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31일 목요일

롬1:18-3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우리 사회의 만연한 도덕적 불감증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조금만 높은 공직에 올라도 쉽게 부패의 유혹의 늪에 빠질수 있습니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이런 사회적악은 필할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죄를 심각하게 다루셨습니다(18).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는  죄로 부터 인간을 구원하실려는 계획을 가져왔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또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는 그분의 '의로운' 속성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분을 인간들에게 보이셨지만, 하나님을 부인하고 부패해졌고(19-21), 심지어는 자신들의 죄가 나쁜것인것 조차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22,32).

죄의 위력은  인간의 마음을 둔하게 만들고, 무감각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결국 본문의 표현대로 ' 상실한 마음' 을 갖게 합니다. 문제는 제동을 걸지 않으시고,  인간들을 죄가운데 그대로 방치해놓으신 하나님의 더 무서운 심판이 있다는 것 입니다(24,26,28).

세상에서 온갖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직 멀쩡한것을 보면 본문의 의미를 알수 있습니다.

생각은 곧 태도로 이어집니다. 악한 생각은 악함을 드러냅니다. 반면에 좋은 생각은 선함을 드러냅니다.

본문에는 온갖 악함이 다  등장하고 있습니다(29-32). 
이들 역시 현대에서 일어나는 죄의 모습들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사탄은 매일 이런 죄의 덫을 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대로 ' 시험에 들지 않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매일 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도 죄와 싸워 이기십시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2013년 1월 30일 수요일

은혜의 하나님

롬1:14-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삶속에서 행복한 순간을 들라고 한다면 그중에 한가지가 남에게 기대하지 못했던 선물을 받는 순간일것입니다. 이 순간은 선물을 받는 사람도 선물을 주는 사람도 행복합니다.

하나님은 가장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은 복음입니다. 본문의 바울도 복음이라는 큰 선물을 받은 후 자나깨나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려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 빚진자"(14)라고 했습니다. 빚진자는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빚을 갚아야 한다는 마음이 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복음의 빚진자로 살았습니다.

또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16)고 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16)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의"(17) 입니다.

하나님의 의(17)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것(창17:1-8) , 즉 그의 영적 후손이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약속의 성취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 의'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때  하나님은 그분의 의를 주십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듣지 못했다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했다면 나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해도 끔찍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기쁘신 뜻을 위해 나를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1세기의 바울은 이진리 하나만으로도 그의 인생이  찬양과 감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을 오늘 아침에도 찬양합니다.

2013년 1월 29일 화요일

주위에..

롬1:8-1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아직 만나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향한 바울의 영적인 열정을 본문을 통해 엿볼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 하고 있습니다(8). 그리고 그들을 만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10). 그들을 사모하고 있습니다(11).

그들을 신앙안에서 용기를 주고, 특히 새로 믿는 연약한 성도들을 믿음으로 굳건하게 세우기를 원해 그들에게 가기를 원했습니다(13).

아직 믿음이 연약한 로마교회를 생각하는 바울의 모습은 큰 교훈을 줍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저런 이유로 시험당한 형제, 자매들은 없습니까?
믿음이 연약해 어떤일로 상처 받은 형제, 자매들은 없습니까?

그들을 신앙안에서 어떻게 용기를 주며, 그들의 믿음을 어떻게 세워줄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십시오.

2013년 1월 28일 월요일

나의 정체성

롬1: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있습니다(1). 종은 다른말로 '노예' 입니다.노예에겐 자신의 의지와 의견이 없습니다. 오직 주인에게 순종할뿐입니다.

또한  복음을 위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1).
그리고 수신자들에게  복음에 대해 명확히 말하고 있습니다(2-4).

오늘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누구를 만나든 가정 먼저 복음을 전하였던 바울의 자세는 큰 도전이 됩니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악수를 합니다. 상상하기로는 바울의 첫 악수는 복음으로 시작했을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침묵으로 넘길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1세기 거대한 로마사회는 바울과 그리스도인들을 위축 되게 만들었습니다.그럼에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복음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로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 당신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6).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7). 하며 그들의 정체성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복음을 전할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누구를 만나던, 어디에 있던,  일터이던, 어떤모임이던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내가 만일 그리스도인임을 부끄러워 한다면 주님도 천사들 앞에서 나를 부끄러워 하실 것입니다.

2013년 1월 27일 일요일

나의 생각

시편53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 시편 말씀은 시편 14편 말씀의 복사형 처럼 보여집니다.
스펄젼 목사는 본문의 말씀에 대해 " 죄악 가운데 있는 인간의 절망스러운 모습과 어리석은 인간의 생각속에 나타난 오만함의 극치를 본다"고 주석을 했습니다.

본문에는 "어리석은 자"(1) 가 나오는데 본 시편을 기록한 다윗은 나발을 생각하며 '어리석은 자의 모습'이 어떠함을 생각하며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발이란 이름의 의미도 '어리석다'입니다(삼상25:25).

또한 다윗은 죄악을 행하는자는  무지한자라고 말합니다(4). 무지함은 죄를 짓게 만듭니다. 무지함은 위험합니다. 특히 영적 무지는 말할것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생각은 항상 굴절되어 있고 악한 생각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보실 때 선을 행하는가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3). 이사야서에 보아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갈길로 갔다"고 (사53:6-12)고 했습니다.

그러나 고난 받으실 메시야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실 이사야의 예언은 본문의 다윗의 결론과 일맥상통합니다(6).

하나님의 은혜가 없은 우리의 생각은 부패해질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의 생각을 지키시고, 마음의 눈을 밝히사 신령한 지혜가 넘치도록 기도하십시오.

2013년 1월 26일 토요일

은혜의 하나님

삼상12:1-2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지금 사무엘은 나이가 많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모아 놓고 마지막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1-2). 그의 설교 내용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것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역사를 이야기하다보니 설교가 길었고 아마 시간도 많이 걸렸을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사들과 선지자들이 이끌던 시대는 지나갔고 왕이 통치하시는 시대가 왔음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지나간 역사속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그들이 순종하는 길을 걸었을때는 하나님이 어떻게 축복하셨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원했던 왕은 장점이 될수도 있고 단점이 될수도 있습니다.
 왕이 이들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할수도 있고, 아니면 좋은 신앙의 영향력을 줄수도 있습니다. 열왕기, 역대기를 보면  알수 있습니다. 어떤왕이 통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사로서 정직했고,  지위를 이용해 남의 것을 빼앗은적이 없음을 강조합니다(3,5). 사심이 없었고,  하나님의 뜻만을 좇았다고 했습니다.

요즈음 대통령의 측근  특별 사면  때문에 논란이 많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 뇌물을 받고 소위 '봐주기' 권력을 행사했던 사람들입니다.  사무엘의 말을 들으면 이들 부패한 권력자들과 비교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왕을 구하지만 그럼에도 용서하시고  함께 하시겠다고 하십니다(17,22).하나님의 결론은 항상 은혜입니다.

때로는 나의 삶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해도
그분의 결론은 항상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나를 다시 순종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은혜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013년 1월 25일 금요일

리더의 덕목

삼상11:1-1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사울은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길르앗 야베스에 대한 않좋은 소식을 들을때까지  평상시 행하던 일 즉 소몰고 밭가는 일을 충실하게 했습니다(1-5).

지금 이스라엘은 패닉(Panic)상태에 빠졌습니다(4).

하나님의 성령이 사울에게 임하셨습니다(6).

암몬이 이스라엘을 수치스럽게 만든것 때문에  그는 의분으로 가득찼습니다.
비로서 그는 용기와 담대한 모습으로 리더십을 발휘합니다(6-7).

그의 리더십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한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7).

성령을 통해 얻은 지혜로 사울은  군대를 조직화 시켰습니다.
그리고 암몬에게 대승(勝)을 거둡니다(11).

전쟁에 승리하자 어떤 이들이 사울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했던 자 들을 처단하자고 제의를 하였지만 사울은 넓은 관용과 용서의 리더십을 보여줍니다(12-13).

이제  리더십이 사무엘에게서 사울에게로 확고하게 이동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조화를 이루며 함께 일을 하였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로 향하였고, 순종하였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사울의 리더십은 모든 리더들의 롤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용기, 결단력 있는 행동, 성령을 통한 능력, 관대한 마음..
오늘 우리가 배울수 있는 리더의 덕목입니다.

2013년 1월 24일 목요일

일관된 삶

삼상10:1-2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모든일의 진행이 잘 되어 갔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기름 부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걱정했던 부분 즉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던것을 해결해주셨습니다. 또한 성령이 그에게 임해 그를 다른 사람으로 변모 시켰습니다(2,4,6,9,10).

사울은 자신을 나타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외히려 사람들 앞에서 숨었고, 겸손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22).

사람들은 사울의 큰 키와 준수한 외모에 관심을 가졌고, 좋아했습니다.

이제 사무엘의 도움과 안내로  사울을 왕으로 삼는 단계의 수순이 완성단계에 이르렀습니다.

특이한것은 사울은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과 반목하지 않는 지혜를 보여줍니다(27).
본문의 사울의 모습은 겸손함과 순종함의 모습만 나타납니다.

하지만 나중에 일어날일이지만, 문제가 닥쳤을때 사울은 자신의 손으로 해결할려고 하였습니다. 타락은 그때 부터 시작이 됩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의 삶을 관찰해보십시오. 이들에겐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겸손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도 "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신다"고 했습니다(시18:27). 오늘도 주님앞에서 일관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2013년 1월 23일 수요일

경주

삼상9:1-2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사울의 출발은 매우 좋았습니다.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고,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아들이요, 책임감이 강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키가 컸고 준수했습니다(2).

권력에 대한 욕심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단지 그의 아버지의 잃어버린 암나귀들을 찾으러 다녔을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건을 사용하셔서 사울을 사무엘에게 인도하셨습니다.

또한 사무엘도 그를 찾고 있었습니다. 사울을 만나기 하루 전날에 하나님은 왕으로 기름부음 받을 사람을 말씀하셨습니다(15-16).

그래서 사무엘은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그를 찾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때로는 사건들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이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른 길이었음을 자주 경험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의 출발은 매우 좋았지만, 그의 말로는 정반대였습니다(삼상31).

우리도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입니다. 그럼에도 아직 결론을 내리기에 이릅니다(물론 구원은 받았지만). 마지막 유종의 미를 어떻게 맺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딤후4:7)고 했습니다.

어떤힘든일 있어도 오늘도 믿음의 경주를 잘 달리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실것 입니다.

2013년 1월 22일 화요일

지도자들

삼상8:1-2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현명하게 잘 다스렸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에 이스라엘을 오랜만에 평화를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좋은 지도자일지라도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이미 살펴본것 처럼 엘리제사장도 그러합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사무엘 같지 않고, 뇌물을 받고 , 공정하지 않게 재판을 하고 .. 지도자로서 부적격한 사람들이었습니다(3).

백성들은 왕을 원하기 시작했습니다(5). 이들은 주변나라들을 보면서 이스라엘도 그와 같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통치하심에도 그들은 전쟁에서 그들을 직접 이끌 보이는 지도자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원하지 않았습니다(7).

 같은 유혹이 교회안에도 있습니다.
교회는 철저히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기 보다는 행정조직, 각종 위원회, 시스템에 의해 이끌려 갈 때 가 많습니다. 물론 이런 조직들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교회의 본질은 성령 공동체입니다. 성령님의 이끄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나라가 아닙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왕을 원하는 것은 곧 그들이 어려움을 자처하게됨을 경고합니다(11-18). 그러나 그들은 사무엘의 말을 거부합니다(19).

백성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생각을 주장합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십니다(22).

지도자를 뽑는 그들의 기준도 외형적으로 나타난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뼈아픈 실패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축복된 길임을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될것 입니다.

교회와 나라의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들이 지혜와 겸손을 겸비한 좋은 지도자들이 되기를 말입니다.

2013년 1월 21일 월요일

에벤에셀

삼상7:2-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적 위기의 시간이 곧 하나님을 찾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블레셋에서 돌아온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스라엘을  회복케 하고,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관계를 증진( 增進)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3-4).

겉으로 회개하는 것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회개에는 행동이 수반됩니다. 즉 그들은 우상을 제거해야 합니다(4).

오늘 이시대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경제적인 부? 명예? 하나님보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자아? 소비주의 문화에 젖어 있는 허영심?...

6-7절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동을 보십시오.
물을 붓는것은 영적 정결함을 갈망하는 상징입니다. 금식은 오직 기도하는데 집중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변화는 곧 시험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블레셋이 다시 침략했다는 소식입니다(7).

블레셋에 승리한 후  사무엘은 '에벤에셀"이라는 돌을 세웁니다(12).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나의 삶속에도 '에벤에셀의 돌' 이 필요합니다. 오늘 여기까지 나를 도우신 하나님!
우리는 너무자주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2013년 1월 20일 일요일

시52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 시편은 다윗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쓴 말씀입니다. 그는 사울에게 좇기고 있습니다. 그가 찾아간곳은 제사장 아비아달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아비아달은 그에게 음식을 주고, 골리앗의 칼을 주었습니다.

다윗이 아비아달과 함께 있다는 정황을 포착한 도엑은  이 사실을 사울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아비아달이 다윗을 숨겨주고, 도와주었다는 것을 듣고 사울은 격노(激怒)했습니다. 사울은  아비아달과 그 지역 사람들을 학살합니다.

 점점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다윗은 도엑을 생각하며 본 시편을 기록합니다. 그는 도엑을 가리켜  " 포악한자, 간사한자, 거짓을 행하는자라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영원히 그를 멸하시기까지 장래가 없을것임을 선언합니다(1-5).

반대로 다윗 자신은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와 같다"고 합니다(8).

한 세기 후에 예레미야는 "...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은 마치 "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다" " 더위가 올라와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다"고 했습니다(렘17:7-8).

도엑은  자신의 악한 꾀를 믿고, 남을 해치는 말, 거짓을 말하고 다른 사람들을 멸망의 구덩이에 빠지게 했습니다. 같은 혀를 주셨음에도 다윗은  그 혀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자신이 " 주의 이름을 사모한다:고 선언했습니다(9).

인간의 눈으로 보면 지금 악이 더 강한것 같습니다.  하지만 끝을 보십시오. 누가 더 강함을 명확히 알게 될것 입니다.왜냐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2013년 1월 19일 토요일

하나님의 임재

삼상4:1-2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이스라엘은 영적 암흑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뿐만 아니라,하나님의 말씀도 희귀하였습니다.

 엘리 제사장이었지만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였고, 그의 자녀들은  온갖 나쁜 일을 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앞으로 돌아오는 회개 없이, 그들의 오랜적이었던 블레셋이 침략하자  하나님의 언약궤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 라고 생각했습니다(3).

그래서 언약궤를 실로에서 전쟁터로 가져올 때  환호했습니다(4-5).
 언약궤자체가 저절로 전쟁을 승리케해주는 마술과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상징해주는 하나의 박스(Box)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마음을 보시는 것이지, 언약궤가 그 옆에 언약궤를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이 상황에서 언약궤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엘리제사장은 이제나 저제나 전쟁터에서 무슨 소식이 올까? 하고 기다렸지만 그가 받은 소식은 절망의 소식이었습니다.

 전쟁에서 패했고, 하나님의 언약궤는 빼앗겼고, 두 아들은 전사했습니다(17).

하나님의 축복이 다 사라졌습니다.

그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의자에 앉아 있다가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게 됩니다(18). 그이 며느리는 " 영광이 떠났다"고 생각했습니다(21). 한 나라의 비극이었지만, 한 집안의 큰 비극이었습니다.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 나갈때 마다 언약궤를 앞장 세웠습니다(민10:33-36; 수6:6,12-20). 이들은 언약궤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구약의 성도들 못지 않게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때 기쁨에 겨워 덩실 덩실 춤을 춘것을 기억합니다. 다윗이 기쁨의 춤을 춘것은 단지 그 궤를 보고 한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시편27:8절에도"...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얼굴을 사모하며 그분의 임재하심속에  사는 기쁨의 날이 되기를 기도해봅니다.

2013년 1월 18일 금요일

나의 귀를

삼상3:1-4: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럼에도 이 당시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셨습니다(1).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려고 하지 않고 순종할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들을려고 하는 사람을  찾고 계셨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옆에 누워있었습니다(3).
하나님의 음성에 낯설어 하는 어린 사무엘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존전앞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전에 하나님은 엘리제사장에게 말씀하셨을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임을 그가 알았던것입니다(5,6,8).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영적으로 우둔해서 그분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심령에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어떤 사건을 통해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분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영적으로 우둔한 마음이고, 말씀을 분명히 들어도 순종하지 않는것이 문제입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이유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주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양은 그를 따른다고 하셨습니다.왜냐하면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입니다(요10:2-5).

세상이 너무 시끄럽습니다. 세상의 소리들이  우리의 마음을 산만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이 시끄러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령님께서 나의 영의 귀를 여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도록 기도하십시오.

2013년 1월 17일 목요일

자녀교육

삼상2:27-3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서 특히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은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30)고 하신 말씀입니다.

엘리제사장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사람은 자녀를 통제하지 못한 그를 책망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제사장으로서 가정을 잘 다스리고, 가장 모범을 보여할 가정임에도 자신의 두 아들들의 악한 행동을 적극적으로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무관심했다는 것 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따라올 책임이 큰것입니다(31-33). 또한 두 악한 아들들은 한 날에 죽을것입니다(34;4:11).

본문은  그리스도인 부모에게 주신는 교훈이 큽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자녀들을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자녀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못하는데 무관심한다면  하나님은  그 책임을 물으실 것 입니다.

물론  좋은 신앙의 부모님이라도 때로는 자녀들이  신앙적으로 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그럴때는 부모로서 더욱 큰 책임을 느끼며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에 힘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될수 없습니다.

혹 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보다 세상적인 성공에 더욱 관심을 갖지는 아니합니까? 본문을 통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위나 교회안에  자녀들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하는 부모님이 있습니까?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2013년 1월 16일 수요일

우리의 자녀들

삼상2:12-2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예배의 중심지였던 실로에 죄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제사장(엘리)의 아들들에게서 벌어지는 범죄였습니다.

백성들에게 가장 모범이 되어야 할 그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했고(21), 탐욕으로 가득찼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물은 삶은 후(13), 어떤부분은 제사장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리기전에 먼저 그것들을 취하였습니다.

레7:28-34절에 이에 대한 설명이 잘 나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지금 실로에서 벌어지고 있는일들과 비교해보면 이들이 얼마나 하나님앞에 큰 죄를 범하고 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심히 타락한 시대에 어린 사무엘에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18). 그리고 하나님의 존전앞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21).

한나가 어린 사무엘을 실로에 남겨두고 1년에 한번씩만 그를 찾아왔다는 것은 보통 어머니로서는 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믿음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한나는 이 타락한 성전에 자신의 어린 아들을 드린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그의 서원대로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무엘과 함께 하셨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거리스리는 이 패역한 세대에어 우리 자녀를 어떻게 대하여 할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한나가 어린 사무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린것 처럼, 우리 역시 같은 믿음과 신뢰로 하나님의 존전앞에서 자녀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어그리지고 거스리는 이 세대(빌2:15)에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신 뜻이 무엇인지 알며 그것을 행하는 자녀들이 되게 기도하십시오.

2013년 1월 15일 화요일

우리 삶속에

삼상2:1-11절,오늘의 묵상입니다.
1장에서 우리는 한나의 슬픔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슬픔이 아닌 찬양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삶속에 나타난 고난과 기쁨은 백지 한장의 차이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누가 주관하느냐에 있습니다. 물론 주관하시는 분 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그가 찬양하는 하나님은 어떤분이십니까? 그분은 피난처가 되시고 반석이시고, 약한자를 도우시고, 가난하고 배고픈자들을 도우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것을 아신다고 했습니다(3).
모든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교만, 자만,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3). 하나님은 이들이 생각하는대로 값을 치루게 하십니다.

또한 한나는 큰  기쁨속에서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자, 필요한자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5).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고, 때로는 가난하게도 하시고(6) 부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십니다(7).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을 묵상할수록 절대로 교만할수 없습니다.
내일이라도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면 다 없어질 재물을 의지하고 교만하게 사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한나는  어렴풋이 장래의 예언을 합니다. 그것은 기름 부어 세울  왕에 대한 말씀입니다(10). 비록 당시 지극히  옅은 지식이었지만, 그녀의 아들(사무엘)이 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을것이고, 이 왕은(다윗) 장차 오실 가장 위대한 왕(그리스도)의 그림자가 될 것입니다.

  삶에 일어나는 어려움과 고난은 하나님의 축복의 첫단계임을 잊지마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을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이 아침에 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013년 1월 14일 월요일

절망의 순간이

삼상1:1-2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가정은 역기능 가정 처럼 보입니다. 아내가 두 명이 있었습니다. 두 명의 아내중 한 아내는 남편의 더 큰 사랑을 받았지만 자녀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부인에게는 자녀가 있었습니다.그럼에도 이 여인은 남편의 사랑을 빼앗겼다는 질투심으로 늘 가득차 있었습니다(6).

 분명이 이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아니었습니다.

자녀가 없던 아내의 이름은 하나였고, 이 여인은 늘 자녀를 갖고 싶은 갈망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한편 브닌나는 남편의 사랑을 늘 빼앗기며 산다는 피해의식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결국 한나는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로 가지고 갔습니다(10). 한나가 그의 괴로움을 가지고 오기를 하나님은 기다리셨는지도 모릅니다.

한나의 기도는 진지했고, 비장함이 엿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아들을 주신다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는 것을 보면...(11).

그녀의 간절한 기도와 오랫동안 입술만 움직이는 모습을 본 당시 제사장 엘리는 그녀가 술취한것으로 오해하기까지 합니다(13-14).

이렇게 영적으로 우둔한 제사장이었지만 하나님은 그의 입술을 통해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시겠다는 답을 주셨습니다(17).

절망과 낙심으로 가득찬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왔지 소망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18). 이것이 기도의 위력입니다.

마침내 한나는 임신을 하게 됩니다(20). 하나님은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에게  나온 한나에게 바라던 대로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한나는 서원대로  기도로 낳은 이 아들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축복하시기전  절망의 순간을 허락하실때가 많습니다. 그때에 그의 믿음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않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아니 기도를 하게끔 하십니다. 아픔이 없이는 간절한 기도가 나오지 않으니까요.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에게는 절망이 곧 축복의 기회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때가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2013년 1월 13일 일요일

잘못

시51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 시편은 매우 유명한 시편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의 남편을 죽인 후(삼하11) 회개하며 쓴 시편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가 늘 자신 앞에 있다고 했습니다(3). 인간은 죄성이 있어서 어떤 계기가 되면 큰 죄를 짓거나 아니면 늘 죄를 지을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감추지 않고 마치 벌거벗은 어린아이 처럼 하나님앞에 자신의 죄를 적나라하게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죄는 특성상 절대로 감추어서는 아니됩니다. 만일 감추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죄는 암덩어리가 순식간에 퍼져나가듯이 마음 전체에 퍼져 마음을 완전히 고장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감추지말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새로워짐의 출발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면 놀라운 일들이 생깁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아는 기쁨이 생깁니다(12).

하나님의 용서함의 경험은 곧 영적자유함으로 이끌어줍니다. 그리고 이 자유함의 경험을 남과 나눌려고 하는 갈망이 생깁니다(13). 더나아가 하나님의 신실함을 찬양하도록 만들어줍니다(14-15).

하나님의 용서함을 체험한 사람은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에게도 언제나 화해의 문을 열어놓습니다.

부모로서 잘못한 일을 자녀에게 말하는 것이 힘들때가 있습니다. '내가 잘못했구나' 하는 소리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 내가 잘못했구하" 하고 말을 하면 금방 편안해지고, 자유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회개가 바로 이와같습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적이 있습니까? 잘못한 일이 있습니까?
감추지말고 오늘중으로 그 사람을 찾아가서 잘못해노라 말하지 않으렵니까?
오래가면 말하기가 더 힘들어지고, 마음이 굳어집니다. 

그러나 ' 잘못했노라' 말하기 시작할 때 부터 하나님의 축복은 이미 시작될 것입니다.

2013년 1월 12일 토요일

이런 믿음

요4:43-5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지역을 떠나 처음 기적을 베푸신 북쪽 갈릴리 지역으로 여행길을 잡으셨습니다(43). 주님이 갈릴리 가나에 이르자 죽음의 문턱에 이른 아들을 둔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이 아버지는 주님의 소문을 듣고 가버나움에서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가나까지 찾아왔습니다.(46-47). 이때가 오후 1시경이었습니다.

깊은 절망에 빠진 이 사람의 간청에 주님의 반응은 냉담한것 처럼 보여집니다(48). 이 사람은 주님이 자신과 함께 가셔서 자신의 아들을 고쳐주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47,49).

그러나 주님은 " 당신의 아들이 살아있으니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50). 놀라운것은 이 사람이 주님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50).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자신의 아들이 살아났다는 소식을 접합게 됩니다(51).

아들이 낫시 시작한때가 주님이 말씀하신 시간과 동일한 시간(오후1시)이었음을 알게 됩니다(52-53).

주님의 말씀만 믿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사람!
어떤 증거나 표적이 없음에도 말씀만으로 족하는 믿음!

그렇습니다. 믿음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보지않고 믿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고 하면 그대로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믿음임을 오늘 본문을 통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오늘 나에게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2013년 1월 11일 금요일

그리스도를 증거할 마음

요4:27-4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먹을것을 사러 동네에 갔다 돌아온(8) 제자들의 관심은 음식을 먹는데 있었습니다(31).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달랐습니다. 주님은 "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이의 뜻을 행하는데 있다"고 하셨습니다(34).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선포하셨습니다(눅4:18-19).

제자들의 관심과 주님의 관심이  달랐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나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본문의 제자들처럼  얼마나 잘먹고 잘 사는데 있습니까?

복음이 변질이 되어 어떤이들은 건강, 성공, 부를 쌓고, 소위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사는데 성경을 이용하는이들도 있습니다. 성경이 마치 웰빙책 처럼 취급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관심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얼마나 성공하느냐에  있지 않고 죄악 가운데 사는 죄인들이 구원 받는데 있습니다.

한편 사마리아 여인은 동네로 들어가서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28-29).

주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오는 것을 보시면서 추수할 밭과 추수할 때를 말씀하셨습니다(35-36).

여인이 전하는 말을 듣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분을 보러왔고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39).

 이분이야말로 "세상의 구주가 아니신가"하는 고백을 했습니다(42).

사마리아야 여인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전했습니까? 단순합니다 "와서 보라"(29) 입니다.
'와서 보라'는 단순한 말이었지만 결과는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39-41).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하는일이 스스로 보기에 작게  보여도 그 결과는 우리가 생각지 못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문제는 그리스도를 증거할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주님!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간절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2013년 1월 10일 목요일

오늘 만일

요4:1-2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니고데모의 스토리와 또 다른 스토리입니다. 니고데모는 이름이 명확히 명기(明記) 되어 있지만, 본문의 여인의 이름은 알수 없습니다.

이름을 알수없는 여인이 가장 더위가 심하고 햇볕이 강렬한 정오에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6).
그리고 주님을 만납니다.

마지막 결론은 이 여인 뿐만 아니라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된 사실입니다(39-41).

주님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방법으로 사역하심을 쉽게 발견 할수 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금기시 하던 사마리아촌으로 들어가셨고,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셨습니다(7).

 주님은 그 여인에게 생명의 물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10). 이 여인은 주님이 말씀하신 물에 깊은 관심을 나타냅니다(15).

유대인 남자의 신분으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접근해 말을 건넨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도저히 상상할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가지고 있는 깊은 아픔과 문제를 아시고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16).이런 모든 과정을 거친 후 주님은 오직 생명을 주실수 있는 분은 자신뿐임을 선언 하셨습니다(26).

아무 목적없이 소망없이 살아가던 사마리아 여인이 구원을 받는 순간 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무의미 하게 , 죄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만일  그런 사람들을 만난다면 그들을 생수가 되시는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 할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2013년 1월 9일 수요일

요한을

요3:22-3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세례(침례)요한은 사람들로 부터 큰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멧시지를 듣고자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젠 사람들의 관심이 점차 요한이 아닌 새로운 사람에게 향하기 시작했습니다(26;4:1).

더욱이 불행이 겹쳐 요한은 감옥에 투옥이 됩니다(마11:2). 그러나 요한은 동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말했듯이 신랑의 친구로, 주님을 증거하는 목소리로만 기억되기를 원했습니다(1:23;1:36;3:29).

요한은 자신의 사역이 목적이 무엇인지? 하나님으로 무엇에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이런 자세는 특히 목회자들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요한처럼 목회자들, 아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오직 사역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인도할수 있고, 그리스도만이 그분을 믿는 모든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역의 촛점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 입니다.

목회자들에게 다가오는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성공적인 사역(?)을 보고 스스로 만족해하며 기뻐 하며 아니면 자칫 사역을 통해 자신의 왕국을 만들수 있는 유혹 입니다.

이런 유혹이 오면 무엇보다 세례(침례)요한을 생각하십시오!!!

2013년 1월 8일 화요일

늘 새롭게

요3:1-2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니고데모가 주님을 찾아오면서 본문이 시작 됩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요, 유대 지도자라고 했습니다(1).

자기를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성령의 역사로 인해 주어지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즉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는  말씀에 니고데모는 매우 당황합니다(4,9).

주님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해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어 물려 죽게 하였던 사건을 예로 들면서 그 때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달아 그 뱀을 본자가 다 살아난 사건을 자신의 십자가의 사건과 연결시키시고 계십니다(14;민21:4-9).

그렇습니다. 오직 구원의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것은 그분을 믿는 것이고, 그분을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16).

 니고데모의 입장에선 주님의 말씀이 이해가 가질 않았겠지요? 이분이 도대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거듭나야 한다는 것도 무슨 의미인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단지 이 예수라는 분이 유명한 분인데 과연 이 사람의 신학적인 입장이 무엇인지? 선생으로서, 종교지도자로서 자질이 있는지? 거기에 관심이 있었습니다(2).

오늘날에도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구속하신 분 으로 보기보다는 단지 종교지도자, 위대한 선생, 아니면 성자로만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입니다.

예수를 올바르게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어떤 가르침으로 되는 것이 아닌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만 됩니다. 성령님만이 우리를 빛가운데로 인도 하십니다(19). 성령님만이 우리의 영안을 밝혀 주십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믿는것은 일회적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매일 매일 그분을 새롭게 바라보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성령님을 통해 오늘도 십자가의 주님을 새롭게 바라보고, 나의 믿음의 더욱 새로워지도록 기도하십시오.

2013년 1월 7일 월요일

우리의 공동체

요2:12-2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말하라고 한다면 흔히 '온유, 겸손, 부드러움' 이렇게 말할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성전안의 예수님의 모습은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분노로 가득차서 채찍을 휘두르며, 양과 소를 내어 좇으시고, 돈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다 쏟으시고, 그들의 상을 뒤엎으셨습니다(15). 이렇게 화를 내시는 주님의 모습은 처음일 것 입니다.

왜 이런일이 일어났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의 삶과 예배의 중심지입니다.

그러나 이 성전이 순수하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온 사람들의 마음을 흩트리고, 예배자의 마음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성전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탐욕과 상업주의..일그러진 모습들이 주님의 분노를 폭발시켰습니다.

예배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가 예루살렘 성전처럼 일그러지게 된다면 오늘도 역시 주님은 분노하실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장 순수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드려,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섬기는 우리의 공동체는 주님 보시기에 어떠합니까?

2013년 1월 6일 일요일

감사로

시50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 시편은 아삽의 시편입니다. 시편에는 아삽의 시편이 몇군데 있습니다(46-49;73-83). 그중에도 본 시편은 아삽의 시편 가운데 매우 드라마틱합니다.

아삽은 다윗이 임명한 3명의 성가대 지휘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본 시편에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를 든다면 '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 함을 들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인간의 연약함을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의 날씨 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1-6).

또한 하나님은 무엇이든 부족하신것이 없는 분 입니다(7-15). 세상의 모든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10-12;24:1).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피조물이 하나님만을 의지 하기를 원하십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적인 법칙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거나 다른 것을 의지 하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를 파괴하는 것 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고난의 시간에 그분께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15). 하나님은 그분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 에게 은혜를 주십니다(23).

이렇게 마땅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존재가 하나님을 잊거나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슬픈 현상이 있습니다(22). 이런일들은 현대인들에게 더욱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를 망각해서는 아니됩니다. 마땅히 우리는  항상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간은을 예배자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오늘도 감사함으로 그분께 나아가 경배와 찬양을 드립니다.

2013년 1월 5일 토요일

새로운 변화

요2:1-1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면 한 가정이 새롭게 탄생하는 모습을 보고 누구나 축하합니다. 그리고 뒷이어 계속 되는 연회에 참석하면 서로 함께 즐거움을 나눕니다.

가나라는 곳에도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잔치가 벌어졌는데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한참 흥겨운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결혼식을 올린 신랑 신부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이스라엘에서 포도주는 모든 잔치에 절대로 빠질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 상황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즐거웠던 잔치 분위기가 매우 썰렁하게(?) 끝을 맺었을것입니다.

포도주를 만드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어떤 설교나 의식이 아닌 그분의 인간적인 모습이 엿보입니다.

새로 만들어진 포도주로 인해 잔지의 분위기는 한 층 더 고조 되었습니다. 처음에 내놓은 포도주나 주님이 만드신 포도주나 질이 같음을 보고 연회장이 신랑을 칭찬을 합니다(9-10;사25:6).

이 기적은 성육신 하신 주님이 베푸신 첫 번 째의 기적입니다. 그러나 이 기적은 앞으로 세상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실 포도주와 같은 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요6:54).

오늘도 주님은 이 기적을 다시 베풀고 계십니다.
마치 웅덩이에  있는 물이 포도주로 바뀌듯이 성령을 통해 죽은 심령을 은혜와 기쁨이 넘치는 심령으로 바꾸십니다.

항아리에 물을 가득히 채워(7) 포도주로 가득히 변했듯이(8) 충만하고 영원한 행복을 주님은 오늘도 그분을 영접하는 자 에게 주십니다.

주님의 손에 붙잡히면 변화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나의 삶에 변화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까?
정직하게 그분의 도움을 구하십시오(3).
그리고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단순하게 순종하십시오(5).

2013년 1월 4일 금요일

나의 나다나엘

요1:43-5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한 사람 한 사람씩 제자들을 삼고 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빌립 그리고 본문의 나다나엘입니다.

본문은 나다나엘이 제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도마처럼(20:25), 나다나엘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빌립이 주님에 대해서 말하자(45), 그는 즉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 이 날  수 있느냐?"하는 반응을 보입니다(46). 그는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와서 보라"(46)고  하는 빌립의 초청에 응하고 있는 것 을 잘 보아야 합니다.

예상밖으로,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을 보고(47), 그는 매우 놀라워합니다(48). 결국 제자가 됩니다(49).

이런 일련의 제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나다나엘이었지만 그는 항상 마음의 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정직했습니다. 또한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의 마음에 간사가 없다고 했습니다(47).

주님이 간사가 없다고 칭찬하신 것 처럼 주님 보시기에 정직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영안을 더 밝히 열어 주실 것 입니다(51).

오늘 누구에게 "와서 보라"고 주님앞으로 인도할 나의 나다나엘을 누구입니까?

2013년 1월 3일 목요일

무엇을 원하느냐?

요1:35-4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멀리서 2명의 제자가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주님이 갑자기 그들을 향해 돌아섰을때 이들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이 두 사람에게 "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이들은 매우 당황해하며 엉겁결에 " 지금 어디에 사십니까?" 하고 되묻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와서 보라"로 하셨습니다(38-39).

복음서를 읽으면서  발견할 수 있는것은 주님은 " 네가 나를 위해 이것 혹은 저것을 해줄수 있느냐?고 묻지 아니하시고, 항상 "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늘 사람들을 주의깊게 바라보시고 그들의 관심에 집중하셨습니다.
"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또한 주님을 만난 베드로에게 네가 장차 ... 하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42).
그 후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요21:15-19,행2:14-41).

주님이 항상 물으셨던 "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는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으로 부터 많은 것을 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건강, 평안한 마음, 장래에 대한 방향 등등..

하나님의 손은 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는 분이시고, 우리가 째째하게 구하는 것 보다 큰것을 구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째째하게 구한다는 것은 그 만큼 하나님을 작게 여긴다는 뜻일것입니다.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고 물으십니다

2013년 1월 2일 수요일

준비

요1:19-3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세례(침례)요한이 등장합니다. 당시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가 전하는 강력한 멧시지, 그의 옷차림, 그의 삶,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위기를 느낀 종교지도자들은 사람들을 보내어 요한의 정체를 알기를 원했습니다(19).이들이 요한에게 와서 한 말은 '당신은 누구냐?' 하는 질문입니다(22).

'당신은 누구냐?' 하는 질문은 매우 의미 심장합니다.

만일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고 질문을 던진다면 그들의 적개적인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이에대해 요한은 두 가지 대답을 합니다.
자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고 외치는 광야의 소리"라는 것입니다(23).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소개하는 것 입니다. 즉 "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29)이심을 소개하는 사람이라는 것 입니다.

이런 요한의 정체성은 바로 우리의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소리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는 증거자의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이를 위해 부르셨습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의무는  첫째는 예배요, 둘째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 입니다.
바울은 이에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4:5).

오늘 누구에게든 그리스도를 증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2013년 1월 1일 화요일

올해

요1:1-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1). 그리고 이 말씀이 " 육신이 되셨습니다"(14). 시간과 공간을 넘어 계신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매우 모험적인 일입니다.
그분의 권능과 영광을 다 포기하시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으니까 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을때 겸손한자들만이 그분의 오심을 조용히 환영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모험을 하셨습니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분의 사랑의 근거한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오심으로 그분을 영접하는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고(12), 질병과 죄악으로 점철된 이 세상에 치유와 회복과 용서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분이 오심으로 사랑이 무엇인지? 용서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속에는  우리 삶속에 겸손하게 찾아오신 주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네가지 단어를 찾을수 있습니다.

생명(4), 빛(9), 은혜,(14), 진리(14)입니다. 이 단어들은 그분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올해, 생명, 빛, 은혜, 진리로  충만한 아름다운 해가 되기를 기도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