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31일 화요일

무감각

막6:45-5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었지만 제자들에겐 피곤하고 힘든 하루 였습니다. 비로서 사람들로 부터 떨어져 자신들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45).  전도여행에서 돌아온 후  사역에 대한 보고를  하기 위해  기다렸지만, 늘 군중에게 둘러싸인 주님인지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생활은  바쁜 사역에 동참함을 말합니다. 주님은 전도하시고, 기도하시기에 바쁘셨습니다(46). 주님의 삶의 포커스는 전도와 기도였습니다. 군더더기가 없었습니다. 바쁘셨지만  단순했습니다. 배워야 할 점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배를 태워 벳새다로  먼저 가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안위(安危)를  늘 주목하셨습니다(48). 풍랑이는 바다에 힘겹게 노를 젓는 제자들을 보셨습니다.  바다위로 걸어오셨습니다. 이윽고 그들이 탄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하지만 마가는 제자들이' 심히 놀라워 했고, 마음이 둔하였다'고 기록합니다(51-52). 
이들은 주님과 항상 함께 있었지만  그분이 메시야임을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기적들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지만 어떤분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외부사람들이 더 주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54-56).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하거나, 늘 교회라는 울타리에 살다보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  무감각해질 수 있고, 구원받은 기쁨과 감격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나의 모습이 제자들과 같지는 아니합니까?  은혜에 무감각하지 않고,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잃어버리지 않게 깨어 기도하십시오. 

2012년 7월 30일 월요일

한 걸음씩

막6:30-4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쁘게 일을 한 후 쉬는 시간을 가질려다 계획이 바뀐다면 어떤 느낌을 갖습니까? 물론, 사람마다 반응이 다를 것 입니다. 주님은  항상 바쁘게 사역을 하셨습니다. 좀 쉬셔야 하는데 사람들은 놓아주지 않습니다(33). 주님은  자신을 찾아오는 무리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이 느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계속 가르치셨습니다(34).  제자들 역시, 전도여행에서 돌아와  휴식이 필요했습니다. 날은 저물어가고...
제자들은   주님도 쉬시고  무리를 보내어 음식을 사먹게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었습니다(36). 그러자 주님은 엉뚱한 대답을 하시는 것 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들이 가진 돈은 이백 데나리온 밖에 없는데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을 사서 먹일 수 있습니까?(37)
제자들의 반응은 합리적입니다. 주님의 요구가 도저히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곧 순종하였습니다(39-43).  순종했더니 오병이어의 축복이 일어났습니다. 생각만 하고, 말만 하고,행하지 않으면 아무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만히 있어서 되는 것은 없습니다.
제자들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실 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순종하면서 많은 기적들을 체험했습니다. 하지만 한번에 한 걸음씩 순종했습니다.
Step by step!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은 한 걸음, 한 걸음입니다. 두 걸음, 세 걸음이 아닙니다. 믿음의 분량에 따름입니다.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순종해가면 그 믿음의 분량도 커지지 않을까요?

2012년 7월 29일 일요일

큰 그림

시27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어두운곳에 있다가  밝은데로 나온 경험이 있다면 그때 받은 느낌은 어떠합니까? 어두운곳에 있다면 고독, 불안, 두려움 등  복잡한 감정들이 교차함을 느낄것입니다. 특히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당하면 당황, 불안, 더 나아가 상처도 받을 수 있습니다. 왜 내가? 하며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다윗도 이런 생각을 품은적이 있을 것 입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연약한 인간이었기 때문이지요. 아무도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는, 홀로있다는, 버려진,.. 하나님이  멀리 계신것 같은 느낌을 가진적이 있습니다(9). 그럼에도  믿음의 사람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구원자요, 빛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1).  그는 문제를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필연으로 생각했습니다(2,5). 본 시편을 반복해 읽고 묵상할 수 록 다윗은 무슨일이던 하나님을 가장 먼저 찾는  그의 신앙의 적극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어려운 환경에 좌우받지 않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이 처한 환경을 조명하고 있습니다(4-6). 믿음의 사람은 자신이 처한 환경을 믿음으로 관망(觀望)하지 거기에 속박되지 않습니다. 속박되지 않기에 인내합니다. 인내하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립니다(14). 하나님은  어떤 상황이든지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늘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
그러므로 영의 눈으로 나의 삶을  그려가시는  하나님의 큰 그림을 바라보십시오.

2012년 7월 28일 토요일

신실하신 하나님

창35:16-2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마치 야곱의 삶의 마지막 장면처럼 느껴집니다. 사랑했던 아내 라헬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헬은 난산(難産)으로 벤냐민을 낳다가 죽음을 맞이합니다(17-18). 벤냐민의 탄생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야곱의 삶에는 계속되는 슬픈 사건이 이어집니다. 라헬의 죽음, 큰 아들 르우벤이 첩인 빌하와 통간한 사건(22),  앞으로 일어날 일 이지만 아들중에 아끼던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것 등등...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을  만나기까지 오랜 세월동안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며 기나긴 슬픔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의 삶은 평탄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두가지 사건으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하나는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기록되고 있는것과 (20-21). 다른 하나는 라헬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며 새로운 희망을 가지는  모습입니다. 라헬은 죽으면서 새로 탄생한 아이를 베노니(슬픔의 아들)라고 불렀지만 야곱은 벤냐민(오른손의 아들) 이라고 고쳐 부릅니다(18).  더 이상 슬픔에 머물러 있지 않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함을  말합니다. 그동안 일어난 많은 일들, 험난했던 시간들... 그 일들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영적인 변화를 이끌어가시는 하나님!
그분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해가시는  하나님!  
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늘을 시작합니다.

2012년 7월 27일 금요일

그분이

창35:1-1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서원했던 벧엘로 오지 않고(28:20-22) , 세겜에 머물다  우환(憂患) 을 당했습니다.  딸 디나가 세겜의 추장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34). 그 후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다시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1). 사람간의 약속도 지켜야 하는데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함을  상기시켜 줍니다. 물론,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벧엘은  하나님의 흔적(?)이 서려 있는 곳 입니다. 야곱에게는 아주 특별한 경험의 장소입니다. 결국 그는  그곳으로 다시 와야 했습니다. 또한 벧엘은 그의 어머니 유모의 장지가 있는 곳입니다(8).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신 증표로 그곳에다 다른 돌기둥을 세웠습니다(14-15). ..
하나님의 집 벧엘!
영적으로 의미깊은 장소입니다.
하지만 신약에서  강조하는 것은 장소가 아닌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6).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분을 통해 비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분이 나의 벧엘이십니다. 아-멘

2012년 7월 26일 목요일

엘엘로헤이스라엘 하나님

창33:1-2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야곱이 마음 졸이며, 걱정했던 부분이 해결 되는 장면입니다. 형의 기질을 잘 알던 야곱은 형을 만나기전까지 두려움과 불안의 시간을 가졌는데.. 형이 적대감을 가지고  대할줄 알았는데 뜻밖의 반응을 보입니다(4). 숙원이었던 형과의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에서는 야곱을 얼싸안았습니다. 두 형제는 서로 울었습니다.  야곱은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10)는  말을 합니다.  형으로 부터  자신을 지키시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나온말입니다. 그동안 가슴 졸이며 걱정했던 부분을 하나님이 해결해주셨습니다. 쓸데 없는 걱정이 많은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나고 보면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었음을  체험하면서 말입니다. 야곱은 가는 곳 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따라서  이름을 명명(命名) 하였습니다. 처음 하나님을 만난 곳인 벧엘(28:19),  이후 하나님과 씨름한 곳인 브니엘(32:30), 에서와 화해의 장소인 엘엘로헤이스라엘(20), 이말은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가는곳 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제단을 쌓았습니다. ..
 화해하게 하시는 하나님!
관계가 어긋나  어색한 형제나 자매는 없습니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 용서가 되지 않습니까? 나의 마음을 엘엘로헤이스라엘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용서할수 있는 힘을 주시고, 평화와 기쁨을 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화목케 하셨듯이 화평의 축복을 주십니다. 엘엘로헤이스라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012년 7월 25일 수요일

새 이름

창32:22-3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야곱은  혼자가 되었습니다. 이미 가족들을  자신 보다 앞서 보냈습니다(22-23). 형과의 만남을 어떻게든 지연을 시킬려고 애쓰는 모습을 봅니다. 가장 고역(苦役)스러운 것은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다음 장면이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갑자기 어떤 사람과 씨름을 합니다(24). 야곱이 씨름하는 이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야곱과 대면하신 하나님(30)! 신비스러운 장면입니다. 하나님과 씨름한 야곱은 부상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허벅지 관절을 치셔서 탈골을 시키셨습니다(25). 성경학자들은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것은 기도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야곱이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허벅지 관절의 둔부를 치신것(32)은  "낮아짐을 의미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먼저 받아야 할 은혜입니다. 참된 기도의 사람은  탈골이 되는 것 처럼 꺽인 사람을 말합니다"(박윤선, 창세기 주석 참조).
 기도하는 사람이  제 생각으로  차있으면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먼저 꺽여야 됩니다.  야곱은  씨름을 통해 '이스라엘' 이라는 새이름을 받습니다(28).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을 말합니다.  야곱이란 '사람과 겨루어 이김'을 말합니다. 야곱이란 이름처럼 그동안 사람에게 촛점을 맟추어 살았왔지만, 이제는 하나님에게 촞첨을 맟추며 살아가는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야곱이란 이름은 사람의 관심, 사랑의 대상이 되길  원했지만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나에게도 이스라엘 처럼 새 이름이 붙혀졌습니다. 죄인이었던 내가 '성도'란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라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웁니다. 그러므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012년 7월 24일 화요일

순례의 과정

창32:1-2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고향으로 가는 야곱에겐 큰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에서와의 남은 계산을 치루어야 할 일입니다. 에서가 아직도 자신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지, 아니면 20년이라는 시간이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트렸는지 모든것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아버지집으로  가려면 어차피 에서와 만나야 합니다. 야곱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7). 타향살이 20년동안 하나님은 그를 보호 하셨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 길에도 천사를 보여주셨습니다(1). 그를 보호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럼에도  막상 에서가 400 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기다린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어찌할바를 몰랐습니다(6).  하지만 야곱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며 기도했습니다(9).  잔머리만 굴리며, 요령으로만 살아왔던 야곱!
서서히 신앙의 사람으로 변모해 갑니다. 라반의 집에서 보냈던 인고(忍苦)의 세월, 두려움 등.. 하나님은  모든 상황과 경험들을 사용하셔서  믿음의 사람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어떤때는 야곱처럼  위기가 올 때가 있습니다. 어려일 때문에 힘들어 숨쉬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염려 때문에 마치 죽은자 같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사용하심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나를  끊임없이 굴복시키시고, 겸손케 하십니다. 이것은  주님앞에 가는 순간까지  하나님이 이끄시는 순례의 과정일지 모릅니다.

2012년 7월 23일 월요일

개입

창31:43-5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야곱에 대한 라반의 반응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야곱에게 내재산이니 다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보복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제는 사위로서 대접을 합니다.  서로 언약을 맺자고 먼저 제의를 합니다.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부탁하는 쪽이 라반이 되었습니다. 인생은 재미 있는것 같습니다.  항상 역전(逆轉)의 소지가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인것 같습니다.  그들은 언약의 증표로 두가지 기념물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기둥이었고, 다른 하나는 돌무더기였습니다(45-46). 언약의 내용은 야곱이 라반의 딸들을 박대하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앞에서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신다는 것을 상징해줍니다. 우리에게도 이와같은 증표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결혼반지 입니다. 결혼식때  입는 예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부부가 되어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언약의 증표입니다. 야곱과 라반은 하나님이 그들의 삶 속에 개입(介入)하시도록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삶 속에 개입 하시길 원하십니다. 나의 인간관계, 가정생활, 직장생활, 교회생활 등.. 매일 나의 삶을  드리십시오. 그분이  개입하시도록...

2012년 7월 22일 일요일

예배자의 행복

시26편 말씀 묵상내용입니다.
  본문에서 시편기자가 하나님의 길을  따라 살려는 애쓰는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싫어 하였습니다(5). 주위에 사람들이 어떻튼 자신은 다른 길을 선택하며 살아갔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은 외로운 길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길을 '좁은문' 이라고 하셨습니다. .. 물론 시편기자의 이 고백은 자신의 '의'에서 나온것이 아닙니다. 예배자의 삶에서 나온것 입니다. 그에겐  몇가지 습관이 있었습니다. 주의 제단에 자주 갔습니다(6).  기쁜마음으로 희생 제물을 드렸습니다. 이 제단에서 행복해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했습니다(7).  자신이 영감을 받은 곳은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8). 하나님의 집은 성막을 말합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충만한 곳 입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본 시편기자인 다윗은  예배하는 삶으로 가득찼습니다. 예배자의 행복을 강론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그의 삶에서  그 어떤것과 비교될 수 없는  가장 큰 행복이었습니다. 저마다 행복을 추구하는 모양이 다릅니다. 돈과 명예와 기타 하나님과 관계없는것에서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런 행복은 행복이 아닌 공허함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행복은 예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우리의 기쁨이요, 행복이시기에.. 그러므로 신앙의 자유를 주신, 교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2012년 7월 21일 토요일

나의 편이신 하나님

창31:22-4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야곱은  고독한 사람이었습니다. 꾀가 많은 사람일 수록 고독해지는 법입니다. 꾀가 많기에 사람들을 진정성 있게 대하지 못해 외로울수 밖에 없습니다. 비록 부인들과, 종들과, 자녀들, 그가 얻은 가축들에 둘러 쌓여 있었지만, 그가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먼저는 형으로 부터 도망을 했는데 이제는 장인으로 부터 도망을 칩니다. 세력으로나 힘으로는 장인을 대항할 수 없었습니다. 살짝 도망을 친 야곱을 라반은 얼마든지 해할수 있었지만 그렇게 할 수 가 없었습니다. 야곱이 자신의 집에서 온갖 불이익을 당하면서 머슴처럼 일을 한 것을 내심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이 라반의 꿈에 나타나셔서 라반의 행동을 제지 시켰기 때문입니다(24,29). 하나님은  야곱의 삶을 위기 때마다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의 백성들을 지키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직장생활을 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세상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살면서 라반과 같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라반과 같은 사람) 마음대로 되게 하시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은 그의 자녀 편이십니다.... 야곱에게 향하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여전히 우리를 붙잡고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본문을 묵상하면서 사도바울의 고백이 생각이 났습니다. "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4-36).

2012년 7월 20일 금요일

나의 벧엘

창31:1-2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야곱의 삶을 관찰해보면 갈등과 논쟁이 떠난적이 없음을 봅니다. 피곤하게 살아간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도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에게 불만을 품었다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1). 라반도 야곱을 대하는 태도가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2). 눈치가 100단인 야곱은 집안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감지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의 스타일대로 ' 몰래' 도망을 쳤습니다(20-21). 상황에 몰려 도망을 쳤지만, 그 배후에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않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2번씩이나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3,13).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13). 벧엘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주는 장소입니다. 야곱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났던 곳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곳입니다. 때가 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받은 곳입니다(28:15). 인격에 많은 결함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야곱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갔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셨다면 포기 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를 다듬어가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사람은 변화 될 수 없습니다. 은혜로 변화 되어 갑니다.
곤고하고, 외로웠던 사막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
나의 벧엘은 어디였습니까?

2012년 7월 19일 목요일

우리 가정은?

창29:31-30:2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야곱의 가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2명의 자녀들이 태어났습니다. 자녀들이 태어나는 과정을 보면 복잡합니다. 레아가 6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낳았습니다. 라헬은 2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라헬의 여종 빌하는 2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레아의 여종 실바는 역시 2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일부다처주의는 결혼제도를 만드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주님도 엄금하셨습니다(마19:4-7). .. 저는 잘 이해 할 수 없지만 야곱은 두명의 아내를 맞이하였습니다.  두 아내는 아이낳기 경쟁을 하였고, 자연히 서로 적대감을 가졌습니다. 참 유치한 이야기입니다. 유치한 이야기이지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죄인이요,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 기록된 말씀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아뭏튼 라헬은 언니 레아에게 질투심으로 가득했습니다(30:1). 레아는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29:33). 하나님은 건강하지 못한 이 야곱의가정에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레아가 사랑을 받지 못함을 보셨다고 하셨습니다(29:31).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다고 했습니다(30:17). 라헬을 기억하셨다고 하셨습니다(30:22).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화목이 없는 이 가정을 위해 하나님은 일하시고 계셨습니다. .. 가정에 가장 필요한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건강한 가정의 표징은 사랑과 용서, 화목함입니다. 주변에 가정이 깨어져 상처 받은 자녀들을 많이 봅니다. 역기능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신들도 역기능 가정을 만듭니다. 악순환이 됩니다. 흉악한 죄를 범한 사람들 대부분이 역기능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입니다. 행복한 가정, 건강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그 인격이 건강합니다. 푸근합니다. 남에 대한 배려심이 있습니다. 이해심이 넘칩니다. 굴절되지 않습니다. 이들은 교회도, 사회도, 나라도 건강하게 만드는  주춧돌이 됩니다.  우리 가정은 어떠합니까?

2012년 7월 18일 수요일

오늘을 살아갈 뿐..

창29:14-3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남을 속인 사람도 자신도 속게 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자신과 비슷한류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아니 더 높은 고수를 만났습니다. 외삼촌 라반은 자신의 딸을 주는 조건으로  14년을 야곱을 일꾼으로 부려먹었습니다(18,27). 원래, 야곱이 아내로 삼고 싶었던 여인은 라헬이었지만(18), 라반은 라헬의 언니인 레아를 주었습니다(23). 이 일을 야곱이 따지자 라반은 변명을 합니다.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이 그 지방의 관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26). 야곱은 그의 속임수를 믿었습니다(30).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또 다시 7년, 결국 14년을 일하게 되었습니다. .. 본문의 말씀은 누가 누구를 속이는 이야기가 촛점이 아닙니다.그것은 인간사요, 지엽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보다 위대하시고, 깊으십니다.  아내를 얻을려고 하는 야곱의 갈망을 통해 ,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의 백성들을 번성 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이 형성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시간에 묶여 살아가는 제한적 존재 입니다. '한 치 앞을 못본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 이십니다. 그분에게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계획을 과거, 현재,미래를 동시에 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그분의 돌보심과 사랑속에서 오늘을 살아갈 뿐입니다.

2012년 7월 17일 화요일

여전히..

창29:1-14절 말씀 묵상내용입니다.
외삼촌집으로 향하던 야곱은 그의 목적지에 거의 도착을 했습니다. 우연찮게 외삼촌집 근처에서 양을 치던 목자의 무리를 만났습니다. 이들은 외삼촌 집안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5). 야곱이 이들을 만난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을 인도하셔도 어려움을 만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지만, 로마로 가는 길은 험난 한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순탄한 길을 허락하실때도 많습니다.
야곱이 지금 겪고 있는 고생의 발단은 그의 어머니(리브가)로 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속여 형 대신 축복을 받게 한 것, 형의 보복을 피해  친정집으로 야곱을 보낸것, 모든 연출은 리브가의 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리브가는 야곱을 보호 하는 길은  친정으로 보내  결혼을 시키는 것 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동기와 과정이 어떻든 야곱은 브엘세바(가나안)에서 하란까지 먼 길을 와야 했습니다. .. 야곱은 장차 그의 아내가 될 라헬을 만납니다. 라헬이 외삼촌의 딸임을 알고 입을 맞추고 소리내어 울었습니다(11).  큰 소리로 우는 야곱을 보면 당시 그가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했던 눈물이기도 합니다. 결국 외삼촌, 라반과 만나게 되고 그 집에 머물게 됩니다(13-14). 이 장면은 야곱의 삶을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로부터 발단 된 일련의 사건들, 투명하지 못한 회색 빛과 같은 이야기, 그럼에도 배후에는 야곱의 삶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나의 삶속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역시 동일합니다. 때로는 잘못된 동기로 일이 어그러져도 결국 " 모든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 하나님의 은혜 말입니다. 거듭되는 실수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시는 기가막힌 하나님의 은혜가 여전히 나의 삶을 붙들고 계십니다. 샬롬!

2012년 7월 16일 월요일

바로 그곳에

창28:10-22절 말씀 묵상내용입니다.
본문은 성경에서 인상 깊은 내용이 담긴 말씀입니다.
한  고독한 사내가 도망을 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속여서  형이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챘다는 이유로, 형의  보복이 두려워 더 이상 집에 머물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목적지는 외삼촌집이 있는 하란이었습니다. 한참을 가는중 사막에서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노숙자의 신세는 육체도 마음도 피곤하고 고달픕니다. 더욱이 사막의 밤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겠습니까?  베고잘 것이 없어서 돌을 베고 잡니다. 얼마나 고단했던지, 눕자말자 깊은 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11). 잠이 들자마자 꿈을 꾸게 되었는데 알수 없는 이상한 광경을 보게됩니다.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닥다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늘 꼭대기 사닥다리에서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12).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가 저지른 잘못을 책망하기는 커녕 도리어 축복과 약속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집에서 분주하게 보낼 때는, 꾀만 부리고 살 때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영적 경험이었습니다. .. 홀로 있는 시간, 마치 사막에 내동이쳐진 느낌이 드는 고독한 시간, 마치 사람들로 부터 소외당하는 느낌이 드는 그 시간이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가질 수 있는 시간입니다. 마치 엘리야가 이세벨의 눈을 피해,  사막의 로뎀나무 밑에서,  깊은 절망속에서 죽기를 소원하며 잠이 들었을때, 천사가 찾아와 어루만졌듯이, 어두움의 시간이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받는 기회의 시간입니다.
시편기자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치라도 거기 게시니이다"(시139:7-8). .. 하나님은 내가 있는 곳, 내가 처한 곳  어디든지, 바로 그곳에 계십니다.

2012년 7월 15일 일요일

자신의 시편

시25편 말씀 묵상내용입니다.
본 시편 말씀은 애절함과 믿음이 함께 섞인 말씀입니다. 이 시편 말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시편기자가 그의 감정을 정직하게 표현함에 있습니다. 이 시편의 저자는 다윗으로, 그는 젊은 날의  죄를 잘 알고 있습니다(7). 젊은시절(Youth) 은 그의 소년 시절 부터 범한 죄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자신의 곤고 와 환난(18)에 대해 말합니다, 그의 대적자들을 언급합니다(19).본 시편은 다윗이 가식이나 꾸밈이 전혀 없는 언어로 기록한 말씀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할 경우가 있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가면을 쓸 수 있습니다. 심지어 기도자리에서도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도 포장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남을 의식하지 않고 그의 믿음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꾸민다는 것입니까? 사람앞에서는 포장 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다윗은  주님의 길을 자신에게 보여달라고 합니다. 주님의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4).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6-7). 그는 교리적으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을 정직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을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행13:22) 이었는지 모릅니다. 위대한 성도들은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는 글(저널)들을 썼습니다. 본문의 다윗을 비롯해 조난단 에드워드, 요한 웨슬레, 데이빗 브레너드 등... 우리도 자신만의 시편을 써보는 것이 어떨까요? 오직 하나님께 자신의 정직한 감정과 믿음을 표현하는 시편말입니다.

2012년 7월 14일 토요일

민감성

행8:26-40절 말씀 묵상내용입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부러움으로 빌립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빌립의 사역을 명확히, 구체적으로 인도하시는  장면을 보면서 말입니다(26).  빌립처럼 저의 사역도 그렇게 인도하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은  빌립으로 하여금 이디오피아 여왕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준 후 홀연히 그분이 원하시는 곳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39-40). 상상이 잘 안되는 장면입니다.  사마리에서 전도하던 빌립을 가사로 가게 하시고, 내시를 만나게 하시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지시하시고(29)..  비단 빌립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빌립에게 말씀하셨던 성령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많은부분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을 그냥 지나치는데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영적민감성이 있다면 성령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지 않을까요?
 "빌립이 입을 열었습니다"(35).  문자적으로 말하면 "빌립이 그의 입을 열었다"고 해야 합니다. 입을 열지 않고는 복음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옵니다. 전하자는 가 없이는 들을 수 없습니다.  듣는 자가 없이는 전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전하게 하시고, 듣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빌립으로 전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지성과 감정, 의지가  없는 로버트 처럼 움직인것은 아닙니다. 오직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접고, 성령님의 인도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생각이 많습니까? 생각이 많으면 민감해질 수 없습니다. 분주하면 민감해 질 수 없습니다. 고독하지 않고는 민감해 질 수 없습니다. 때로는 외로움과 고독에 처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참지 못합니다. 빠른 속도와 분주함에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  빌립을 보면서 단순함을 봅니다. 해야 할것과 하지 말아야 할것을 구분함을 봅니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면 되고, 악한 것은 피하면 됩니다. 단순함은 영적 민감성과 관계가 깊습니다. 영적으로 민감해야 성령님이 예리하게 사용하실 것 입니다.



2012년 7월 13일 금요일

시몬을 보면서..

행8:9-25절 말씀 묵상내용입니다.
사마리아에 시몬은  마술사였습니다.  마술을 행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자칭 큰 자라 하며 하나님 처럼 군림했습니다(9). 하지만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전도하자 그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짜는 진짜가 나타나면 그 정체가 밝혀집니다. 가짜도 내심 진짜를 존경하게됩니다. 시몬이 그러했습니다. 자신이 전혀 경험해 보지못했던, 알지도 못했던 신기한 것들을 빌립을 통해 보면서 자신도 그렇게 해보고 싶었습니다(13). 할수만 있으면 빌립이 행하는 능력을 자신것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돈을 주고라도 그 능력을 사고 싶었습니다. 성령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19-20). 시몬의 실수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빌립과 사도들이 가지고 있던 영적 능력을 가지길 원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로 부터 이전보다  더 큰 주목을 받기를 원했기에... 사역자들도 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구합니다. 주님이 입혀주시는 능력이있어야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능력있는 사역을 통해 유명해지고자 하는 동기가 있다면  시몬의 모습과 다를바 없습니다. 둘째,그의 실수는 하나님과 거래를 할려고 했습니다. ..  하나님! 저의 신앙을 보십시오. 주일을 성수 하고, 성실하게 십일조를 드리고, 매일 성경을 읽고, 정한 시간에 기도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혹은  조건을 달면서.. 주님! 저에게 이렇게 이렇게 해주신다면 저는 주님을 위해 이것, 이것을 하겠습니다. 이 역시 시몬의 모습과 다를바 없습니다.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마7:11). 그것은 정확히  선물입니다. 선물은 사거나, 댓가나  혹은  거래를 통해 얻는 것이 아닙니다.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나에게는 시몬과 같은 마음은 없습니까?

2012년 7월 12일 목요일

도구

행7:54-8:8절 말씀 묵상내용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종교지도자들은 회개는 커녕 마치 짐승들 처럼 이를 갈았습니다(54). 그들은 무리를 지어 달려들어(57),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첫번째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더 모진 박해가 초대교회에 다가왔습니다. 사도외에는 모두다 피난길에 올랐습니다(8:1). 모진 고난이 오고 박해가 찾아왔지만 이들의 믿음은 연약해지지 않았습니다. 가는 곳 마다 복음을 전하였습니다(8:4). 박해로 인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주님께서 이들을 통해 행하시는 놀라운 기적들을 통해 도리어 기쁨이 넘쳤습니다. 특히 사마리아 지역으로 피신해 사역을 하던 빌립집사의 사역은 두드러졌습니다(8:5-8). 빌립도 스데반 처럼(6:8-10) 능력을 행하였습니다.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후  유대인들의 태도가  돌변하여 교회를 무섭게 핍박할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핍박을 통해 힘든 것 보다, 이들을 통해 일어나는 기적, 치유, 거듭되는 사람들의 회심으로 인해 도리어 기쁨이 넘쳤습니다. 또한  앞으로 하나님이 자신들을 통해 무슨 일 을 계속하실지 모르는 알수 없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예기치 않는 일을 당할 경우가 많습니다.  기쁜일도 있지만,  실망할때가 더 많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함으로 모진 박해가 찾아온것은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실망할 일입니다. 하지만 스데반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교회로 하여금  이방인 선교를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봅니다 (고난이라는 수단을 통해). 고난과 박해가 없었다면, 흩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교는 커녕 안일과 부패에 빠질수 있습니다. 고여있으면  썩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에는 실망, 낙심, 좌절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건 마다 하나님의 뜻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단지 도구일뿐입니다. 도구는 주인의 손에 있을뿐, 실망이나 좌절이 있을 수 없습니다.

2012년 7월 11일 수요일

먼저 자신에게..

행7:37-53절 말씀 묵상내용입니다.
스데반은 해박한 성경지식과 역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설교를  이어갔습니다. 그의 청중들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에게 역사적인 이야기는  무의미 합니다. 누구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잘 알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조상들이  하나님께 보여준  불신실했던 모습과 선지자들을  핍박했던 것들을  익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마 본문 50절 까지는 스데반의 설교에 동의 했을 것 입니다. 갑자기 스데반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당신들도  같은 사람들이다" 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51). 자신들에게는 무감각 했던 이들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유대지도자들은  성경을 읽고 남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조상들의 행한 일들을 알고, 자신들도 같은 일을 행하였지만, 자신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이야기 일 수 있고,  바로 저의 이야기였습니다. ..자칫 말씀의 잣대를  자신 보다 남에게  들이댈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다는 사람일수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일수록  그런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외형은 경건한 것 같지만 속에는 감추어진 은밀한 죄가 있을 수 있고, 겉은 믿음이 좋은 것 같지만 내면에는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차 있을수 있습니다. 남을 위로한다고 하지만 위로 받아야 할 사람, 치유한다고 하지만  치유받아야 할 사람은  남이 아닌 자신입니다. 말씀을 통해 새로워져야 할 사람은 바로  자신입니다.  본문이 주는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은 '남이 아닌 먼저 자신에게'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2012년 7월 10일 화요일

부르심

행7:17-34절 말씀 묵상내용입니다.
스데반은  계속되는 그의 설교에서 모세의 생애를 이야기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역사속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한 지도자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수여한 사람입니다. 출생 때 부터가 범상치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가장 극심한 고난을 받을 당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가 태어났을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20) 였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아이'라고 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가 넘쳤던' 사람임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그가 태어날 시기에는 히브리 남자 아이들은  다 죽이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태어난 처음 3개월은 친어머니에게서 양육을 받고 그 후 애굽의 궁중에 입양이 되어 궁중에서 양육을 받았습니다(21). 모세를 보호하시는 섬세한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애굽의 궁중에서 자랐지만 자신의 몸속에는 히브리 사람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  철저한 히브리 사람임을 자각하였습니다. 동족이 조금이라도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혈기를 발산했습니다(24). 40세에  하나님이 자신을 민족을 구원할 지도자로 삼았음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25). 결국  광야로 도망을 칩니다. ..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셨다는 것을 알지만,  사람들에게 거부를 당한다면 ' 부르심' 을 의심 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도 오랫동안 목회가 뜻대로 잘 안될 땐  부르심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모세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를 다시 부르셨습니다.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34).  하나님이 부르셨는데, 부르심을 외면, 도망을 쳤다면, 하나님은 도망친 그 장소에  찾아가셔서 다시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사전에는 '포기'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목회자들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모두  성직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교회일만 성직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일,  세속적인 직업, 모두 성직입니다. 성직이 아닌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삶 자체가 성직입니다. 그 일이 무엇이 되었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일과 세속의 일을 구분하여 생각한다면 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직업에  불성실 하다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나에게는 그런 부분이  없습니까?

2012년 7월 9일 월요일

이루어가시는..

행7:1-16절 말씀 묵상내용입니다.
억울하게 공회앞에 서게 된 스데반은 자신이 옳다 그르다 하고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법정에 세운 사람들과 공회원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로 삼았습니다. 스데반은 역사에 해박했고, 유대의 역사와 그리스도의 복음과 연결 시키는 탁월한 영적 통찰력을 가졌습니다.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는 매우 긴 설교였습니다. 그의 설교에서 스데반은 2가지 주요 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유대 지도자들은 오랜 역사동안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자주 배척했다는 사실, 둘째,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단계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첫번 준비가  아브라함을 선택하는데서 부터 시작됩니다(창12:3).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온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 구별하신 민족입니다.스데반이  설교에서  강조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인도와 역사를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나타내시고, 말씀하시고, 보내시고, 약속하시고, 징계하시고, 구원하시고. .. 이스라엘의 역사속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가나안에서 이집트로 이집트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순례의 길 마다 하나님의 기가막힌  인도가 있으셨습니다. 때로는 어떤 사건을 통해, 기쁘던, 좋지 않던,  아픔을 주시기도. .. 그분의 계획에 따라 주권적으로 인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는  이성으로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넓고,  깊으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계획을  삶속에서 극히 작은 부분만 볼 수 있습니다. 신실한 주님의 종이었던 스데반이나, 사사건건 하나님의 일을 방해 하던  유대지도자들이나,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주권속에서 볼 때 한 줌에 재에 불과 합니다. 인간의 역사, 세상에 돌아가는 일들..  무슨일이던 너무 기뻐하거나, 낙심하거나, 흥분하거나, 요란하게 떠들 필요가 없습니다.  이루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조용히 그분의 주권에 순종할 뿐입니다.  다만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위대한 뜻이  삶과,가정에, 교회와 나라에 이루어지도록 기도  하는 것 뿐입니다.

2012년 7월 8일 일요일

들을 때 마다

시24편 말씀 묵상내용입니다.
이 시편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권능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위대하시고 , 존재하는 모든것들이 다 그분의 것입니다. 이분의 이 능력이 초대교회를 통해 그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초대교회는 살아 있고 능력이 넘쳤으며 많은 표적과 기사들, 악한 영에 눌린 자들 수 많은 병자들이 치유받고, 그들이 증거하는 복음을 통해 죄악에서 신음하던  수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는 일들이  매일 일어났습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투옥된 그분의 종들을 구하기 위해 천사를 보내시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경외하고 순종해야 할 분입니다. 하지만 시편기자는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는데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분의 존전앞으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3). 하지만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려면 '의'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하나님 존전앞에 나아가기를 원하는자는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4)가 되어야 함을 강조 합니다. .. 여기 '손'이라 함은 행동을 상징합니다.  '손(행위), 마음, 말' 이 등장합니다.  손과 마음과 말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즉 마음이 정결해야 행동과 말이 정결할수 있고, 행동이 정결하고  말이 정결함은 마음의 정결함을 말합니다. 시편기자는 이 의가 있어야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앞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은  그 '의'를 하나님에게서 얻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5). ..즉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앞에 나아갈 수 있는 의는 하나님의 의 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보혈로써만 얻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그의 피 믿으오!".
주님의 보혈! 수 없이 듣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상한것은  들을 때 마다 영혼이  살아나고, 들을 때 마다 죄에서 자유케 되고, 들을 때 마다 영적으로 소생하는 힘이 생깁니다.
 주의 보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10:19-20) -아-멘-

2012년 7월 7일 토요일

축복된 위험

행6:8-15절 말씀 묵상내용입니다.
사람들에게 있는 공통된 심리가 있다면 돋보일려는 마음일 것 입니다. 요즈음 유행하는 말로 '미친 존재감'이 되고 싶은 욕구' 입니다. 그러나 유명해지고 싶은 것은 일종의 권력추구입니다. 왜냐하면 유명하다는 것 때문에 특권의식이 생기고, 횡포를 부릴 수 있습니다. ..

스데반도 초대교회에서 매우 두드러졌던 사람 이었습니다. 그는 첫 일곱집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교회안...이나, 밖에서도 매우 주목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자신이 유명해지를 원했던 사람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한가지 갈망, 즉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 되는 것 이었습니다. 사도는 아니었지만 능력있게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스데반에 대해 몇가지 특징을 기록 합니다.
첫째,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6:3),
둘째,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6:5),
셋째,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6:8),
넷째,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6:10).

성령님이 주시는 지혜로 말하는 그를 대적자들은 어떤 논리로 대항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세상 지식과 논리로 무장을 해도 성령님이 주시는 지혜가 넘치는 사람앞에는 압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논리로 스데반을 당하지 못하자 대적자들은 사람을 매수하여 스데반을 모함하도록 거짓말을 하게 하고 결국 법정(산헤드린 공회)에 세우게 하였습니다(11-12). .. 논쟁에서 지면 감정이 상하고, 결국 폭력적인 수단으로 상대방을 제압 할려고 합니다. 사탄은 인간의 이런 악한본성을 사용합니다. 주님도 이같은 방식으로 빌라도의 법정에 서셨습니다.....

스데반은 탁월하게 사역을 감당했음에도, 엄청난 반대와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닮을수록 남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지만, 어떤 때는 주님을 닮은 것 때문에 비판과 거부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축복된 '위험'임을, 스데반을 보면서 생각해봅니다.
See More

2012년 7월 6일 금요일

영적 분별력

행6:1-7절 말씀 묵상내용입니다.
사람들이 모인곳에는 다툼과 불평이 쉽게 일어날수 있습니다. 은혜가 충만했던 초대교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교회안에는 대표적으로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두 부류가 존재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이란 세계각지에 흩어져 살다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사람들인데 헬라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었고,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 태어난 본토 사람들로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두부류는 당시 유대사회에 서로 경쟁자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안에 이 두부류 사람들 사이에 불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 했습니다. 그 발단은 '공평성"의 문제였습니다. 당시 교회에서는 생활이 어려운 과부들을 도왔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의 대상에서 제외 되었던것 같습니다(1). 그래서 불평이 시작... 이를 간파한 사도들은 재빠른 수습에 들어갔습니다. 그 수습은 회의를 열어 누가 옳고 그름을 따지는것이 아닌, 오히려 자신들의 본질적인 일을 상실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했습니다(2).그들이 해야 할 본분은 기도와 말씀 사역이었습니다(3-4).  기도없는 말씀 사역은  말씀을 듣는 영혼들을 병들게 합니다.  목회자가 기도와 말씀에 대한 선택과 집중을 상실한다면  교회안에는 은혜가 사라지고,  분쟁과 파당이 생길수 있고.. 결국 많은 시험에 직면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마귀의 이 궤계를 간파했습니다. 그래서 일곱 집사를 선택하여 그들로  구제사역을 하게 하고 자신들은 본분에 충실할려고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뽑은 일곱명의 집사들의 이름들이 다 헬라말인것을 보면(5), 소외감을 느꼈던 헬라파 유대인들의 마음을 헤아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분열의 위기에 놓였던 예루살렘 교회는 다시 정상을 되찾았습니다(7).
본문을 묵상하면 교회안에  영적 분별력과  영적 지혜가 얼마나 필요한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무슨 문제가 일어나면 이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니면 마귀의 역사인지? 식별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우리에게 더욱 절실함을 느낍니다.


2012년 7월 5일 목요일

그들을 위해..

행5:33-42절 말씀 묵상내용입니다.
공산치하 루마니아에서 여러해 동안 투옥 생활을 하였던 리차드 범브란트(Richard Wurmbrand) 목사가 그의 감옥생활의 경험을 기록한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고난으로 인해 파괴되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If prison wall speak, 참조).  .. 산헤드린 공회에서 사도들을 감옥에 넣고, 위협하고 심지어 죽일려고 하였어도(33), 그들의 신앙을  약화시키거나 파괴시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모욕을 당하게 됨 을 영광 스럽게 여기고 기뻐 하였습니다(41). 본문을 묵상하면서, 만일 내가 사도들이 처한 그런 상황에 있었다면 어떻게 하였을까?.. 아마 서슬퍼런 산헤드린 공회의 위협에 못이겨 굴복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복음을 전하기는 하되, 숨죽인채 비밀리에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사도들처럼 어느 때든지, 어느 곳에든지 두려움 없이 거리낌없이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까? 그런 상황에 부딪히지 못한 저로서는 뭐라고 말할 수 가 없습니다. 모르긴해도, 투옥을 당하거나, 매를 맞거나, 심한 모욕을 당하였다면, 사도들 처럼 기뻐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연민에 빠지거나, 분노, 원한.. 하지만 사도들은 자신들이 당한 것에 대해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산에서 가르치신 말씀을 기억하며 기뻐했을 것입니다. "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1-12).
 십자가의 복음은 인간의 '의' '자랑' '교만'이 아닌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영광' '겸손'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본성과 대치됩니다. 그러기에  박해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 지금도  흰두교와 모슬렘 나라에서  혹은 공산권에서 복음 때문에  투옥, 테러, 위협을 당하면서 신앙을 지키는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다. 또한  북한에서 복음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강제노동수용소에서 고난을 당하는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매일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자유의 땅에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빚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물으실지 모릅니다.

2012년 7월 4일 수요일

어떻게 반응을 ..

행5:17-32절 말씀 묵상내용입니다.
사도들에 의해 많은 표징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자 대제사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만이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기를 원했는데 뜻하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백성들의 관심이 거기에 쏠리자, 위기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부랴 부랴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17-18). 하지만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방해 할려고 애를 써도  소용 없는 일 입니다. 철통같은 옥문, 늘 긴장하면서 죄인들을 살피는 간수들이 있었지만(23),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사도들을 구하셨습니다(19-20). 천사는 사도들을 구하면서 성전에 가서 이 생명의 말씀을  계속 가르치라고 했습니다(20). 반대로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엄금했습니다(4:17; 28). .. 자유의 땅에서 사는 대부분의 우리는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히거나,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법정에 서 본 경험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법정에서 전도하지 말라고 판결을  받은 적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때때로 반대나 방해에 부딪히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 부터... 교회안에서도 내 신앙에 방해 인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때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합니까? 이에대해  베드로와 사도들이 좋은 모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 하니라"(29).

2012년 7월 3일 화요일

당신을 사모합니다.

행5:12-16절 말씀 묵상내용입니다.
 본문은 놀라운 광경으로 시작됩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많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다"(12)고 했습니다.  표적과 기사를 행하였던 사도들은 불과 몇주전만 해도, 예수님이 붙잡히자 도망을 쳤던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을때도 문을  틀어 잠그고  숨죽이며 숨어지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이들을 통해 많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또한 베드로가 지나갈 때 혹 그의 그림자라도 덮히면 병이 나을까 하고 바라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15). 사람들은 베드로가 전하는  능력있는 말씀과 그가 행하는 표적과 기사를 통해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베드로야말로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베드로는 불과 몇주전만 해도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면서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특히 공개된 장소에서는 자신의 신앙을 숨기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만일 그런 경우가 있었다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부끄러움? 죄책감? 후회?
이 말씀은  큰 용기를  줍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들은 애써 주님을 부인하고,  공개된 장소에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닌척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이 오시자  몇주전의 문을  걸어 잠그고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젠  사람들의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13)이 되었습니다. 또한, 수  많은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능력 있는 전도자들이 되었습니다(14). 목회의 능력도, 능력있는 신앙생활도, 담대함도,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함도, 원초적이고 단순한것 같지만 답은 하나입니다. 성령님에게 있습니다. 성령님! 당신을 사모합니다.

2012년 7월 2일 월요일

나의 마음에는 ...

행5:1-11절 말씀 묵상내용입니다.
은혜가 충만했던 초대 교회에 첫 번 째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입니다. 이들의 죽음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그 판값 얼마는 감추고 나머지만 헌금을  드린데서 비롯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거짓을  행하였다는 이유였습니다. .. 거짓말이나, 거짓된 행동은 다른 죄에 비해  쉽게 범할 수 있는  있는 죄입니다.  4:36-37에서" 바나바는 그의 소유를 팔아 그 판값 전부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금했습니다". 하지만 아나니아는 그의 소유를 판 값 전부가 아닌 일부만 드렸습니다. 바나바와 아나니아의 차이가 여기서 시작됩니다. .. 바나바가  전부를 헌금하자 교회에서 칭찬을 한몸에 받은 것 같습니다. 이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 아나니아는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바나바의 흉내를 내고 싶었습니다. 즉 가난한 사람들을 진심으로 돕기 위해 소유를 판것 보다 바나바 처럼 남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기를  더 원했습니다. 두 사람의 큰 차이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특히 베드로가 아나니아를 책망하는 내용에서  이것을  엿볼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문제를 삼은 것은  아나니아가 자신의 소유를 팔지 않아서도 아니요, 헌금을 드리지 않아서도 아니요, 또한 일부를 나두고 나머지만 드린데 있는 것이 아닌, 오히려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나님께 다 드린것 처럼 믿게 하는데 있었습니다(3-4). 하나님 앞에서 바른 마음의 자세 보다 오직 사람들의 관심과 존경, 칭찬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 선행을 하는 것은 좋으나 선행을 할 때는 행해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그 원칙을 가르치셨습니다.   "선행을 할 때에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은밀하게 행하라"고 하셨습니다"(마6:1-4). 하지만 아나니아의 자세는 주님이 가르치신것과 정반대 였습니다 . 하나님은 나의 선행보다 나의 마음의  자세를 더 보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나의 마음에는 아나니아와 같은 마음은 없습니까?

2012년 7월 1일 일요일

나의 목자

시23편 말씀 묵상 내용입니다.
이 시편을 기록한 다윗은 수많은 위기와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움을 많이 당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시편은 믿음, 용기, 위안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사실 그가 이시편을 기록할 당시 어느때 보다 그에겐 용기와 위로가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압살롬의 반란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의 반란도 반란이지만, 자신의 친 혈육인 아들이 자신을 죽일려고 하는 상황을 맞이한 그는 아버지로서의 고뇌와 갈등은 이루 말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완전히 소진된 상태 였습니다(2-3). 또한 위험에 직면에 있었고(4), 원수들에 둘러 싸여 있었습니다(5).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 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역시 이 시편은 큰 위안을 줍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고, 선하십니다. 그분은 필요를 공급하시고, 보호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위안을 얻지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지키시고, 그분의 신실함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뒤를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것이 어디 있었습니까? 그분이 얼마나 우리를 도우셨고,보호하셨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푸셨는지... 그분은 언제,어디서나 영원히 나의 목자가 되십니다.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