했던
 바울에게 하나님은   이런 선물들을 주셔서 그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는 큰 격려 그자체입니다.

나의 주변에는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는 없습니까?

2014년 9월 29일 월요일

원망과 시비

빌2:12-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
매일 우리 삶속에서 역사하신다고 했습니다(12-13).

욕심이 아닌 순수한 열정과 주님을 향한 강한 열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포장한 나의 욕심이나 야망이 아닌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사탄은 나의 감정도 속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 있다면
무슨일을 하던 분쟁이나 불평으로 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분쟁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조용한 가운데 순수함과 책망받을 것이 없는 행동으로(14-15)
이타락한  세대에 하나님의 자녀로 빛을 나타냅니다(15;요3:21).

요란하거나 칭찬과 갈채 속에는 늘 분쟁과 불평이 따릅니다.
이곳에서 사탄은 늘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것입니다.

모든일에 하나님의 자녀로 빛을 나타내기 보다는(15;요3:21)

원망과 시비가 있지는 아니합니까?

2014년 9월 26일 금요일

하나가 되는 비결

빌2:1-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하나가 되기를 원했습니다(2).
하나가 되기위해서는 ' 하나가 됩시다' 하고 구호를 외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교회가 하나가 되기 위해 실제적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 일이던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자기 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했습니다(3).

요란하거나 시끄러운
다툼이나 허영,경쟁의식, 남에게 보이고자 하는(show up)..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요일2:16)

 조용하면서도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한 마음 이것이 하나 되게 하는 비결이요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의 마음을 치유해주기를 바랍니다.

2014년 9월 24일 수요일

하나님의 손길

빌1:12-2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아마 사형선고도 받았을 것입니다.
이일은 감옥에 있는 바울보다 밖에 있는 빌립보 교인들을 크게 낙담케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에 하나님의 큰 섭리가 있음을 바라보며 도리어 그들을 격려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무슨 일을 당하면 단순히 처한  상황만 보지만,
믿음의 사람은 그 상황속에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영적인 안목으로 봅니다.

바울은 자신이 처한 어려움이 도리어 복음전파의 진전이 되었다고 했습니다(12).
또한 이일은  결국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의 진보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목적이심을 그는 바라보고 있습니다(25).

모든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1세기의 그리스도인이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에게도 역시 동일합니다

고난이 있던 없던
항상 그분의 목적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동일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죽음까지도 그분의 선하신 도구로 사용하십니다(21).

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오늘도 믿도 따릅니다.

2014년 9월 23일 화요일

바울의 기도

빌1:7-1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빌립보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가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 내가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8) 말씀에서
그가 이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엿볼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사랑이 풍성한 교회가 되도록 기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지식과 분별력을 겸비한 사랑입니다(9-10).

하나님에대한 풍성한 지식은 그분에 대한 사랑도 풍성하게 해줍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가 빈약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대한 지식이 빈약해질때 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빈약해지는 것은 설교가 빈약할때 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에 대한 풍성한 지식을 드러내고 
이 하나님에 대한  풍성한 지식은 곧 그분에 대한 사랑과 찬양과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또한  분별력입니다.
분별력이 없는 사랑은 남의 죄를 키워주고 그를 잘못되게 할수 있습니다.

주님도 마7장에서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마7:1-2)하시고는
곧 이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고 하셨고(마7:6),
거짓 선지자들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마7:15).
남의 잘못을 트집잡는 것과 분별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사랑과 지식과 분별력

빌립보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가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도 역시 같은 기도임을 믿습니다.

2014년 9월 17일 수요일

본받는 자

주님은 산상 설교에서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말씀이지요.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그 해를 동일하게 비추시는(마5:45)
누구에게난 관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자는 하나님처럼  누구에게나 관대함을 나타냅니다.

관대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나의 눈으로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고
다른 사람의 눈으로 나를  봅니다(마7:5).

그러면 동일하게 행동하는 나를 보게 되고
 남의 잘못에 트집만 잡고
정죄하는 자가 아닌(마7:1)

우리의 관대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엡5:1)
라고 권면했습니다.

주님! 오늘도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게하소서.

2014년 9월 12일 금요일

위로

살다보면 낙심하는 일이 많습니다.
세상의 삶도 그러하고 주님의 일을 하는데도 만만치 않습니다.
때로는 절망하고 포기하고 싶은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기까지 했다고 했습니다(고후1:9).
마음에 내려진 사형선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가  얼마나 힘들어었는지를 가늠해볼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낙심했던 그 상황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깨닫고

자신이 낙심했던 것은  "같은 고난을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함"(고후1:6)이요

"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지 하기 위함"(고후1:9)이라고 했습니다.

때때로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그 가운데도 위로를 넘치게 주시는 하나님(고훈1:5)

어떤 상황속에서도 이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는 우리를 탄복하게 만듭니다


2014년 9월 9일 화요일

기도

하나님은 기도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기도를 향과 같다고 했습니다(계5:8).
하나님에게 아름다운 향기의 기도!
그러므로 그분의 뜻대로 구할 때 그 향내는 하나님의 코를 더욱 자극할것입니다. 그래서 응답하실것입니다.
요일5:14 "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2014년 9월 4일 목요일

권위에 순종

마22:15-2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리새인들과과 헤롯당원들은(15-16)은 서로 극과 극의 사람들입니다.
헤롯당원들은  헤롯왕가를 지지하는 친로마파 사람들이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종교적으로는 보수적이면서 철저한  유대주의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둘이 뭉쳤습니다.

때로는 서로 극과 극의 사람들도 뭉칠때가 있습니다.
같은 목적일때 입니다.
이둘은 나쁜 목적으로 연합했습니다.

이들의 질문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코너에 몰아 넣기 위함이었습니다(17)

주님은 이들의 술책을 아시고
가이사에게 속한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21).

가이사와 하나님의 것
세상나라와 하나님 나라.

우리는 둘다 존중하고 존경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세상 나라에는 정직함으로
하나님 나라는 경외함으로

물론  먼저 선택하라면 당연히 하나님 나라입니다(마6:33).
하지만 가이사( 정부)의 권위를 존중하고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하나님의 말씀과 대치되지 않는다면)(롬13:1).

이렇게 위정자들을  존중해주고 존경하는 풍토가
교회에서 먼저 일어나야 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 본을 보여야 할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2014년 9월 1일 월요일

주님이 보시는 것은

마21:28-3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의 비유는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말에 처음에 거부했다가  돌이켜 순종했던 맏아들과  하겠다고 해놓고 가지 않은 둘째 아들의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이 비유의 결론 부분에서 요한이 " 의의 길을 보여 주려고 왔다고" 했습니다(32).
자기 의에 빠져 있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요한의  멧시지를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소위 뻔뻔한 죄인들(?) 창기와 세리들은 요한의 멧시지를 믿었습니다
그결과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31).

본문의 포인트는 정직함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아직도 겉치레와 개인의 야망을 버리지 않았습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다를바가 없습니니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창기와 세리와 같이 단순함과 정직함일 것입니다.

2014년 8월 27일 수요일

진정한 리더

대상22:1-1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다윗은 성전을 건축할 수는 없었지만  건축하는 일을 돕는데 온힘을 다했습니다.

성전 건축에 필요한 자재를 모으고 공급하는일에 감독자가 되었습니다.
자재가 조금도 모자람이 없이 철저하게 일을 진행시켰습니다(1-4).

또한 아들 솔모몬에게도 지혜로운 충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11-16).
지도자들에게도 솔로몬을 정성껏 도울 것을 명령하였습니다(17).

다윗을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영적 지혜가 필요함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고
할 수 없는 것은 최선을 다해 조력자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리더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2014년 8월 25일 월요일

무엇인지

대상17:1-1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온 후  다윗은 또 다른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성전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나단 선지자에게 말했습니다(2).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셔습니다(4)

성전은 그의 아들(솔로문)이 건축하기를 원하셨습니다(12).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사명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남과 비교하지 말고
남을 모방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것입니다.

2014년 8월 22일 금요일

다윗과 미갈의 차이

대상15:25-16: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야 말로 축제의 분위기 였습니다

 노래와 온갖 악기들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쁨에 들뜬 사람들의 소리..
나라에 무슨 큰 경사가 난 것 같았습니다(25-28)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이때만큼 온 백성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경외했던 시간은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신앙과 그의 리더십의 결과였습니다.

다윗은 언약궤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마냥 좋아
춤을 추며 즐거워했습니다.

이때는 왕이 아니라 마치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미갈은 다윗의 이런 모습을 보고 비웃었습니다(29).

다윗과 미갈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전에는 온통 세상일에  분주하고, 신문과 TV와 세상적 즐거움에만 시간을 보냈지만
지금은 아침에 눈을 뜨면 성경을 먼저 찾고 말씀을  묵상하고 시간이 날때 마다 조용히 앉아 하나님을 묵상하고,그분의 영광과 그분의 나라를 묵상하며
주님이 주시는 영적 즐거움을 가장 큰 행복으로 아는 것
이것이 육에 속한 사람과 그리스도인의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다윗과 미갈의 차이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2014년 8월 20일 수요일

하나님의 생각

대상13:1-1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왕이 된 다윗은  천부장와 백부장 그리고 백성들을 모으고 의논했습니다(1-2).
리더십이 실패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소통이 부재(在) 될 때입니다.
다윗은 소통하는 지도자였습니다.

의논의 주제는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궤를 옮겨 오는 도중 큰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수레에 실고 오던 궤가 소들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자
궤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옆에서 지켜보던 웃사가 궤를 붙드는 순간
하나님이 그를 치셔서 그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9-10).

무슨 일이던 아무리 좋은 동기로 시작해도,
인간의 눈에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같이 보여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절대로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기 때문입니다(사55:8)

2014년 8월 19일 화요일

하나님이 만들어가시는..

대상11:1-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사울이 죽고 이스라엘에는 새로운 시대가 왔습니다.
새시대 새지도자가 새워졌습니다.
다윗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까지 기다렸습니다.
때가 되어 모든 환경과 분위기가 그가 왕이 될 수 밖에 없도록 되었습니다(1-2).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는 시간입니다(3).

세상을 내마음대로 할 수 없지요.
하나님이 만들어가십니다.

하나님이 만들어가는 세상에, 역사에
나는 도구로 쓰일 뿐입니다.

2014년 8월 15일 금요일

오늘 하루

오늘 하루가 중요합니다.
내일 일을 생각하며 걱정하는 것은 오늘 하루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일것입니다.

오늘 하루 최선의 삶은
내일을 걱정하지 않도록 하는 치료제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신 것 처럼
하루의 최선을 하나님께 구하며 살도록 하는 것과 일맥 상통합니다.

오늘 하루 최선의 삶은  내일의 일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믿음입니다.

"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27:1).

2014년 8월 12일 화요일

성전

마20:17-2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사람들은 힘과 권력을 좇습니다.
초기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중 본색을 제일 먼저 드러낸 것이  야고보와 요한, 그들의 어머니였습니다(21).

주님은 자신의 죽으심을 말씀했음에도(17-19)
제자들은 주님의 왕되심(세속적) 과 그들이 누릴 영광에 집중했습니다.

다른 열명의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분개했습니다(24).
아마 자신들도 가졌던 야망을 이들이 먼저 선수를 쳤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것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앞에 영웅적인 행동이나 세속적인 영광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임함을 말씀하셨습니다(22).

또한 참된 리더십과 권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자가 어떤자임을 말씀하셨고(26).
그분이 오신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28).
이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길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고전3:16).
성전안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외에는 다른 것이 존재할수가 없습니다.

아직도 세속적인 야망이나 탐욕이 있다면 성전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2014년 8월 11일 월요일

하나님의 은혜

마20:1-1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한 포도원 주인이 하루 품삯1데나리온으로  일꾼들을 고용했습니다(2)
그는 일꾼이 부족했는지 더 많은 일꾼들을 고용했습니다(3-6).
하지만 하루일을 마감할때 일찌기 일한 사람이나  늦게 일한 사람이나 동일한 임금을 주었습니다(9-10)

일한 시간이 많은 사람이 더 받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준으로  공평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고용된 사람들은  공평치 못하다고 당연한 불평을 하였습니다(12).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주님은 포도원 주인을 하나님으로,일꾼은 그의 백성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찍 일한 사람이나 늦게 일한 사람이나 동일한 삯을 주시는 분임을 말씀합니다(13-14).

이것이 하나님의 공평입니다(9,14,15).

공평하신 하나님은  그분의 은혜를 누가 독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수고의 댓가가 아닌  그분의 기쁘신 뜻대로(15)주시는

하나님이심을 가르쳐주십니다.

2014년 8월 9일 토요일

한 부자 청년

마19:16-3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이 청년은 영생을 얻기 위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17-20).

주님은 이 청년에게"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21)고 도전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 청년은 " 슬픔에 잠겨"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가 굉장한  부자였기 때문입니다(22).

이 청년의 삶은 부와 성공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또한 내세의 영생을 얻기 위한 열심도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영생은 열심이 아니라 주님을 따라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주님을 따르기에는 그가 이룬 부와 성공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가치관과 정반대 입니다.
용서와 사랑, 포기와 헌신일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온전히 하나님께 포기하지  못한것이 있다면
그것은 위선일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슬픔에 잠겨 돌아선" 이 청년이 더욱 정직하게 보입니다.

2014년 8월 2일 토요일

참된 부

딤전6:17-2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은 부자 그리스도인에게  '부'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부(물질)와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부'는 비교의 대상이 될수 없습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을(17) 의지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물질은 삶을 편하게 해줄수는 있지
보호해주지는 못합니다.
질병도, 죽음도 막을수 없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만이 주장하십니다.
돈으로 영생을 살수 없습니다.
영생은 하나님만이 그리스도안에서 주십니다.

사람들은 부를 더 얻기 위해 투자를 합니다.
그리스도인도 더 풍성한 하늘의 영적 '부'를 누리기 위해
주님을 위해 수고를 합니다. 그 수고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고전15:587).

물질만능주의, 소비주의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만 참된 '부'이시고
하나님만이 참된 '만족'이심을 성령님께서 본문을 통해 다시 일깨워주십니다.

2014년 7월 31일 목요일

자족한 마음

딤전6:3-1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은 이단 사상을 가리치는 거짓 선생들의 실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라는 가면을 쓰면서 혼란에 빠트립니다(1:3-4;4:1-2;4).
영적으로 교만합니다.
 자신들만이 성경을 많이 알고,자신들의 가르침만이 구원을 준다고 유혹합니다.

특히  논쟁하기를 좋아합니다(4).
또한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여깁니다(5).
 결국 모든 것이 돈으로  귀결됩니다.

이단교리를 가르치는 자들도 결국 돈이고
그리스도인들도 돈때문에 유혹을 받기에

바울은  물질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돈은 하나님이 필요의 수단으로 주신 것이지
돈이 목적이 되어 돈을 사랑해서는 아니됩니다.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10).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해서 지갑을 열고 신용 카드를 꺼내놓고 혹은 지폐를 손에 들고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하고 외친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족한 마음이 중요합니다(7-8).
자족한 마음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나타납니다.

거기에 잠된 자유함이 있습니다.



2014년 7월 29일 화요일

목회자의 자세

딤전5:1-1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은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목회의 원리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는 교인들을 부모처럼, 형제 자매 처럼 대하라고 했습니다(1-2)
목회자는  교인 어느 누구한테도 소홀이 대해서는 아니됨을 말씀합니다.
목회자가 양들을 대할때의 자세는 한마디로 존경심입니다(3,17;6:1).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 지를 느낌으로도 다 알수 있습니다.

교인들을 진실함으로 섬기며, 존경하는 목회자를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의  지도자로 세우심을 믿습니다(행20:28).

이런 존경과 헌신,영혼을 위한 수고는
영력(성령님의 능력)으로만이 가능합니다.

2014년 7월 24일 목요일

교회지도자

딤전3: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지도자 혹은 목회자의 삶의 기준은 매우 높습니다(1).
본문에 열거된 내용을 보면(2-4)
교회지도자나 목회자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다시 느낍니다.

한마디로 양떼들의 본을 보이지 못한다면 그들을 인도할수 없고,
그가 전하는 멧시지와 삶이 동일하지 않는다면 진리의 말씀을 제대로 전달할수 있습니다.

교회앞에서의 모습과 뒤에서의 모습이 동일해야
하나님이 더욱 영력을 주시고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영적권위가 생깁니다.

본문을 통해 교회지도자들이나 목회자들을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연약한 그릇이기에
그들을 위해 기도 하기 위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2014년 7월 22일 화요일

선한 싸움

딤전1:12-2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사도바울의 전도의 열정은 그가 받은 은혜에서 나타났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는데 앞장 섰던 사람이 신실한 주님의 종이 된 것은 참신비스럽습니다.

변하기 어려운 존재인 사람이 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함이 없이는 설명되지 않습니다(12-16).

이어서 그는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서 선한 싸움을 잘싸우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18).
바울은 자신의 전도사역과 목회사역을 통해 싸우지 않고는 감당할수 없기에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고 있습니다.

선한 싸움은 우리가 주님앞에 갈때 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건강해야 싸울수 있습니다.
영혼의 건강과 보약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언(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습니다(18).



2014년 7월 19일 토요일

티끌과 재가운데

욥42:1-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과 씨름했던 욥은 결국 하나님앞에 회개하기에 이릅니다.
그가 회개한 이유는 하나님앞에서 무지하게 말했기 때문입니다(3).
인간의 이성을 넘어서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러 말하는 것은 건방진 이야기이지요.

욥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다시한번 깨닫습니다(2).
자신을 티끌과 재처럼 여깁니다(6).

고난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도 때로는 욥처럼 절망하고 분노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고난은 인간이 티끌과 재와 같은 존재임을 알게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 앞에 무릎을 꿇는 축복의 시간이 됩니다.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잊어버리고
혼자 분노하고 절망한적이 있습니까?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무지하게 말한적이 있습니까?

욥처럼 티끌과 재가운데서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2014년 7월 17일 목요일

하나님은..

욥40:1-2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은 폭풍 가운데서 두 번에 걸쳐 욥에게 말씀하셨습니다(38:1;6).
C. S 루이스는 " 하나님은 평안속에서는 우리에게 속삭이지만, 고난 가운데서는 큰 소리로 외치신다"고 했습니다.

고난의 시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더 가깝게 들을수 있는 시간일 것입니다.
그 시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겸손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메가폰으로  세상을 향해 외치시지만 듣지 못하는 영적으로 귀먹은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욥은 그동안 자신을 변호 할려고 애를 썼지만 하나님의 말씀앞에 대답할말을 잃었습니다(3-5).

하나님은 욥에게 그분이 '의'에 근원임을 다시 상기 시키셨습니다(8).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를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 할수 있는 수용능력이 없어도(13-24)

하나님은 항상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시는 분임을 믿습니다(롬8:28).

2014년 7월 15일 화요일

가장 가까운 친구

욥19:1-2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고난중에 있는 욥은 깊은 고독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피한다고 했습니다(13-22).
전에 가까웠던 사람들도, 심지어는 가족들까지도 자신을 타인처럼 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엔 고난중에 있는 욥과 함께 있으면서 오랜 시간 침묵하던 친구들도(2:11-13)
위로는 커녕 욥을 비난했습니다(1).

그럼에도 그와 함께 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욥은 그를 "대속자"라고 불렀습니다(25).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고난중에 있는 사람은 친구도 없고  마치 홀로 있는 것 처럼 느껴져도
" 형제보다 더 친밀한 친구가 계시니"(잠18:24),

"항상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히7:25)
주님이십니다.

2014년 7월 12일 토요일

고난중에 있는 사람에게

욥6:1-3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욥은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13,26).
그의 친구들의 논쟁은 그를 더욱 절망 가운데로 몰아 넣었습니다(25-27).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던진 말한마디가 그에게 용기를 주거나
아니면 더큰 상처를 줄 수 있음을  욥의 친구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창조 하셨습니다(창2:18).
특히 고난중에 있을 때 말입니다.

고난중에 있는 사람을 대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를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욥이 갈망했던 것이 이것이었습니다(14,26,27).
하지만 그의 친구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고난중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를 판단하지 말고 그의 말을 들어주십시오.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이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2014년 7월 10일 목요일

때로는...

욥4:1-2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욥의 세 친구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엘리바스가 욥을 위로 할려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위로가 전혀 없었습니다.
엘리바스의 말은 본문 뿐만 아니라 5장,15장,22장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그의 말의 요지는 의인은 고난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7-8).

이 말은 고난중에 있는 욥의 폐부를 찌르는 말입니다.
위로가 아닌 깊은 상처를 주는 말입니다.
엘리바스는 의인이 고난을 받는 것은 그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모르고 있습니다(시34:19)
하나님의 길은 인간이 생각하는 길과 다릅니다.
그분은 항상 옳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때로는 영적으로 너무 우둔하기에
"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소서"(욥34:32)
하며 그분을 온전히 믿고 따릅니다.

2014년 7월 9일 수요일

두려움

욥3:1-2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1장과 2장에서 욥은 불평없이 자신에게 일어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해서(1-10).
존재 자체의 의문을 가졌습니다(20-24).

본문의 욥의 고백을 보면 그는 평소에 고난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자신이 두려워 했던 것이 현실적으로 일어났음을 말하고 있습니다(25).

과거 부정적인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두려움이 많습니다.

두려움에 집중하다보면  미리 자포자기 하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을 지배할수는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좇는다"고 했습니다(요일4:18).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집중하면 할수록 두려움을 다룰수 있을 것입니다.

2014년 7월 7일 월요일

고난이 닥칠때

욥1:1-2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욥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욥기의 저자는 두 번이나
온전하고 정직한 사람,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1,8).
욥의 신앙 인격은 하나님도 인정하셨습니다(8).

욥은 고난 가운데서 두 가지 사실을 배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그분의 뜻대로 모든 것을 행하시는 절대자이시고,
또한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무엇이던 절대 의로운 일이라는 것입니다(22).

그러기에 그는 항상 예배 드리는 삶을 살았습니다(5).

고난 가운데도 예배드리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20).

고난중의 욥을 통해 배우는 것은

고난이 닥칠때 욥처럼 하나님이 어떤분이심을 알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2014년 7월 4일 금요일

연약한 믿음

마17:14-2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산위에서 변형된 예수님의 모습과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기를 원했던 베드로(1-4).

하지만 항상 산위에서 살수는 없습니다.
절망적인 일이 많고 힘든일 많은 세상과 같은 산 밑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산밑으로 내려오자   귀신 들린 소년을 고치지 못해 애를 쓰던 제자들의 모습을 보아야 했습니다(16).

주님은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17,20).

그리고 겨자씨 한 알의 믿음만 있어도 큰일을 할수 있음을 말씀 하셨습니다(20).

왜 겨자씨 한 알의 믿음입니까?

나의 믿음이 큰 것 같아도 언제나 작습니다.
불신으로 가득찬 세상에 살고 있기에
늘 신앙이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늘 기도하기를 원하시고
기도를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나에게 직면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주님께 가져가십시오.

늘 믿음이 작기에

" 주여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막9:24)
하면서 말입니다.

2014년 7월 1일 화요일

주님을...

마16:13-2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라는 논란은 주님이 오셨을때 부터 지금까지 계속 되어 왔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베드로는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16).

베드로의 신앙은 오늘  우리의 신앙과 동일합니다.
그분은 죄인을 구원하시려(막2:17)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빌2:6-7).

그럼에도 어떤이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선한 사람, 선생님, 종교지도자, 선지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신 것 처럼(17).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아무리 가르쳐도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감화로 되는 것입니다(고전12:3).

예수를 더 깊이 아는 지식
홍수처럼 쏟아 지는 책들을 통함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그분과 깊은 영교에서 성령님을 통해 얻어 지는 것입니다.

주님!
주님을 더 깊이 알고 따르기를 원합니다.


2014년 6월 30일 월요일

이 두 가지

마16:1-1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6).
누룩은 이들의 가르침을 암시해주는 말입니다.

누룩이 조용히 모르게 퍼져 나가듯이
자칫하면 잘못된 가르침이 내안에 침투할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무엇입니까?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지만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의 누룩은 무엇입니까?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세를 부인하고 현세주의로 살았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
겉으로는 신앙이 있는 것 같지만 속은 불신앙자이고

겉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지만
현세주의자가 되어 세상사람들과 똑같은 말을 사용하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아니한지..

이 두 가지가  항상 우리의 신앙을 오염시킵니다.

주님은 오늘도 이 두 가지를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2014년 6월 28일 토요일

은혜아래에..

렘30:1-2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영화나 드라마가 '해피엔딩'으로 마치는 경우 더불어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해피엔딩'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소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다시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3).

더 나아가 가장 큰 위안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 너희는 내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22;출6:7;겔36:28).

이들의 고난은 일시적입니다.
이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변하지 않습니다.

바울도  비록 상황은 다르지만 로마에 있는 교회에 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이에대한 답은 ' 다른 어떤 피조물도 그 어떤존재나 세력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입니다'(롬8:35-39).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불변 하십니다.

나의 과거 현재 미래 그 모든것이 그분의 은혜 아래에 있음을 믿습니다.

2014년 6월 25일 수요일

진리를 말하라

렘23:9-3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았습니다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들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뼈가 떨리며 술취한 사람 같았습니다(9).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말을 전했습니다(16-17).

죄를 회개해야 할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희망을 주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약속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도둑질 하는 것이었습니다(30).

이것은 예레미야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말이 얼마나 진실하고 정직한가입니니다.

바울도 "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하라"(엡4:15)고 했습니다.

2014년 6월 24일 화요일

지도자

렘23: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리더십은 항상 뉴스를 만들어냅니다.
정치, 경제, 사회 심지어 교회의 지도자들은 항상 주목의 대상이 됩니다.
도덕적이고 올바른 지도자들이 있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이지만
온갖 부정 부패에 연루했던 사람임에도 다시 리더가 되어 큰소리 뻥뻥치는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소위 '목자'라고 불리웠던 지도자들은
양들을 모으고 먹이고 돌보기 보다는
도리어 양떼들을 흩어버리는 자들(이들의 잘못으로 유대가 바벨론에 끌려가게됨)이었습니다.

이렇게 백성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사분 오열로 갈라놓는 지도자가 있는 반면,

양들을 모으고 희생하는 선한 지도자가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요10:11,14).

주님은 참지도자의 모습을  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참된 권위가 어떠한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참된 권위는 이것이 나에게 얼마나 유익한가를 구하는 자가 아니라
 섬김과 희생 그리고 정직한 인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지도자들이 대한민국에 많이 나오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될 줄 믿습니다.

2014년 6월 21일 토요일

내안에 계셔서...

렘19:1-1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 집에서 옹기를 사라고 하셨습니다(1).
옹기가 깨어짐같이 유대나라가 깨어질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10).

또한 백성의 어른들을 데리고 예루살렘 외곽에 위치한 힌놈의 아들 골짜기(도벳)로 가서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2).

이곳은 쓰레기를 버리는 장소였고 악행의 역사가 있던 곳입니다.
몰렉과 바알에게 어린아이를 불태워 바치던 곳이었습니다(4-6; 대하28:3;33:6).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일들을 행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교회도 타락한 시대가 있었고
그 시대에는 세상의 불신자들 보다 더 악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누가 이렇고 저렇고 함부러 남을 판단하거나 큰소리 칠 처지가 아닙니다.
나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더 악한일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든지 법을 어길수 있고, 남을 속일수 있고 심지어는 자신을 속일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내안에 계셔서 하나님의 율례를 따라 살게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겔36:27)
의지하며 오늘도 살아야 합니다.

2014년 6월 19일 목요일

은헤가 없이는...

렘17:1-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죄로 인해 바벨론의 침략으로 당할 고통을 선포합니다(3-4).
우상숭배와 온갖 악행을 자행했던 소위 '하나님의 백성'들이 처할 운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던 아니던 인간의 마음은 거짓되고 부패합니다(9).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마음이란 요사스러워서 잘속입니다.
스스로도 속게 하고 남을 속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부패하고 거짓된 마음을 보십니다(9-10)

 부패하고 거짓된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그 마음이 정직해지고, 정결해지고, 올바르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그가 전하는 멧시지로 인해 많은 모욕과 수치를 당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깊은 상처를  받았고, 깨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을 치유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14). 이것이 예레미야의 위대한점입니다.

거짓되고 부패하기 쉬운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부우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상처받고 깨어지기 쉬운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부우며
치유와 회복을 간구해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수 없기 때문입니다.

2014년 6월 18일 수요일

말씀을...

렘13:1-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상한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베띠를 사서 허리에 띠라고 하셨습니다(1).

그 띠를 유브라데강가 외진 곳 바위틈에 감추라고 하셨습니다(4).

여러날 후에 감춘 그 띠를 다시 가져오자 띠가 썩어서 쓸수 없게 되었습니다(7).
겉보기에 참으로 기이한 행동입니다.

띠가 허리에 밀착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밀착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지만 띠가 썩어서 쓸모 없게 된 것처럼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일지라도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썩은 띠와 같이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9).

여기에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더욱 강팍해집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3:8-8)고 했습니다.



2014년 6월 16일 월요일

진리를 전하는 자

렘11:1-2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예례미야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순종할 것을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1-17).

사회적으로 온갖 악행이 일어나고 우상숭배가 성행하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위험을 감수 하는 일입니다

안전을 보장받을수 없지만 멧시지를 전해야 하는 선지자의 고뇌를 엿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18-23절은 애가로 가득차 있습니다.

특히 예레미야를 해할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나돗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레미야를 미워하기 보다는 그가 전하는 멧시지를 미워했습니다(21).
그렇습니다. 설교자가 그가 전하는 멧시지로 인기를 누리기보다는
때로는 많은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가 진리의 밀씀을 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를 전하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21-22).

2014년 6월 14일 토요일

마지막 인사

고전16:1-2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오랫동안 경제적인 어려움속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시아에 있는 이방인 교회들이 힘을 모아 이들을 도왔다고 언급합니다(1-4. 고후8-9, 롬15:25-32).

바울은 고린도를 방문할 계획이 있었고,
디모데(10)를 고린도에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4:17).
그리고 그들의 영적인 돌봄을 위해 디모데를 다시 보낼려고 합니다.

디모데가 고린도에 가게 되면 그를 신임하고 그가 사역을 힘있게 하도록 도와줄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10-11).바울의 목회자적인 마음을 엿볼수 있습니다.

왜 고린도 사람 스데바나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와 함께  바울이 있는 에베소에 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은 지금 스데바나집에  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신뢰받고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15).

바울의 마지막 인사는 여러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을 대신해  안부를 전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들이 어려운 가운데도 그들의 믿음이 견고해짐을 매우 기뻐하고 있습니다.
2천년전의 따뜻한 온기가 아직도 우리에게 전달이 되는 느낌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따뜻한 안부의 인사
바울의 말이 오늘 우리의 귓가에도 들리는듯 합니다.

저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안에서 여러분들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Peace and grace in Christ!!


2014년 6월 13일 금요일

주님을 위해

고전15:35-5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날 것인가?
부활의 몸은 어떤 몸일까? 신앙인라면 누구나 가질수 있는 질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도 갖은  생각을 가졌습니다
바울은 이에대해  현재의 몸은 죽지만 영원한 새몸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42-44).

현재의 몸은 첫 번째의 아담의 몸이지만
새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동일한 몸입니다(46).

주님이 다시 오실때
 죽은 자들이 먼저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살아날것이고(살전4:16)
살아있는자는 영광의 몸으로 바뀔것입니다(52).
이일을 행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롬8:11).

생각만 해도 영화의 한 장면과 같습니다.
그러나 영화속의 이야기가 아닌 실제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는
바울이  본장의 마지막부분에서 권면한 것 처럼

 견고하고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58).

주님을 위해 행하였던  모든 수고는 때로는 어떤 것은  미미하게 보여도
절대로 헛되지 않음을  압니다.



2014년 6월 11일 수요일

부활

고전15:1-1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울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실제 목격한 사도들과 수백명의 사람들을 나열하며(5-7)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실제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의 영적 권위도
자신은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이지만(9)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목격한 것에 두고  있습니다(8).

바울과 같이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9)
변화가 되고 은혜로 사도가 된 것 자체가(10)
그리스도의 부활이 실제임을 증거해줍니다.

주님의 부활을 친히 목격한
사도들이 전한  부활의 주님을 믿기에

오늘도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내세에 소망을 두며 살아갑니다(19).

2014년 6월 9일 월요일

무엇이 다른지를..

고전14:1-2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예배에 대한 바울의 관심은  질서 있고 남의 믿음을 세워주는데 있습니다.
그는 방언을 금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과 개인적인 대화를 위해 정상적으로 사용하기를 원했습니다(4).

그는 방언보다 예언을 더 중시했습니다.
교회기초는 방언이 아닌 예언이었습니다(고전12:10,28).

예언은 사도시대와 교회시대와 구분됩니다.
사도시대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앞으로 일어날 어떤 사건에 대해 예언했습니다(행11,21).

그러나 교회시대는 설교가 그것을 대체 하였습니다.
설교자들은 사도들이 닦아놓은 터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견고하게 집을 지어나갑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말한다' 라는 단어를 24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은유법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 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악기도 그 소리로 분별 할 수 있고(7)
모든 소리에는 다 뜻이 있듯이(10)

우리에게 주신 이 복음의  말씀도 세상에 분병하게 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복음대로 살 때  사이비 이단들과 복음이 무엇이 다른지를 분명하게 보여줄수 있습니다.

2014년 6월 7일 토요일

사랑은

고전12:31-13:1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은 12장 마지막절에서 가장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면서 12장을 끝맺었습니다.
가장 귀한 은사는 13장과 14장1절 사이에 10번에 걸쳐 등장하는 단어인 사랑(아가페)입니다.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4-7절 사이에 나타나는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를 말합니다.

어떻게 남을 대하느냐?
아무리 거짓으로 위장을 해도 사랑(아가페)이 아닌 것은  금방 드러납니다.

13장을 처음 읽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를 상상해보십시오.

4절-7절에 나타난 사랑이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내가 어떻게 실천하며, 체험하는 지를 생각해봅니다.

"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4-7).



2014년 6월 6일 금요일

은혜를 사모

고전12:21-3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고전12장은 성령님의 은사를  다룬 내용입니다.
한몸에  기능이 다른  여러 지체가 있듯이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은사 또한 다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방언 하는 사람들이 가진 소위 ' 영적 엘리트주의' 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을 경고하기 위해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맨 나중에 올려놓은 것 같습니다.

모든 은사는  성령님이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영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지체로서의 교회의 참모습입니다.

바울은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여지를 남겨놓고 12장을 맺고 있습니다.
사모하라는 말은 하나님은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또한 그 은혜를 깨닫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처럼(시42:1)
오늘도 나의 영혼의 주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2014년 5월 19일 월요일

지헤로운 충고

삼하20:1-2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압살롬의 난을 겪은 후 다윗 정권은 또 한 번의 위기가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 세바의 난' 입니다.

다윗은 세바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아마사를 등용했습니다(4).
아마사로 인해 자신의 자리가 위협을 받음을 느꼈던 요압이 시기심으로 아마사를 죽이는 불행한일이 벌어졌습니다(10).

아마사의 죽음과 세바의 난은 압살롬의 난 이후 다윗 정권이 아직 안정이 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세바를 추격하는 요합! 세바를 따르는 무리들!
이스라엘에는 다시 한 번 내전이 벌어질 큰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그러나 반역자 세바가 도피한 아벨성에 지혜로운 여인이 있어서
요압을 설득하였고(16-20), 성사람들을 설득하여 세바를  죽이게 함으로((21-22).
그들이 살고 있던 성을 구하였습니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는 것 처럼(잠1:20)

오늘도 나에게 지헤로운 말로 충고해주는 사람을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겸손과 지헤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2014년 5월 12일 월요일

다시..

삼하18:1-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압살롬과 싸우려는 다윗의 군대가 조직이 되었습니다(1-2).
불행하게도 아버지와 아들간에 전쟁이 벌어지게 된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다윗은 큰 딜레마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아들을 살리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다윗은 휘하 장수들에게 자신을 봐서라도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해달라고 부탁했지만((5)
다윗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14-15).

압살롬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평소에 그가 자랑하던 그의 긴머리였습니다(9).
그의 머리는 그의 자부심의 교만의 상징이었습니다(14:25-26).
자부심과 교만이 그를 파멸로 인도했음을 잘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무덤마져도 멸시와 천대를 받는 무덤이었습니다.
아무도 그의 무덤앞에서 그를 존경하거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17).

그가 생전에 세운 비석은 그의 수치스러움을 후대에 전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18).

압살롬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죽어서도 멸시를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자,
 하나님을 떠난 자의 운명이 어떠하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줍니다

2014년 5월 9일 금요일

나에게 있어서..

마13:44-5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짧은 세 가지의 비유가 나옵니다.
첫 번째는  밭에서 숨겨둔 보화를 찾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44).
이 사람은 자신이 소유를 다 팔아 보화가 있던 밭을 샀습니다

두 번째는  장사하는 사람으로  값진 진주를 발견한 내용입니다.
그도 역시 소유를 다팔아 그 진주를 샀습니다.

이 두사람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자신들이 발견한 보화에 대한 엄청난 기쁨을 가진 것과
자신들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들 보화를 가진 것입니다.
자신들의 소유보다 그 보화를 더 중요시 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이보화(그리스도)(골2:3)를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빌3:8)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와 같습니까?

2014년 5월 7일 수요일

심판은...

마13:24-3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천국의 비유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느 농부가 큰 농장을 경영했습니다.
일꾼들이 좋은 씨를 땅에 뿌렸습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뿌린 씨앗에서 싹이 나고 결실할때가 되자 가라지도 함께 났습니다.
일꾼들이 가라지를 보고 뽑기를 원했습니다(28).
하지만 주인은 반대했습니다. 왜일까요?(29)
우리는 자주 남을 판단합니다. 어떻게 보면 판단이 체질화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판단(가라지를 뽑는것)은 우리의  일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나의 일은 믿음이 열매를 맺어 계속 자라는 것이고(골1:6).
모든 추수는 주님이 하실 것입니다.
심판은 주님만이 하실 것입니다(30).

2014년 5월 5일 월요일

말씀을 받을 때

마13:1-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5월부터9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그 기간동안 땅은 매우 단단히 굳어있게 됩니다.

10월 하순경에 첫 비가 내림에 맞추어 농부는 땅을 경작합니다.
그리고 한가득 씨를 담은 큰 바구니를 옆에 끼고 경작한 땅에 씨를 뿌립니다.

그런다음 새들이 와서 먹지 못하도록 땅을 한 번 더 갈아줍니다.

주님이 씨를 뿌리는 비유를 들어서 영적 교훈을 말씀하셨습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눅8:11)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중요한 것은 씨입니까? 아니면 땅입니까?
주님은 이 비유를 들어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나는 말씀을 받을때 어떻게 받는 것이 가장 최상의 길임을
성령님께  지혜를 간구하십시오.

2014년 5월 2일 금요일

어디를 보아도

민20:14-2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모세가 에돔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그땅을 통과하게 해달라고 하였으나
돌아온 대답은 ' NO'였습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입니다(창36:1).
'붉다'라는 에서의 별명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창25:20).

이스라엘과 에돔은 태속에 있을때 부터 서로 싸웠습니다(창25:22)
이싸움은 멈추지 않고 오랜역사 속에서 에돔은 이스라엘을 대적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에돔을 미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신23:7).

그리고 아론은 가나안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습니다(29).

본문에는 에돔의 방해와아론의 죽음,

어딜보아도 좋은 소식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가나안을 향해 이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와같은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됨을 믿습니다.

2014년 4월 30일 수요일

분별

민14:26-4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열명의 정탐꾼들의 불신앙적 보고는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이들은 두려움과 원망에  사로잡혔습니다.
이일로 인해 이들은  광야에서 40년동안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40년은 정탐한 날 수 사십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친 날수 입니다(13:15,40).

불신앙적인 보고를 한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이 내리신 재앙으로 죽음을 당했습니다(36-37).

이런 아픔의 시간이 지난 후 비로서 이들은  가나안 정복에 나서겠다고  결정을 합니다(40).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41).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42).

그러나 이들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올라가 대패하고 맙니다(45).

이들은 하나님의 뜻과 시간과 늘 정반대로 행했습니다.

이들이 전쟁하러 올라간 사이 '하나님의 언약궤가 진영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은(44)
하나님의 시간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성령께서 오늘 ,'나의 마음의 눈을 열어서'(엡1:18)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며 순종케 하기를 기도합니다.

2014년 4월 28일 월요일

누구의 말에

민13:1-3,17-3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끔 했습니다(1-2).
모세는 12명의 정탐꾼들을 보내어 하나 하나 조사한 후 보고하게끔 했습니다(17-20).

이들은 돌아올때  에스골 골짜게에서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베고 석류와 무화과를 따서 왔습니다(23)

이들은 와! 이곳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구나 하며 탄복했습니다(27).
그러나 그곳은 거인들이 살고 있었고(28),
이들에 비하면 자신들은 메뚜기 처럼 보였습니다(33).

갈렙(30)과 여호수아를 제외한(수14:6) 다른 사람들은 그땅을 정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와 이들 사이에 논쟁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합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여러 소리들이 섞여서 들립니다.
하나님편에 선자들과(갈렙과 여호수아) 불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소리가 함께 들립니다.

나는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까?

2014년 4월 25일 금요일

두가지 사건

민11:16-2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모세에게 임한 하나님의 성령이 70인장로들에게 임했고(25)
 심지어는   자기 장막에 있던 엘닷과 메닷에게도 임해
예언을 했습니다(26).

큰 그림으로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의 축복의 상징입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고기가 없다고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만나대신 고기를 냄새가 싫어하도록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20).

그것은 메추라기였습니다(31).

그러나 그 고기에 탐심을 부린 이들에게- 하나님의 재앙이 임했습니다(33).
이 사건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 두이야기에는 축복과 심판이 함께 어우러져 있습니다.
욥도 "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므로 화도 받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욥2:10).

삶이 형통할때 감사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늘 겸손하며
넘어질까 조심해야합니다(고전10:12)

2014년 4월 23일 수요일

가장 안전한 길

민9:15-2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어떻게 통과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 하나님과 함께' 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보여주는 구름기둥(낮)과 불기둥(밤)이 이들을 인도했습니다(15-16).

구름과 불기둥이 움직이면
백성들도 진행했고.
멈추면 백성들도 머물렀습니다.

얼마동안 머물지 알수 없었습니다, 하루가 될수 있고 아니면 한 달, 일년이 될수 있습니다(22).

하나님은 이들에게 언제 떠날것인지 얼마동안 머물것인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도에 따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우리의 삶도 그러합니다
그분이 가라면 가고
머물라 하면 머물고..
오직 순종으로 인도함을 받을 뿐입니다.
이것이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2014년 4월 21일 월요일

동일한 요구

민3:1-1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모세와 아론의 가계를 기록한 말씀입니다(1).
모세와 아론은 레위지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출2)

레위지파에 속한 아론과 그의 후손들은 성막을 돌보는 일을 했고(7),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도록 했습니다((10).

또한 평소에  이일을 감당하기 위한 삶이 요구 되었습니다(레10:8-11).

모든 성도들을 제사장으로 부르신 하나님께서도(벧전2:9)

오늘 우리에게 동일한 요구를 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2014년 4월 18일 금요일

주님의 은혜

마27:45-5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장면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죽음은 죄의 결과로 온 것이고(롬6:23),
죽음후에도 영혼은 의식하며 존재합니다(눅16).

그러나 육체적 죽음보다 더 무서운것은 영적 죽음입니다.
영적 죽음은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육체적 죽음을 당하셨습니다(50).
그리고 성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신 것 같은 영적 죽음도 경험하셨습니다(46).

십자가에서의 육체적 고통은 말로 표현할수 없지만,세상의 죄를 짊어지신영적 고통은 육체적 고통과 비할바가 못됩니다(사53:4-5).

주님은 이 고통중에 십자가상에서  처절하게 울부짖으셨습니다(시22:24).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2014년 4월 16일 수요일

진정한 강자

마27:11-2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빌라도 앞에서 선 주님은 총독의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거짓으로 자신을 고소하는 무리들에게 침묵으로 일관 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빌라도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14).

빌라도의 부인까지 나서서 주님의 무죄를 주장하고 주님을 석방하라고 남편을 설득하였지만(19), 빌라도는 무리가 두려워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결정을 합니다(24-26).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사람들의 큰 함성앞에 침묵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주님의 모습과

권력자이면서도 " 내가 예수를 어떻게 하랴"(22)고 묻는 빌라도의 연약함이 대조를 이룹니다.

고난주간에 주님의 침묵을 배웁니다.

참믿음은 말로 떠는 자가 아니라
침묵하며  행함으로 그믿음을 표현하는 것이고
 행함은 곧 믿음에서 나옴을 주님을 통해 다시 느끼게 됩니다.

주님과 빌리도의 모습
누가 진정한 강자의 모습입니까?

2014년 4월 14일 월요일

돕는 은혜

마26:69-7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이 그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신 반석이란 뜻의 베드로는
 이름과는  달리 믿음자체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주님이 예언 하신대로(34)
주님을 부인하고 있습니다(70,72,74)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며 주님을 부인하여(74)
위험을 피할려고 했지만 그의 마음은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닭이 울자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 밖에 나가 통곡을 했습니다(75)..

어떤때는 베드로처럼 주님을 사랑한다고 큰 소리를 치지만
어떤때는 베드로 처럼  말과 행동이 다를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므로  매일 '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히4:16)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2014년 4월 11일 금요일

고난의 비밀

마26:47-5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3년동안 훈련 시키고 동고 동락 했던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이었습니다.

유다는  천연덕 스럽게  예수님께 다가가 입을 맞추었습니다(49).
주님은 자신에게 입맞추는 배신자를 향하여 ' 친구'라고 불렀습니다(50).

곧 이어 돌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제자중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자
주님은 도리어 제자의 행동을 꾸짖었습니다(51-52).

원수를 사랑하고 가르치신대로(마5:44)
마지막 순간에도 행함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자기 중심, 이기적인 삶에 찌든 우리의 삶에 다시 한 번 도전을 주십니다.

삶에 고난이 올 때 우리는 고난에 대해 어떻게 반응을 보여야 합니까?
어떤때는 고난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지만,
어떤때는 그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많은 고난을 당했던
바울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비밀'을 알기를 원했던 것 처럼 말입니다(빌3:10).

2014년 4월 9일 수요일

오늘도

마26:31-3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할 것이라고 예언 하셨습니다(31).
주님의 말을 듣던 베드로는 다른 이들이 주님을 버릴 지라도 자신은 절대 아니라고
장담했습니다(33).

베드로가 왜 이렇게 장담했을까요?
일종의 영웅심리일까요?
아니면 자신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착각에서 나온 말인가요?

주님은 베드로가  특정한 시간(밤)에,
특정한 소리(닭 울기 전)가 울리기 전,
특정한 숫자(3번) 로 주님을 부인 할 것임을 구체적으로 예언하셨습니다(34).

하지만 본문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함의 도우심을 구하기 보다는
아직도 장담하고 있습니다(35).

복음서는 초대 교회 위대한 지도였던 베드로의 연약함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성도들도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고전10:12).

나도  언제든지 말과 행동으로 주님을 부인 할 수 있기에

오늘도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2014년 4월 7일 월요일

두 사람중

마26:1-1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두명의 정반대의 사람이 나옵니다.
귀한 향유를 주님께 부은 한 여인입니다(7).
그녀는 이행위로 비난을 받았습니다(8-9).

하지만 주님은 이 여인의 행동은 자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고(12),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그녀의  행동도 기억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3).

주님의 제자가 아니었지만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주님께 부었던 이 여인과
주님을 3년동안 따르면서 훈련받았지만  은30에 주님을 판 가룟 유다(14-15)
가 서로 대비됩니다.

두 사람중에 나는 어디에 속합니까?

나는 매일 참된 예배자로서 주님을 섬깁니까?
아니면 나의 필요에 의해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2014년 4월 4일 금요일

잠17:1-2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말은 굉장히 영향력이 있는 도구입니다.
상처를 줄수 있고 남을 넘어뜨릴수 있습니다(4,7,9,10).
말을 통해 싸우게 되고, 남을 속이고, 화를 당하기도 합니다(14,19,20).

반면에 주님의 말씀은 항상 은혜스러웠습니다(눅4:22).
십자가의 죽음의 자리에서도 '용서'의 말씀을 하셨습니다(눅23:34).
그분의 생명의 말씀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 왔습니다(롬1:16).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진다고 했습니다(28).
그러므로 말을 적게 하고 선을 행하는데 힘을 써야합니다(갈6:10).

주님! 오늘 저의 입술을 주장하사
말을 적게 하고, 말을 하되  그 말을 통해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소망과 위로와 남을 치유하는 말을 하게 하소서! 아-멘

2014년 4월 2일 수요일

마음의 즐거움

잠15:1-3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건강과 행복을 다른데서 찾지 마십시오.
건강과 행복은 마음의 즐거움에 있습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얼굴을 빛나게 합니다(13).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지만(고후7:10),
마음이 즐거우면 항상 잔치하는 삶이 됩니다(15).
또한 마음이 즐거우면 그 인격도 품위가 있고 선량해집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기쁨의 기름으로 슬픔을 대신하게 하고
찬송의 옷으로 근심을 대신 하게 하신 분을 소개 했습니다(사61:3)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하고
기쁘게 해줍니다(고후4:4)

오늘도 주님께서 이 충만한 기쁨속에  살게하심을 믿습니다.

2014년 3월 31일 월요일

부요함

잠10:1-3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 가운데 ' 부' 에 대한 말씀이 마음이 와 닿습니다.
본문에는 정당한 ' 부'와 불의한 재물을 비교 하였습니다(2,16).

부지런한 자에게 하나님은 물질의 부를 주십니다.
정직하게 부지런히 일하는 자와 함께 하시고 그를 축복하신다고  하셨습니다(4,5,22).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속한 것입니다(마5:45).

이것보다 더 귀중한 영적인 부요함이 있습니다.
믿음의 부요함입니다(약2:5).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이 부요함은 물질이 많고 적음에 상관이 없는 부요함이요,
행복입니다(고후8:9).

오늘도 이 부요함의 기쁨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2014년 3월 28일 금요일

성령을 따라...

마12:22-3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항상 말을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은혜스럽게 합니다(골4:6).
어떤 사람은  늘 부정적이고 ,상대의 감정을 상하는 말만  골라하는 듯 하는 착각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생각, 어떤 행동,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존재를 알수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33).

마음에 가듯한 것이 말과, 행동으로 나오듯이(34),

많이 접촉하는 대상에 따라  마음에 담기는 것이 달라질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내속에서 자연적으로 흘러 넘치도록(갈5:22-23).
오늘도 성령님을  따라 살기를 원합니다(갈5:16).

2014년 3월 25일 화요일

선택

마11:20-3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쁜 현대 생활은 선택을 강요받습니다.
중요한 것, 중요하지 않은 것
급한 것, 급하지 않은 것...
이것이 스트레스입니다.

무엇을 선택할 것입니까?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먼저 선택하라(28)
그러면  내가 너희를 자유케 해주겠다.

그렇습니다.
먼저 주님앞에 가면 다른 것들은 자연히 쉬워질 것입니다(눅10:42).

오늘도 쉬운것을 선택하겠습니다.
먼저 주님앞에 가겠습니다.

주님이 모든것을 쉽고 가볍게 해주실것 입니다(30).

2014년 3월 24일 월요일

요한의 질문

마11:1-1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옥에 갇힌 침례(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님에게 질문하게 했습니다.

요한이 기다렸던 예수는 누구였습니까?
 요한이 기다렸던 예수는 아마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예수였던 것 같습니다.

요한의 질문과 같은 질문이 그 후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바울도 자신이 전했던 예수가 아닌 다른 예수를 전하는 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고후11:4).

오늘날에도 많은 예수들이 있습니다.
신화적인 예수, 혁명적인 예수, 병을 고쳐주고, 부자가 되게 하고, 성공을 시켜주는 예수,

우리가 믿는 예수는 누구입니까?
그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마16:16),
우리를 대신 하여 죄인이 되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분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고후5:21)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예수입니다.

2014년 3월 21일 금요일

착각

삼하15:1-1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압살롬에게는 계획된 음모가 있었습니다.
그는 4년동안 속내를 감추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위해 힘을 썼습니다(10).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아버지의 권좌였을까? 아니면 아버지에 대한 분노였을까?
동기가 어찌 되었던 압살롬의 마음과 행동에는
다윗의 죄의 댓가를(밧세바 사건) 치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삼하12:11).

압살롬은  아버지를 대적하기 위해 아버지의 리더십에 상처를 주는 것으로 출발했습니다.
마치 아버지의 통치에 정의가 없고, 아버지가 왕으로서 할일을 못하고 있음을 선동했습니다(2-4).

정권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 선동에 넘어간 사람들 점점 그의 세력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12). 그러나 이것은 그를 파멸로 이끄는 함정이었습니다.

지도자들이 쉽게 빠질수 있는 함정이 이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에 쉽게 도취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진짜 그런 사람인줄 착각합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의 환호와 갈채에 속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촛점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시는 것이었습니다(요4:34).

2014년 3월 19일 수요일

신실함

삼하11:1-2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이스라엘의 온 군대는 전쟁터로 나갔고 다윗은 홀로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1).
차라리 다른 왕들처럼 그도 전쟁터에 나갔다면 유혹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이 홀로 남은 예루살렘은 그의 유혹의 장소였습니다.

다윗은 밧세바가 남의 아내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에겐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불러 들였습니다.
술을 마시게해 취하도록 했습니다(13).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고 실행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계획은 우리아의 신실함앞에 무너졌습니다.
우리아는 자신의 부하들이 전쟁터에서 전쟁을 치루는 동안 아내가 있는 집으로 가기를 거부했습니다(11).

이일이 실패하자 다윗은 요합까지 자신의 음모에 가담시켜 결국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였습니다(14-15).

헷사람 우리야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님에도 이스라엘 왕인 다윗보다 이스라엘에 더욱 충성하였던 그의 모습이 돋보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어서 신실함은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누가 알아주던 안알아주던 신실한 사람은 변함없이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그 모습을 보시고 계십니다..

나의 삶의  전영역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지키고 있습니까?

혹 고백하지 않은 죄는 없는가요?

2014년 3월 18일 화요일

약속

삼하8:15;9:1-13
요나단과 다윗은 이전에 서로 언약을 맺었습니다(삼상20:42).
다윗은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울의 집안 사정을 알아보았습니다(9:1).

이제야 친구와 약속을 지킬려는 것 같습니다.
 왜 그동안 친구와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까요?

그의 왕권이 강화 될 때까지 기다렸을까요?
아니면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바빠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다윗은 정의와 공의를 행했다고 했습니다(8:15).
내가 만일 다윗의 위치에 있었다면 어떻게 행했을까?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공평과 의로 모든 사람에게 행할 것인가?
아니면 한쪽으로 치우쳐서 나를 좋아 하는 사람들에게만 기울어질 것인가?

목회자가 된 사람
교회지도자가 된 사람들이 하나님이 맡겨주신 양떼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생각해줍니다.

므비보셋은 자신을 " 죽은 개" 와 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8).
그의 겸손을 나타내는 것인지, 아니면 다윗이 두려워 다윗에게 자신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님을 말한것인지 잘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므비보셋을 왕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대하였습니다(11).
늦었지만 다윗은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누구와 약속을 하고는 아직 지키지 못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2014년 3월 17일 월요일

감사의 마음

삼하7:18-29절, 오늘의 묵상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고  즉각 감사의 기도로 반응을 보였습니다(18).
만일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 있다면 제일 먼저 누구에게 알리겠습니까?

페이스북에 Post로 올리겠습니까?
아니면 전화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알릴것입니까?
아니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로 나아겠습니까?

다윗은 만사를 제쳐놓고  성막으로 들어갔습니다(18).
기도는 모든 일을 제쳐놓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다른 일중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일의 제일 첫 번째에 해당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앞에 겸손했습니다(18).
그가 받은 축복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했습니다(22-24).

 하나님의 계속적인 축복을 간구했습니다(29).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권좌,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나라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동안 나의 삶속에 주신 축복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속적인 풍성한 은혜와 인도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잠16:9)

2014년 3월 14일 금요일

예배

삼하6:1-2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언약궤는 거룩한 것입니다. 만질수 없습니다..

하지만 웃사가 언약궤를 만짐으로 죽음을 당했습니다(7).
웃사는 좋은 의도로  그렇게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이 되었습니다(민4:15).

좋은 의도이던, 합리적이던 그것은 사람의 생각이고,
신앙인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웃사의 불순종은 신앙 공동체가 해야 할 본질을 일깨워줍니다.

웃사의 죽음에 대해 다윗이 처음 보인 반응은 분노였습니다(8).
하지만 곧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그 두려움은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면서 큰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12-15).

다윗은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상징임을 알았고,
그것이 오벧에돔의 집에 큰 축복을 가져왔음을 알았습니다.
예루살렘에도 하나님의 거룩한 축복이 임하게 됨을 알았습니다(11-12).

그래서 그는 하나님앞에서 아이처럼 껑충껑충 뒤며 춤을 추었습니다(16,20),
그의 모습이 그의 부인에게 비웃음을 샀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16).

전심으로 춤을 추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다윗의 모습!

나의 예배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해봅니다.

2014년 3월 13일 목요일

지도자의 권위

삼하5:1-1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다윗은 마침내 전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지파가 그를 지지했습니다(1-3).

다윗의 왕권은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이것은 교회나 선교단체의 지도자에게도 큰 교훈을 줍니다.

지도자를 세울때에는 모든 교인들과 구성원들이 참여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마음으로 동의해야합니다.
어떤 사람의 영향력(?)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백성들의 탄탄한 지지의 기반으로 그 여세를 몰아 예루살렘을 점령했습니다(7).
예루살렘은 요새라 점령하기 힘든 지역이었고, 아무도 그곳을 쉽게 점령하리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6).

다윗의 승리는 하나님이 언제나 그와 함께 하심을 입증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권위는 날로 날로 더해갔습니다(10).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의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곧 한님이 그와 함께 하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12).

2014년 3월 12일 수요일

다윗의 본

삼하2:1-7;3:1 오늘의 묵상입니다.
삼상 16장에서 다윗은 이미 사무엘로 부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사울이 죽자 다윗은 모든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왕이 될수 있었지만
그는 남쪽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7).
북쪽 이스라엘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었습니다(10).

그럼에도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과 인도하심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더욱 하나님을 신뢰했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지기 까지 인내로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리더는 자신의 정치력과 힘으로 목적한바를 획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에 온전히 맡기는 자입니다.

후에 다윗이 손을 대지 않아도 이스보셋이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삼하4).
이때 다윗은 이스보셋을 죽인 자들에게 상을 주기보다는 벌을 내려 죽였습니다.

교회이던 선교단체이던  사역자로, 지도자로 세움을 받은 사람은 다윗의 본을 따라야함을 다시 느낍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문을 여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앞에서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는데 힘을 쏟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데 집중했다는 사실입니다.

2014년 3월 10일 월요일

기다림

삼하1:1-1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사울은 다윗의 가장 큰 대적자였고 박해자였습니다.
반면에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후원자였습니다.

다윗이 이 두사람의 죽음소식을 들었을때 그는 크게 애통해했습니다(12).

우리는 다윗이 요나단의 죽음은 정말 슬퍼했고 사울의 죽음은 내심 반가워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의 슬픔은 진심이었습니다.

만일 내가 다윗의 입장이 되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사울은 다윗의 대적자 일뿐만 아니라
 왕이 되는데 큰 걸림이 되는 사람입니다.

사울의 죽음은 다윗이 쉽게 권좌에 앉을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보통 사람 같으면 반갑지 않겠습니까?

본문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알린 사람에게 다윗이 어떻게 대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죽어가는 사울을 죽이고 그 소식을 다윗에게 알리면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아말렉인은 생각했습니다(10).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자를 손대는 것을 큰 죄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14-15).

사울은 죽는 날까지 다윗의 대적자였지만
다윗은 사울이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자'였습니다(16).

오직 사울을  제거하실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이심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2014년 3월 7일 금요일

하나님의 은혜

행23:12-2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바울을 죽이기전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결심한 40명의 결사대가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바울은 큰 위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뜻밖에 세명의 사람들을 사용해 바울을 보호하십니다.

첫째는 바울의 조카입니다(16).
만일 바울의 조카가 ' 내가 삼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젊고 어린데, 누가 내말을 들어줄것인가? 하고 생각을 했다면 주저했을 것입니다.

둘째는 백부장입니다(17-18).
만일 백부장이 '내가 왜 이 죄수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결사대가 있다는 확인 되지 않는 사실을 가지고 귀찮게...  그러면 바울의 말을 무시했을 것입니다.

셋째는 천부장입니다(19-22).
만일  천부장이 ' 내가 왜 어린 이 젊은이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내가 왜 한 트러블 매이커(troublemaker)를 보호하기 위해 470명의 군인들을 동원해야 하는가?' 했다면
바울은 큰 위험에 빠졌을 것입니다.

이런 가정들은 다 기우(杞憂)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생각을 지배하셨고, 바울을 보호하셨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에도 위기의 순간이 오지만
언제나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기억해야합니다.

 " 주를 두려워 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31:9)

2014년 3월 6일 목요일

행22:30-23:1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앞에서 바울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죄가 없음을 역설합니다(1).

공회원들 가운데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증거하자(6),
원래 신학적 입장차가 컸던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8) 사이가 더욱 나누어졌습니다(9).

바울도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자신의 입을 치라고 명하자

그는 대제사장에게 저주에 가까운을 말을 퍼부었습니다(3).
물론 나중에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를 했지만...(5).

말이 항상 문제입니다.
우리는 말로 다른 사람을 격려할수도 있고(히10:24),
분노를 가져올수도 있습니다(잠15:1).

세울수도 있고 무너뜨릴수도 있습니다.
진리를 말할수도 있고 아첨할수도 있습니다.

말의 지혜, '때에 합당한 말'이 얼마나 필요합니까?(잠25:11).

항상 우리의 말을 '은혜 가운데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골4:6).

2014년 3월 5일 수요일

시민권

행22:22-2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은 가죽줄에 매이고 재찍질을 당했습니다(24-25).
바울은 백부장에게 로마 시민권자인 자신이 채찍질을 당하는 것은 부당한 일임을 말했습니다(25).

로마법에는 로마시민이 채찍질을 당하는 것이  금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부장의 말대로(28)
당시 로마 시민은 로마 시민권자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에게는  자동적으로..
어떤이는 사기도 하고,
아니면  로마에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상으로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날때부터 시민권자였습니다(28).
그렇지 않고는  천부장 처럼 엄청난 돈을 지불해서 시민권을 사야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도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그 값은 세상의 돈으로 치룰수 없는 것입니다(벧전1:18).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값을 다 지불하셨습니다((고후5:21).

우리는 태어날때 부터가 아닌  믿음으로(엡2:8).
하늘의 시민권자가 되었습니다(빌3:20).

값을 지불하셔서 나로 하늘의 시민권을 갖게 해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2014년 3월 4일 화요일

만나는 사람들에게..

행22:6-2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의 회심은 성경안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메섹 도상의 경험은(6) 그의 생애를 한순간에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다르게 다양한 모습으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단순한 전도로
어떤 사람은 고난을 통해
어떤 사람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 자연스럽게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주님을 만났지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새로운 신분(요1:12),
새로운 삶(고후5:17)
새로운 공동체(엡3:6)
입니다.

바울이 자신이 만난 부활의 주님을 열렬히 증거했듯이

오늘 내가 만난 예수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증거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2014년 3월 3일 월요일

주님을 위해

행21:37-22: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가 예상했던 대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31).
바울이 매를 맞고 있을때 천부장이 바울을 체포했습니다(33).
바울을 해하려하는 무리로 부터 바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35).

유대인들은 바울이 그들의 언어로 말함을 듣고 조용해졌습니다(22;2).
바울은 헬라말과 히브리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할수 있었습니다.
그는 양쪽의 문화를 다 이해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시민권자일뿐만 아니라,  당대의 유명한 대학도시에서 양육된 사람이었습니다(39).

그는 평범한 유대인은 아니었습니다.
유명한 율법 선생밑에서 훈련을 받은 자요, 어느 유대인 못지 않는 열심을 가진 자 였습니다(22:3).

바울의 이런 배경과 그가 받았던 훈련을 보면
주님이  왜  그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택하셨는지를 알수 있습니다(행9:15).

주님은 내가 누구인지, 나의 성향이 어떠한지, 내가 받은 교육, 재능, 훈련, 은사, 내가 처한 상황을 누구보다 더 잘아십니다.

그것을 오늘 주님을 위해 사용하도록 나를 이끄실것 입니다.

2014년 2월 28일 금요일

이런질문을

행21:17-2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그의 가르침이 유대인들에게 커다란 반감을 사고 있음을 들었습니다.(21).

사실 바울은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할례에 대해
참 할례는 외부적인 할례가 아닌  마음에 행함을 가르쳤습니다(롬2:25-29).

그러면서도 복음외에 다른 문제로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해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롬14:13-14).

야고보는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이 반감을 완화 시키기 위해
바울로 하여금 결례를 행하며, 예루살렘 교회에 서원한 사람들의 머리깍는 비용을 지불할 것을 제안했습니다(24).이렇게 함으로 유대인들의 오해를 풀어줄려고 했습니다.

야고보의 제안은 지혜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속박으로 자유케 하셨습니다(롬8:1-2, 갈5:1).
그럼에도 교회연합과 복음을 위해 때로는 그 자유를 제한할 필요가 있습니다.(진리에 위배되지 않는 한).

우리는 세상의 문화에 지배를 받는 자가 아니지만(요일2:15-17).
이 세상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을 위해 세상 문화에 지배를 받는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어떻게  다가갈것입니까?

본문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2014년 2월 27일 목요일

오늘 내가

행21:1-1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고난을 성령님께서는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두로에서는 형제들을 통해 하셨고(4), 가이사랴에서는 아가보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11).

모든 형제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간곡히 권면했습니다(4,12).
하지만 바울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고난과 순교를 각오하고 있었습니다(13).

그는 복음전도에는 반드시 고난이 따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당시 바울 곁에 있었다면 우리는 바울에게 무엇이라고 말할것입니까?
그에게 간곡하게  권하여 우리 곁에 머물게 할것입니까?
아니면 고난 받을 그를 격려 할것입니까?

우리는 그의 안전을 더  생각할 것입니까?
아니면 그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생각할것입니까?

주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을 면제해주신다고 약속하신적이 없으십니다(요16:33).
그러나 주님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순간에서든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28:20).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돌아보고 격려'가 필요 합니다(히10:24)

오늘 내가 기도하고 격려해줄,사역자나 형제, 자매는 누구입니까?

2014년 2월 26일 수요일

바울처럼

행20:13-2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항상 개인이나 대중들 앞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놓치지 않을려고 힘을 썼습니다(20).
이것이 " 주 예수께 받은 사명"임을(24) 한 순간도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본문에서의 바울처럼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직업이 있고, 가정이 있고, 사회생활이 있고, 혹은 취미나 여가 생활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처럼 동일하게 부르심을 받지는 않았습니다(약3:1)
모두가 다르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동일합니다.

바울과 같이 열심을 품고 주를 위해 사는 것일겁니다(롬14:8).

주님!
오늘 저의 삶이 헛된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하시고
바울 처럼 살게 하소서



모든 능력은..

행20:25-3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교우들과 다시 만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25).
바울은 3년동안 에베소에서 쉬지 않고 복음 진리를 가르쳤고 눈물로 목양을 했습니다(31).

마치 자녀들을 양육하는 아버지처럼, 교회의 지도자로서, 동역자로서, 교회의 한멤버로서, 신앙의 친구로서 그들을 섬겼기에 그들과의 이별은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떠나면 거짓선생들이 교회에 들어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변형시키고 양떼들을 헤칠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30).
항상 양떼들을 걱정하는 목자로서 바울을 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과 은혜의 말씀에 그들의 영혼을 맡겼습니다(32).

목회자가 힘쓰고 수고하지만 바울처럼  나머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양들을 맡기는 것이
올바른 태도입니다.
모든 능력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기에..



2014년 2월 24일 월요일

복음전도는

렘10:1-2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는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는 인간이 행하는 가장 어리석고 무식한 행동입니다(14).

예레미야는 생명이 없고(5,9), 헛된(15) 우상과 살아계신 (10),
만물의 조성자이신(16) 하나님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는 인간의 죄성에서 나오는 가장 끈길긴 죄악입니다.

율법을 알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유다백성들에게 우상 숭배가  넘쳐났고,

바울이 격분을 했던 철학의 도시로 알려진 지성적인 아덴에서도 우상이 넘쳐났습니다(행17:16). 우상숭배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보여주는 실증입니다.

오늘에도 역시 많은 사람들이  돈, 섹스, 권력의 우상아래에 살고 있습니다.

복음전도는 어리석고 무식한  인간의 본분을 되찾게 해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히 그분을 즐거워 하는 것'이지요.

2014년 2월 21일 금요일

주변에

렘8:18-9: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예레미야의 고뇌가 잘표현 되어 있습니다.
망해가는 유다와 백성들을 보면서 그가 얼마나 슬퍼하고 있는지를 잘보여줍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감정을 백성들과 동일시 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 상함이 곧 자신이 상함이' 이라고 생각합니다 (21).

마치 자신이 병들어 치료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병들어 있는(죄악으로) 백성이 길르앗의 유향과 의술로 치료받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22).(당시 길르앗은  의술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앞으로 이들에게 닥칠 모진 고난을 보면서
안타까워 주야로 울겠다고 하고 있습니다(9:1).

하지만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죄악을 혐오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9:2)

그의 감정은 매우 복잡합니다.

그의 감정은 복잡하였지만 그것은  진실한 선지자의 마음에서 나오는 그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슬픔과 탄식!

주변에  그리스도없이  죄악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영혼들을  보는 우리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2014년 2월 19일 수요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

렘7:1-2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유다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항상 보호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대해 예레미야는 '아니오' 라고 대답했습니다(4)

만일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고 정의를 행한다면 하나님이 보호하시지만

그렇지 않다면 거룩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도 예외가 아닐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이 떠날것입니다.
전에 엘리가 제사장으로 사역했던 실로처럼 말입니다(12-15).

성전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대표하는  곳입니다(11)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보이는 곳입니다.

유다사람들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2)
한편으로는 이교도들이 섬기던 ' 하늘의 여왕'께 예배했습니다(18).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들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세 번이나 반복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16).
역겨워하셨습니다

무슨 기도이던 하나님이 다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흠향하시는 향기가 아닌(계5;8)
역겨운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과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는 것 보다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2014년 2월 17일 월요일

설교자

렘6:1-1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군대를 동원해서 예루살렘을 지킨다고 하지만 소용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북방의 군대(바벨론)를 동원해서 시온을 멸망 시키실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1-2).

거룩한 예루살렘은 벌받을 성입니다(6).

하나님의 백성에게 환난이 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오면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실수 밖에 없었던 예루살렘이 어떠했습니까?(6-8,13-15).
귀가 할례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의 소리는 좋아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싫어했습니다(10).

탐욕이 넘쳐났고(13),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해야 할 선지자와 제사장들은 평강하다고(14)
 거짓을 전했습니다.

진리를 바르게  전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아부를 한다면
하나님앞에 가증한 것입니다.
그리고 듣는 사람들을 더욱 죄악에 빠지게 할 것입니다.

설교자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안에는 이런 모습은 없습니까?

2014년 2월 14일 금요일

박해받는 교회를 위한 기도

마10:17-3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선교와 전도에는 항상 박해가 따릅니다. 거부를 당하고 때로는 심한 모욕을 당하기도 합니다.
주님이 이미 이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예언 하신 박해는(17-23)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당했던 것이고,
지금도 여전히 전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모슬렘권, 불교권, 흰두교권 아래의 우리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이 테러의 표적이 되고, 왕따를 당하고, 고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세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심하게 핍박하는 북한에는 5만-7만명의 그리스도인들이 감옥, 정치 수용소,강제 노동 수용소, 강제 노동과 같은 환경속에서(자료출처:Open Doors) 말로 표현할수 없는 고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일을 미리 말씀하신 주님은 세가지의 당부를 하셨습니다.
첫째는 사람들을 조심할것(17)
박해가 예상이 되면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준비해야 합니다(엡6:10-18).
둘째는 걱정하지 말것(19).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십니다(20).
성령님은 어떤 상황속에서도 우리의 생각을 지키시고 내가 무슨말을 해야 할것임을 알려주실것입니다.
셋째는 두려워하지 말것(26,28,31).
우리가 두려워해야할 대상은 박해하는 연약한 인간이 아니라
" 몸과 영혼을 함께 지옥에 멸하실 분"(28) 오직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신앙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형제, 자매님들의 신음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신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평안한 가운데 주님을 섬기는 우리가 이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이런 환경을  허락하신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실것입니다.

2014년 2월 13일 목요일

준비된 영혼

마9:35-10:1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의 복음전도는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시는 사역이셨습니다(35)
열두 제자들을 세우시고 그들을  파송하셨습니다(10:1-2).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역을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지를 정확히 가르쳐 주셨습니다(5-8).

복음 전도는  뭔가를 연구해서 고안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행하신 방법대로  그대로 하면 됩니다.

제자들은 파송을 받으면서 그들의 필요에 대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했습니다(9-11).

그리고 다양한 반응을 접할 것입니다.

누구나 다 환영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심하게 거부를 당하기도 할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누군가 복음을 들을 준비된 영혼들을

하나님이 이미 예비 하셨다는 사실입니다(행16:14).

2014년 2월 12일 수요일

원하시는대로

마9:27-3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이 지나가실때 두 맹인이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이상하게도 주님은 그들의 요구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셨습니다(27).

하지만 주님이 집에 들어가셨을때  비로서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28-29).
다른때와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얼마후에는 거리에서 귀신 들린 자를 만나셨고 그들을 사람들 앞에서 고쳐주셨습니다(32-33).

두 맹인과 귀신 들린자를 다르게 취급하셨습니다.
왜입니까? 마태는  아무 대답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분명한것은 주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하심을 보게됩니다.
그분의 목적과 그분의 뜻에 따라 행하심을 봅니다.

어떤때는 기도를 계속하게 하시고,
어떤때는 즉각 응답하시고,

어떤때는 은밀하게 응답하시고(28-29)
어떤때는 사람들 앞에서 그분의 권능을 드러내십니다(33).

우리가 주님께 개인문제로  구하던지
남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던지

주님은 그분의 시간에, 그분의 뜻에 따라
그분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응답하심을 믿습니다.

2014년 2월 9일 일요일

주님처럼

마9:9-13절,오늘의 묵상입니다.
세리인 마태를 제자로 삼으신 주님의 결정은(9)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세리는 유대인들에게 매우 교활한 자로 취급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세리가 로마제국의 압잡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돈밖에 모르는 돈버러지 처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마태의 집에서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10)  본
바리새인의 질문은(11)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는 질문이었습니다.

이때 주님의 대답은 단순 명확했습니다.
건강한자에게는 아니지만 병든 자(죄인)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12).

우리주변에도 세리와 같은 병든 자들이 많습니다.
술, 마약, 섹스, 동성연애등 온갖 죄악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주님은 우리가 그들을 정죄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처럼 그들의 친구가 되어 복음으로 그들을 치유케 해주는 사람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2014년 2월 7일 금요일

중풍병자처럼

마9: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주님이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내용입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친구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친구를 불쌍히 여겨 그를 데리고오 친구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2).

 주변에 나의 영적인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혼자는 믿음으로 일어설수 없는 사람,
연약한 사람
그래서 서로 돌아보고(히10:24)
한지체가 되게 하신 이유입니다(롬12:5).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2).
주님의 이 선언은 유대지도자들을 매우  언짢게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 신성모독, 죄를 범했다고 속으로  판단했습니다(3).
주님은 이들의 생각을 꿰뚫고 계셨습니다(4).

주님은 다니엘이 예언한 " 인자"(단7:13-14) 를 자신에게 적용하시면서
유일하게 죄를 사하실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셨습니다(6).

한 사람의 중풍병자가 죄에서 놓임을 받고,
육체의 질병에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만이 나의 죄를 용서하실수 있습니다.
주님만이 나를 변화시킬수 있습니다..
나의 나쁜습관,
잘못된 생각도 주님만이 바꾸실수 있습니다.

주님!
중풍병자처럼 저도 변화 시켜주소서!!

2014년 2월 6일 목요일

약속하신

마8:28-34절,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이 가신 가다라 지방의 어는 길은 누구나 지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곳엔 사람들이 통제할수 없는 사나운 귀신 들린 두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28).

주님은 이 두사람을  한 마디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고쳐주셨습니다(32).
이들을 고치심으로 주님은 영적인 세계에도 '절대 권위자'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29,32).

두 사람에게 들어 있던 귀신들이 돼지떼에게로 들어가자 돼지떼가 바다에 몰사했습니다(32).

이곳 사람들은 '다닐수 없는 길'을 회복 시켜주신  생명의 주님을 영접하기 보다는
흉악한 귀신들의 결박에서 해방된 사람들을 기뻐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경제적 손실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곳을 떠나기를 원했습니다(34).
씁슬함을 줍니다.

우리 주변에 사람들이 '다닐수 없는 길'이 많습니다.
마귀의 세력에 사로잡혀 폭력, 살인, 테러, 우상숭배, 호색, 온갖 더러운것들이 있습니다.

주님!
주의 복음으로 '다닐수 없는 곳을 다닐수 있게' 회복시켜주시고,
깨끗하게 하시고
치유하소서!

약속하신 새하늘과 새땅(계21:1)을 오늘도 소망하며 삽니다
 

2014년 2월 4일 화요일

주님을 따르라

마8:14-2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주님이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는 장면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15-17).
마태는 이일을 기록함으로  주님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17, 사53:4)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하였습니다.

메시야이신 그분을 따를려고 하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서기관은 '  어디로 가시든지 주님을 따르겠다' 고 했습니다(19).
반면에 한 사람은  머뭇거렸습니다(21).

주님을 따르는 것은 한번의 결단으로만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의 삶속에서  영속적으로 행해지는 일입니다.

" 너는 나를 따르라"(22)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오늘도 " 모든 무거운것을 ...벗어버리고"(히12:1)

주님을 더욱 가까이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2014년 2월 3일 월요일

주님앞에

미8:1-1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나병환자와 백부장의 하인이 고침 받는 내용입니다.
문둥병자와 백부장(이방인)의 공통점은 유대인들에게 부정한 사람들로 취급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무릎쓰고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둘다 겸손한 모습을 보였습니다(2,6,8)

주님께 기도할때에 이 두사람이 보여준 자세로 기도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두 사람은 주님만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변화 시킬수 있는 분임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나병환자는 " 원하시면" 이라는 단서를 붙혔습니다(2).
나병환자였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거절당한 경험을 가진 아픈 상처가 그를 머뭇거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람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이 사람에게 기꺼이 손을 내미셨습니다(3).

유대인들이 꺼리는 백부장(이방인)의 집에도 기꺼이 가셔서 그의 하인을 고쳐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7).

오늘 내가 처한 상황,
다른 사람의 문제(백부장 처럼)를 가지고 주님앞에 나갑니다.
주님이 모든 상황을 변화 시켜주실줄 믿습니다

2014년 1월 31일 금요일

의인의 삶

렘5:1-1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다윗이 간음죄를 짓고 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를 드린적이 있습니다.
" 내속에 진실함을 원하시오니"(시51:6).

하지만 예레미야 시대에는 죄를 범하고도 회개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징계하시고 고통을 주셔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3).

예루살렘 거리에서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의인 한 사람을 찾을수 없었습니다(1).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사람이 없었던 것처럼(창18)...

하나님의 거룩한 도시인 예루살렘이나 소돔과 고모라는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을 곡해하고 있었습니다(12).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수 없는 운명에 처한 유다백성들입니다(6,14-17).

본문에 예루살렘에 의인 한 사람이 생명인 것처럼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사람이 생명인 것처럼

나는  주위를 살리는 의인의 삶을 살고 있는가? 생각해봅니다.

2014년 1월 30일 목요일

하나님의 슬픔

렘4:19-3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예레미야의 슬픈 탄식으로 시작 됩니다.
" 슬프고 아프다 나 마음속이 아프고..(19)

비록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지만 이것은 곧 하나님의 슬픔입니다.

하나님이 백성들이 당할 고난은 필연적입니다.
 장차 바벨론의 침략으로 유다가 당할 비참한 광경을 예레미야는 알고 있습니다(20,29)

바벨론을 징계의 막대기로 사용하셔서 그의 백성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더욱 아프십니다

마치 아버지가 마지막 수단으로 자녀를 징계하는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슬픔의 말씀입니다.

오늘도  이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을 보시며
오래참으시며 다 회개하도록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벧후3:9)

2014년 1월 28일 화요일

처음사랑

렘2:1-2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의 예레미야의 멧시지는 매우 생생합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은  신혼때의 신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인도를 잘 따랐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이 사막일지라도 그분을 의지하며 따랐습니다(2)

하지만 이들이 하나님의 인도로 가나안으로 들어왔을때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섬겼다고 했습니다(4-8).

깃딤 섬들에 사는 사람들, 게달에 사는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신들을 바꾸지 않았습니다(10-11).

거짓된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도  고집스럽게  그들의 신을 섬기는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헛된신을 따른다는 것입니다(11).

이것은 하나님과 싸우는 일이며(9), 하늘도 놀랄일입니다(12).

하나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계2:4)
모습 그것이 혹 나의 모습은 아닌지요?

2014년 1월 27일 월요일

부르심에

렘1:1-1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예레미야는 제사장의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1).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태어나기전 그를 선지자로 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4-5).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예레미야는 모세와 같은 반응을 보입니다(출4:10)
즉 자신은 말을 잘할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6).

이런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확신을  주시기 위해 두 가지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살구나무 환상입니다(11)
모든 나무들이 겨울잠을 자지만 살구나무는 겨울동안에 깨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깨어서 때가 되면 이루심을 말씀합니다.

다른 하나는 끓는 가마의 환상입니다(13)
이것은 바벨론에 의해 유대백성들에게 임할 환난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말씀을 전할때 그와 그의 멧시지가 거부를 당할것이라고 하셨습니다(19). 그럼에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8).

하나님이 부르심에는 언제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은 그 부르심에 충성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고전4:2).

2014년 1월 25일 토요일

제한되는 자유

고전10:234-11: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이교도 신전에서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은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것을  엄격히 경계하였습니다(14-22).

하지만 본문은 다른 장소에서 먹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시장에서 파는 고기(25), 혹은 불신자 집에 초청 받았을때 먹는 문제입니다(27).

당시 시장에서 파는 고기 가운데는 이교도 신전에서 나온 것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비록 제물이었지만 파는 상품이었기에  먹어도 가하다고 했습니다(25).
음식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다 선합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 보시게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창1).
또한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26).

영적인것만 선한 것이고 물질은 무조건 악하다고 하는 것은 성경이 아닌
이교도 사상(영지주의)입니다.

음식은 다 선한것이기에 불신자 집에 초청을 받아 음식을 먹어도  상관이 없습니다(27),
그러나 음식이 제물에 사용되었던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 말을 한사람의 양심을 위해 먹지 말아야 합니다(28-29).

본문은 성경에 명시되지 않는 일을  행하는 경우에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가?(31)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일인가?(32-33)
이 두가지 관점에서 행해야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겐 자유가 있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가?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우는 것인가?
에 따라 나의 자유가 제한 받아야 합니다.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히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자세(고후4:5)

그래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바울을 본받는 오늘의 삶을 살겠습니다(11:1).

2014년 1월 24일 금요일

겸하여

고전10:14-2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 가운데  이교도 신전에 앉아 우상제물을 먹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14).

그리스도인들은 성찬에 참예하는 사람입니다.
성찬에 참예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을  의미합니다(16-17).
  그리스도의 지체됨을 확인하는 것입니다(고전6:15).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물을 먹는 것이 하나님의 제단에 참여한 것 처럼
이교도 신전에서 우상 제물을 먹는 것 바로 우상제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18).

세상은 온통 우상으로 둘러 쌓여있습니다.
돈, 쾌락, 섹스, 명성... 이런 우상들이 세상과 사람들을 지배합니다.

그리스도이라 하면서  이런 우상의 유혹을 버리지 못하면
이방신전에서 우상제물을 먹는것과 같습니다(20).

주의잔과 귀신의 잔(세상의 우상)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을 겸하여 참여하지는 않습니까?(21)

2014년 1월 22일 수요일

신앙생활

고전9:19-2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19).
자기 부인의 모습입니다(눅9:23).
종의 모습입니다.
그가 왜 이런 모습을 취합니까? 더 많은 사람들을 주님앞으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19).

사람들을 주님앞으로 인도하는 것은 말의 설득이나 강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종의 모습으로, 희생의 모습으로 됩니다.

주님도 종의 모습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셨습니다(빌2:6-11).

또한 그는 복음 전파의 융통성을 보입니다.
그 융통성은 복음진리를 거스리지 않는 범위내에서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의 모습으로(20),
율법이 없는 자(이방인)에게는 율법이 없는 자처럼(21),
약한 자들(진리 지식이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22)
행했습니다.

그 목적도 오로지 "얻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즉 사람들을 그리스도앞으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그는  신앙생활을 경주자에 비유했습니다.
경주자의 특징은 ' 절제' 입니다(25).

바울은 금욕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절제하는 생활입니다.
절제는 경건 생활의 바탕이 됩니다.

경주자 향방없이 달리지 않는 것 처럼
신앙생활도 목표지점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므로 단순함입니다.

오직 주님외에 모든 군더더기는 버리는 것입니다.

2014년 1월 21일 화요일

바울의 본

고전9:1-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은 사도로서(1-2), 고린도 교회로 부터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전도 했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왜 그런 권리를 가질수 있습니까?

이에대해 그는 일하는 사람은 정당한 댓가를 받음이 당연하고(7),
구약성경에도 분명히 명시되어 있고(8-9,13),
주님이 친히 명령하신 것(14)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권리를 포기하고(15-18),

자신이 수고해서 자기 생활비뿐 아니라 동역자의 생활비도 감당했습니다(행20:34).

그것은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해서이고(12),
약한 고리도 교회에 누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고후11:9).

바울의 생활은 눈코 뜰새 없이 바빴을것입니다.
복음 전도에 전력 투구했을뿐만 아니라(딤후4:6),
생활비까지 벌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이 모습은 물질에 노예가 된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해있는 교회에 큰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모습을 통해서
주님의 일을 하는 자는 복음이 열매를 맺는 것으로 기뻐하는 자이지(빌1:12)
보수를 바라고 일하는 자가 아님을 다시 생각하게 해줍니다.

2014년 1월 20일 월요일

자유케

고전8:1-1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을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지식이 있는 사람은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4),
그 음식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10).

그러나 지식이 약한 사람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가리켜 '약한 양심'을 가졌다고 했습니다(7).

이 약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런 음식이 무슨 문제가 있느냐 하며 강요하며
그들의 양심을 상하게 한다면,
믿음이 약한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곧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12,눅17:2).

교회안에 모든 사람들이 같은 지식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같은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나의 신앙양심이 중요하듯이 남의 신앙양심도 중요합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이 그 믿음대로 행하지 않으면 무엇이든지 죄가 됩니다(롬14:23).

교회는 서로 덕을 세우고
서로를 자유케 하는 곳입니다.

자유함이 없다면 그것은 성령공동체가 아닐것입니다(고후3:17).

2014년 1월 18일 토요일

희년의 축복

레25:8-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오십 년째 해를 희년이라고 합니다.
희년에는 땅을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줍니다.
노예가 된 자는 자유케 됩니다(10).
손상된 모든것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 놓습니다.

땅도 경작하지 않고 쉬게 됩니다(11-12).

평화와 자유와 회복의 축복의 해가 희년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희년을 주신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주시는(사61:1)

모든 죄의 노예로 부터 자유게 하시는 (요8:32-36)
그분의 사역을 상징해주시기 위함입니다.

긍휼과 자비,의와 평화, 치유의
주님께서 주시는 희년의 축복을 오늘도  모든 이들에게 전합니다!! 아-멘

2014년 1월 17일 금요일

영적인 행복

레23:1-1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육체적으로 쉬는 날이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입니다(3).

주님도 안식일을 우리를 위해 주셨다고 하셨습니다(막2:27).
바쁘게 살고 힘든 일이 많은 세상에서 안식일의 주인이신(막2:28)
주님안에서 안식함으로 천국의 맛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자주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절기를 제정하신 것 같습니다(4-8).
이 절기를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선하심을 상기 시키기 위함이요,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은혜가 앞으로도 계속 될것임을 상기 시켜 믿음을 새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초실절(유월절 다음 처음 안식일 다음날)을 만드시고 처음 익은 곡식단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셨습니다(9-14).

하나님께 드리는 것 자체도 영적 즐거움이요, 행복입니다.

이것 역시 이 세상에서 천국의 맛을 누리는 기쁨입니다.

2014년 1월 16일 목요일

바른 관계

레19:1-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사람들과 두가지 관계의 중요성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성과 같습니다.
즉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듯이 다른 사람들과도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처럼 거룩해야 합니다(2).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합니다(4).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긍휼과 자비로(9,10,14),
정직함과 의로움으로(11-13,15,16),
선한양심과 진실함으로 (17-18)로 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미6:8).

주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내용이라고 하셨습니다(마22:40).

바울도 "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꺼리낌이 없기를 힘쓴다"(행24:16)고
했습니다.

내가 사람에 대해 어떻게 대하는것을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알수 있습니다(요13:35).

2014년 1월 14일 화요일

성결

레11:1-12, 41-4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은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나누셨습니다.
노아시대에도 이 개념이 있었습니다(창7:2).

 하나님이 창조하신 짐승들을 깨끗함과 깨끗하지 못함으로 구분하신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깨끗하지 못한 짐승은 위생과 건강에 좋지 못함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구분하신 것은 위생적인면 보다는  성결함을 가르시기 위함입니다.
레위기의 주제는 '거룩함'입니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분하듯이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구별된 사람이기에 구별된 삶을 살도록 가르치십니다.

주님도 우리가 '하나님아버지의 온전하심을 닮으라'(마5:48)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도 "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말라"(엡5:3)고 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보시기에 온갖 더러운 것은 이름조차 부르지 않는

구별된 택한 백성으로 왕같은 제사장으로 (벧전2:9)살겠습니다.


2014년 1월 13일 월요일

번제

레1:1-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번제의 원뜻은 '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번제는 헌신을 나타내는 제사입니다.

번제의 마지막 순서로 제사장들은  제물을 불사릅니다.
제사장들이 제물을 불사르면 "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9,13,17)라고 했습니다.

온전한 예배는 '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됩니다.
또한 온전한 예배는 번제물을 완전히 불사르듯이 나의 전인격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입니다.

번제는 성막에서 매일 드리려집니다(레6:9)
매일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 헌신해야 합니다.

안식일에는 번제를 두 번 드렸습니다(민28:9)
주일에는 더욱 예배에 힘쓰고 하나님이 주시는 더 큰 은혜를 사모해야합니다.

그래서 한 주간을 세상을 좇는 자가 아닌(요일2:15-16),
하나님께 드린 번제물(헌신자)로  살아갈수 있습니다.


2014년 1월 10일 금요일

단순함과 지혜

마7:13-2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남을 판단하지말라고(7:1-2) 말씀하신 주님은
본문에서는 중요한 선택과 지혜로운 분별력을 촉구하셨습니다.

그 선택은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13-14).
좁은 길은 남들이 다가는 넓은 길이 아닙니다.
겉보기에 좋고 화려한 길이 아닙니다.

그길은 길이 좁고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
이길은 참되게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눅9:23).

또한 분별은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는 것입니다(15).
주님은  어린 아이와 같은 단순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지혜로운 어른 같은 분별력 양면성을 가르치셨습니다.

말재주가 그럴싸한 사람,
카리스마가 있어서 사람들을 끄는 매력이 있는 사람,
사람들이 환호하는 사람
하지만 그 열매를 보고 판단할수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20).

사도요한도 "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요일4:1)
고 했습니다.

갈수록 더욱 분별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날마다 단순한 믿음과 영적지혜를 구해야 할것 같습니다.



2014년 1월 9일 목요일

판단

마7:1-1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지? 를  가르치십니다.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1-4).

물론 건전한 비판을 금하시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금하시는 것은 자기가 재판장이 되어 남을 정죄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만이 계십니다(약4:12).
즉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 정죄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실 일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가르치심을 본받아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고 했습니다(롬12:10)

 남을 정죄하는 자가 아니라
오늘도 주님의 제자로 살겠습니다(요13:35).



2014년 1월 8일 수요일

걱정

마6:25-3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여러가지 일로 걱정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중에도 비중을 많이 차지 하는 것이 경제 문제일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주님의 말씀을 읽을때마다 큰 위안을 받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심을 상기시키십니다(32).
그분은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시고(6:11),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이미 아시는 분임을 강조하셨습니다(32).

물론 노동과 땀이 있어야 하지만 채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채우시되  내가 생각하는 모든것에 더욱 넘치게 하시고(엡3:30),
풍성하게 하시는 분입니다(빌4:19).

본문을 묵상하다가 앗시스의 프란시스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는 남루한 옷차림으로 살았지만 아이처럼 단순하게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평생 자유로움과 기쁨속에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이 이렇게 (단순함과 자유함과 기쁨) 살아야 함을
주님이  본문에서 가르치시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2014년 1월 7일 화요일

돈과 하나님

마6:16-2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바른신앙 생활에 대해 계속해서 도전하고 계십니다.
'은밀한 구제' ' 은밀한 기도' 또한 본문의 ' 은밀한 금식'(16-18)을 가르치십니다.

금식의 목적은 기도에 집중하기 위함입니다.
그 마음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향하기 위함입니다.

구제, 기도, 금식,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진실함'입니다.

또한 주님은  '탐욕'을 경계하셨습니다.
이것을 마몬(Mammon)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과거나 현대나 시대를 초월해서 마몬의 힘은 그 어떤것 보다 강력합니다.
물질주의, 돈,,, 강렬한 욕망이요, 유혹입니다.

그 어떤곳에도 돈의 힘이 작용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돈으로 부터 온갖 죄악이 시작이 됩니다(딤전6:10).

주님은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24).

돈과 하나님
나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요?(21)

2014년 1월 6일 월요일

주님의 가르침

마6:1-1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구제(2,3)와 기도할때(5-15)에 어떻게 해야함을 가르치십니다.
 구제와 경건생활에서 받는 강렬한 유혹은 " 사람에게 보일려고" 하는 유혹입니다.

사람에게 보일려고 하는 유혹은 '사람에게 영광을 받고자 하는 마음'입니다(2).
 누구나 쉽게 빠질 수 있는 유혹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이어서 주님은 기도에 대해 가르치시셨습니다.바른 기도는 그 시작이  하나님과 관련된 기도를  하고 다음이 우리와 관련해서 기도해야함을 말씀하셨습니다(9-13).

또한 기도를 가르치신 후 용서를 가르치셨습니다(14-15).

왜입니까?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기전 먼저 나의 죄를 용서 받아야 그 기도가 상달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는 먼저 남의 죄를 용서해야 합니다.
남에게 악감을 품고, 미움을 품으면서 나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는 자를 하나님은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15).

본문의 주님의 가르침을 볼 때
나는 언제나 주님의 가르치심과 거꾸러 행동하고 있음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2014년 1월 4일 토요일

계명

마5:33-4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유대의 랍비들의 가르침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랍비들은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도 지켜야 하지만, 그러나 맹세를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행한대로 덜도 말고 더더 말고 당한대로 복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같은 종교, 같은 유대인만이 이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반면에 주님은 헛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33-37)
선으로 악을 갚으라고 하셨습니댜(39-44).
그렇다고 정당 방어를 금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정당한 방어를 위해 하나님은 정부를 세우셨고, 공권력을 세우셨습니다(롬13:1).
이웃을 사랑하되 그 한계를 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43-48)

그리스도인이 산상 설교대로 산다면 세상은 변화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산상설교대로 사는 것이 어렵습니다.

주님이 우리가 지키지 못할 것을 가르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산상 설교는 내 힘과 내 의지로 지킬수 없습니다.

성령을 따라 지킬수 있습니다(갈5:16).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함을 입증해줍니다(요14:21).

2014년 1월 3일 금요일

절제

마5:21-3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살인과 간음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살인과 간음을 경고했습니다(출20:13-14).

살인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남의 생명을 강제로 앗아 가는 흉악한 죄악입니다.
간음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몸에 대해 죄를 범하는 행동입니다(고전3:16-17)

이 두죄는  개인적인 사람과의 관계, 신성한 가정, 사회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주님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분노하는 것도 살인으로 규정하셨습니다(22).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것을  간음이라고 하셨습니다(28).

예수님이 말씀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이 죄들은  살아가면서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바울의 고백처럼 "곤고한 사람" 처럼(롬7:24)
느껴집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나를 통제 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것이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인 절제(Self- control)입니다(갈5:23).

2014년 1월 1일 수요일

새해의 복

마5:1-1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 복' 이라는 말을 싫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 ' 행복' 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는 ' 행복'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다릅니다.
사람들은' 부' 와 '명성' 으로 부터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본문의 주님의 말씀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주님은 " 심령의 가난함","애통함" " 온유함"이 참 복임을 말씀하십니다(3-5).

 세상사람들은 ' 자기중심' '명성' '야망' 등을 좇아  살지만
주님은 이와 정반대의 삶을 살라고 가르치십니다(6-9).

주님의 말씀대로 산다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바보' 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기준과 세상의 기준은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가 주는 행복과 세상이 주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요18:36).

자신을 비우신 주님의 겸손과(빌2:5),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요15:20)
참된 행복임을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자'입니다(빌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