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30일 금요일

샬롬

사54:1-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은 수치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본문의 잉태하지 못하고 출산하지 못하는 여인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민족을 비유합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 이방나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그 자체가 수치스러운 것입니다.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향해 노래하라고 초청하십니다(1).
현재 고난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회복 시키시고 번성 시키실 날이 올것입니다(2).

하나님의 나라가 이와같습니다.
예수님이 열두명의 제자를 삼으실때는 이들은 매우 적은 무리들이었습니다. 열두명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들을 통해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 되도록 하셨습니다.

본문에도 마찬가지입니다.
2절의 " 휘장(텐트)이 도시로 바뀌었습니다(11-17).
하나님이 그들의 장막터를 넓히셨습니다. 그 도시(예루살렘)의 성벽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의 축복이 넘쳐나는 곳입니다(13).

계시록21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아름다움과 그분의 평강이 넘쳐나는 곳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신 예루살렘 처럼,

하나님은 그분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볼 것이고  그곳에서 주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영원한 평강(Shalom)속에 살 것입니다.

2013년 8월 29일 목요일

고난의 종

사52:13-53:1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자세하게 예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내 종이라고 하셨습니다(52:13).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철저하게 순종하실 분이기에 그분을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참된 종이셨습니다.

하지만 온 세상을 구원하실 하나님이 보내신 종은 사람들의 기준과 다른분이셨습니다.겉보기에 보잘것이 없습니다(53:2). 멸시를 당하실 만큼(53:3) 외형적으로 내세울것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위해 찔림을 당하시고, 상함을 입으시고, 징계를 받으셨습니다(53:5).
억울함을 당하시면서도 침묵하셨습니다(53:7).남에게 악한 일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53:9). 말에도 죄가 없으셨습니다(53:9).

그분은 하나님이 보내신 '의로운 종'이십니다(53:11). 그분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하십니다. 즉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통해 우리가 의롭게 됩니다. 바울은 이 지식이 너무 귀하고 고상하기에  모든것을 해로 여겼습니다(빌3:8).

나의 죄를 위해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묵상하면 할수록 나의 영혼이 정화됩니다.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내가 너무 교만하고, 거짓된 삶을 사는지를 알게 됩니다.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셔서 종의 모습을 보여주신 주님!
오늘 저의 영혼을 정화시켜 주소서!

2013년 8월 27일 화요일

시온의 영광

사51:1-1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은 징계가운데도 긍휼을 잊지 아니하십니다. 그분의 행하심의 끝은 항상 소망이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항상 그분을 찾고 그분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과거를 기억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을  깨트리신적이 없으십니다(1-2). 하나님은 과거에 항상 신실하셨습니다. 이것이 비록 이들이 포로중에 있다 해도  희망을 놓지 않는 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시온을 다시 회복 하실 것입니다. 시온에 하나님의 영광이 빛이 다시 임할 것입니다(3). 시온에서 나갈 하나님의 율법이 온 세상의 빛이 될 것입니다(4-5). 장차 메시야이신 주님께서 그 땅에 오셔서 온 세상에 구원의 복음이 전파될 것입니다.

얼마나 흥분되게 만드는 예언입니까? 이들은 고난 (포로생활)가운데서 소망이 넘쳤습니다. 용기를 얻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이 있기에 사람들의 멸시와 훼방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7).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그리스도의 말씀이 세상을 이깁니다.

주님의 말씀이 심령에 가득한 사람은 어떤 힘들일이 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 예언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듭니다(9-11).  "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풀어달라고"(9)기도 하였습니다 . 그리고 그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났습니다(12-16).

특히 11절에는 구원 받은 자들의 기쁨이 나타납니다. 구속 받은 자들이 시온으로  돌아와 노래하고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위에 있습니다. 슬픔과 탄식이 달아났습니다.

이것은 계시록의 마지막 장면을 읽는것과 같습니다.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고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 곡하는 것 아픈것이 다시 있지 아니할것입니다(계21:4).

그리스도안에서 받은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이 바벨론 포로 생활 같은 이 세상을 통과할수 있는 힘을 줍니다.

또한 앞으로 다가올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구원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미래를 믿음으로 기다리며 오늘을 시작합니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입니다. 샬롬!

2013년 8월 26일 월요일

주님처럼

사50:1-1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옛날 유대나라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내어 보낼때 이혼증서를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내가 간음함이 없이 이혼을 당할 경우입니다. 일종의 증명서입니다. 하지만 아내가 간음했을 경우는 이혼증서 없이 집에서 내어보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남편으로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혼증서가 없다고 하셨습니다.즉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에 잡혀간 것은 그들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먼저 배반했기 때문입니다(1).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회개를 촉구했지만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2). 반응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강팍한 증거였습니다. 강팍했으므로 그들을 구원하실 하나님을 불신했습니다.

그러면서 갑자기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언합니다. 그분은 학자의 혀를 가지셨습니다. 곤핍한자들을 살리시는 말을 하십니다(4).

어떤말은 남에게 상처를 줍니다. 어떤말은 남을 낙심케 합니다. 하지만 어떤말은 남을 살립니다. 영혼을 소생케 합니다. 그 말은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자는 영혼을 치료하는 의사입니다.

또한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기꺼히 고난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6-7). 주님은 철저하게 순종하심으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원한 모델이 되셨습니다.

주님이 순종하여 수치를 당하시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으셨습니다(8). 아버지께서 함께 하심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주님처럼 온유와 겸손으로 옷입은 사람이지만 믿음으로 당당함을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심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순종함의 본을 보여주신 주님처럼
오늘도 순종함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의 당당함속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2013년 8월 25일 일요일

답답하고 힘들때..

시80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얼굴 빛'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어" 달라고 반복하며 간구하고 있습니다(3,7,19).

하나님의 얼굴 빛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속에서 사는 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목자로 부르고 있습니다(1).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영원한 목자이십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따라갑니다.

하나님의 양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인도를 따릅니다. 인간의 소리를 듣고,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양이 아닙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전하면 하나님의 참된 양들이 모여들것 입니다

하나님은 목자이시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시편 기자가 지칭하는 것은 북쪽 이스라엘)은  포도나무입니다(8-16). 하나님은 그 포도나무를 번성케 하셨습니다(8-11).

그러나 하나님은 그 포도나무의 담을 허셨습니다(12). 들짐승들의 먹잇감이 되게 하셨습니다(13). 포도나무에서 아무 열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에서 바라는 것은 포도열매이지 나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열매를 바라십니다.

시편기자는 모든것이 암울하고 답답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14).

답답하고 힘들때 일수록 시편기자처럼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그때 더욱 새로워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2013년 8월 22일 목요일

하나님의 말씀에...

사48:12-2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말씀을 들으라고 초청하십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통해 바벨론에서 그들을 구하시려는 계획을 알수 없습니다(14,45:1).

본문의 강조점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것입니다.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16).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계획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의 약속, 그분의 성품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함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축복된 삶임을 알기를 원하십니다(17).

매일 매일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마땅히 행해야 할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마음에 평강이 임하지 않습니다.
평화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만 임합니다(18).

또한 치유는 말씀을 들을때 생깁니다. 말씀을 들어야 영혼이 치유됩니다.
우리는 매일 치유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그분의 계획은 항상 선하십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선하십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자들에게는 모든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롬8:28). 하나님의 행하심은 반드시 선입니다.

하나님은 이루시고자 하시는 것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천만년, 억만년 후에도 그분이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풍성한 열매가 있습니다(19).

오늘도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앞에 귀를 기울이며 하루를 출발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으로....

2013년 8월 21일 수요일

진실함으로

사48:1-1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앞으로 바벨론으로 잡혀갈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 바벨론에 살게되지만 이들의 소속은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입니다(2).

하나님은 이들의 외식을 책망하셨습니다. 진실이 없고 공의가 없었습니다(1).
진실하지 못한 것은 위선입니다. 위선은 가장 큰 악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외선자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 했지만  내면에는 명예심이 가득찼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들이 영광 받기를 더 원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늘 존경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 사람들의 관심이 자신들 보다 주님에게로 향하기 시작하자 시기와 질투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을때도 온갖 중상모략을 다했습니다.

진실이 없는 신앙은 가장 큰 악으로 발전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실이 없는 이들을 향해 " 네 목은 쇠의 힘줄이고, 네 이마는 놋"이라고 했습니다(4).

이들에게 필요한것은 고난의 풀무불에서 연단을 받는 것입니다(10). 즉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통해 연단을 받아야합니다. 쇠의 힘줄 같은 마음과 놋과 같은 이마는 고난의 풀무불을 통과해야 부드러워집니다. 교만이란 병은 고난을 통해 치료 받을 수 있는 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행하심은 그분의 영광과  그분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기 위함입니다(11).

하나님의 관심은 그분의 영광과 그분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는 데 있습니다.
나의 삶을 통해 늘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때 하나님이 가장 기뻐 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2013년 8월 20일 화요일

오직 구원자는

사47:1-1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성경에 바벨론은 교만과 오만함의 상징으로 나타납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성경의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창11, 계17-19).

이사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될 때를 바라보며 예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징계하시기 위해 일시적으로 바벨론을 사용하셨습니다. 하지만 교만한 바벨론을 하나님이 심판 하실 것입니다(9-11).

바벨론은 앗수를 정복하고 거대한 제국이 되었습니다. 나라가 거대해지자 곧 자만과 안일, 방종에 빠졌습니다(8). 교만했습니다.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습니다. 교만해서는 않됩니다. 사람의 일도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잘 되는 것 같지만 항상 그렇지 않습니다. 날씨와 같이 기복이 있습니다. 가장 안전한 길은 하나님앞에서 겸손한 것입니다.

이웃나라들을 정복하고 잘 나갔던 바벨론은 사치, 안일 방종속에  자기들을 하나님 같이 여기게 되었습니다(12-13). 사람도 그렇습니다. 교만해지면 안일과 방종,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처럼 되어버립니다. 가장 위험한 일입니다.

바벨론 처럼 강대한 나라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순식간에 없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1-3).
교만한자가 가진것이 없어지는 것도 순식간입니다.

세상에 자신을 구원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그 어떤 존재도 없습니다.

오직 구원자는 "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입니다(4).

2013년 8월 19일 월요일

하나님만이

사46:1-1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를 통해 그의 백성들이 자신에게 돌아오라고 외치십니다.
이들은 바벨론 우상들을 섬겨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주변의 문화에 동화되어 살았습니다. 바벨론 신들을 섬겼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벨(태양신)은 바벨론 신들중 주요한 신입니다. 느보는 벨의 종에 해당하는 신입니다. 바벨론이 외세의 침략으로 정복 당해 이 우상들이 외국으로 끌려 가게 되었습니다. 짐승들이 우상들을 운반했습니다(1).짐승들에게 '무건운 짐'만 되는 존재들이었습니다(1).

이런 우상들이 어떻게 그들을 도울수 있겠습니까? 이들 우상들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반대로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돌보셨습니다.
늙을 때까지 돌보시고 머리가 희어질 때까지 그들을 품으신다고 하셨습니다(3-4).

부모가 자녀를 늙을 때까지 돌볼수 없습니다. 머리가 희어질 때까지 품을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우상에 대한 경고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상은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을 갖지 못하도록 만드는 방해물입니다.

우리시대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물질주의, 소비주의, 사회복지, 경험, 지식, 건강,..

하나님! 오늘 나의 삶에 하나님만이 중심이 되게 하소서!! 아-멘

2013년 8월 18일 일요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시79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 폐허가 되었습니다.
시편기자는 그 처참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더럽혀졌습니다(1). 하나님의 종들의 시체가 가득했습니다(2-3). 하나님의 백성들이 비방과 조롱을 당했습니다(4). 하나님의 땅이 황폐해졌습니다(7).

이런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의 긍휼의 손길을 간구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이 징계를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들이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8-9).

그러나 시편기자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의 동기에는 단순히 주의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풀어달라는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훼손을 당할까봐 입니다(10).
그는 '하나님이여!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의 기업의 땅이(1), 주의 거룩한 성전이(1), 주의 종들이(2), 주의 성도들이(2)...
그의 간구는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그분의 영광과 이름을 위해서입니다(9).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길 " ...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라"(레19:2)고 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게 살아야 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훼손되지 않기 위함입니다.

2013년 8월 16일 금요일

빛의 자녀

요13:18-3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은 예언의 성취였습니다(18). 주님은 유다가 자신을 배반할 줄 알았습니다(21,26).

복음서에는 가룟  유다앞에 ' 예수를 판 자' 라는 꼬리표를 붙힙니다(마10:4;막3:19;눅6:16). 유다가 자신을 팔자임을 아시지만 주님은 유다를 다른 제자들과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전혀 티를 내시지 않았기에 다른 제자들은 주님이 돈궤를 맡은 유다를 신뢰하는 줄 알았습니다(29).

유다의 운명을 알고 계셨던 주님은 아픈  마음으로 유다를 사랑하셨습니다.
유다에게 친히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셨습니다(26). 가까운 친구에게 친밀감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다른 제자들 처럼 그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사탄은 주님이 유다를 포기하도록 계획했지만 주님은 마지막까지 유다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유다는 사탄의 하수인이 되었습니다(27).

마음의 큰 고통을 느끼시면서 주님은 유다에게 "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하셨습니다(27).
속히 하라는 주님의 말씀에는 뭔지 모르는 외로움이 느껴집니다.

요한은 그 시간이 "밤"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30). 유다의 영적 상태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유다와 같이 밤에 속한 자가 아니라 낮에  속한자 입니다.

오늘도 빛의 자녀로  살기를 원합니다.

2013년 8월 15일 목요일

참된 설교

요13:1-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요한복음의 후반부(13-20)는 영광의 책이라고 이름을 붙혀도 될 것 같습니다. 그 영광은 제자들의 발을 씻는 것으로 부터 시작해 십자가의 달리심으로 극치를 이루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십자가의 달리신 그분의 겸손을 나타내는 그림자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함을 보여주는 시각적인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고대 중동지역에서는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발 씻을 물을 주었습니다(눅7:44). 집에 노예로 하여금 손님의 발을 씻도록 했습니다.

노예는 손님이 도착을 하면 발을 씻어주었지만 주님은 저녁을 먹는중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2,4).

주의 만찬은 이 만큼 큰 의미가 있습니다. 겸손과 섬김의 마음이 없이는 만찬에 참여할수 없음을 가르쳐줍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주님이 우리의 죄를 씻기전까지는 우리는 온 갖 죄악으로 더러운자임을 말씀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주님의 이 행동은 가장 위대한 설교자가 어떤자임을 보여주십니다.

말로 울고 웃기고 감동을 주는 것이 설교가 아니라 설교자가 설교한대로 삶을 살때 그 설교가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움직일것입니다.

2013년 8월 14일 수요일

주님은...

요12:37-5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요한은 주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음에도 유대인들이 여전히 주님을 믿지 않았다고 말합니다(37). 그는 이사야 선지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38-40). 이사야 선지는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마음이 완고한대로 버려두셨음을 말씀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의 눈을 멀게 하시고 마음을 완고한채로 그대로 두신다면 많은 표적과 기사를 보아도 믿지 않습니다. 죄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회개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고 주님앞으로 온 사람들도 많지만 여전히 종교지도자들과  대다수의 사람들은 주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숨으셨습니다(36).

관원들 가운데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지 못했습니다(42). 요한은 이들을 가리켜 "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는 자들" 이라고 했습니다(43). 다른말로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명예를 사랑해서 주님을 믿는다고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할 수 없었습니다.

돈과 마찬가지로 명예심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명예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나중에 하나님에게 비참하게 버림을 받을수 있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정열을 다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외치셨습니다(44-47).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중보자이시고 주님을 믿는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44-47).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것이 아닌 구원하러 오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2013년 8월 13일 화요일

영광

요12:27-3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하셨습니다(23). 그러면서도 주님은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계셨습니다(27).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그분의 고뇌와 갈등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것이 인성을 입으신 그분의 모습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경험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히4:15). 그분은 하나님이셨지만 인간의 연약함을 경험하셨고, 너무나 잘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완벽한 중보자가 되십니다.

두려움과 갈등이 있었지만 철저히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아닙니다. 아버지, 제가 이 일 때문에 오지 않았습니까?"(27) 하셨습니다.

또한 영광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영광은 자신의 영광이 아닌 "아버지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28).

사탄은  자신이 영광을 받고, 자신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지만 주님은 아버지가 영광을 받고 아버지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셨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영광만을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도록 자신을 끊임없이 복종시키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친히 보여주신 본이십니다.

주님은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땅에서 들려 올라가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 것이라"고 하셨습니다(32). 들려 올라가는 것은 보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합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눈에는 모진 형벌이요, 수치이지만.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영광입니다.

사람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그 자체가 영광이 됩니다.

2013년 8월 12일 월요일

주님을 따르는 자

요12:20-2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이전에 주님은 자신의 시간이 아직 오지 않았음을 말씀하신적이 있습니다(2:4;7:6).
본문에서는 " 인자가 영광을 얻을 시간이 왔다고" 하셨습니다(23). 제자들은 아마 이 말씀을 듣고 뭔가 모르는 큰 기대감으로 부풀었을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며 주님을 환영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12-13). 바리새인들 조차 " 온 세상이 그를 따른다"고  인정했습니다(19).

그러나 예수님이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것은 왕의 대관식이 아닌 죽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알의 밀을 말씀하셨습니다(24).

주님을 따르는 자는 세상의 영광을 얻는 자가 아니라 한 알이 밀처럼 죽는 것을 말합니다.
얻음이 아니라 잃음을 말합니다. 가짐이 아니라 버림을 말합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너무 많은 것을 얻고자 합니다.
희생보다는 영광을 얻을려고 합니다.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을 섬기자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귀히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26). 주님을 섬기는 것은 곧 주님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2013년 8월 10일 토요일

나의 삶속에

요12:12-1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시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11). 예수님의 명성은 재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유월절 명절이 다가왔고 예루살렘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신 다는 소식을 듣고 큰 기대와 설레임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12).

전쟁에 승리한 개선 장군에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 환영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전통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보자 종려나무를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호산나' 하고 외쳤습니다(13).
호산나는 ' 도와주소서'(시118:25-26)라는 의미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이스라엘의 참된 왕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13).

수 많은 외침의 환성속에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기도 힘든 상황입니다. 이들의 외침에 대해 주님은 어린 나귀를 타심으로 응답하셨습니다(14). 스가랴 의 말씀대로 행하심입니다(14).

요한은 예수님이 왜 나귀를 타셨는지? 주님의 행동을 제자들은 그 시간에 깨닫지 못했다고 진술합니다(16).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나서야  나귀를 타신 주님이 스가랴 선지의 예언의 성취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비로서 알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의 삶속에 다가온 어려운일들을 넘기고 나서야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깨닫게 될때가 많습니다.

개선장군은 멋있는 말을 타고 가야 상식에 맞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나귀를 타셨습니다. 평화와 겸손을 상징합니다..

그분의 나라는 평화와 겸손의 나라입니다.
그분의 나라는 군대의 힘이 아니라  희생과 섬김으로 확장되는 나라입니다.

오늘 나의 삶속에 평화와 겸손, 희생과 섬김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2013년 8월 9일 금요일

교회는

요12: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육 일전에 나사로가 살고 있는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2). 마태와 마가는 이 연회장소를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마26:7;막14:3). 아마 잔치가 시몬의 집에서 열렸는데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도 함께 초청을 받은 듯 합니다.

항상 그렇듯이 마르다는 분주했습니다(2). 음식을 접대하는데 바빴습니다. 이런 봉사도 귀한일이지만 말씀을 배우는 것, 영적인일에 힘을 쓰는 것이 더욱 귀합니다.

진리를 배우지 않고 분주한 사람은 영적으로 쉽게 메마르게 됩니다. 쉽게 지칩니다.
쉼이 없습니다. 진리안에서 견고함이 없기에 상황에 따라 변할수 있습니다.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그녀는 비싼 향유 약300그램을 가지고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닦았습니다(3). 오빠 나사로를 살려주신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주님은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진 음식들보다 이 일을 더욱 기뻐하셨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7).

주님은 기뻐하셨지만 가룟 유다는 이 일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한다면 더 좋지 않은가? 하고 비판했습니다. 요한은 그에대해 그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 말하기보다는 탐심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5-6). 그는 물질중심의 사람입니다. 무엇이든 돈으로 평가하는 사람입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어떤집에 사느냐? 어떤 자동차를 타고 다니느냐? 여기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물론 교회는 가난한 자들을 돌볼 책임이 있습니다(13:29). 그러나 주님과의 관계가 먼저 입니다(8). 복음이 없이 구제만 한다면 그것은 자선 사업이지 전도가 아닙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해 영혼을 구원하는 곳이지, 자선 사업하는 곳이 아닙니다.

2013년 8월 8일 목요일

나는 어디에?

요11:45-5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이 나사로를 살리자 이를 본 많은 유대인들이 주님을 믿었습니다(45).
반면에 어떤 사람은  믿는 것을 거부하고, 주님을 해하려고 바리새인들에게 고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46).

 종교지도자들도 예수님이 행하시는 많은 표적을 알고 있었습니다(47).
하지만 이들의 특징은 강팍함입니다.

이들은 그들의 권위가  손상 받지는 않을까, 그들의 위치가  예수님때문에 흔들리지는 않을까,  예수님때문에 사람들이 동요한다면 로마정부가 탄압하지는 않을까?(48)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이라 하면서 생각은 세상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가장 불행한 일을 종교를 통해 출세하고, 부귀 영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직업을 통해 출세를 했다면 차라리 떳떳 할것입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 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보면서 애통해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공회에서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로 인해 로마군대의 위협이 있으니 예수 한 사람만 희생 시키면 안전하다고 발언을 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오신 메시야는 아닌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는 생각보다 세상적인 계산법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위치는 대제사장이지만 불신앙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가야바가 비록 잘못된 동기로 말을 했지만, 유대의 공직자로서 최초로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예언 하게 된 것입니다(49-52).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합니다.

이때부터 이들은 예수님을 죽일계획을 세웠고(53),
주님은 이것을 아시고 깊은 광야 한 마을로 피하셨습니다(54).
아직 잡히실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순종하십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좇아가는 주님과
남들이 우러러 보는  대제사장이요, 종교지도자들이지만 세상적인 생각으로 가득차 세상적인 방법만 좇는 이들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나는 어디에 속해있습니까?

2013년 8월 7일 수요일

울고계시는 주님

요11:28-4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고대 헬라인들은 신(神)은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예수님은 정반대이십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감동을 주는 구절은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더라"(35)하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주님은 친구 나사로의 죽음앞에서 우셨습니다.

본문에는 비통히 여기셨다는 말씀이 두 번 나옵니다(33,38). 이때 예수님의 감정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사로의 죽음앞에서 흘리신 눈물은 단순히 슬픔의 눈물이 아닙니다.
인간의 고난을 보시는 의분의 눈물이십니다.
죄로 인해 세상에 찾아온 고통과 죽음을 보시는 의분의 눈물이셨습니다.

"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외치시는"(43) 주님의 모습은 죽음을 향해 맹렬한 분노를 발하시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죽음에 대해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고전15:26)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원수입니다.
죽음을 가져다 준 죄는 원수중에도 원수입니다.

오늘  울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봅니다.

2013년 8월 6일 화요일

마르다의 신앙

요11:17-2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마르다와 마리아 가정에 큰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의 사랑하는 오빠가  병들었기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 SOS를 보냈지만 주님은 아무 반응이 없으셨습니다. 결국 나사로는 죽게 됩니다. 죽은지 사 일만에 주님은 이들 가정을 찾아오셨습니다.

슬픔에 잠겨 있던 마르다는 주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곧 나가 주님을 맞이했습니다(20).
주님을 만난 마르다의 첫 마디는 주님이 여기 계셨다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21).
섭섭한 감정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이제라도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실줄 믿습니다(22). 이어서 나사로가 "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 때 제 오빠가 살아날줄 믿습니다"(24). 마르다가 신앙적으로 말하는 것 처럼 보여도 그의 말을 가만히 보면  확신이 없었습니다.

상황에 따라 기복이 심한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깊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일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왠지 모르는 깊은 평안함을 느낍니다. 그에게서 영적인 안식을 얻습니다. 조용합니다. 그의 심령이 믿음안에서 잔잔한 평안함이 넘쳐남을 보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이 어떤분이심을 아는 것입니다(27).
마르다는 주님이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주님이 나사로를 살리지 못할것 같은 말을합니다(39).

마르다의 신앙은 체계가 없었습니다. 그의 신앙이 체계가 없었던 것은 늘 분주하기만 했지, 진리의 말씀을 깊이 배우지 않았습니다.  말씀앞에  머물러 있지 않고 , 진리를 배우지 않으면 위기를 만나면 신앙이 흔들립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굳건히 서기 때문입니다.

2013년 8월 4일 일요일

나 란 존재

시78:1-3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 시편은 시적인 형태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이스라엘의 역사는 고집스럽고 , 불순종, 그 마음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한 역사임을 이 시인은 강조합니다(8).

전쟁에 능한 에브라임 자손들이 가나안 정복을 성공하지 못한 것은  불신앙이 원인이었습니다(11). 이들 은 하나님의 수없는 능력을 친히 목격을 했습니다.

바다를 육지처럼 건넜습니다(13). 구름과 불 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14). 물이 귀한 광야에서 하나님은 반석을 깨트려 시원한 물을 흡족하게 마시게 하셨습니다(15).

만나를 내려주셨고(24), 고기(메추라기)를 먼지 처럼 많이 보내주셨습니다(27).
그것도 금방 불평으로 바뀌었습니다(30).

하나님의 수 많은 기적을 보고도 정탐군들의 보고를 듣고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주저했습니다(32-33).

이들이 어려움속에서 회개한다고 하였지만(34-35), 진정성이 없었습니다(36-37). 진정성이 없는 회개는  하나님께 아첨하는 행동입니다(36).

아첨하는 것은 중심은 안그런데 겉모습만 포장할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회개에는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회개를 한다고 하면서 행동의 변화가 없는것은 하나님께 아첨하는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 부패한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하지만 누가 탓할수 있겠습니까?
나의 내면에도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의 끈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고, 한 번 가면 다시 못 오는 바람같은 존재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39).

바람은 한 번 훗 불고 지나가면 흔적이 없듯이
'나' 란 존재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2013년 8월 3일 토요일

요란한 것

잠9:1-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지혜가 집을 짓는다고 했습니다(1). 집은 쉬는 곳입니다. 안식하는 곳입니다. 본문의 집은 교회를 비유합니다. 교회는 쉬는 곳입니다. 한  주간 광야 같은 세상에서 지쳐있던 영혼들이 예배를 통해 영적으로 안식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영혼의 집입니다.

이집에서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잔치를 배설해서(2) 여종을 보냅니다.마을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초청합니다(3). 와서 준비한 음식을 먹으라고 합니다(4-5). 세상에서 지친 영혼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먹음으로  신령한 기쁨을 얻습니다. 영적인 새힘을 얻습니다. 이곳이 교회입니다.

하지만 거만한 자를 꾸짖지 말라고 했습니다. 미움만 살뿐입니다(7-8). 교만한 사람은 진리의 말씀을 들을수록 더욱 강팍해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가 모세를 만날때 마다 마음이 더욱 강팍해졌듯이.. 이런 사람은 가만히 나두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 시간에 지혜로운 사람을 훈계하는 것이 낫습니다(8-9).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입니다(10).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권면할때 그것을 받아 들이는 나의 자세를 보면 내가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인지를 알수 있습니다.다윗은 나단의 책망을 겸손히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앞에 자신을 낮추는 사람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신령한 지혜를 넘치게 하십니다. 그만큼 말씀앞에 그 심령이 개방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엔 유혹이 많습니다. 거짓된 진리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본문은 이것을 미련한 여인으로 표현합니다(13). 이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요란합니다(13). 요란하게 포장해서, 뭔가 있는듯이 변장을 해서 사람들을 초청합니다(14-18).

지혜가 없는 사람은 겉모습에 잘속습니다(16).

하지만 요란한것은 속이는 것입니다.

2013년 8월 2일 금요일

문 곁에서 기다리는 사람처럼

잠8:22-3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27).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때 그리스도께서 건축사가 되셨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기쁨으로 넘쳤습니다(30). 인자들을 기뻐 하셨습니다(31). 즉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여 기뻐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으로 솔로몬은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신약에 와서 바울은 모든 만물이 그분에게서 창조 되었고, 그분을 위해 창조 되었다고 했습니다(골1:16). 그 분안에(그리스도)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했습니다(골2:3).

지혜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야 영혼이 소생함을 얻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까?
날마다 문 곁에서 기다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34). 문 곁에서 기다리는 마음은 간절함과 정성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함과 정성으로 사모해야 은혜가 임합니다.
하나님은 건성으로  말씀을 대하는 사람에게 말씀을 열어주시지 않습니다.

마치 문 곁에서 기다리는 사람처럼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성경을 펼칩니다.


2013년 8월 1일 목요일

거저주시는

잠8:1-2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지혜가 부른다고 했습니다(1). 지혜는 영적 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입니다.

 지혜가 "길 가", "사거리", " 성문들 곁", 여러 출입문"에서 부릅니다(2-3). 현대로 말하면 쇼핑몰 이나 전철역 같은곳 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는 지혜는 우주 만물에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시19).

하나님을 나타내지 않는 곳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주만물, 세상 모든곳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 미련한 자들이 있습니다(4-5). 왜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입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시14:1).

세상 곳곳에  하나님의 지혜가 충만한데 그것을 모릅니다.  과학적 지식만 숭배하며 살아갑니다. 모든 지식의 근원이신 창조주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내세가 있는줄 모르고 현세에만 집착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줄 모르고 교만, 거만함,악함과 거짓속에 살아갑니다(13).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입니다. 지혜가 이들을 향해 부르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부귀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지혜가 금,은, 모든 보석 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10-11). 그가 가졌던 부로 영혼을 구원할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가 가진 영광으로 죄로 부터 자유할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세상의 금, 은, 보석 보다 가장 귀한 것이 하나님의 지혜(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가장 귀한 귀한것을 주십니다(19). 영원한 부요함을 주십니다. 세상의 돈으로 살수 없는 하늘의 기업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수고의 댓가가 아닌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