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7일 목요일

거스리며

요일2:28-3:1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서 요한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 입니다(3:2). 얼마나 은혜스러운 선언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인 큰 이유는 주님이 오셔서 나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죄의 기록에서 모든 흔적을 없애셨기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아직 죄를 짓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습관적으로 짓는 죄는 없습니다. 가령 분노를 통제하지 못한다던가, 거짓말을 밥먹듯이 한다던가, 도박을 한다던가, 외도(外道)한다던가..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고(3:10),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3:6).

또한 하나님의 자녀는 미혹당하지 않는 의인입니다(3:7).  이 세상에는 미혹하는 요소들이 너무 많습니다.  도덕적 기준이 해이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 그것이 당연한 것 처럼 받아들여지는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의로운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스리며 나아가듯이 하나님의 자녀는 이런  세상의 흐름에 반(反)하여 성경적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흐름에 역행하며 사는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려움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거기에 계시며 도우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을 감사하십시오.
세상의 문화를 거스리며 살때 다가오는 어려움을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2012년 9월 26일 수요일

세상의 것들

요일2:15-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서 요한은 금욕을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금욕의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연은총을 즐기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스포츠를 즐기고, 좋은 소설을 읽고, 좋은 영화를 보고, 아름다운 음악을 보고 , 여행을 가고...
그러나 이것이 삶의 전부가 아님을 말합니다(15).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최신 유행하는 옷, 돈, 운동... 우상이 되어서는  않됩니다.

탐욕이나 정욕을 따라 살아서는 않됩니다(16). 사람들은 자신의 원하는 것을 가졌거나, 성취했다면 과시하거나 그것을 성공의 척도로 삼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는  최신 유행을 좇고 싶은 욕망, 자신이 중요한 존재임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이런 욕심들의 세상의 삶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요한은 이런욕망들은 하나님에게서 온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16).

신문, 음악, 텔레비젼, 인터넷 할 것 없이 탐욕을 자극하고 성적자극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탐심과 섹스와 이기주의에 흠뻑 빠져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강하게 말한것 처럼  본문 역시 이런 세상의 것들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 허무하게 만들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지나가고 없어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사는자에게 오는 행복과 축복은 영원합니다(17).

2012년 9월 25일 화요일

주님이 사셨던 것 처럼

요일2:1-1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서 요한은 먼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언급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의 죄와 세상의 모든 사람의 죄 때문이다고 강조합니다(2).

이어서 순종은 주님을 아는 열쇠임을 말합니다(3).주님을 안다고 하면서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가 무슨 말을 하던, 아무리 심오한 말을 한다고 해도 주님을 모르는 자 입니다(4).

만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문자 그대로 주님은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십니다. 따라서 주님이 사셨던대로 살아야 합니다(6). 요한은 남자, 여자, 청년, 노인 할 것없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함을 말하고 있습니다(12-14).

마22:37-39절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두가기 큰 계명을 주셨습니다. 마음을 다해,목숨을 다해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 몸 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입에 발린 말로 남을 기분좋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인도자가 시키는 대로 주안에서 사랑합니다 하며 포옹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우리 내면 깊은곳에서 나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인 순종을 말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나의 내면에서 나오는  자발적인 섬김입니다. 주님이 섬기신 것 처럼...
그러나 아주 힘든 일 입니다. 그러기에  의지적행동이요, 맑고 순수한 마음이 동반 되어야 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과장이 아닌...

주님이 사셨던 것 처럼 우리도  행한다면(6) 우리는 빛안에 거하는 자이고, 하나님과 영적으로 연합된 사람입니다.

주님이 사셨던 것 처럼 살게하소서!성령님 도우소서!!

2012년 9월 24일 월요일

그리스도의 교회

요일1:1-1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서는 사도요한이 기록한 서신입니다. 본서의 첫번 독자인 초대교회는 잘못된 가르침을 주는 거짓 선생들이 들어와 영적으로 교회를 혼란 시켰습니다. 소위 영지주의(Gnosticism)가 침투했습니다. 영지주의는 헬라어로 '지식' 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들의 가르침의 가장 큰 특징은 영과 육을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가르침입니다. 영적인것은 선한 것이고, 육신은 악한것이다. 따라서 극단적인 금욕생활을 강조 합니다.

또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몸은 진짜 몸이 아니라 몸처럼 보여진것이다.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으로 오신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분임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이런 영지주의 이단사상이 초대교회 누룩처럼 퍼지자 이대로 있다가는 안되겠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사도요한은 그들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펜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본서의 배경입니다.

먼저 그는 자신의 영적권위에 대해 말합니다. 그 권위는 자신이  주님과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 한 제자라는 사실에서 나옵니다(1). 주님은 하나님이시고 뿐만 아니라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분임을 그는 강조하고 있습니다(2). 그가 말하는 내용을 보아도 당시 영지주의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음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것 입니다(5). 그분은 완전히 성결하시고, 선하시고 거룩하신 분 입니다. 하나님의 빛은 모든것을 조명(照明)합니다.
그분에게는 어두움이 전혀 없으십니다(5). 어두움은  악한것, 죄를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앞에는 그 어떤 악한것이나 죄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운데 살면 하나님의 빛안에 거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고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읽는다고 해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영적 교제가 단절이 됩니다(6).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용서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럼에도 매일 알게 모르게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8). 그럼에도 늘 그리스도안에서 용서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7절하,9절)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해 죄를 자백하면 언제든지 하나님과 영적교제가 회복이 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됨을 회복합니다.

하나님가 하나됨은  어떤 교단에 속해있던 상관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영적으로 하나됨을 말해줍니다.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한형제요, 자매입니다. 교단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내교회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웃교회 더나아가  세계의 복음의 불모지에 세워진 약한 교회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만일 내교회만 생각하고 숫자만 불리는데 집중한다면 그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닐지 모릅니다.


2012년 9월 23일 일요일

괴롭히는 사람들

시35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 시편기자는 다윗입니다. 그는 그가 언급한대로 " 많은 적들로"(19) 인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에대해 거짓말을 말하고(20), 조롱합니다(16). 또한 함정을 파고(7), 말로 덫을 놓을려고 애를 씁니다(11).  그를 미워하고 무시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께 탄원드립니다(1). 그는  그의 정직한 감정을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것 처럼 그들도 고통 당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26).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들의 몰락을 보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4). 참 진솔한 감정표현입니다.

오늘도 무고히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어디에든 존재하고 있습니다. 학교, 직장, 대학 심지어는 교회안에도 존재 합니다. 이들은 남을 지배할려고 하고, 무시하고, ...
인터넷상에서도 존재합니다. 악성댓글을 달고, 이유없이 남에게 인격적, 정신적 테러를 가합니다. 어떤때는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현재 다윗의 심정도 이러했습니다. 그는 요즈음 신조어 처럼 '멘붕' 상태에 빠진 느낌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이 간구는 일시적인 것이 아닌 계속적입니다." 언제까지 이러한 일들을 보고만 계시렵니까"(17),"더 이상 가만히 계시지 마소서" " 나를 홀로 내버려 두지 마소서."(22) "나의 주여, 떨치고 일어나"(23)- 쉬운성경-
이런표현들은 소망중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내용들입니다. 어떤상황도, 어떤일도 해결자는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012년 9월 22일 토요일

믿음

막10:46-5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 주님은 한 맹인을 고치신 일 있습니다(8:22-26). 본문의 맹인을 고치신 일은 주님이 제자들과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마지막 여정에서 생긴 일입니다. 이 사람은 바디매오 라고 하는 사람인데 매우 솔직담백한 사람처럼 보여집니다.

그는 주님이 다윗의 자손임을 알았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름은 메시야임을  믿었습니다. 메시야이신 이분이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리라 믿었습니다(47).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때는 제자들이 제지했습니다(10:13). 이번에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며 소리치는 이 맹인을 다른 사람들이 제지합니다(48).

주님은 가던길을 멈추시고  이 맹인을 부르라소 하셨습니다(49). 주님의 음성을 들은 이 사람은  겉옷을 챙기는 것도 잊은채 벌떡 일어나 주님께 갔습니다(50). 그는 열정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한번 지나간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섬기는데 방해는 잘못된 습관이 있는데 버리지 못합니까?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합니까? 아직 머뭇거립니까? 기회가 지나가면 오지 않습니다. 바디매오 처럼 그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 나를 부르시는 주님앞으로 다가가십시오.

자신에게 다가온 바디매오에게 주님은 무엇을 해주길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51). 이 사람은 부자청년 같지 아니하고 그의 요구를 거침없이 말합니다(51). 아주 단순합니다.

주님은 그의 믿음을 칭찬해주시고  그의 시력을 완전히 회복시켜주셨습니다(52). 이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단순성.... 믿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2012년 9월 21일 금요일

과연

막10:32-4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고난에 대해 예언 하신것은 마가복음에서 세번째 입니다(33-34, 8:31, 9:31).
이번에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이 영광을 구합니다(35-37).

주님은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동상이몽(同床異夢) 이라 할까요?
이 두형제는 장래 자신들이 받을 영광의 자리만 생각합니다

이들의 대한 주님의 반응은 이들이 이해 할수 없는 요구를 하십니다(38-40). 이들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출세를 위해 뭐든지 하겠다고 하는 자세로 임합니다.

같은 제자들은 질투를 느껴 이들에게 화를 내었습니다(41). 본문을 읽으면 이때 제자들의 영적 수준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미 십자가를 생각하시는데 이들은 주님을 따르는 댓가로 누릴 영광을 생각하고 있으니 주님의 마음을 착잡하고 답답했을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바라는 이들에게 다시 한번 섬김의 도를 말씀합니다(43). 하나님의 나라는 파워게임을 하는 나라가 아니라 섬김과 자신을 주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도 섬기려 오셨고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하십니다(45).

주님은 섬김으로 오셨고 자신을 주시로 오셨다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 우리가 매일 매일 어떻게 살아야 함을 가르쳐주시고 계십니다. 오늘 내가 섬기는 교회와, 목회자들, 교회 지도자들이 과연 이 말씀에 부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2012년 9월 20일 목요일

헌신

막10:17-3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한 부자가 주님을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마태는 이 사람을 청년이라고 했고(마19:20) 누가는 관원(눅18:18)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부자가 된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으로 인정을 했습니다.

그는 출세도 했고, 신앙이 좋아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영적인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영생에 대한 궁금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릴적 부터 율법을 철저히 지켜왔고, 율법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살아왔지만(20), 뭔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그를 지배했습니다. 또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차에 주님의 소문을 듣고, 한편으로는 주님을 존경했습니다(17).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주님은 이사람에게 단호한 요구를 하십니다 " "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21).

하지만 이 사람은 주님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으로 슬픈기색을 띠며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22). 이 사람의 문제는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재물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재물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도 훌륭한 신앙인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헌신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마음이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귀한 일입니다. 물질이 많으므로 물질에 대한 애착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마음을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을 따르는 생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삶은 이 세상의 돈하고는 비교가 안되는 부요한 생활이요, 행복한 생활임을 주님은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오늘아침 헌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나에게 헌신이라는 것이 어떤의미를 주는지요?

2012년 9월 19일 수요일

이혼

막10:1-1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과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믿음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가까이 오셨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바리새인들로 부터 민감한 질문을 받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지식을 뽐내기 위한 동기가 많았지요. 본문의 바리새인들도 순수한 동기 보다 주님을 곤경에 빠트리기 위함입니다. 남을 곤경에 몰아 넣고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질문은 이혼에 대한 것입니다. 이혼하는 것이 옳은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2).
이혼에 대한 것은 당시 유대사회에 논쟁이 끊이지 않는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율법을 해석하는데 자유주의적인 힐렐파와 보수적인 솸마이파가 사이의 논쟁있었습니다. 힐렐파는 이혼에 대해 관대했고, 솸마이파는 염격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이 문제를 물어 어느쪽으로든 걸리도록 하였습니다. 이에대해 주님은 성경으로 돌아가 결혼에 대한 창조의 원리로 대응하셨습니다.결혼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고, 이혼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이라는 것입니다(5-9).

하지만 후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허락하신 이유는 사람들의 마음의 완악해져서(마10:5) 허락하셨지만, 단 배우자가 수치스러운 일을 했을 경우,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신24:1). 주님도 이 말씀에 근거해 배우자가 간음한 경우에만 이혼이 허락된다고 하셨습니다.(마19:9). 하지만 이혼을 통해 아이들이(13-16) 상처를 받는다면, 문제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혼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죄악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이혼을  쉽게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혼에 대해 가르치신 말씀과는 반대로 성격문제, 경제문제 등등.. 너무 쉽게 ..
드라마를 보아도 이혼은 아무것도 아니고 불륜을 그리는 막장 드라마가 비난을 당하면서도 인기가 있습니다. 왜 인기가 있는가 생각해보았더니 인간에게는 규정을 어기고 싶어하는 본능적인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아침 이혼에 대해  가르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가정이 경건하고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2012년 9월 18일 화요일

결심단행

막9:42-5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소금이 되라고 명령하십니다(50). 왜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까? 50절을 어떻게 마치는지를 살피면 알수 있습니다. ' 서로 화목하라'고 하십니다.
소금의 역할은 맛을 내는 것인데 즉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화평을 만들려면 무엇보다 겸손해야 합니다. 종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복잡하게 다른말이 필요없습니다 겸손과 종의 마음입니다.

또한 주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죄를 짓게 하는 것은 영적자살 행위라고 하십니다(42). 어린아이는 문자적인 의미보다, 신앙적으로 연약한자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인도하는자, 남을 가르치는 자들의 책임이 큼을 주님은 강조 하십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영혼의 가치는 주님이 피로 값주고 사신 영혼입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영혼이 지도자로 인해 실족케 된다면 주님이 반드시 책임을  물으실 것 입니다. 교회를 책임진 분들, 아니 한교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한국교회의 지도자 위치에 있는 분 들일수록  말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믿음이 연약한 자를 실족케 할 수 있고, 아니면....

또한 주님은 나의 어느부분이 죄로 이끈다면 그것을 제거하라고 하십니다.본문엔 손, 발, 눈이 나오는데 이것은 우리 신체의 대표적인 부분입니다. (43-48).물론 이것을 문자적으로 제거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죄로 이끄는 유혹이 무엇입니까?
잘못된 습관은 무엇인지?그것은 주님과 자신만이 아는 비밀일 것입니다.

손을 찍고, 다리를 찍고, 눈을 빼어내는 것은 결심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은 결심단행(決心斷行)하는 삶입니다. 결심하고 단행해야 신앙적 인격이 계속 성숙합니다. 신앙생활은 오래했지만 결심이 없고 행동이 없다면,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나를 죄로 이끄는 부분이 무엇이지 안다면 오늘 결심하고 단행하십시오.

2012년 9월 17일 월요일

주님을 따르는자

막9:30-4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두번째로 자신의 고난에 대해 예언 하십니다.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31-32). 아니 이해 할 수 가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들에게  큰 두려움을 주었습니다(32). 자신의 모든 장래를 주님에게 걸고 있는 그들로서는 감당 할수가 없는 말입니다.

 주님은 섬기는자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섬김과 고난은 서로 연결됩니다(35,10:45). 섬기지 않고는 고난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섬기지 않고는 희생 할 수 없습니다.

섬기는자의 실제 모델로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고 가르치셨습니다(36-37) 예수님 당시 어린 아이들은 보잘것 없는 존재로  취급 받았습니다.

하지만  내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의 하나를 영접하면 그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고 하십니다(37). 이것이 섬김입니다. 섬기는 자 는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섬기는 마음은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소유, 위치, 가진 힘등 대상을 따지지 않습니다.

섬기는 마음은 탐욕과 교만으로 가득차 있는 영혼을 치유 시켜줍니다.

주님이 섬김을 말씀하심에도 제자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여전히 다릅니다. 이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좇는 사람들을 경쟁상대로 생각하고 불평하는 모습을 보면...(38-41).

내 마음에도 경쟁과 질투와 교만은 없습니끼? 말로는 섬김을 말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높은 마음이 어느덧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김은  영적인 삶이요, 섬김은 성령의 삶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말보다  조용하고 작은 실천입니다. 작은 것에서 부터 섬김을 시작하십시오. 그것이 무엇입니까?

2012년 9월 16일 일요일

하나님의 눈

시34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 시편 말씀은 다윗이 기록했습니다. 표제에 보면 다윗이 아비멜렉 혹은 아기스 (아비멜렉은은 블레셋의 왕호,아기스는 그의 실제 이름)앞에서 미친체하다가 좇겨나서 지은 시 라고 되어 있습니다. 표제만 보아도 당시 다윗이 처한 상황을 잘 알것 같습니다.

그는 고난중에 처해 있습니다. 좇겨다니는 신세요, 오죽했으면 블레셋 왕 앞에서 미친 사람처럼 연극을 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는 어려움에서 건짐을 받은 그의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6).

무엇보다 그가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여호와' 라는 이름이 16번정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항상 그의 종들을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축복하시는 하나님! 본문의 흐름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윗의 신앙은 이론적인것이 아니고 체험적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라"(8),
"부족함이 없도다"(9) "찾는자"(10)"..

믿음은 체험적입니다.  체험이 없는 믿음은 형식적이거나, 추상적, 무능력합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것(체험)입니다.

또한 본 시편의 키워드는 '의' 입니다. 다윗은 이 단어를 여러상황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15,17,19,21). 물론 여기 ' 의'는 도덕적으로 완벽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의인은  하나님을 의지하지는 사람들에게 붙혀진 칭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넘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눈은 의인에게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십니다(15).

오늘도 내일도 아니 항상, 전능하신 하나님의 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늘 향하시고, 기도에 늘 귀를 기울이심을 믿습니다. 

2012년 9월 15일 토요일

믿음과 기도로..

막9:14-2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산에서 돌아온 주님과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율법 학자들과 논쟁을 벌이는 다른 제자들을 보았습니다.(14). 사건의 발단은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한데서 시작 되었습니다.

주님의 소문을 듣고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왔지만 주님은 산에 가셔서 만날 수 없고... 그래서 제자들에게 부탁을 했지만 연약한 믿음을 가진 그들은 고칠 수 없었습니다. 이 순간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조롱거리가 될 수 있고, 사탄의 능력이 더 나타 날수 있는 빌미를 주는 순간입니다.

절망에 빠진 아버지, 그를 동정하는 사람들.. 마가는 이 아이의 상태를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귀신들려 듣고 말할 수 없습니다(25). 자주 넘어져 발작증세를 보입니다(18). 넘어지는 것은 좋은데 그것때문에 큰 위험에 처하기도 합니다(22).

제자들이 아무리 귀신을 좇아 낼려고 애를 썼지만 허사였습니다(18). 허사일수 밖에 없습니다. 사탄을 이기는 힘은 기도인데 제자들은 그것을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28). 사탄이 역사 하는 이 세상에서 기도는 능력의 근원이요, 강한 무기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칠려고 하십니다.

여느 사람들 처럼 이 아버지도 주님이 고치신다는 믿음은 있었습니다. 믿습니다! 하고 소리는 쳤지만, 믿음은 연약했습니다. 믿습니다! 소리친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24).

주님은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고 아이를 고치셨습니다(25-27). 본문의 이야기는 드라마틱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은 단순합니다. 마귀를 이기는 것은 믿음과 기도라는 것입니다. 영적 권능은 기도를 통해 나타납니다(29). 이 기도의 능력은 믿음을 통해 효과가 발휘됩니다.

주님! 오늘 저의 삶이 오직  믿음과 기도로 일관(一貫)하기를 원합니다.

2012년 9월 14일 금요일

하나님의 현존

막9:2-1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등산을 하셨습니다. 세명의 제자들은 그곳(헐몬 산)에서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합니다. 산에 오르시자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셨습니다(2).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의 변화는 단순한 겉 모습의 변화가 아닌 내부로 부터의 변화를  의미 한다고 합니다.

사탄은 겉만 위장합니다 그러므로  겉만 보다가는 속기 쉽습니다.  겉보다는 중심이라고 알지만 그래도 겉모습에 잘 넘어갑니다.  화려한 건물, 잘연출된 예배, 겉모습만 보고 좇다가는  속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사두개인들은 애써 주님을 부인하고 인정하지 않을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됨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구약시대를 대표하는 두사람이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를 하였습니다. 엘리야와 모세였습니다(4). 이들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구약의 대표자입니다.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고 모세는 율법을 대표합니다

만일 제가 그 현장에 있었어도 너무 놀라운 광경이라 비몽사몽(非夢似夢)에 빠졌을 것 입니다.
베드로가 그러합니다. 베드로는 단순하면서도 순수한 사람입니다. 그는 산에서 내려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천막을 셋 짓고 모세와 엘리야와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5). 그러면서도  자신이 무슨말을 하는지 몰랐습니다(6).

그러자 구름가운데서 소리가 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의 말을 들으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7) 주님의 말을 들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는 주님이시기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산에서만 있어서는 않됩니다. 수도원이나 기도원에서만 있어서는 않됩니다. 세상에 나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열심히 사는 것, 열심히 일하는 것 (하나님이 주신 직업에 따라) 자체가 전도입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들에게 영적 체험이  중요했습니다.

 매일 하나님의 현존 속에  삽니다 하지만  바쁘고 열심히 살기전에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는 영적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얻는 영적 지혜와 힘으로  세상을 이기십시오.

2012년 9월 13일 목요일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8:27-9: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중요한 질문을 하십니다. 왜 주님이 그런 질문을 하셨는지? 제자들이 얼마나 훈련이 잘 되었는지를 알고 싶어서 인지? 주님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하십니다.

주님이 바다를 잔잔케 하신 후 제자들은 이미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4:41). 주님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십니다(27). 곧 이어서 사람들은 그렇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의외로 옳은 대답을 합니다." .. 주는 그리스도" 시라고(29).

하지만  베드로는 주님이 오신 목적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31절에 주님께서 자신의 고난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고난은 당하시고 버림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다시 부활한다. 이 말씀은 앞으로도 계속 되풀이 해서 말씀하십니다(9:31,10:33-34).

주님의  말씀은 베드로에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능력만 보았지, 그분이 오신 목적을 몰랐습니다. 주님이 왜 저렇게 약하게 말하실까?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32).

주님으로 부터  심하게 꾸짖음을 받았습니다(33). 칭찬 받은지 얼마후 꾸짖음을 받고...
인간의 한계요, 연약함입니다. 신앙적인 생각을 하다가도 순간적으로 인간적인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하루의 생각중 신앙적인 생각과 인간적인 생각이 수없이 교차되면서 살아가곤 합니다.

물론 베드로가 사탄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탄이 베드로를 통해 주님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게끔...(마4:1-11).

주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을 따르는자의 자세를 말합니다(34-38).
그것은  진실입니다. 진실은 바로 주님을 섬기는 자의 생명입니다.

진실이란 나의 요구사항 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순종함을 말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나의 일만 생각하지는 아니합니까?

2012년 9월 12일 수요일

영의 눈

막8 :22-2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벳새다에서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오병이어,칠병이어의 기적 처럼(6:30-44,8:1-13), 마가는 본문을 통해 영적 상징성을 보여줍니 다.

 주님은  이곳에서  맹인의 눈을 만지심으로  캄캄한 암흑속에 살았던 사람에게 광명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눈에 침을 뱉고 안수 하시자  맹인은 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걷는 것이  나무처럼 보였다고 했습니다(24).

주님이 두번째로 눈에 안수하시자 시력을 완전히 회복했습니다. 모든것이 밝히 보였다고 했습니다(25).

주님은 병든이들을 대할 때 그 사람의 믿음 따라 고치시는 방법도 달리하셨습니다. 이 맹인에게는  두 번 안수 하셨습니다. 주님의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맹인의 믿음이 부족함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본문의 맹인처럼 육신의 소경이 아닌 영적인 소경이 더 많습니다.
영의 눈을 밝혀주는 것은  성령님이십니다(엡1:18).

성령님은  영의 눈을 뜨게 하시고, 밝히시고,  식별력을 주십니다.  세상에는 가짜가 진짜인것 처럼 포장을 하는 가짜들이 많습니다. 교회도 잘못 선택하면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닌 도리어 믿음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영의 눈이 밝으면  그리스도의 충만한 임재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천국의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주변에  시들고 병들어 있는 영혼들을 보게되고, 그들의 영적 치유를 위한 성령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오래했지만 영의  눈이 밝지 않았습니까? 다시 한번 주님의 만져주심을 사모하십시오. 본문의 맹인처럼...

2012년 9월 11일 화요일

나의 믿음

막8:14-2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께서 4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베푸신 후 제자들은 남은 떡을 가져오는 것을 잊었습니다(14). 그런데 주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15).

바리새인의 누룩은  위선을 말하고 헤롯의 누룩은  세속화를 말합니다. 헤롯당은 세상의 권력과 타협하는 무리를 말합니다.

영적으로 정결해야 할 교회가 누룩에  쉽게 감염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위선에 빠질 수 있고, 세속화 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이용해서 이익을 누리고, 교회를 이용해서 유명해지고.. 

생명이 없는 교회일수록 눈에 보여지는 것에 집중합니다. 따라서 예배의식이 화려하고, 복잡하고 군더더기가 많습니다. 속화된 교회의 특징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철저히 경계하십니다..

또한 주님은 떡이 없다고 수군거리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시키면서 믿음을 요구 하십니다(16-20).

주님을 따라 다니지만 쉽게 불신앙에 빠질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제자들 처럼 환경에 따라 쉽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하나님이 나의 삶에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십시오.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동일하게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2012년 9월 10일 월요일

예수그리스도는..

막8:1-1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떠나  전도 여행중이십니다. 본문의 기적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비슷합니다(6:30-44). 두 기적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6장의 기적은 유대인들이  대상이었지만 본문의
4천명은 대부분 이방인들입니다.

주님은 두 사건에서  굶주린 군중들을 만나셨고, 긍휼함을 가지셨습니다(2). 없는 것으로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있는 것으로 축복하셨습니다(5-6).  내게 있는 것을 정성껏, 아낌없이 드리면  하나님은 그것으로 더 큰 축복을 주심을 배웁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떡 7개와 작은 생선 2마리로 기적을 행하시고  7광주리를 남기셨습니다(5,8). 성경에는 숫자가 의미하는 것이 큽니다. 일반적으로 7은 완전수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7병이어 기적으로  풍족히  먹이시고 7광주리를 남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을 예표해줍니다.

또한 주님은 6장과는 다르게 그들을 향해 '목자없는 양과 같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아직도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표적을 구합니다(11-13). 소위 종교지도자들이란 이들이 주님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차 있는것을 보면 믿음을 갖기가 이렇게 힘드는구나를 볼 수 있고,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실감합니다.

나에게 믿음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하나님만이 아닌, 세계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심을 찬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계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신 구원자이시고, 메시야이심을 찬양합니다.

2012년 9월 9일 일요일

신앙

시33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 시편 기록자는 미상(未詳)입니다. 하지만 본 시편은 하나님에 대한 찬송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분이 행하신 일', ' 공급', '보호하심', '창조물과의 관계'...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속성의  중요한 특성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실'' 옳으심' '진실'(4) '정의로우심' '공평하심'' 한결같은 사랑'(5).
그분의 계획은 한결같고 실패가 없으십니다(11).

둘째 시편기자는 어려움을 당할때 도움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보여줍니다(16-22). 세상의 힘은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힘을 믿거나 군대의 힘을 믿는 민족들은 다 패망했습니다(16-17). 로마제국을 비롯해, 히틀러 나치, 일본의 군국주의... 한때 세상을 일시적으로 흔들었지만 결국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셋째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창조에 감동을 받습니다(6-7).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분 입니다. 모든 나라와 민족들을 주관하십니다(8-15).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켜보십니다(13). 하나님을 경외 하는 자들을 보호하십니다(18).

그분은 전지(全知)하시고 전능(全能)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 한다는 말이 한 번 나오고(18), 바란다는 말이 세 번 나오고(18,20,22), 의지한다는 말이 한 번 나옵니다(21).

 경외하고 바라고 의지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행하는 것입니다.

2012년 9월 8일 토요일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룻4:13-2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보아스와 룻은 결혼을 했습니다.하나님은 룻을 임신하게 하셨습니다(13).하나님의 섭리는 분명했습니다. 그동안 룻이 겪었던 일들.. 기근, 빈곤, 수치, 외로움, 두려움 등등.. 이런 질곡(桎梏)의 세월을 벗어나 마침내 그는 아들을 낳았습니다(13).

어두움으로 둘러싼 환경이었지만 그의 삶은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또한 마라로 바뀌었던 나오미는  다시 나오미가 되었습니다(14). 하나님은 그녀에게 아픈 경험들을 허락하셨지만 다시 기쁨으로 바꾸셨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룻은 그녀가 낳은 아들 오벳을 통해 다윗왕의 증조 할머니가 됩니다(17).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조상이 됩니다. 이 이방여인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됨을 증명해줍니다. 하나님은 그분께 신실한자에게 신실하게 대하시고, 상급을 주시고,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주심을 룻을 통해 보게됩니다.

룻의 이야기는 한편의 감동적인 드라마 같고 한편으로는 예언적입니다.  룻의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게 되고, 룻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행하실 일을  보게됩니다.
룻기를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 보여는 아침입니다.

2012년 9월 7일 금요일

룻에게 임한 은혜

룻4:1-1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보아스는 사업이나 법적인 소송문제를 다루는 성문에서 결혼 문제를 의논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진행과정속에  하나님의 섭리, 룻에 대한 보아스의 사랑, 문제를  법적,이성적, 합리적으로  다루는 보아스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보아스는 법적으로 자기보다 나오미의 땅을 먼저 살 수 있는 친척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허락할 듯 하다가(4), 룻과 결혼을 해야 한다고 하니까 거절을 했습니다(5-6). 여기에 보아스와 룻의 결혼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2:3).

세상의 모든일, 사소한 일이던, 복잡한 일이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그 어느것 하나도 사람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드디어 보아스는 나오미의 땅을 사고, 룻을 아내로 맞이합니다(9-10). 나오미의 기도가 응답되는 순간입니다(2:19-20).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기도가 선행(先行)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지만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이 행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없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보아스가 나오미의 땅을 사고 이방여인 룻을 아내로 맞이 하는  장면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이던 이방인이던 그분의 피로 사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구원의  은혜를 예표해주고 있습니다.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아스를 통해 나타납니다. 유대인이던, 이방인이던 오직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주고 사셔서 신부로 맞이 하셨습니다. 나를 신부 되게하심을 찬양합니다.
룻의 삶속에 임하셨던 하나님의 은혜! 이 아침에 그 은혜에 감격하여 경배드립니다.

2012년 9월 6일 목요일

신실

룻3장, 오늘의 묵상입니다.
나오미는 룻과 보아스를 결혼시키려는 계획을 가졌습니다.  유대 전통에는 형제나 가까운 친적이 죽으면 그의 부인과 결혼을해 대를 잇게 해주는 '계대결혼'이라는 풍습이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 근거한 풍습입니다(신25:5-10).

나오미는 적임자가 친척중에 하나였던 보아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름을 알수 없는  더 가까운 친척이 있었지만(12), 나오미의 생각으로는 보아스야 말로 룻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임을 믿었습니다.

 나오미는 룻으로 하여금 보아스에게 프러포즈(Propose) 하게끔 용기를 줍니다. 요즈음도 여자가 먼저 프러포즈하면 좀 멋적지요. 룻의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룻은 보아스의 침실로 들어갔습니다. 물론 보아스의 도덕성을 믿었습니다(7). 아무리 보아스가 좋은 사람이라도 룻의 행동에는 큰 용기가 필요 했습니다.

룻은 나오미, 보아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의외로 보아스는 적극적인 반응을 보입니다(10). 보아스는 룻의 의도를 알아채리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젊은 과부가  젊은 사람을 배우자로 찾아 자신의 길을 가지 않고 죽은 남편의 대를 잇기 위해 늙은 자신과 결혼을 할려고 하는 마음..

보아스는 이스라엘사람이요, 남자요, 부자요, 힘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 네가 베푼 '인애'(kindness, NIV) .. 친절을 베푼것은 자신인데 룻이라고 말합니다.

친절(Kindness)은 히브리말로 '신실'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입니다 신실은 하나님에게 사용해야 할 단어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룻에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룻기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룻기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룻의 신실함, 보아스의 신실함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룻기를 묵상하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신실한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주여! 오늘 신실하고 진실하게 살게 하소서!!

2012년 9월 5일 수요일

나오미와 룻처럼..

룻2:14-2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룻은 매우 신실했습니다. 그녀는 시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쉼없이 일했습니다(7). 이런 룻의 모습이 보아스의 눈에 띄었습니다. 보아스는 그녀를 선대 했습니다.도리어 의아하게 생각 한것이 룻입니다. ' 나는 이방여인 인데 왜 나에게 친절을 베푸냐' 고 되물었습니다(10). 보아스는 룻의 신실함과  시어머니에게 행한 일들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11).

특히 인상적인 것은 보아스가 룻을 자기 식단에 초대 한 일입니다(14).그의 친절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곡식베는 일꾼들에게 룻을 책망하지 못하게 했고(15), 또한 벤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룻으로 줍도록 했습니다(16).룻에 대한 보이스의 친절은 단순한 인간의 친절이 아닌 룻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룻은 보아스가 자신에게 행한 친절 등 모든일을 나오미에게 이야기를 합니다(17-23).두 사람의 대화속에는 보아스에 대한 축복과 감사로 일관 했습니다. 사람들중에는 남에게 신세를 지고도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를 도와준 사람, 고마운 사람을 잊지않고 감사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지극히 단순하고 상식적이지만  인생사가 그렇지 못할 때 가 많습니다. 사람에게 고마워할줄 모르는 사람, 감사 할줄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산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마운 사람은 잘 잊어도 섭섭하게 한 사람은 더 잘 생각납니다. 고마운 사람을 늘 잊지 않고 축복하고 감사하는 것  작은일 같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입니다. 나오미와 룻처럼 말입니다....

2012년 9월 4일 화요일

절망을 넘어

룻1:19-2:1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나오미는 그의 며느리 룻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 왔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나오미를 알아봅니다. "나오미가 아니냐?"(19).  나오미는 자신을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고 합니다(20). 나오미는 ' 즐거움' 이라는 의미이고, 마라는 '괴로움' 이라는 의미 입니다.

나오미는 " 전능자가 자신을 슬프게 했다"고 했습니다(20). 나오미는 하나님을 '전능자'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샤다이(Shaddai) 즉 세상의 지배자 라는 뜻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의 주권과 연결 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만일 자신에게 일어난  고난이 우연이라고 생각한다면 , 우연을 바로 잡을 수 없는 인간으로서는 절망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고난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 고난을 거두어 가실 분도 하나님이시기에 소망중에 주님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나오미가 겪은 슬픔과 절망 가운데서도 한번도 그를 떠난적이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영혼의 깊은 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어떤 순간에도  나를  떠나신적이 없으심을 기억하십시오.

부지런한 룻은 밭에 나가서 이삭을 줍기 시작합니다(2:2-3). 나중에 일어날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나오미는 보아스와 룻이 맺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패배, 죽음,기근,  절망스러운 환경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
이제는 새로운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오미 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절망은 절망 자체가 아니라, 새로운 용기와 믿음의 힘을 발휘하는 기회의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느 시간, 어느 순간에도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2012년 9월 3일 월요일

평범속에..

룻1:1-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룻기는 사사시대에 일어난 일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룻기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사소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삶의 모든 부분을 자세히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분 입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사별(死別)한 과부들을 중심으로 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 독자들에게 많은 감동을 줍니다.

룻기에는  이름이  중요합니다. 특히 히브리 문화에서 이름은 그들의 인물됨을 말합니다. 이름은 곧 인격이었습니다.

엘리멜렉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의미인데  그가 살던 베들레헴(떡의 집)에 흉년(凶年)이 들자 가족들을 데리고 모압땅으로 이민을 떠납니다(1).  얼마후 엘리멜렉은 세상을 떠나고(3), 10년후에 두 아들 마져 세상을 떠납니다(4-5). 결국 시어머니, 두 며느리들만 남습니다.

흉년을 피해 모압으로 갔지만 거기에서 더 큰 환난을 만납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안에 있을때에만이 안식과 영적 평안이 있습니다.

나오미라는 이름은 쾌적함, 아름다움, 멋진'을 의미하지만 그의 삶에 닥친 가슴 아픈 일들은 그의 이름을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방 땅에서 슬픈 일을 당한 나오미를 볼 때,  이민생활을 하는 저로서는 나오미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 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나오미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올려고 결심을 합니다(6). 나오미  자신은 떠나지만 두 자부들은 모압에 남아 있기를 권했으나 결국 룻은 그의 시어머니를 따라 갈려고 결심합니다(16-18).

나오미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려는 마음,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 갈려는  마음,
한 가정의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습니다.

나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일속에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음을 믿습니다.그러므로  평범속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십시오.

 

2012년 9월 2일 일요일

회개

시32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은 롬4:6-8절에서 본 시편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안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의 완벽함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어떤 기록도 가지지 않으십니다. 세상에서 죄를 범하면 전과자가 되지만 하나님에게는 전과자가 없습니다.

본 시편은 명확한 구조를 보여줍니다.
#1.축복(1-2). 죄를 범하지 않는 것도 축복이지만(시1:1), 죄를 범해 회개하여 용서를 받는것도 축복입니다.
#2. 죄를 고백함의 실제성(3-4).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마음이 어둡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가만이 있어도 두렵고 불안합니다. 쉬고 싶어도 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함으로 마음의 평화를 누립니다.
#3. 하나님의 용서(5). 다윗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자 하나님은  그의 죄를 용서해주셔습니다.

사죄의 경험은 주님을 피난처로 삼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6-7). 생활속에 찬송이 넘쳐납니다. 찬송은 용서 받은 자의 기쁨의 표현입니다. 마음에 죄가 있을때, 회개하지 못할 때 찬송을 부를 수 없습니다. 찬양을 들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사죄의 경험을 한 다윗은 " .. 내 마음이 구원의 노래로 주님을 찬양한다"(7)고 했습니다. 그는 음악가였습니다. 그의 음악은 더욱 힘이 넘쳤고, 기쁨이 넘쳤을 것 입니다.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은 다윗은 자신과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조언할 수 있었습니다(8-9). 그것은 주님을 신뢰하고 죄를 고백한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경험입니다(10).또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입니다(11).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2012년 9월 1일 토요일

마지막 승리

옵1:17-2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오바다의 예언은 구약의 선지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네가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 심판의 약속', 이유', 내용'  또한 '구원과 회복' 이라는 패턴은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영적안목을  넓혀줍니다.

매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만나는 흉악한 범죄, 가슴아픈 일들, ... 잠시 악이 이기는 것 같지만 결국 무사히 넘어가지 않을 것 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세워 질것입니다. 선지서에서 보는 것 처럼 하나님의 '의' 는 악한 자 들에게 대한 무자비한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깊은 상징적인 멧시지가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 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은혜의 출발을 말씀합니다.

본문의 이스라엘(혹은 유대)의 회복 과 에돔의 멸망(17-18)은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를 상징해줍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사랑과 은혜의 법이 지배 하는 하나님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 날 천국 운동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세상을 보고, 성경의 안목으로 신문을 보면, 현재의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일어나는 일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도래하는 그 날,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며 오늘도 하나님과 동행 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