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30일 월요일

이 두 가지

마16:1-1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6).
누룩은 이들의 가르침을 암시해주는 말입니다.

누룩이 조용히 모르게 퍼져 나가듯이
자칫하면 잘못된 가르침이 내안에 침투할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무엇입니까?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지만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의 누룩은 무엇입니까?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세를 부인하고 현세주의로 살았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
겉으로는 신앙이 있는 것 같지만 속은 불신앙자이고

겉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지만
현세주의자가 되어 세상사람들과 똑같은 말을 사용하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아니한지..

이 두 가지가  항상 우리의 신앙을 오염시킵니다.

주님은 오늘도 이 두 가지를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2014년 6월 28일 토요일

은혜아래에..

렘30:1-2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영화나 드라마가 '해피엔딩'으로 마치는 경우 더불어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해피엔딩'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소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다시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3).

더 나아가 가장 큰 위안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 너희는 내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22;출6:7;겔36:28).

이들의 고난은 일시적입니다.
이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변하지 않습니다.

바울도  비록 상황은 다르지만 로마에 있는 교회에 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이에대한 답은 ' 다른 어떤 피조물도 그 어떤존재나 세력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입니다'(롬8:35-39).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불변 하십니다.

나의 과거 현재 미래 그 모든것이 그분의 은혜 아래에 있음을 믿습니다.

2014년 6월 25일 수요일

진리를 말하라

렘23:9-3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았습니다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들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뼈가 떨리며 술취한 사람 같았습니다(9).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말을 전했습니다(16-17).

죄를 회개해야 할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희망을 주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약속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도둑질 하는 것이었습니다(30).

이것은 예레미야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말이 얼마나 진실하고 정직한가입니니다.

바울도 "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하라"(엡4:15)고 했습니다.

2014년 6월 24일 화요일

지도자

렘23: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리더십은 항상 뉴스를 만들어냅니다.
정치, 경제, 사회 심지어 교회의 지도자들은 항상 주목의 대상이 됩니다.
도덕적이고 올바른 지도자들이 있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이지만
온갖 부정 부패에 연루했던 사람임에도 다시 리더가 되어 큰소리 뻥뻥치는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소위 '목자'라고 불리웠던 지도자들은
양들을 모으고 먹이고 돌보기 보다는
도리어 양떼들을 흩어버리는 자들(이들의 잘못으로 유대가 바벨론에 끌려가게됨)이었습니다.

이렇게 백성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사분 오열로 갈라놓는 지도자가 있는 반면,

양들을 모으고 희생하는 선한 지도자가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요10:11,14).

주님은 참지도자의 모습을  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참된 권위가 어떠한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참된 권위는 이것이 나에게 얼마나 유익한가를 구하는 자가 아니라
 섬김과 희생 그리고 정직한 인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지도자들이 대한민국에 많이 나오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될 줄 믿습니다.

2014년 6월 21일 토요일

내안에 계셔서...

렘19:1-1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 집에서 옹기를 사라고 하셨습니다(1).
옹기가 깨어짐같이 유대나라가 깨어질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10).

또한 백성의 어른들을 데리고 예루살렘 외곽에 위치한 힌놈의 아들 골짜기(도벳)로 가서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2).

이곳은 쓰레기를 버리는 장소였고 악행의 역사가 있던 곳입니다.
몰렉과 바알에게 어린아이를 불태워 바치던 곳이었습니다(4-6; 대하28:3;33:6).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일들을 행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교회도 타락한 시대가 있었고
그 시대에는 세상의 불신자들 보다 더 악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누가 이렇고 저렇고 함부러 남을 판단하거나 큰소리 칠 처지가 아닙니다.
나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더 악한일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든지 법을 어길수 있고, 남을 속일수 있고 심지어는 자신을 속일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내안에 계셔서 하나님의 율례를 따라 살게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겔36:27)
의지하며 오늘도 살아야 합니다.

2014년 6월 19일 목요일

은헤가 없이는...

렘17:1-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죄로 인해 바벨론의 침략으로 당할 고통을 선포합니다(3-4).
우상숭배와 온갖 악행을 자행했던 소위 '하나님의 백성'들이 처할 운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던 아니던 인간의 마음은 거짓되고 부패합니다(9).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마음이란 요사스러워서 잘속입니다.
스스로도 속게 하고 남을 속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부패하고 거짓된 마음을 보십니다(9-10)

 부패하고 거짓된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그 마음이 정직해지고, 정결해지고, 올바르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그가 전하는 멧시지로 인해 많은 모욕과 수치를 당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깊은 상처를  받았고, 깨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을 치유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14). 이것이 예레미야의 위대한점입니다.

거짓되고 부패하기 쉬운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부우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상처받고 깨어지기 쉬운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부우며
치유와 회복을 간구해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수 없기 때문입니다.

2014년 6월 18일 수요일

말씀을...

렘13:1-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상한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베띠를 사서 허리에 띠라고 하셨습니다(1).

그 띠를 유브라데강가 외진 곳 바위틈에 감추라고 하셨습니다(4).

여러날 후에 감춘 그 띠를 다시 가져오자 띠가 썩어서 쓸수 없게 되었습니다(7).
겉보기에 참으로 기이한 행동입니다.

띠가 허리에 밀착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밀착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지만 띠가 썩어서 쓸모 없게 된 것처럼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일지라도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썩은 띠와 같이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9).

여기에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더욱 강팍해집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3:8-8)고 했습니다.



2014년 6월 16일 월요일

진리를 전하는 자

렘11:1-2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예례미야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순종할 것을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1-17).

사회적으로 온갖 악행이 일어나고 우상숭배가 성행하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위험을 감수 하는 일입니다

안전을 보장받을수 없지만 멧시지를 전해야 하는 선지자의 고뇌를 엿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18-23절은 애가로 가득차 있습니다.

특히 예레미야를 해할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나돗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레미야를 미워하기 보다는 그가 전하는 멧시지를 미워했습니다(21).
그렇습니다. 설교자가 그가 전하는 멧시지로 인기를 누리기보다는
때로는 많은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가 진리의 밀씀을 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를 전하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21-22).

2014년 6월 14일 토요일

마지막 인사

고전16:1-2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오랫동안 경제적인 어려움속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시아에 있는 이방인 교회들이 힘을 모아 이들을 도왔다고 언급합니다(1-4. 고후8-9, 롬15:25-32).

바울은 고린도를 방문할 계획이 있었고,
디모데(10)를 고린도에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4:17).
그리고 그들의 영적인 돌봄을 위해 디모데를 다시 보낼려고 합니다.

디모데가 고린도에 가게 되면 그를 신임하고 그가 사역을 힘있게 하도록 도와줄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10-11).바울의 목회자적인 마음을 엿볼수 있습니다.

왜 고린도 사람 스데바나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와 함께  바울이 있는 에베소에 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은 지금 스데바나집에  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신뢰받고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15).

바울의 마지막 인사는 여러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을 대신해  안부를 전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들이 어려운 가운데도 그들의 믿음이 견고해짐을 매우 기뻐하고 있습니다.
2천년전의 따뜻한 온기가 아직도 우리에게 전달이 되는 느낌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따뜻한 안부의 인사
바울의 말이 오늘 우리의 귓가에도 들리는듯 합니다.

저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안에서 여러분들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Peace and grace in Christ!!


2014년 6월 13일 금요일

주님을 위해

고전15:35-5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날 것인가?
부활의 몸은 어떤 몸일까? 신앙인라면 누구나 가질수 있는 질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도 갖은  생각을 가졌습니다
바울은 이에대해  현재의 몸은 죽지만 영원한 새몸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42-44).

현재의 몸은 첫 번째의 아담의 몸이지만
새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동일한 몸입니다(46).

주님이 다시 오실때
 죽은 자들이 먼저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살아날것이고(살전4:16)
살아있는자는 영광의 몸으로 바뀔것입니다(52).
이일을 행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롬8:11).

생각만 해도 영화의 한 장면과 같습니다.
그러나 영화속의 이야기가 아닌 실제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는
바울이  본장의 마지막부분에서 권면한 것 처럼

 견고하고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58).

주님을 위해 행하였던  모든 수고는 때로는 어떤 것은  미미하게 보여도
절대로 헛되지 않음을  압니다.



2014년 6월 11일 수요일

부활

고전15:1-1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울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실제 목격한 사도들과 수백명의 사람들을 나열하며(5-7)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실제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의 영적 권위도
자신은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이지만(9)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목격한 것에 두고  있습니다(8).

바울과 같이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9)
변화가 되고 은혜로 사도가 된 것 자체가(10)
그리스도의 부활이 실제임을 증거해줍니다.

주님의 부활을 친히 목격한
사도들이 전한  부활의 주님을 믿기에

오늘도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내세에 소망을 두며 살아갑니다(19).

2014년 6월 9일 월요일

무엇이 다른지를..

고전14:1-2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예배에 대한 바울의 관심은  질서 있고 남의 믿음을 세워주는데 있습니다.
그는 방언을 금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과 개인적인 대화를 위해 정상적으로 사용하기를 원했습니다(4).

그는 방언보다 예언을 더 중시했습니다.
교회기초는 방언이 아닌 예언이었습니다(고전12:10,28).

예언은 사도시대와 교회시대와 구분됩니다.
사도시대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앞으로 일어날 어떤 사건에 대해 예언했습니다(행11,21).

그러나 교회시대는 설교가 그것을 대체 하였습니다.
설교자들은 사도들이 닦아놓은 터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견고하게 집을 지어나갑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말한다' 라는 단어를 24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은유법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 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악기도 그 소리로 분별 할 수 있고(7)
모든 소리에는 다 뜻이 있듯이(10)

우리에게 주신 이 복음의  말씀도 세상에 분병하게 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복음대로 살 때  사이비 이단들과 복음이 무엇이 다른지를 분명하게 보여줄수 있습니다.

2014년 6월 7일 토요일

사랑은

고전12:31-13:1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은 12장 마지막절에서 가장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면서 12장을 끝맺었습니다.
가장 귀한 은사는 13장과 14장1절 사이에 10번에 걸쳐 등장하는 단어인 사랑(아가페)입니다.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4-7절 사이에 나타나는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를 말합니다.

어떻게 남을 대하느냐?
아무리 거짓으로 위장을 해도 사랑(아가페)이 아닌 것은  금방 드러납니다.

13장을 처음 읽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를 상상해보십시오.

4절-7절에 나타난 사랑이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내가 어떻게 실천하며, 체험하는 지를 생각해봅니다.

"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4-7).



2014년 6월 6일 금요일

은혜를 사모

고전12:21-3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고전12장은 성령님의 은사를  다룬 내용입니다.
한몸에  기능이 다른  여러 지체가 있듯이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은사 또한 다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방언 하는 사람들이 가진 소위 ' 영적 엘리트주의' 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을 경고하기 위해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맨 나중에 올려놓은 것 같습니다.

모든 은사는  성령님이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영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지체로서의 교회의 참모습입니다.

바울은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여지를 남겨놓고 12장을 맺고 있습니다.
사모하라는 말은 하나님은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또한 그 은혜를 깨닫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처럼(시42:1)
오늘도 나의 영혼의 주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