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31일 일요일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요20:1-1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안식 후 첫 날 새로운 주간이 시작되는 날 (1)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삼년동안 가르치고 훈련 시켰던 제자들은 깊은 절망 가운데 다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그나마 막달라가 마리아가 주님이 걱정이 되어 주님의 무덤에 찾아왔습니다(1).

그러나 무덤의 돌이 옮겨진것을 보고 너무 놀라 이 사실을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서 알렸습니다(2).

주님이 삼년동안 제자들을 가리치면서 고난을 당하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실것을 그렇게 가르쳤건만 그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요한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요한은 자신의 경험을  부끄러워하면서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지 모릅니다(9).

이 영광스럽고 역사적인 부활사건에 첫 번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 본문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이었습니다(1-2).

복음서의 제자들의 모습은 불신과 두려움, 절망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제자들의 모습은 전혀 다른 세상을 격동시키는, 그 어느 누구앞에서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증거자의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같은 제자들임에도 이들의 모습이 왜 전혀 다른 것입니까?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핍박하는데 앞장섰던 사울(바울)이 왜 일평생 독신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데 열정을 다했습니까?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삼일동안 악이 이긴것 처럼 보였을것입니다.
깊은 절망감과 적막감이 흘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주님을 더 붙잡아 놓을수 없었습니다.
삼일만에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기쁨을 처음 알렸던 막달라 마리아 처럼
저 북한땅 지하교회에서 모진 박해속에서 신앙생활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과
이 시간도 박해받는 전 세계의 교회들에게 부활의 기쁨이 넘치길 기도드립니다.아-멘-

2013년 3월 30일 토요일

두 사람

요19:38-4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어떤 상황을 만나 자신의 용기없는 행동을 인해 후회해본적이 있습니까?
본문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지내는 두 명의 주님의 제자가 나옵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주님의 제자이나 자신이 제자임을 떳떳이 밝히지 못하고 뒤늦게 후회하는 마음으로 나타난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 이 사람은 공회원이었지만 공회원들이 주님을 죽이자고 결정할때에 적극적으로 나서 반대하지 못했던 사람입니다(눅23:50-51).

다른 한 사람은 니고데모인데 역시 비밀리에 주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지만 초기에 주님을 방어하지 못했던 자책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요7:50-52).

이제 뒤 늦게 나마 용기를 내어 주님의 시신이라도 장사지낼려고 공개적으로 나타난것 입니다. 그리고 정성껏 장사를 치루었습니다(39-40).

이들이 주님의 시신을 정성껏 장사를 치루었지만 주님이 부활하실것을 깨닫지 못했던것 같습니다(마27:59-60).

하지만 뒤늦게라도 용기를 내어 나타난것은 그동안  후회로 가득했기 때문일것입니다.
왜 내가 그때  용기있기 행동을 하지 못했나? 하는 자책감.. 뒤를 돌아보면서 후회했지만 이것은 곧  새로운 행동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고후7:10).

지금은 모든것이 허무하고 후회스럽고 적막이 흐르는 시간이지만  조금 있으면 부활의 주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혹시 나에게도 이런 시간이 있었다면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나에게 새로운 축복과 기회의 문을 여실것 입니다.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듯이 말입니다.

2013년 3월 29일 금요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요19:28-3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사람들의 힘을 빌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유대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시기와  예수님을 이단자로 취급해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요한은 이분이 '진리'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35).

이들은 주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 다 끝난것 처럼 생각하였지만
주님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닌 오랫동안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예언하신 성경의 성취임을 요한은 강조하고 있습니다(28,36,37).

이 세상의 어떤 권력이나 힘도 주님의 생명을 강제로 빼앗아 갈수 없습니다.
그분은 생명을 빼앗긴 것이 아닌 그분 스스로 우리의 죄를 위해 자신을 주신것 뿐입니다(30).

황량한 갈보리 언덕위에 서있는 십자가를 보십시오.
사람들 눈에는 그분의 십자가는 허무하고 실패한것 같고, 수치스러워 보이지만

그분의 십자가는 죄와 사망과 어두움을 비추는 하나님의 영원한 빛이요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자신을 기꺼이 주신 주님을 찬양하면서도 아직 내 마음에는 더 많은것을 가질려고 하고,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이중적인 모습은 없습니까?

2013년 3월 28일 목요일

십자가

요19:16-2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육체적 고통 못지 않는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배반, 거짓고소, 채찍질을 당하는 수치심, 온갖 모욕적인 말로 모욕을 당하심,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고통..

주님은 인간이 당할수 있는 모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정신적, 영적, 육체적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분의 고통은 바로 우리의 죄에 대한 고통이셨습니다.
이 고통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그 정의를 사전에서 찾지 마십시오.
갈보리 언덕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면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 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모진 고통속에서 죽어가시지만 육신의 어머니에 대한 따뜻한 관심을 잊지 않으셨습니다(25-27).

십자가에 달리시는 주님의 모습속에는
자신을 방어하지 않으시고, 자기의 의가 없으시고, 자신에게 악행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모습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오직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자기를 십자가에 목박는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눅23:34).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는
인간의 역사속에서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표시입니다.

십자가를 생각하면
인간이 가진 자랑. 교만, 탐욕, 그 모든것들이 다 부끄러워집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겸손과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입니다. -아-멘-

2013년 3월 27일 수요일

선택

요19:1-1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빌라도에게 본격적으로  심문(審問)을 당하십니다.
그는 세 번이나  주님이 죄 없음을 선언했습니다(18:38,19:4,6).

하지만 결국 주님을 십자가게 못박도록 내어주었습니다(16).

왜 빌라도는 하나님이 주신 권력(11)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고  죄없으신 주님을  놓아주지 못했습니까?

그것은 유대인들이 외치는 교묘한 말 때문이었습니다(12).
즉 ' 자신을 왕이라고 하는 주님을 풀어주면 로마황제에게 반역하는 행위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들의 말에 그의 양심의 눈을 감았습니다.

그 역시 부패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옳은것 보다 이익을 먼저 택하는 타락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 두 주인을 섬길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마6:24).
빌라도는 '의'보다  자신의 권력을 보호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만일 내가 빌라도와 같은  경우를 당하면
나는 무멋을 선택하겠습니까?

주님!  이익보다 주님을 위해 고난 받는 길을 선택하게 하소서 - 아-멘-

2013년 3월 26일 화요일

그들의 믿음을 위해

요18:19-4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재판정에 서셨습니다.
첫번재로 유대종교의 최고의 권위자인 안나스와 가야바 앞에 서셨습니다(19-24).
그런다음 로마의 정치적 법정인 빌라도 총독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28-40).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36-37) 두 지상 권력을 대표하는 이들에게 신문을 당하시는 모습은 매우 아이로니컬합니다.

재판정에 서계시는 주님은 성경말씀을 응하게 하시기 위해 서계십니다(32).
이와 반면 또 한 사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두려움으로 가득찬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는 장면입니다(25-27).

이 시간은 베드로에겐 시험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도 베드로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쉽게 베드로와 같은 처신을 할 수 있는 소지(素地)가 다분하기 때문입니다.

시험의 시간 (Testing time) 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누구든지 실패할수 있습니다.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실패했던 베드로였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그를 다시 찾아가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요21:15-19).

시험당하는 형제, 자매가 있습니까?
주님께서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던 것 처럼 "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22:32).

그들의 믿음을 위해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2013년 3월 25일 월요일

겟세마네

요18:1-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주님이 체포되시는 장면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체포되시는 과정에 있어서 주님은 많은 심적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2), 체포되심(3,12), 다혈질적인 베드로가 칼을 휘두름(10)
안나스에게 끌려가심(13), 여종이 베드로를 고발함(17-18).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사람들이 행하는 것 같지만  모든것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4,9).

주님 또한 하나님의 계획이 하나씩 하나씩 성취되어감을 알고 계셨습니다.

구원 사역의  주도는 성부 하나님이 하시지만 주님의 순종함이 없이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은  "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순종함으로 마시고 계십니다(11).

나의 삶에도 내가 컨트롤 할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컨드롤 할수 없지만 그 모든것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기에 그분을 신뢰하고 순종할 따름입니다.
이것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을 통해 다시 보게 됩니다.

2013년 3월 24일 일요일

나귀를 타신..

슥9:9-1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셔서 고난을 당하시는 고난주간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오랜 계획과 철저한 섭리에 의해 즉 사도바울의 말처럼 '성경대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특히 구약성경인 본문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내용을 생생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나귀'가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나귀는  자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짐승입니다.

이새가 그의 아들 다윗을 처음으로 사울왕에게 보낼때 사용한 짐승이 나귀였습니다(삼상16:20).
발람의 나귀가 그의 주인보다 더 지혜로웠습니다(민22).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때 멋진 말이나 병거를 타고 들어가신것이 아니라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것도 나귀새끼를 타셨습니다(9,마21:5).

본문에서 스가랴는 앞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분은 의로우신 왕으로 구원을 가져오실분(9), 모든 원수들을 정복하실 분입니다(10,13).

유대인들은 화려한 왕의 귀환을 기대했을것 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가진 환상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나귀위에 타신 하나님의 아들은 만왕의 왕이시고, 겸손하시고 평화의 왕이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죄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제물로 드리신 분 입니다.

이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십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주님의 모습은  나의 교만, 불순종, 이기심등을 치유해주십니다.

2013년 3월 23일 토요일

십자가

롬5:12-2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고대의 유대인들은 정결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의 죄가 그들의 공동체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주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대표자인 아담 한 사람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고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이르렀습니다(12).

하나님의 법은 아담의 후손인 인간의 죄의 속성을 잘 드러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다 지킬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법은 그분의 은혜의 풍성함을 보여줍니다(20).
죄가 드러날수록 은혜는 더욱 커집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본문에는 '선물' 이라는 단어가 5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순수한 선물은 조건이나 계산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선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죄가 없으신 그분에게 나대신 모든 죄를 짊어지시게 하셨고,
사망에 있는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인간의 논리로는 하나님의 이 사랑을 이해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논리가 아닌 무조건적인 은혜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하면서도
나의 마음에는 아직 조건이 많습니다. 이기심이 있고, 교만이 있습니다.

이것을 치유케 하는 십자가 앞으로 오늘도 다시 나옵니다.
십자가는 나를 다시 새롭게 해주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죄성으로 부터 나를 자유케 해주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2013년 3월 22일 금요일

이기쁨을

롬5:1-1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로마서는 우리의 믿음에 대해 감성적으로 접근한 책이 아니라 논리가 정연한 책입니다.
특히 5장에는 복음적인 용어로 가득차 있습니다.

본문의 키워드(key word)를 든다면 '의롭다하심' '믿음' '은혜' '화평' 입니다.
이들 단어들은 우리의 신앙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본문은 한구절 한구절이 매우 깊고 놀라운 말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구절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말로 표현할수 없는 사랑을 전달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리스도의 말로할수 없는 사랑이고. 그것이 내가 하나님앞에서 당당하게 설수 있는 합당한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결론적인 말씀으로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하나님안에서 기뻐할수 있습니다(11).

세상 사람들은 육체의 쾌락, 명예, 돈으로 기쁨을 찾지만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쁨을 빼앗을자가 없습니다.


2013년 3월 21일 목요일

믿음

롬4:13-2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바울은 믿음을 말하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한 마디로 말하면 ' 바랄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는 믿음"(18) 입니다.
어떻게 바랄수 없는 가운데 바라고 믿을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신 말씀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19-20).

따라서 믿음은 맹목적인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신다는 확신입니다(21).

어떤이는 믿음을 '적극적 사고'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 박사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이분은 아침에 일어나면 " 나는 믿는다' 라고 큰 소리로 세번을 외치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믿는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믿는다' 세번을 큰 소리로 외치는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는다는 것입니까?

부정적인 생각은 없애야하고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믿는다고 한다면 그 믿음대로 된다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닌 일종의 자기 최면을 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적극적인 사고에서 나온 믿음이 아닙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데서 나온것입니다(21).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는 것 이것을 하나님이 ' 의'로 여기셨다고 (23)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것 자체가 하나님은 의로 여기시고(24).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고  살아가는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2013년 3월 20일 수요일

믿음으로

롬4:1-1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으로 구원다는 위대한 진리를 말하면서 구약시대의 대표적인 인물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은 모드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의 롤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유대인들과 모슬렘들에게도 존경을 받는 인물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의 선행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에 있었음을 강조합니다(2-3).

아브라함이 의로워진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사41:8)라고 불리우것은 그의 믿음에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모든 영적 거인들은 의로운자가 되어 의로워진것 아니라 믿음으로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 받았기 때문입니다(7-8).

믿음으로  나를 의롭다고 하신 하나님!
오늘도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르겠습니다. -아-멘-

2013년 3월 18일 월요일

때를 따라

롬3: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 의' 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보았습니다.
' 의' 란 무엇인가? 의는 사람이 정할수 없습니다. 의는 오직 하나님이 입혀주는 것 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받은것 만으로도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2).
율법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켜야 의로워집니다. 그러나 인간은 율법을 지킬수 없습니다.

사람은 다 거짓됩니다(4).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대로 만물보다 부패하고 거짓된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렘17:9).
나의 마음을 보아도 쉽게 우상이 자리잡을수 있고, 온갖 나쁜것들에 쉽게 오염이 될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비추어 보면 그것이 더 확연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죄상을 더욱 드러내고, 하나님의 '의'를 드러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 받을 수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 의롭다' 하심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의롭게 되는 축복은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가장 기본적인 축복입니다. 이보다 한차원 높은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양자됨'의 축복입니다(요일3:1).

양자됨은 하나님의 가족의 개념입니다. 죄인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부모가 자녀를 돌보듯이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우리를 돌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습니다(마6:25).
또한 내일일을 염려하지 않습니다(마6:34).

나의 삶에 나의 아버지(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2013년 3월 17일 일요일

언제나

시60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 시편은 국가적인 어려움을 당해 쓴 시편입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그들의 방어망은 무너졌고, 승리를 기대했지만 패전하고 말았습니다. 그 패전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돕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1-3).

심지어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말합니다(1,10).
 이런 국가적인 어려움을 당했지만 하나님이 그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며 소망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5-8).

이스라엘의 군대 지도자들도 어떤 전략이나 전술보다 하나님을 더욱 바라봅니다(9-12).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이들을 징계하시기 위해 패전케 하셨지만 결국 그들을 도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다윗은 확신하고 있습니다(12).

언제나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
그분을 믿고 오늘 하루도 출발합니다.- 아-멘-


2013년 3월 16일 토요일

하나님의 손안에..

사45:9-2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인상파 작가의 그림을 가까이 가서 감상하면  자기 마음대로 온통 물감으로 더덕더덕 도배를 한것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뒤로 물러서서 보면 걸작을 감상할수 있습니다.

화가의 그림은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멧시지를 줍니다. 그의 멧시지에 따라 색깔도 선택합니다. 그렇다고 그림이 화가에게 왜 나에게 이런 색깔을 칠합니까? 하고 물을수는 없습니다.

본문의 멧시지도 이와같습니다. 질그릇의 모양은 토기장이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질그릇이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물을수는 없습니다(9).

자식이 부모에게 왜 나를 이렇게 낳았느냐고 불평할수 없습니다(10).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왜 이방인 고레스를 택해서 자신들을 구원하실려고 합니까? 하며 이스라엘에 질문할수 없습니다(11-13).

인간의 구원도,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것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논쟁할수 없습니다. 논쟁이 아닌 오직 그분께 경배와 예배를 드릴뿐입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15) 하시는 일,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일을 이방인들도 알게 될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고백할 것입니다(14-17).

구원은 받았지만 나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질그릇 같습니다.
그분이 나를 빚어 가십니다. 나의 모난부분을 아픔을 주셔서 깍으시기도 하시고, 교만한 부분이 있으면 부드럽게 만드시기도 하시고, 낙심하면 용기를 주시고, 채찍질 하기도 하시고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처럼 얼싸안아주시기도 하시고 여러모습으로 나의 삶을 그분이 원하시는 자녀로 만들어가십니다.

결국 나로 하여금 그분을 자랑(영화롭게)하도록 (25) 이끄실것입니다.

2013년 3월 15일 금요일

선하신 목적

사 45: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페르시아왕 고레스의 전승(戰勝)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고레스의 발길이 닿은 곳은 다 그에게 정복됩니다.

그의 성공의 배경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셨습니다(1-3).
그러나 고레스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4-5).

역사적으로 보아도 고레스가 하나님을 알았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계획대로 전쟁을 치루었을뿐입니다.

그러나 그의 뒤에는 그를 도우시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문빗장을 여시고, 꾸불꾸불한 곳들을 평탄하게 하시고, 놋쇠 성문을 부수시고, 감추어진 보물을 주셨습니다(1-3).

그러면 하나님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 이방왕을 도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을 위함이었습니다(4).

고레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돕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심을 강조합니다.

세상의 모든 권력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권력자들을 세우시고, 사용하시고, 폐하시기도 합니다.

모든 힘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G2라 불리우는 미국이나 중국의 힘도 하나님에게서 온 것 입니다.
세상의 모든 열강의 힘도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 번영과 실패, 그 어느것 하나도 하나님의 뜻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7-8).

모든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위해 사용됩니다..
오늘의 나의 삶도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위해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2013년 3월 14일 목요일

그분의 선하신 뜻이

사44:24-2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매일 아침이 되면 지난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하는 마음으로 뉴스를 접합니다.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는 일들, 고국의 소식들...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다양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내일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르며 살아가는 우리이지만 하나님을 묵상하면 늘 든든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주관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앞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실 일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면서 하나님은 '구속자' '모태에서 부터 그들을 지으신분' ' 누구의 도움 없이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24)임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순간에 동시적으로 펼쳐 집니다.

이 하나님께서 황폐한 예루살렘을 다시 회복 시킬것입니다(26).

더욱 놀라운것은  예루살렘을 복원하는 일을 이방왕인 고레스를 통해 행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28).

하나님은 고레스를 ' 내 목자' 라고 하셨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기쁨을 성취하시겠다고 하십니다(28).

고레스는 이사야 선지자 보다 100년 후의 사람입니다. 현재 그의 입에서 그가 전혀 알지못하는  100년 후의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면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모든것이 하나님의 계획하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알지 못하는 고레스와 같은 사람들의 손을 통하여 행하시기도 합니다.

오늘의 나의 삶과 세상의 모든 일도 하나님의 계획속에 선한신 뜻대로 이루어가심을 믿습니다.

2013년 3월 13일 수요일

모든 만물들이

사44:9-2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고도의 기술이 발달해도 인간의 어리석음은 여전합니다. 세상은 발전해도 인간의 죄성은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대표하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본문은 우상을 만드는자와 우상숭배하는자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방인들이 하는 행동입니다.

이사야는 우상을 만드는자의 허망함(9)을 말하면서  본문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특히 12-14절에는 우상을 만드는 사람들이 들이는 정성을 말씀합니다. 왜 우상을 만드는데 정성을 기울입니까? 허탄한 마음때문입니다(20).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창조되었고,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지성적이고 도덕적이고 영적인 존재로 창조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본래 창조된 본질에서 떠나게 되었고, 그것은 곧 허탄한 마음을 가질수 밖에 없습니다. 뭔가 채워지지 않는 영적 갈증이 곧 우상이라는 대안(代案)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져도 가져지지도 않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데서 비롯된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로 가득한 세상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21).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그들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나를 그분의 자녀로 삼으신것은 내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된 것입니다.

이사야는 모든 창조물들이 하나님께 기쁨으로 노래할것을 말하며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23).
그렇습니다. 이 아침에 모든 만물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은혜로 나를 그분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2013년 3월 12일 화요일

하나님은

사44: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죄를 범한 자는 반드시 댓가를 치루게 하는 것이 세상의 법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정에는 이와 정반대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정에 서 있는  느낌을 줍니다. 하나님의 재판의 결과는 당연히 이스라엘이 징벌에 합당한 죄를 범한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불순종, 반역 불신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이와 같습니다(43:25-28).

그럼에도 43:1; 44:1에는 '그러나'(But, NIV 영어성경 참조) 로 시작됩니다.
여기에는 징벌대신 은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온갖 죄악으로 얼룩짐에도 '그러나'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로 이들을 대하십니다.
마치 집을 나간 탕자를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흡사합니다(눅15:20). 이 아버지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저지른 온갖 죄악에도 불구하고 '여수룬'(의로운자, 2절)이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그리스도안에서 의로운자, 성도라고 부르신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을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그들을 소생 시키십니다.
마른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듯이 성령을 부어주시고, 축복을 그들 후손에게 계속 부어주심을 약속하십니다(3).

늘 마음이 변화무쌍한 그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되셨습니다(8).

본문이 주는 멧시지는  은혜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한하신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 언제나 나의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오늘 하루를 시작합니다.

2013년 3월 11일 월요일

현재와 미래

사43:14-2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께서 떡을 떼시면서 나를 기억하라고 하셨을때 옛것은(과거의 죄) 잊어버리고 현재의 구원함을 기억하며 감사 하라는 의미 입니다.

복음은 과거는 기억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구원의 삶, 미래에 받을 은혜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현재적이고 미래적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예전일을 기억하지 말라고 하십니다(18). 대신 하나님이 행하실 새일을 보라고 하십니다(19).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벨론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메대바사의 군대를 사용하실것 입니다(14). 세상나라의 흥함과 망함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에게로 부터 나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역사를 만들어가시고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출애굽 처럼, 바벨론에서 구원하심은 이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때문이 아니라(22-24),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인함입니다(25-28).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언제나 그분의 은혜에 기초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과거가 아닌 현재의 시간이요, 미래적인 삶입니다.

예수 믿기전의 나의 삶의 간증은 한번으로 족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구원 받은 현재의 삶, 미래의 받을 은혜를 위해 뒤엣것은 생각하지 않고 앞을 향하여(그리스도) 좇아가는 삶이 신앙입니다.

주님! 뒤엣것은 잊고 앞엣것을 향해  힘껏 달리는 신앙의 경주를 잘 할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아-멘-

2013년 3월 10일 일요일

하나님은

시59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 시편기자(다윗은)은 긴박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자신을 죽일려고 사울이 보낸 자 들에 의해 그의 집이 감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이 주인공의 집에 마구 총을 쏘아대며 그 집안에 있는 있는 사람들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찬 모습을 그린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본 시편 기자의 집도 이런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집니다.

만일 우리집이 이런 경우를 당한다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수 있을까요?
그러나 시편기자는 자신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가져가고 있습니다(3,6,7,14,15).

시편기자의 믿음과 자신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에 가득찬  모습을 엿볼수 있습니다.

1-5절에 나타난 그의 절박한 기도, 마치 사냥개에 좇기는 짐승같은 처지에서 간절하게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가끔 우리도 걱정과 염려가 너무 커서 하나님으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 혼자된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그런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의 이런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로 가져갔습니다.
자신이 비록 감시하에 있지만 ,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그들을 비웃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8).

이런 믿음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도우심을 바라보고 있습니다(9).
이날밤은 마치 악몽을 꾸는 것 같은 밤이지만(6,14), 다음 아침날에는 찬양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도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16).

항상 어려움을 찬송으로 바꾸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고.. 그분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기"(9-10) 때문입니다. 아-멘.

2013년 3월 9일 토요일

이 은혜속에서..

사43:1-1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을 시작하는 접속사를 붙힌다면 ' 그러므로' 일것입니다. 42장에서 이스라엘은 눈멀고, 귀먹고 하나님의 종으로 실패했음을 보았습니다. ' 그러므로' 나는 너를 버리겠다. 이렇게 나와야 논리가 맞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본문은 그러나(But,NIV 성경참조)로 시작됩니다. 이들이 눈멀고, 귀먹은 백성일지라도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 너는 내것이다"(1)라는 말씀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진하게 묻어있습니다.

이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이들을 포로생활(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키실것을 약속하십니다(5-7).

비록 눈멀고 귀먹은 이스라엘이지만(8), 그들은 아직 하나님의 종이요 증인입니다(10).
이것은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초한것입니다.

이사야의 메시지는 우리에게도 큰 위안을 줍니다.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은 받았지만, 나의 삶을 살펴보면 쉽게 넘어지고 실수하기도 합니다. 그럴때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증인입니다. 하나님의 변함이 없으신 사랑과  그분의 신실하심이 늘 우리를 붙잡고 계심을 이사야는 우리에게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 은혜속에서 살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2013년 3월 8일 금요일

안약

사42:10-2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다가올 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현재의 어려움을 이기는 힘이 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온전한 신뢰입니다. 믿음은  자기 체면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루 하루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새 일을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다고(9) 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반응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새 노래를 하나님께 부르라고 합니다.  섬에 거하는 사람들, 사막에 있는 도시들, 산꼭대기에 사는 사람들 모두 망라해서 하나님께 새 노래를 부르라고 초청합니다(10).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천둥같은 고함소리를 내며 전쟁 나가는 용사의 모습에 비유합니다(13). 그분의 소리는 마치  해산하는 여인의 소리와 같습니다(14).

하나님은 심판과  자유를 가져오십니다(15-17).  그 결과 앞 못보는 사람들을 새로운 길로 인도하시고 어두움을 빛으로 바꾸실 것입니다(16).

하나님의 가르침이 선포되고 존귀하게 될 것입니다(21).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지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눈멀고 귀먹은 자들이었습니다(18-20).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그들에게(20-25) 필요한것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계3:14-22) 안약이 필요합니다.

매일 말씀속에 살지 못하면 , 기도에 힘쓰지 못하면 마음이 둔해집니다. 늘 세상속에서 바쁘게 살다보면 보지못하고 듣지 못합니다.

 나는 괜찮다고 스스로 자위(自慰)하나 나에게도 안약이 필요하지는 아니한지 잠시 멈추어 생각해봅니다.

2013년 3월 7일 목요일

사42:1-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 나의 종"(1)이라는 단어가 본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그러면 이 종은 누구입니까?
우선 이스라엘이 주님의 종입니다(41:9).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종입니다(고후6:4).

또한  '종'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보여줍니다.

이'종'은 하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시시고 기뻐하시는 존재입니다(1).  조용한 권위와 긍휼롸 진실과 정의를 가지신 분 입니다(2-3).

빛을 가져오시고(6-7), 영광을 받으시고(8), 성령을 통해 능력을 행하십니다(1,6).

가장 위대한 종,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을 따르는 자 들의 완벽한 종의 모델이 되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종의 입에서는 주님의 말씀 처럼 " 나는 무익한 사람이고 내가 해야 할일을 한것 뿐이라고 말이 있을 뿐입니다"(눅17:10).

종은 주인이 받아야 할 영광을 자신이 취한는 자 가 아닙니다. 오직 주인을 위해 일할뿐입니다.
종은 오직 섬기는 자요, 종은 주인이 기뻐하면 그것으로 행복해하는 자 입니다.

새 교황이 탄생했다고  세계인들이 열광했습니다. 아르헨티나 출신이라고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더 열광하며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앞에 화려한 가운을 입고 등장한 그의 모습속엔  2천년전 유대땅 가장 낮은  종의 모습으로 오신 주인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종이 주인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신것 처럼  낮고 겸손하며 섬기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사순절 기간을 지내면서 그리스도의 종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해줍니다.

2013년 3월 6일 수요일

미래의 소망으로..

사41:1-2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매일 매일 세계각국에서 일어나는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북한의 핵문제, 세계경제위기, 시리아 내전등 세계는 늘 불안정하게 보입니다.

이사야가 본문을 기록할 당시에도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도 복잡한 국제정세 아래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있던 바벨론도 이제는 힘을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강자로 페르시아가 점점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 핵심 인물이 페르시아왕 고레스입니다. 물론 이사야가 예언한지 160년후의 일이지만 이사야는 고레스가가  세계정복 전쟁에 나설것이고 그의 발길이 닿는 곳 마다 나라들을 정복할것임을 말씀합니다(3).

남에 나라에 포로 생활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야말로 가장 작고 힘이없고, 소망이 없어 보였습니다(14). 그러나 이사야는 그런 상황에서 살고 있던 이들에게 희망의 멧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강대국들이 횡포를 부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연약한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결국 세상을 움직이시는 분 은 하나님이시라는 것 입니다(1-4).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셨다는 것,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부를때 " 나의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8)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실것입니다(14).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한 종입니다(9).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환경을 새롭게 하실것 입니다(17-20).

이사야의 멧시지는 이스라엘에게 큰 위안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현재 매일 같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결국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습니다. 모든일들은 하나님의 손안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선하신 뜻대로 모든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실것 입니다(롬8:28). 이것이 역사의 종착점입니다.

이러한 미래의 소망으로 오늘 하루를 시작합니다. 샬롬!

2013년 3월 5일 화요일

하나님의 은혜

사40:12-3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인간은 흙으로 지어졌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습니다. 인간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의존적인 존재입니다.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영광과 경배를 드리며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그의 본분을 떠나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본문에서 이사야는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인간인 우리가 감히 하나님을 가르칠수 없고(13-14), 인간이 아무리 귀한 것을 드려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것이지 그것이 하나님에게는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16).

이 세상, 세상의 나라들도 그 어떤것들도 하나님 눈 앞에는 ' 빈 것' 같은 존재입니다(17).

자연적인 인간(구원받지 못한)은 하나님을 그들의 크기에 맟출려고 합니다. 그 결과물이 우상입니다(18-19).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어떤분이심을 소개하며 그분의 위대하심, 장엄하심 그리고 인간의 나약함을 비교하며 우리의 눈을 창조주 하나님께로 이끌고 있습니다(22-31).

 인간의 존재가  나약해도 하나님에게는 결코 하찮은것이 아닙니다.하나님의 눈에는 우리가 너무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이기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라는 말만 들어도 감격스럽지 않습니까?

2013년 3월 4일 월요일

영광의 하나님

사40:1-1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집앞마당에 잔디를 잘 관리하기 위해서는 두가지일을 동시에 해야합니다. 하나는 잡초를 제거해주는것과 다른 하나는 잔디를 자라게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이와같습니다.
영광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은 악인들은 심판하시고, 의인들에게는 축복으로 임하십니다.

침례(세례) 요한이 주님이 행하실 사역에 대해 소개할때 본문의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자신은 물로 침례(세례)를 주지만 주님은 불과 성령으로 침례(세례)를 주시겠다고 했습니다(눅3:16).

본문 1-2절에서는 위로하라는 음성이 들리더니 6-7절에는 위로와 정반대의 말씀이 나옵니다
 인간의 육체는 풀과 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풀처럼 때가 되면 마르고, 꽃처럼  그 아름다움도 시든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가진 모든 것들은  한시적(限時的)입니다. 인간이 가진 부귀영화, 영광은 때가되면  시들고 없어집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영광은 영원하십니다.

풀이마르고 꽃이 시듬은 하나님의 영광을 강렬한 태양에 비유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떠오르는 태양과 같습니다. 떠오르는 태양을 산들도, 골짜기도 방해할수 없습니다(3-5).

태양처럼 떠오르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거룩하지 못한것들은  태우시고 시들하게 만드십니다(7).

또한 하나님의 임재는 목자의 모습으로 임하십니다. 선한 목자이신 그분의 능력의 팔로 어린양을 품에 안으시고 보호하십니다(11).

그의 품에서 빼앗아갈자 없습니다.

영광의 하나님!
떠오르는 태양처럼 임하시고, 생명을 주시고, 목자와 같이 오셔서 나를 그분의 팔오 안으시는 영광의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

2013년 3월 3일 일요일

공의

시편58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세상의 불의함은 타락한 인간 본성에서 나온 결과(結果 )입니다.
특히 권력은 쉽게 부패하며 권력자들은 쉽게 타락할수 있습니다(1-2).

시편기자는 불의한자들, 혹은 타락한 권력자들의 악행을 적나라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3-5).

더 나아가 이들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간구하고 있습니다(6-9)

악인들의 망함은  공의로 세상을  심판 하시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사람들이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11).

캐나다에 살고 있는 저로서는 이런 악한자들의 횡포를 잘 느끼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낸 한국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가질 것 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이 매일의 삶속에서 이런 악한자들이 악행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더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하지만  지구 곳곳에는 불의가 더 융성하고, 불의하고 악한 권력이 사람들을 압제하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저 북한 땅 정치범 수용소에서 짐승보다  못한 생활을 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다

비록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낸 한국 사회이지만 아직도 가진자들의 횡포가 있습니다.
 악덕 기업주들의 횡포에 시달려도 말한마디 못하고 노예처럼 일해야 하는 외국인 근로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 불의!
힘이 없어서 당하고만 사는 사람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모든 곳에서 압제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 세상 곳곳에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도록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2013년 3월 2일 토요일

언제 어디서든

행16:16-4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12)였고, 군인도시로 로마의 많은 군인들이 이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조용한 이 도시를 소용돌이치게 만들었습니다.

복음은 불의한 세상에 소동을 일으킵니다. 박해가 임하든, 변화가 일어나든 일은 일어납니다.
왜 박해를 받습니까? 십자가의 복음은 죄로 인한 인간의 교만(자기의 의)에 상처를 입히기 때문입니다. 왜 변화가 일어납니까? 십자가의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여종이 점을 쳐 얻어진 많은 수입으로 안락하게 살아가던 여종의 주인에 수입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고(19), 자신들이 없어진것을 안 간수가 자살할 마음을 가지게 했고(27)또한 감옥에서 조용히 떠나기를 거부했습니다(37).

그가 전한 복음을 들은자들은  삶과 태도가 변화되었습니다(34,40).

바울과 함께 전도여행을 가다보면  이렇게 많은 일들을 목겨하게 됩니다. 때로는 도저히 감당할수 없는 핍박을 당하고 기적이 나타나고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구원과 삶의 변화..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드라마틱합니다.

또한 바울은 복음을 전할 기회만 주어지면 회당이든, 감옥이든 서슴치 않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곳에는 반드시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은 복음이 전해질때  절대로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바울처럼 언제 어디에서든 복음을 전하십시오.

세 가지 요소

행16:6-1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성령님의 인도로 바울 일행은 유럽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누가는 바울의 두 번째 전도여행을 통해 바울이 여전히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하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13).
하지만 그는 많은 이방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점치는 여종, 그의 고용주(16),간수(29), 평범한 시민들(17:17), 철학자들(17:18).

바울의 첫 번 전도여행에서 성령님의 주도적 인도하심을 보았습니다(13:1-4). 본문에서도 성령은 바울이 전혀 생각 하지 못한 곳으로 인도 하셨습니다.

바울의 생각으론 아시아쪽으로 가는것이 좋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곳은 경제 활동이 활발한곳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수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합리적인 일입니다.그러나 바울 일행은 아시아가 아닌 다른 지역으로 옮겨야 했습니다(6).

내가 편한곳, 내 생각에 더 합당한곳, 더 익숙한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생각과 다른곳, 전혀 다른일들을 하길 원하시고 인도 하실때가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또다시 성령님의 통제를 받아야 했습니다.바울은 20:6까지 드로아(8)에서 복음을 전할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계획은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무한 하십니다
.성령님은 드라마틱하게 바울 일행을 빌립보로 이끄셨습니다.
빌립보에 도착하자  바울은  평소 습관대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를 찾았습니다. 빌립보에는 회당이없었습니다(회당은 최소 10명이 있어야 생길수있음)

회당과 비슷한 기도처가 있었고  그곳의 대부분은 여자들이었습니다(13).
이들이 나중에 빌립보 교회의 기초가 됩니다.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고 본격적인 유럽전도가 이루어집니다. 유럽전도는 사람들을 만날수 있는 회당이나 기도처를 찾는 인간의 상식과 성령님의 간섭,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이 합쳐져 이루어졌습니다.

상식(Common Sense), 성령님의 간섭,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세 가지 요소임을 다시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