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31일 월요일

부요함

잠10:1-3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 가운데 ' 부' 에 대한 말씀이 마음이 와 닿습니다.
본문에는 정당한 ' 부'와 불의한 재물을 비교 하였습니다(2,16).

부지런한 자에게 하나님은 물질의 부를 주십니다.
정직하게 부지런히 일하는 자와 함께 하시고 그를 축복하신다고  하셨습니다(4,5,22).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속한 것입니다(마5:45).

이것보다 더 귀중한 영적인 부요함이 있습니다.
믿음의 부요함입니다(약2:5).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이 부요함은 물질이 많고 적음에 상관이 없는 부요함이요,
행복입니다(고후8:9).

오늘도 이 부요함의 기쁨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2014년 3월 28일 금요일

성령을 따라...

마12:22-3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항상 말을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은혜스럽게 합니다(골4:6).
어떤 사람은  늘 부정적이고 ,상대의 감정을 상하는 말만  골라하는 듯 하는 착각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생각, 어떤 행동,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존재를 알수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33).

마음에 가듯한 것이 말과, 행동으로 나오듯이(34),

많이 접촉하는 대상에 따라  마음에 담기는 것이 달라질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내속에서 자연적으로 흘러 넘치도록(갈5:22-23).
오늘도 성령님을  따라 살기를 원합니다(갈5:16).

2014년 3월 25일 화요일

선택

마11:20-3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쁜 현대 생활은 선택을 강요받습니다.
중요한 것, 중요하지 않은 것
급한 것, 급하지 않은 것...
이것이 스트레스입니다.

무엇을 선택할 것입니까?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먼저 선택하라(28)
그러면  내가 너희를 자유케 해주겠다.

그렇습니다.
먼저 주님앞에 가면 다른 것들은 자연히 쉬워질 것입니다(눅10:42).

오늘도 쉬운것을 선택하겠습니다.
먼저 주님앞에 가겠습니다.

주님이 모든것을 쉽고 가볍게 해주실것 입니다(30).

2014년 3월 24일 월요일

요한의 질문

마11:1-1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옥에 갇힌 침례(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님에게 질문하게 했습니다.

요한이 기다렸던 예수는 누구였습니까?
 요한이 기다렸던 예수는 아마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예수였던 것 같습니다.

요한의 질문과 같은 질문이 그 후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바울도 자신이 전했던 예수가 아닌 다른 예수를 전하는 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고후11:4).

오늘날에도 많은 예수들이 있습니다.
신화적인 예수, 혁명적인 예수, 병을 고쳐주고, 부자가 되게 하고, 성공을 시켜주는 예수,

우리가 믿는 예수는 누구입니까?
그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마16:16),
우리를 대신 하여 죄인이 되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분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고후5:21)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예수입니다.

2014년 3월 21일 금요일

착각

삼하15:1-1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압살롬에게는 계획된 음모가 있었습니다.
그는 4년동안 속내를 감추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위해 힘을 썼습니다(10).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아버지의 권좌였을까? 아니면 아버지에 대한 분노였을까?
동기가 어찌 되었던 압살롬의 마음과 행동에는
다윗의 죄의 댓가를(밧세바 사건) 치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삼하12:11).

압살롬은  아버지를 대적하기 위해 아버지의 리더십에 상처를 주는 것으로 출발했습니다.
마치 아버지의 통치에 정의가 없고, 아버지가 왕으로서 할일을 못하고 있음을 선동했습니다(2-4).

정권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 선동에 넘어간 사람들 점점 그의 세력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12). 그러나 이것은 그를 파멸로 이끄는 함정이었습니다.

지도자들이 쉽게 빠질수 있는 함정이 이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에 쉽게 도취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진짜 그런 사람인줄 착각합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의 환호와 갈채에 속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촛점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시는 것이었습니다(요4:34).

2014년 3월 19일 수요일

신실함

삼하11:1-2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이스라엘의 온 군대는 전쟁터로 나갔고 다윗은 홀로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1).
차라리 다른 왕들처럼 그도 전쟁터에 나갔다면 유혹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이 홀로 남은 예루살렘은 그의 유혹의 장소였습니다.

다윗은 밧세바가 남의 아내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에겐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불러 들였습니다.
술을 마시게해 취하도록 했습니다(13).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고 실행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계획은 우리아의 신실함앞에 무너졌습니다.
우리아는 자신의 부하들이 전쟁터에서 전쟁을 치루는 동안 아내가 있는 집으로 가기를 거부했습니다(11).

이일이 실패하자 다윗은 요합까지 자신의 음모에 가담시켜 결국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였습니다(14-15).

헷사람 우리야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님에도 이스라엘 왕인 다윗보다 이스라엘에 더욱 충성하였던 그의 모습이 돋보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어서 신실함은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누가 알아주던 안알아주던 신실한 사람은 변함없이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그 모습을 보시고 계십니다..

나의 삶의  전영역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지키고 있습니까?

혹 고백하지 않은 죄는 없는가요?

2014년 3월 18일 화요일

약속

삼하8:15;9:1-13
요나단과 다윗은 이전에 서로 언약을 맺었습니다(삼상20:42).
다윗은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울의 집안 사정을 알아보았습니다(9:1).

이제야 친구와 약속을 지킬려는 것 같습니다.
 왜 그동안 친구와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까요?

그의 왕권이 강화 될 때까지 기다렸을까요?
아니면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바빠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다윗은 정의와 공의를 행했다고 했습니다(8:15).
내가 만일 다윗의 위치에 있었다면 어떻게 행했을까?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공평과 의로 모든 사람에게 행할 것인가?
아니면 한쪽으로 치우쳐서 나를 좋아 하는 사람들에게만 기울어질 것인가?

목회자가 된 사람
교회지도자가 된 사람들이 하나님이 맡겨주신 양떼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생각해줍니다.

므비보셋은 자신을 " 죽은 개" 와 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8).
그의 겸손을 나타내는 것인지, 아니면 다윗이 두려워 다윗에게 자신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님을 말한것인지 잘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므비보셋을 왕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대하였습니다(11).
늦었지만 다윗은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누구와 약속을 하고는 아직 지키지 못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2014년 3월 17일 월요일

감사의 마음

삼하7:18-29절, 오늘의 묵상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고  즉각 감사의 기도로 반응을 보였습니다(18).
만일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 있다면 제일 먼저 누구에게 알리겠습니까?

페이스북에 Post로 올리겠습니까?
아니면 전화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알릴것입니까?
아니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로 나아겠습니까?

다윗은 만사를 제쳐놓고  성막으로 들어갔습니다(18).
기도는 모든 일을 제쳐놓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다른 일중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일의 제일 첫 번째에 해당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앞에 겸손했습니다(18).
그가 받은 축복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했습니다(22-24).

 하나님의 계속적인 축복을 간구했습니다(29).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권좌,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나라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동안 나의 삶속에 주신 축복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속적인 풍성한 은혜와 인도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잠16:9)

2014년 3월 14일 금요일

예배

삼하6:1-2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언약궤는 거룩한 것입니다. 만질수 없습니다..

하지만 웃사가 언약궤를 만짐으로 죽음을 당했습니다(7).
웃사는 좋은 의도로  그렇게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이 되었습니다(민4:15).

좋은 의도이던, 합리적이던 그것은 사람의 생각이고,
신앙인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웃사의 불순종은 신앙 공동체가 해야 할 본질을 일깨워줍니다.

웃사의 죽음에 대해 다윗이 처음 보인 반응은 분노였습니다(8).
하지만 곧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그 두려움은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면서 큰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12-15).

다윗은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상징임을 알았고,
그것이 오벧에돔의 집에 큰 축복을 가져왔음을 알았습니다.
예루살렘에도 하나님의 거룩한 축복이 임하게 됨을 알았습니다(11-12).

그래서 그는 하나님앞에서 아이처럼 껑충껑충 뒤며 춤을 추었습니다(16,20),
그의 모습이 그의 부인에게 비웃음을 샀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16).

전심으로 춤을 추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다윗의 모습!

나의 예배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해봅니다.

2014년 3월 13일 목요일

지도자의 권위

삼하5:1-1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다윗은 마침내 전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지파가 그를 지지했습니다(1-3).

다윗의 왕권은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이것은 교회나 선교단체의 지도자에게도 큰 교훈을 줍니다.

지도자를 세울때에는 모든 교인들과 구성원들이 참여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마음으로 동의해야합니다.
어떤 사람의 영향력(?)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백성들의 탄탄한 지지의 기반으로 그 여세를 몰아 예루살렘을 점령했습니다(7).
예루살렘은 요새라 점령하기 힘든 지역이었고, 아무도 그곳을 쉽게 점령하리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6).

다윗의 승리는 하나님이 언제나 그와 함께 하심을 입증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권위는 날로 날로 더해갔습니다(10).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의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곧 한님이 그와 함께 하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12).

2014년 3월 12일 수요일

다윗의 본

삼하2:1-7;3:1 오늘의 묵상입니다.
삼상 16장에서 다윗은 이미 사무엘로 부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사울이 죽자 다윗은 모든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왕이 될수 있었지만
그는 남쪽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7).
북쪽 이스라엘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었습니다(10).

그럼에도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과 인도하심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더욱 하나님을 신뢰했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지기 까지 인내로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리더는 자신의 정치력과 힘으로 목적한바를 획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에 온전히 맡기는 자입니다.

후에 다윗이 손을 대지 않아도 이스보셋이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삼하4).
이때 다윗은 이스보셋을 죽인 자들에게 상을 주기보다는 벌을 내려 죽였습니다.

교회이던 선교단체이던  사역자로, 지도자로 세움을 받은 사람은 다윗의 본을 따라야함을 다시 느낍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문을 여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앞에서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는데 힘을 쏟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데 집중했다는 사실입니다.

2014년 3월 10일 월요일

기다림

삼하1:1-1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사울은 다윗의 가장 큰 대적자였고 박해자였습니다.
반면에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후원자였습니다.

다윗이 이 두사람의 죽음소식을 들었을때 그는 크게 애통해했습니다(12).

우리는 다윗이 요나단의 죽음은 정말 슬퍼했고 사울의 죽음은 내심 반가워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의 슬픔은 진심이었습니다.

만일 내가 다윗의 입장이 되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사울은 다윗의 대적자 일뿐만 아니라
 왕이 되는데 큰 걸림이 되는 사람입니다.

사울의 죽음은 다윗이 쉽게 권좌에 앉을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보통 사람 같으면 반갑지 않겠습니까?

본문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알린 사람에게 다윗이 어떻게 대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죽어가는 사울을 죽이고 그 소식을 다윗에게 알리면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아말렉인은 생각했습니다(10).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자를 손대는 것을 큰 죄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14-15).

사울은 죽는 날까지 다윗의 대적자였지만
다윗은 사울이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자'였습니다(16).

오직 사울을  제거하실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이심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2014년 3월 7일 금요일

하나님의 은혜

행23:12-2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바울을 죽이기전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결심한 40명의 결사대가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바울은 큰 위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뜻밖에 세명의 사람들을 사용해 바울을 보호하십니다.

첫째는 바울의 조카입니다(16).
만일 바울의 조카가 ' 내가 삼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젊고 어린데, 누가 내말을 들어줄것인가? 하고 생각을 했다면 주저했을 것입니다.

둘째는 백부장입니다(17-18).
만일 백부장이 '내가 왜 이 죄수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결사대가 있다는 확인 되지 않는 사실을 가지고 귀찮게...  그러면 바울의 말을 무시했을 것입니다.

셋째는 천부장입니다(19-22).
만일  천부장이 ' 내가 왜 어린 이 젊은이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내가 왜 한 트러블 매이커(troublemaker)를 보호하기 위해 470명의 군인들을 동원해야 하는가?' 했다면
바울은 큰 위험에 빠졌을 것입니다.

이런 가정들은 다 기우(杞憂)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생각을 지배하셨고, 바울을 보호하셨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에도 위기의 순간이 오지만
언제나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기억해야합니다.

 " 주를 두려워 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31:9)

2014년 3월 6일 목요일

행22:30-23:1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앞에서 바울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죄가 없음을 역설합니다(1).

공회원들 가운데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증거하자(6),
원래 신학적 입장차가 컸던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8) 사이가 더욱 나누어졌습니다(9).

바울도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자신의 입을 치라고 명하자

그는 대제사장에게 저주에 가까운을 말을 퍼부었습니다(3).
물론 나중에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를 했지만...(5).

말이 항상 문제입니다.
우리는 말로 다른 사람을 격려할수도 있고(히10:24),
분노를 가져올수도 있습니다(잠15:1).

세울수도 있고 무너뜨릴수도 있습니다.
진리를 말할수도 있고 아첨할수도 있습니다.

말의 지혜, '때에 합당한 말'이 얼마나 필요합니까?(잠25:11).

항상 우리의 말을 '은혜 가운데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골4:6).

2014년 3월 5일 수요일

시민권

행22:22-2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은 가죽줄에 매이고 재찍질을 당했습니다(24-25).
바울은 백부장에게 로마 시민권자인 자신이 채찍질을 당하는 것은 부당한 일임을 말했습니다(25).

로마법에는 로마시민이 채찍질을 당하는 것이  금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부장의 말대로(28)
당시 로마 시민은 로마 시민권자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에게는  자동적으로..
어떤이는 사기도 하고,
아니면  로마에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상으로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날때부터 시민권자였습니다(28).
그렇지 않고는  천부장 처럼 엄청난 돈을 지불해서 시민권을 사야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도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그 값은 세상의 돈으로 치룰수 없는 것입니다(벧전1:18).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값을 다 지불하셨습니다((고후5:21).

우리는 태어날때 부터가 아닌  믿음으로(엡2:8).
하늘의 시민권자가 되었습니다(빌3:20).

값을 지불하셔서 나로 하늘의 시민권을 갖게 해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2014년 3월 4일 화요일

만나는 사람들에게..

행22:6-2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의 회심은 성경안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메섹 도상의 경험은(6) 그의 생애를 한순간에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다르게 다양한 모습으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단순한 전도로
어떤 사람은 고난을 통해
어떤 사람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 자연스럽게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주님을 만났지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새로운 신분(요1:12),
새로운 삶(고후5:17)
새로운 공동체(엡3:6)
입니다.

바울이 자신이 만난 부활의 주님을 열렬히 증거했듯이

오늘 내가 만난 예수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증거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2014년 3월 3일 월요일

주님을 위해

행21:37-22: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가 예상했던 대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31).
바울이 매를 맞고 있을때 천부장이 바울을 체포했습니다(33).
바울을 해하려하는 무리로 부터 바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35).

유대인들은 바울이 그들의 언어로 말함을 듣고 조용해졌습니다(22;2).
바울은 헬라말과 히브리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할수 있었습니다.
그는 양쪽의 문화를 다 이해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시민권자일뿐만 아니라,  당대의 유명한 대학도시에서 양육된 사람이었습니다(39).

그는 평범한 유대인은 아니었습니다.
유명한 율법 선생밑에서 훈련을 받은 자요, 어느 유대인 못지 않는 열심을 가진 자 였습니다(22:3).

바울의 이런 배경과 그가 받았던 훈련을 보면
주님이  왜  그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택하셨는지를 알수 있습니다(행9:15).

주님은 내가 누구인지, 나의 성향이 어떠한지, 내가 받은 교육, 재능, 훈련, 은사, 내가 처한 상황을 누구보다 더 잘아십니다.

그것을 오늘 주님을 위해 사용하도록 나를 이끄실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