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31일 월요일

앞을 바라보며

사25:1-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지난 며칠동안 이사야서를 묵상하면서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를 보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주어진 고난(24)으로 부터 회복되는  기쁨으로 가득찬 말씀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해야 함을 깨닫게 되기까지 고난을 견디어 내야 했습니다.

이제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분노가 끝마치고(6) 주어지는 기쁨, 환희를 볼수 있습니다.
이 기쁨의 잔치는 모든 백성을 위한 것 입니다(6). 사망을 멸하시고(7-8), 그들의 얼굴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실것 입니다(8).

이 기쁨의 잔치는 우리가 주님 앞에 가면 참여 하게 될  천국 잔치의 모형입니다.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행했던 모든 수고를 칭찬하시고, 우리를 위해 기쁨의 잔치를 베푸실것입니다. 세상에서 고통 받던때의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말할수 없는 위로로 우리를 감싸안을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좋습니다.

이처럼 이사야가 유다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이 환희의 멧시지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실 은혜를 선명하게 예표해주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나라를 위해 수고를 다하는 것 입니다.

모든것이 새로워지며, 가장 큰 기쁨의 날이 우리에게 다가올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9) 오늘도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2012년 12월 30일 일요일

구원의 우물

사12:1-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구원의 기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눈에 띄는 단어는  3절의 ' 구원의 우물' 입니다. 이 물은 마르지 아니하고 순전한 기쁨을 주는 물입니다.

우리가 이 우물에서 물을 먹을지라도 계속 이 물을 먹으며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더욱 깊이 알고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이 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도 말씀하시길 " ...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고 하셨습니다.

21세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 어느때 보다더 편리함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세상은 더욱 우리에게 갈증을 줍니다. 그리스도 없이 사는 사람은 세상이 발전하고 바뀔지라도 늘 메마른 광야에서 살아가는 것 입니다.

하나님이 이 물을 주셨습니다. 이 물은 과학의 힘으로 살수 없습니다. 돈으로 살수 없습니다. 권력으로 살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마실 수  있습니다. 그분(예수 그리스도)에게 오면 됩니다. 구원 뿐만 아니라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아있는 동안 살 수 있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며 이사야의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까?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사라지고 이제는 그들을 향한 치유와 위안이 있습니다(1).

좋지않은 시간을 보낸 후 금방 기쁨으로 바뀐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직도 않좋았던 기억과 여운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사야는 유다를 향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5-6).

우리가 기쁨으로 가득찰때 누가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고, 내 안에 기쁨의 소식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질것입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안에서 주신 구원의 기쁨속에 사십시오. 나를 구원하시고, 축복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012년 12월 29일 토요일

앞으로 일어날

사11:1-1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언의 말씅입니다.
이사야가 이 멧시지를 선포할때에 유다의 상황은  매우 어둡고 침울하고 소망빛이 보이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당시 유다처럼 어둡고, 침울한 세상에 살아갑니다. 좋은 소식 보다는 좋지 않는 소식이 더 많습니다. 테러, 자연재해, 어린아이들까지 죽이는 묻지마 총기사고, 국지전, 세계 경제 위기 등등... 하지만 세상을 보면 갈수록 흉폭해지는 것 같지만 우리의 눈은 항상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야 합니다.

이사야는  그런점을 그들(우리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 희망의 멧시지의 근원은 바로 이새의 줄기입니다. 육신적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그분을 통해서 시작 될 것입니다(1).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5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 이신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의와 공의 신실함을 대표하시는 분입니다.

추운 겨울이 되면 나무가지는 앙상해집니다. 겉보기는 마치 죽은것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겨울이 지나 때가 되면 그 나무가지에는 새싹이 나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열매가 맺게 될것 입니다.

현재  이 세상이 마치 앙상한 가지와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그분이 세우실 하나님 나라의  환상을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 합니다(6-9).

 주위의 환경을 보지 않고 그분과 함께할 미래의 시간을 보며 믿음안에서 굳건하게 설수 있기를 기도하십시오.

"물이 바다를 덮음 간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아-멘-

2012년 12월 28일 금요일

앗수르

사10:20-2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7:3에서 이사야의 첫번째 아들 '스알야숩'(남은자가 돌아오리라)을 통해 유다가 멸망할지라도 남은자가 있음을 압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고난을 주시지만 희망을 끈을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남은자는 소수입니다(22)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올것입니다.
교회가 박해를 받고, 교회가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은 항상 남은자를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새로운일을 하셨습니다.

중세의 교회가 타락을 하고 영적으로 암흑기였을때에도 하나님은 루터와 칼빈등 개혁자들을 남겨두셨습니다.

본문의 남은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지를 깨달았습니다(20). 그들이 의지했던 앗수르가 결국 자신들의 부메랑(Boomerang)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것을 의지하면 그 의지하는 대상이 결국 자신의  고통의 근원이 되고 맙니다.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십니다.

하나님께 돌아온 그들은 더 이상 이 흉악한 외국 침략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앗수르'가 있습니다. 때로는 이' 앗수르'가 우리를 두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의지 하는자는 앗수르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백성을 징계하는 징계의 막대기에 불과 합니다. 만일 앗수르가 크게 보인다면 그만큼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안에 어떤 '앗수르'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하나님께 가져가십시오.
하나님은 이 앗수를 이길수 있도록 영적으로 우리를 강건하게 하시고 은혜를 주실것 입니다.

2012년 12월 27일 목요일

무엇을 해야 할지를

사9:18-10: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9:12,17,21;10:4). 그럼에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기다림입니다(10:3).

하나님의 진노는 불의한 법을 만들어  기득권자들에게는 온갖 혜택을 주고 사회적 약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자 들  이들 지도자들을 향해 있습니다(10:1-2). 이렇게 이사야가 살던 시대는 악이 성행하던 시대였습니다.

우리는 불의한 법을 만들어 사회적적 약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이사야가 살던 시대가 아닌 민주주의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이번 대선에서 대선 후보들이 서로 질세라 경제민주화를 외치며 어떻게든 양극화 현상을 완화시키겠다고 공약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치인들이 경제민주화니 양극화를 완화시킬려고 해도 세상에는 항상 빈부의 격차가 있고, 사회적 약자는 여전히 불이익을 당합니다.

주님이 오실때까지는 이런일들은 계속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는 이런 사회적 책임을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 복음전도에는 사회적 책임이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믿습니다.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좀더 나아지기 위해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2012년 12월 26일 수요일

한 순간도

사9:8-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9:1-7의 본문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한 말씀이 나옵니다(6).
 하지만 본문은 하나님의 진노가 계속 되풀이 됨을 봅니다(12,17).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모습이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한 아기의 탄생을 예언했던(6)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진노하십니까? 그들이 회개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13).

이들의 교만한 생각이 9절과 10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징계하셔서 전쟁을 통해 모든것을 파괴하셨음에도 그들은 파괴된 이전보다 더 멋있게 복구할수 있다고 장담하고 있습니다(10).

이들은 하나님보다 이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인간 지도자들을 더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결국 그들을 더욱 큰 파멸의 길로 이끌었습니다(16-17).

나의 삶을 보십시오.
 날마다 주님을 의지하며 그분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갑니까? 아니면 그분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한 순간도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2012년 12월 25일 화요일

한 아기

사9: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예언이 명확히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가 세우실 왕국은 정의와 공의로 세워질 나라입니다(7). 9장까지 이르러 이사야는 세번에 걸쳐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예언을 했습니다.

이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은 당시 그가 살던 상황, 생각, 시간을 넘어선 일입니다. 아마 자신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며 하나님이 주신 멧시지를 선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사야 선지자의 시대보다 약700년 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본문 6절에서 앞으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아기의 모습을 말씀합니다.
주님은 구유에 누워 있는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것은 이 아기는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 이시고,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십니다(6).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줄 수 없는 평화를 주시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아기는(6)는 평범한 아기가 아닙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 죄악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죄로 부터 해방시키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 하는 아기입니다.

오늘날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아기는 필요합니다.
6절 말씀을 조용히 다시 묵상해보십시오.
이 아기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찬양하십시오.

2012년 12월 24일 월요일

하나님의 소망

사8:11-2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으로 부터 멧시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두려워해야 할 분임을 느끼며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13).

그는  환상을 본 영적 경험이 있습니다(6:3).  환상을 본 후 그는 마음으로 부터 우러나오는 멧시지를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강한 손으로 자신을  덮으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11). 하지만 더 이상 그 강렬하게 다가왔던 환상의 경험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습니다(17).

하나님은 그의 지성소가 되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않고 자신의 길로 간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것입니다(14-15).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힘으로 산다면  반드시 그 길을 막으시고 중간에 걸려 넘어지게 하실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사야의 아들에게 주신 이름 즉 '마헬살랄하스바스'는 이스라엘에게 행하실 징조와 징표가 됩니다(18). 그 이름에 따라 불길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앗수르가 그들을 약탈하고, 파괴시킬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가운데도 남은자를 남겨두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들이 비로 소수이지만 이들은 여전히 유다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비하면 소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에 존재케 하신것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나는 나의 이웃과 사회에 하나님의 소망이 되고 있습니까?

2012년 12월 23일 일요일

참된 부

시49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 시편기자는 찬양이나 기도 보다는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 멧시지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 할것없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2).

좋은 설교가 그렇듯이 그 역시 자신에게도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악한자와 부유한자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5-6).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그를 구원하실 분 이시기에 그러합니다(15).

본문에는 속전(贖錢), 속량(贖良)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이 두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본 시편은 큰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또한 독자들에게 큰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 부자들이 자신의 부를 치부하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지말라' 고 합니다(16). 다른말로 놀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왜냐하면 사람의 '부'는 일시적인것이기에 그러합니다.

부를 쌓고 또한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죽을때 아무것도 가지고 갈수 없기 때문입니다(17). 물론 부자들 가운데도 훌륭한 신앙인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그 부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돕는데 사용합니다.

그러나 현대의 물질주의 사회에서 사는 우리에겐 돈을 역시 위협적인 존재입니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에게 마음이 쉽게 기울어질수 있습니다.

서점에 가보아도 ' 부자가 되는법' 이라는 책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텔레비젼에서도 좋은 집에서 사는 유명인들을 소개하며 은근히 부를 자랑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아무리 좋게 보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영원한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뿐이십니다(15).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산다면 아직 짐승과 같습니다(20).

부유함은 편리함은 주지만 행복은 주지 않습니다. 행복은 만복의 근원이시고, 모든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안에 사는 것입니다.

2012년 12월 22일 토요일

이름

사8:1-1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이름을 짓습니다. 이름을 지을때는 이름속의 의미대로 아기가 자랐으면 하는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사야를 위해 이름을 지으셨습니다. 이사야의 아내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은 ' 마헬살랄하스바스' (1-3) 입니다. 그 의미는 ' 속히 노략하라' 는 말입니다.

이름치고는 최악입니다.
하지만 이 이름속에는 하나님의 예언이 담겨 있습니다. 즉 빠른 시간내에 앗수르가 다메섹과 사마리아를 노략할것입니다(4).

그리고 하나님은 이 이름을 이사야에게 쓰게 하시고(1), 두 명의 신실한 증인을 세우셨습니다(2).

이사야의 아들은 그 자체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멧시지입니다. 아들이 살아 있는한 절대로 무시할수 없고, 잊을수 없는 멧시지입니다.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워지는 우리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나의 삶속에 어떻게 표현되고 있습니까?

2012년 12월 21일 금요일

어떤상황에서도

사7:1-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유다의 아하스왕때 입니다. 시라아와 이스라엘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할려다가 실패했습니다(1).

이들은 재차 침략을 할려고 다시 동맹을 맺었고, 이 소식이 아하스왕과 백성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이들은 마치 "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큰 두려움으로 떨었습니다(2).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왕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는 자기의 아들을 데리고 왕을 만나 용기를 줍니다(3-7).

이사야는 왕을 만나 조용히 하라고 합니다(4). 위기의 때일수록 조용히 해야 할것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려운일이 생기면 마음이 혼란스러울수 있습니다. 조용히, 가만히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어떻게 이일을 해결하실지 조용히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이사야는 왕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했습니다(11).
아하스왕은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다고 거절을 합니다.(12). 그가 겉으로는 경건한척 하였지만 내심(內心) 하나님 보다 당시 유다와 가까운 강국이었던 앗수르를  더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징조를 주시길 원하셨습니다(14).
아하스는 이사야의 말을 듣고 무슨말인지 이해할수가 없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약속이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임을 알고 있습니다.

위기가 왔을때 아하스가 보여준 모습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어려움이 오면 조용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믿음가운데 굳게 서지 못하면 굳게 설수 없습니다(9).
어떤상황에서도 두려움 없이 굳게 설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2012년 12월 20일 목요일

준비가..

사6:1-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하심이 나타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지금 성전에 있습니다(1). 아마 평소와 같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려고 하였던것 같습니다.

그때에 갑자기 그의 영안이 열려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하심을 보게 됩니다.
또한 이해할수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들의 소리를 듣습니다(2-4).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앞에서 그는 자신의 죄를 보게 됩니다(5).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습니다(7). 더나아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합니다(8).그런후 그는 유다의 회복에 대한 질문을 하나님께 하고 있습니다(11).

본문에서 주의깊에 보아야 할 부분은 하나님은 이사야를 사용하시기전 그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셨다는점입니다(5-7). 즉 하나님은 깨끗한 그릇을 사용하신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의 입술을 깨끅하게 하신 후 그의 입술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쓰실려면 매일 우리의 심령을 성령으로 정화 시켜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하게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8).

2012년 12월 19일 수요일

십자가 앞으로

사5:22-3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분노에는 정당한 분노와 잘못된 분노가 있습니다.  인간도 의분과 옳지 않은 분노 둘 다 가질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항상 옳으십니다. 그분은 항상 의로우신분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유다의 죄악된 사회를 바라보시며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분노가 나타납니다. 그들의 죄에 대해 분을  발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입니다(25).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지 오래됩니다.  아예 그 말씀을 무시하며 살아갑니다(24). 온갖 죄악의 삶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시는 도구로 앗수르를 사용하십니다(26-30).

 유다를 향하신 하나님의 분노는 나에게 어떤 영적의미를 줍니까?
한 사물을 보고 서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 처럼, 하나님에 대해 생각할때에도 서로 다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떤이는 하나님은 무조건 사랑이시다.
어떤이는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 분노하시는 하나님에 촛점을 맟줍니다.

사랑과 분노는 서로 분리될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에 분노 하십니다. 사랑이 없다면 왜 분을 발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분의 분노는 곧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분노와 사랑을 완벽하게 표현해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분노와 사랑에 대한 바른 반응이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분노와 사랑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신 십자가 앞으로 오십시오.
나에게 감추어진 죄가 있다면 회개하십시오.

2012년 12월 18일 화요일

변화될 부분은

사5:8-2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유다의 죄악상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유다의 죄악상을 보면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살아가는 만큼 , 이들에게 닥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수 없을것입니다.

 이들 사회의 죄악상을 보십시오.
탐욕과 불의가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8-10).
방탕한 삶이 끝에 다다르고 있습니다(11-12).
심지어는 하나님을 비웃기까지 합니다(18-19).
도덕적 불감증이 사회에 팽배해 있습니다(20-21).

하나님을 향해 조롱하는 이들 백성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단호합니다.
이들의 탐욕은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바뀔것입니다(13). 이들이 얻을 수확은 아무것도 없을것입니다(9-10). 한나라의 경제적인 어려움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사치와 방종, 쾌락. 음란한 사회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역사가 증명합니다.로마가 멸망한 이유가운데 하나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본문에는 향락주의 삶은 결국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을것이라 했습니다(14).
이들의 교만은 이들을 비참한 신세로 몰락 시킬것 입니다(15).

이런 심판의 멧시지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소망도 있습니다(16-17).
하나님은 심판을 하시면서도 소망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유다의 죄를 보면서 오늘 내가 하나님앞에 고백할 죄는 없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나의 삶에 변화될 부분은 없습니까?

2012년 12월 17일 월요일

얼마나 많은

사5:1-7절, 오늘의묵상입니다.
본문에는 포도원 정경이 펼쳐집니다. 이 포도원은 기름진 산에 위치해 있습니다(1). 따라서 당연히 좋은 포도를 수확할수 있는 환경입니다.하지만 수확시기가 되어 수확을 할려고 보니 좋은 포도가 아닌 들포도가 맺여 있습니다(2,4).

왜 이포도원에서 좋지 않은 포도가 수확이 될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이 포도원 비유를 통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멧시지입니다.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7). 나쁜 포도를 맺었다고 하는것은 이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멸망이 그들에게 다가옴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좋은 포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좋은 포도를 맺는것은 말씀에 순종함을 말합니다. 얼마나 말씀을 많이 본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얼마나 순종했느냐입니다.

얼마남지 않는 올해를 넘기기전에 나의 삶속에 얼마나  많은 좋은 포도를 맺었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시95:7-8).

2012년 12월 16일 일요일

죽을 때까지

시48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어떤분이시냐? 하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1). 하나님은 자신을 보이셨습니다(3). 이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일들이 잘되어가고 , 환경적으로 평안할수록(4-7). 우리는 그분안에서 즐거워하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잘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번영할때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삿2:12).

솔로몬왕조차 성전을 지어놓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왕상11:4).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도 모든일이 잘되어갈때는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이 앞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대로 행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모든일이 잘될때 일수록 하나님의 인도를 더욱 구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며 살아가십시오.
무슨일을 만나던 좋던 나쁘던 그분과 나의 삶을 나누십시오. 그분은 죽을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14).

2012년 12월 15일 토요일

온세상의

행12:19-2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교만하고 오만한 사악한 권력자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미 10장에서 베드로가 고넬료가 만나는 장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는 만났을때 그 앞에 엎드렸던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10:25-26).
베드로는 고넬료의 이런 행동에 매우 당황해하며   즉각  만류했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태도와 본문의 헤롯의 차이점을 보십시오.
헤롯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을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줄 알고 한층 더 박해를  강화했습니다(12:3).

또한 가이사랴 사람들이 자신에게 아첨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습니다(22).
 이들은 헬라문화에서  신들이 사람들 사이에 강림한다는 신화를 사용해 헤롯에게 아첨을 부립니다.

헤롯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음을 당합니다(23).
사람에게 영광을 받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에게만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가는것 만큼 큰 죄는 없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런 어려운 환경속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가이사가 주님이고, 가이사에게 예배해야 한다고 로마정부가 요구했을때  오직 예수님만이 주님이시고 하나님이시라고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24). 하지만 대신 그들에게 찾아온것은 박해였습니다. 이들은 그 어떤 시련도 인내와 믿음으로 이겨내었습니다.

누가 이세상을 움직인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치가들 입니까? 재력가들입니까?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 세상의 주인이심을 선포하십시오.

2012년 12월 14일 금요일

하나님의 주권

행12:1-1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교회에 더 무서운 박해가 찾와왔습니다. 교회의 큰 기둥이었던 야고보가 순교를 합니다(2). 또한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투옥을 당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베드로입니다(3).

성도들은 하나님이 왜 이런 무서운 시련을 허락 하시는 것일까?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실까?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 입니다.

복음이 더 강하게 전파되고 교회가  평안이 든든하게 서가기를 바랬는데, 반대 세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들은 서로 하나가 되어 기도에 힘을 씁니다(5,12). 환난 가운데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더욱 축복을 받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교회가 평안하면 나태해지고, 부패해질수 있으니까? 고난을 허락 하십니다.

이런 박해로 인해 한 곳에만 모여 있던 그리스도인들을 흐트려서 새로운 곳에 가서 복음이 전해지도록 하셨습니다.

 이런 환난은 그들의 믿음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야고보는 순교를 하고, 감옥에 투옥된 베드로는 천사를 보내어 극적으로 구출하시는 하나님!
한쪽은 왜 순교를 허락하시고, 한쪽은 왜 안전하게 지키실까?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을 만나도 하나님의 주권앞에 순종하며 감사하십시오. 분명한것은 지나고 보면 거기에는 엄청난 축복이 있었음을 깨닫게 될것 입니다.

2012년 12월 13일 목요일

그리스도인

행11:19-3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이 초대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환난을 당하게 하신것은 그들이 한곳(예루살렘)에 모여 있지 않고 흩어져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데 있었습니다.

본문은 이 흩어진 사람들이 신실하게 복음을 전하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도우시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21-22).

그리고 성령님이 앞으로 일어날 흉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28).

잠시 무대에서 사라졌던 사울이 재등장을 합니다.
그가 회심한 후 아무도 그의 회심을 믿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그를 믿어주고  사도들과 성도들에게 변호해준 바나바(9:27)는 본문에서 사울을 찿으러 다소로 갑니다(25).

 두사람은 1년동안 안디옥에서 팀을 이루어 사역을 하고 이 교회를 견고하게 세워갑니다(26).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경멸의 대상이었던 그리스도를 사울은 열심히 가르쳤고 전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처음으로 ' 그리스도인' 이라고  불리워졌습니다(26).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하신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는 자체가 영광입니다.

성령님이 예언하신 대로 기근이 일어나자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난을 당하는 형제들을 돕기 위해 힘을 다했습니다(29).

초대교회는 조직적으로는 엉성한것 같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우는대로  살았습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것 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우는데로 살고 있습니까?

2012년 12월 12일 수요일

하나님의 일을

행11:1-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베드로는 유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이방인과 접촉했다는 것 입니다(1-3).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아직 유대적 사고와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그리스도인이 되기전에 가졌던 생각과 관습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어떻게 이방인에게 임했는지, 주님이 세상에 계실때 물이 아닌 성령으로 세례(침례)를 받을것이라는 하셨던  말씀을 연관시키며 증거하고 있습니다(16;막1:8).

유대인에게 성령이 임하였던, 이방인에게 임하였던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막겠느냐 하며 그들에게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17).

나의 좁은 생각, 경험에 갇혀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을때가 있습니다. 혹은 어떤 선을 그어놓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가 그어놓은 한계, 경험, 생각을 버리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나의 생각과 나의 경험안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가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역은 일정한 패턴이 있는것이 아닙니다.
가령, 거리에서 전도하는 사람들, 지하철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아니면 마약중독자, 알코올 중독자들에게 전도하는 사람들, 창녀들이나 호스티스에게 전도하는 사람들, 조폭들에게 전도하는 전직 조폭출신 그리스도인들.. 어떤때는 이들에게 좋지 않는 시선으로 볼 때가 있습니다. 기존 교회에서 이들을 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명한것은 하나님은 그들 역시 사용하신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유명한 교회 소위 ' 스타목사님'들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소중하게 사용하십니다. 각자의 은사와 사역의 현장이 다를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나의 좁은 생각이나 편견으로 제한하지 마십시오.

2012년 12월 11일 화요일

이 영광스러운

행10:34-4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복음증거자로서의 베드로는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그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과정이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선 고넬료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으며  시작합니다(29-33). 고넬료의 이야기를 듣자  하나님이 자신에게 환상으로 말씀하신것을 연관시키며 한 이방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더욱  느끼게 됩니다((34-35).

그런다음, 베드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명확하면서도 간단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36-43).

복음은 단순합니다.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재림하심(42), 또한  그분을 통하여야만 구원 받을 수 있음을 증거하기만 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람이 하지만  믿음을 가지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44).

욥바에서 베드로와 함께 온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에게도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워 합니다(45).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때 항상 좋은 반응이 있는것은 아닙니다.

물론 어떤때는 마음이 강팍한 사람이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는 드라마틱한 상황이 나타날때가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때는 아무리 열심이 증거해도 열매가 전혀없습니다.

죄인이 구원받는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하는 증거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2012년 12월 10일 월요일

누구를 만나든

행10:23-3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베드로는가 고넬료를 만나는 것 자체가 유대인의 관습에서 보면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명령이기에 일단 순종을 하며 고넬료의 집으로 향합니다. 가면서도 내심 왜 내가 이방인에게 가야하나? 하는 복잡하고 착찹한 마음으로 갔을것입니다.

 고넬료를 만나자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 자체가 있을수 없지만 하나님이 자신에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거나 깨끗하다고 하지말라(28)고 했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오기 싫었지만 하나님이 지시하셔서 이렇게 왔노라 한것이 그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그러면서도 베드로는 중요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하나님나라에는 인간이 한계를 그을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지만 우리도 한계를 긋고 사람을 대하지는 않습니까? 가령, 테러리스트, 마약판매상, 유괴범, 성폭행범, 조폭, 부패한 정치인들, 종교의 이름으로 사람의 인권을 유린하는  사이비 교주들..

그럼에도 이들 모두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 역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고 , 구원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누구나 제한없이  복음을 전해 구원을 받게 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만나자 엎드려 절했습니다(25). 베드로는 즉각 그렇게 하지못하게 했습니다(26).

베드로의 이런 자세는 우리에게  시사하는바가 큽니다.
아무리 훌륭한 영적지도자일지라도 그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가 필요한 죄인입니다.

사람을 대할때 선입견(先入見)을 가지고 대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누구를 만나든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도록 말입니다.

2012년 12월 9일 일요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시47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뜨거운 마음이 전달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외치라고 했습니다(1).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외치는 것은 누가 강요해서 되는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감격,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찬양을 할때 그 찬양이 메마르거나, 목에서 소리가 나오는것은 그 심령이 메말라있다는 증거입니다. 은혜가 충만한 심령에 나오는 찬양은 그 소리부터가 다릅니다.

노래를 잘부르거나 못부르거나가 문제가 아닙니다. 은혜의 소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끼칩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우리가 손벽을 치며 찬양하는 하나님은 어떤분이십니까?
그분은 온 땅의 왕이십니다(1,8)
지존자이십니다(1).

위대하시고 두려우신분입니다(2).
하나님은 만민을 나라들을 복종케하십니다(3)
그분은 우리하나님이시고, 우리를 만드시고, 아시고 사랑하시는 분입니다(4).

그러므로 가 하나님안에 있고 그분의 충만한 임재속에 살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것들은 지극히 작게 보일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삶, 이세상에 어떤것과도 비교할수 없는 크신 분 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분의 통치는 가장 즐거운일입니다. 그분의 통치를 싫어하는것 자체가 자신을 섬기는 죄악입니다.

오늘도 이 광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012년 12월 8일 토요일

이 영광스러운 일에

행10:9-2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서양속담에"듣고는 잊어버리지만, 보고는 기억한다. 그리고 행하면 이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길 .."모든 음식물은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막7:19). 3년동안 주님으로 부터 친히 가르침을 받고 훈련을 받았던 그것도 가장 사랑받았던 제자가운데 한 사람인 베드로는 아직  복음이 주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늘 정해진 기도시간에 따라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시간이 정오라 시장기를 느꼈습니다( 9). 그러다가 환상을 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취급하는 짐승들이었습니다(12,14).

하나님은 그것을 잡아 먹으라고 하십니다(13). 베드로는 거부합니다(14). 그럴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주의 문화권에서 살던 이 사람이 실천하기에는 어려운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것을 속된것이라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15).

하나님이 보여주신 이 환상은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를 만나게 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게는 부정한 짐승처럼 보였습니다.

베드로가 그 환상의 의미를 생각할때에 성령님께서 고넬료가 보낸 두 사람을 만나도록 도우셨습니다(19).

한 이방인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이렇게 치밀하게 일하셨습니다.환상을  보이시고, 성령께서 말씀하시고... 한 영혼의 가치가 천하보다 귀합니다.

 베드로가 머물고 있는곳이 가죽제품을 만드는 시몬의 집입니다(6,9:43). 시몬은 종교적관점(유대주의)에서 보면 부정한곳에서 하루종일 일을 합니다. 가죽제품을 만드니 죽은 짐승의 가죽을 취급해야 합니다. 죽은짐승도 유대인들은 부정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베드로 하여금 시몬에 집에 머물게 해서 그런 환경에 익숙하게 한것은 한 이방인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얼핏보면 과정이 복잡합니다. 천사가 고넬료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면 될텐데.. 환상을 보이시고  또한 고넬료에게 나타나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고, 그를 청하게 하시고(7,22).

왜 이리 복잡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복음 전도를 맡긴것은 천사가 아닌  사람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전도는 가장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이 영광스러운 일에 쓰임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2012년 12월 7일 금요일

무엇을 원하시는지

행10: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보기드물게 이방인으로서 경건하게 살며 선행에 힘을 썼던 사람의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고넬료로 그의 위치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으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을수도 있고, 힘으로 약자들 위에 군림할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난 그는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늘 선행에 힘을 썼던 사람입니다(1-2).
그것도 자신만 그렇게 한것이 아니라 그의 온집안 사람들에 선행에 힘을 썼습니다.

또한 늘 기도생활에 힘을 썼습니다(2).

하나님은 이런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어 만나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드라마틱한 장면입니다(4). 처음으로 천사를 만나는 영적 경험을 한 고넬료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곧 천사가 시키는대로 순종을 합니다(5-8).

구제를 하고, 남을 돕는것은 가장 실제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주님을 증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중에 하나입니다.

성경에 보아도 하나님은 과부와 고아들 즉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심을 가지셨듯이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사회의 약자들에게 역시 관심을 가지십니다.

나의 수입이 많든 적든, 상황이 어떻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남을 돕는다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물입니다. 하나님은  축복하실것입니다.

본문의 고넬료의 행동을 보면서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2012년 12월 6일 목요일

베드로를 보면서..

행9:32-4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의 촛점은 사울에게서 베드로로 바뀌었습니다. 베드로는 스데반의 순교후(행7:54-8:1) 흩어진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 사방으로 두루다녔습니다(32).

룻다와 욥바에는 비록 적은 숫자이지만 이미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32,38).

베드로가 행한 첫번째 이적의 대상은 그지역 성도들(32)에게 알려진 애니아였습니다. 이 사람은 8년동안 중풍으로 고생을 했는데 그를 고쳐주었습니다(33-34).

두번째는 욥바에서 일어났습니다. 도르가라는 여성도가 갑자기 병이 나서 죽게되었습니다.
이분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들로 부터 존경을 받아왔습니다(36). 베드로가 죽은 도르가를 살렸습니다(40).

이 두사 건은 두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많은 사람들을 전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35,42).

기적은 항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행하실때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도구로 사용받았습니다.

본문에서 특히한점은 이 두가지 엄청난 기적을 행하고 베드로는 그곳을 떠나지않고 여러날 그들과 함께 머물며 그들에게 믿음을 북돋아주었습니다(43).

그가 중풍병자를 고치고, 더나아가 죽은자를 살렸는데 요즈음 같으면 VIP 대접을 받았을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머문곳은 가죽제품을 만드는 집이었습니다. 아마 가죽 냄새가 늘 진동을 하였을것입니다.(43). 베드로의 겸손을 보게됩니다.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요즈음 목회자들이 너무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2012년 12월 5일 수요일

도우심이 없이는

행9:19-3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사울의 회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큰 혼란에 빠지게 했습니다.다메섹의 유대인들은 사울이 교회를 박해하는데 앞장섰울때는  좋아했지만  이제는  사울을 죽일려고 하였습니다.

사울을 따랐던 제자들이 급히 피신을 시켰습니다(25).

한편,예루살렘의 제자들 역시 사울의 회심을 의심했습니다(26).  그러나  후에는  사울의 진심을 알고 죽음의 위협 앞에 있는 사울을 피신 시켰습니다(25)/

 하나님은  때때로  복음을 전할때에  어려움을 허락하실때가 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일에는 어려움이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그때 절망하기 쉽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의  종들의 믿음을 굳건히 하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세상의 일도 그러하지만 특히 주님의 일은 내힘이 아닌  주님의 힘으로 하는것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늘 무릎을 꿇지 않고는 한순간도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사탄의 공격앞에 패하게 됩니다.

주님이 늘 깨어 있으라고 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도우심으로  초대교회는 든든히 서가고 구원 받는 숫자가 더해갔습니다(31).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수 없기에 오늘도 주님앞에 더욱 무릎을 꿇습니다.

2012년 12월 4일 화요일

마음의 벽

행9:10-1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아나니아와 사울의 만남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도우라는 어려운 책무를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내키지 않는, 싫은 일이었습니다(13).

주님은 사울을 도우라고 재차 말씀하셨습니다(15). 아나니아는 싫었지만  순종을 합니다. 결국  사울을 "형제"라고 부릅니다(17).

교회를 박해하는일에 앞장섰던 사울이 아니니아로 부터 형제라는 말을 듣고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요?

또한 본문에서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관계성을 엿볼수 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초대교회 성도들 같은 공동체 의식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인지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자신을 '오픈' 하는 것이 쉬운일이 아닙니다.

더우기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사울처럼)을 선뜻 돕는것이 쉬운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이 생각하는것과 다릅니다.
때로는 사람의 기준에 못미쳐도 하나님은 그를  변화시켜 그분의  택하신 그릇으로 사용하십니다(15).

 오늘 나의 마음의 벽을 허물고  신앙적으로 도와야 할 사람은  없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마음의 벽을 가지고 어떤이는  형제,자매처럼,어떤이는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지는 않습니까?

 마음의 벽이 있다면 그것을 허물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2012년 12월 3일 월요일

눈이 열려서

행9:1-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사울은 날카로운 지성, 높은 교육을 받은 유대인으로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대제사장으로 부터 위임을 받아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좇는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사람들처럼(눅24:18-20), 아마 사울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전에 주님을 본적이 있거나 아니면 주님의 대한 이야기를 들었음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당시 사울은 주님이 어떤분임을 알지못하였고, 이해할수도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의 영의 눈을 열기위해 육신의 눈을 멀게하셨습니다(8). 또한 마음의 문을 열기위해 그에게 " ..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4).

사울은 주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확실히 사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고 만났습니다. 그의 삶에 획기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입니다. 기독교 역사의 새로운장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대로 가던길을 막으시고 고통을 주실 때 가 있습니다. 예기치 않는 힘든일을 당할때가 있습니다.  그 모든순간이 하나님의 간섭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나의 영의 눈이 열려서 그것이 나와 생각이 틀려도
내가 보기엔 불편한 일일지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도록 기도하십시오.

2012년 12월 2일 일요일

가만히 있어

시편46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시편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고 힘이시라고" 하면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1). 또한 마지막절은 " 우리의 피난처" 라고 하며 끝내고 있습니다(11).

'우리'라는 단어가 두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반복되고 있음은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피난처가 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곧 하나님을 참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에 한하여 그러합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 ..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두가지 논점이 있습니다.
불확실하고, 뭔가 않좋은 상황을 만났을때 이 말씀은 큰 위로를 주는 말씀입니다.
마틴루터는 두려움이 올때마다  이 시편 말씀을 읽고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서 그분이 하나님됨을 알수 있습니까?

본문에서 시편기자는 자연의 엄청난 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2-3).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자연의 힘 앞에서는 인간은 힘을 쓸수가 없습니다.전쟁의 참상처럼(6,9)  지진, 수나미, 토네이도 등 .. 자연재해 참상을 자주 목격합니다.

그러나 시편기자의 촛점은 이런 참상이 아닌 그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맞추어져 있습니다(4-9).

TV, 신문, 인터넷을 통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알수 있습니다. 좋은일 보다 좋지 않는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그 가운데도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눈이 맞추어져야합니다.

본문의 키워드(Key word)는 '가만히 있어'(10) 라는 말씀입니다.
가만히 있으면서  어려움에 있었을때 나를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3절 말씀의 기도가 나올것입니다. " ...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2012년 12월 1일 토요일

그 어떤것도

아가서7:9-8:1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오늘 본문은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사랑에 대해 많은 의미를 주는 구절을 든다면 8:6-7절 말씀일것입니다.

 아가서를 묵상해오면서 이 부부가 서로에게 얼마나 사로잡혀 있는지,  서로를 얼마나 위하는지, 서로를 얼마나 사모하는지를 보아왔습니다(4:9-10).

한때는 서로에게  힘든시간도 있었지만(5장), 그럼에도 서로가  얼마나 강하게 묶여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 입니다(8:6)

본문에서 이 부부의 애정과, 애정 표현을 보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의 어떤 물로도  끌수 없는 하나님의 불과 같습니다(8:6-7).
또한  홍수와 수나미,같은 천재지변(天災地變)으로도  빼앗아 갈수 없습니다(7).

그래서 바울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로마서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빼앗아갈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