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4일 수요일

용서

막11:20-2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어제 본문에는 주님께서 성전을 정화 시키는 일을 하시기 전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이 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습니까? 주님이 단지 배가 고파서? 하지만 막상 열매가 없는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화가 나셔서 저주 하신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호세아9:10, 미가7:1-6,렘8:13,29:17).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보시고 주님의 한탄하심입니다.

다음날 베드로는 주님이 말씀하신것이 기억하며 그 나무를 보았을때 나무가 뿌리부터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20-21).

베드로가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한 것은 이번만이 아닙니다(14:72).

그러나 주님은 무화과 나무가 마른 사건을 오히려 믿음(22)과 기도(24)에 대해 가르치시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믿음과 기도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믿음은 기도의 능력을 더욱 증가 시키고 기도는 믿음을 북돋워줍니다. 하지만 기억할것은 믿음과 기도는 우리가 구하는 것 마다 받게 하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믿음으로 하는 기도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 할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25).

아직 마음에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2012년 11월 13일 화요일

분노

막11:12-1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두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는 사건, 다른 하나는 성전을 정화시키는 사건, 이 두사건속에서 주님의 모습은 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두사건은 당시 이스라엘의 시대상을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성전을 정화 시키는 사건이 본문의 중심주제입니다.예루살렘에 도착하신 주님은 성전에 들어가 먼저 둘러보십니다(11).

그런데 주님은 다시 성전에 오셨습니다(15). 그러면 무엇이 주님으로 하여금 다시 성전에 오게 했습니까?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15-16).

그것은 성전에 예배드리러온 자들이 희생제물을 사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관행화 되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성전을 관리하는 자 가 이방인 뜰에서 사고 파는 행위를 묵인해주고 있었습다. 묵인해주는 댓가로 댓가성 뇌물을 받았을것입니다.

희생제물을 파는 장사꾼들은 폭리(利)를 취했습니다. 이것이 예배자들로 하여금 큰 부담을 갖게 했습니다.

이장면을 본 주님의 분노는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분노가 극에 달하신 주님은 성전을 난장판으로 만드셨습니다.주님은 선지자들의 말을 인용하시면서(17, 사56:7;렘7:11)"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굴로 만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교회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예배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교회안에 세속주의, 소비주의, 물질주의,상업주의등 혼합주의가 들어와 이것이 복음인냥 일반화 되어 있지는 아니합니까?

만일 그렇다면 성전에서 분노하셨던 주님의 모습을 기억하십시오. 

2012년 11월 12일 월요일

이분이 가신 길

막11:1-1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주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주님을 보고 군중들은 매우 열광했습니다(8-10).

주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모습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10).
비록 마가는 마태와 요한처럼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이 장면은 스가랴9:9절과 연결된것입니다.

이렇게 환호를 하던 군중들은 얼마지나지 않아 그 열광적인 환호가 적개심으로 바뀝니다(막15:13-14). 열광주의는 금방 돌별할수 있는 위험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박수와 갈채를 좋아하며 사는 사람들은 얼마지나지 않아 큰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런면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들이 목회자들입니다.

또한 교회에서 행하는 많은 이벤트, 많은 프로그램등은 금방 실증을 느끼게 되고 공허함을 만들기 쉽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조용한 가운데, 말씀안에서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또한 순종과 신실함은 주님을 찬양하는 참된 증거입니다.

군중들과는 다르게 예루살렘을 향하는 주님의 마지막 여정은 웬지 쓸쓸함으로 가득찬 개선식과 같은 느낌을 갖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제자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제자의 도 라는 순간적으로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나귀를 타신 이분이 가신 모든 길을 조용히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이 아닐까요?

2012년 11월 11일 일요일

갈망

시42-43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이 두시편은 매우 인상적이고, 감동을 주는 말씀입니다.
본 시편기자는 매우 깊은 절망의 늪에 있었다가 그곳을 빠져나와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찬양으로 가득차 있는 아름다운 내용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런 고백이 나와야 되지 않을까? 하고 본문을 묵상하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42:5,11,43:5).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힘든 상황에서 마치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 상태에서 그는 자신에게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 하는 내가 왜 낙심하며, 불안해 하는가?

또한 그는 하나님의 인도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43:3). 그의 주변에 그를 향하여 조롱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은것 같습니다(42:3,10;43:1-2).

힘든일이 거듭되면 하나님이 마치 침묵하시는 것 같고, 멀리 계시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수가 없습니다(42:9;43:2).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께 항의하고 싶은 생각이 들때가 많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42:9) 하며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의 시련의 골짜기에서 벗어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합니다(42:11,43:5).
낙심과 절망의 느낌이 일시적으로 들지만 결국 찬송하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특히 이 두시편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첫부분입니다.
"내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42:1)
이 표현보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을 충분하게 표현할수는 없을것 입니다.

자신을 찾는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주님! 제 영혼이 오늘도 주님을 찾기에 갈급합니다.
주님을 갈망합니다. 저의 심령에 은혜를 더하여 주소서!!

2012년 11월 10일 토요일

요셉의 고백

창50:15-2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야곱은 죽으면서 자기가 죽은 후 혹시 요셉이 형들을 해할까봐 형들을 해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긴것 같습니다((16-17). 형들은 17년전 사건때문에 요셉이 자신들을 해할까봐 두려움속에 있었습니다.

야곱도 같은 상황을 맞이한적이 있습니다. 이삭이 죽을때가 되자 에서의 복수가 두려워 미리 도망을 쳤습니다(창27:4).

지금 아버지 야곱이 죽은 상황,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요셉은 얼마든지 형들에게 복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얼마나 감동적인 말입니까?
".. 두려워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19)

이 말은 사도바울이 로마서에 한 말과 같은 말입니다."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롬12:19).원수는 내가 갚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요셉의 그 다음말은 더욱 아름다운 말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오늘 같이 많은 생명을 구하셨습니다"(20).요셉은 모든 상황, 사건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어떤상황이든 그것을 다 사용하셔서  항상 선으로 바꾸십니다. 때로는 인간의 실수까지도 선으로 바꾸십니다.

힘들일, 상처받은 일, 좋은 일, 그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항상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그러므로 믿음의 삶이란 이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는 삶입니다. 

오늘 나의 삶에도 이 요셉의 고백이 있습니까?

2012년 11월 9일 금요일

항상 행복한 사람

창49:29-50:1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나이 많은 야곱은 죽음이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그의 죽음은 축복된 죽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둘러 싸인채, 자신의 장례에 대해 부탁을 하고, 그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다한채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는 매우 만족했고, 자신의 조상들이 잠든곳에 묻히고 싶었습니다(29).
우리도 때가 되면 죽음을 맞이 하게 될 것 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는 믿음으로 죽음앞에서 야곱처럼, 두려움없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주님앞으로 갈수 있음을 믿습니다.

평생 주님의 도구로 살다가 마지막 삶은 평화롭게 끝을 맺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믿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마음껏 축복하면서, 살아오면서 나에게 악하게 행한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면서, 주님과 더불어 앞서간 성도들을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주님앞에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죽음입니다.

바울은 사망이 쏘는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고전15:55-56). 하지만 주님이 십자가에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사망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우리 자녀들의 앞날을 예견할 수는 없지만, 비록 그들에게 많은 유산을 물려줄수는 없지만. 그들에게 줄수 있는 최고의 유산인, 그리스도께서 주신,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약속을 물려줄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살아 있으나 죽으나 항상 행복한 사람입니다.

2012년 11월 8일 목요일

회개

창49:1-2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야곱은 죽기전에 아들들을 모아놓고 그들을 위해 축복하며 예언을 합니다. 죽어가는 아버지가 나를 위해 축복한다면 참 아름다운 일일 것입니다.
특히 유다와 요셉은 아버지로부터 축복의 말을 들었습니다(8-12,22-26). 그들의 앞날이 번성할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벤냐민, 납달리, 아셀, 단, 스불론의 장래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 대한 예언은 좋지 않습니다. 이들이 과거의 지은 죄가 이들의 앞날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인 빌라와 동침을 했습니다(창35:22), 시므온과 레위는 누이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한 것에 대한 복수를 무자비하게 했습니다(창34). 이들이 과거에 저지른 죄에 대한 댓가를 장래에 치루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들이 받을 축복이 유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유다도 과거 며느리 다말과 동침을 한 부끄러운 일이 있었습니다(창38). 그러나 죄를 대하는 태도가 이들과 너무나 달랐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자신들이 한 행동을 정당화 시켰고(34:31), 유다는 깊이 뉘우쳤습니다(38:26).
즉 시므온과 레위에게는 '회개'가 없었고 유다는 '회개' 했습니다.

나의 과거의 행동은 반드시 장래에 영향을 줍니다. 문제는 회개 입니다. 회개는  죄를 씻는 통로일뿐만 아니라, 죄의 댓가를 바꾸어 놓습니다.

 무슨 죄를 지었던지  주님의 십자를 의지하며 회개하는 자를 다시 회복시키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