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31일 월요일

앞을 바라보며

사25:1-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지난 며칠동안 이사야서를 묵상하면서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를 보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주어진 고난(24)으로 부터 회복되는  기쁨으로 가득찬 말씀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해야 함을 깨닫게 되기까지 고난을 견디어 내야 했습니다.

이제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분노가 끝마치고(6) 주어지는 기쁨, 환희를 볼수 있습니다.
이 기쁨의 잔치는 모든 백성을 위한 것 입니다(6). 사망을 멸하시고(7-8), 그들의 얼굴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실것 입니다(8).

이 기쁨의 잔치는 우리가 주님 앞에 가면 참여 하게 될  천국 잔치의 모형입니다.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행했던 모든 수고를 칭찬하시고, 우리를 위해 기쁨의 잔치를 베푸실것입니다. 세상에서 고통 받던때의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말할수 없는 위로로 우리를 감싸안을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좋습니다.

이처럼 이사야가 유다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이 환희의 멧시지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실 은혜를 선명하게 예표해주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나라를 위해 수고를 다하는 것 입니다.

모든것이 새로워지며, 가장 큰 기쁨의 날이 우리에게 다가올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9) 오늘도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2012년 12월 30일 일요일

구원의 우물

사12:1-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구원의 기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눈에 띄는 단어는  3절의 ' 구원의 우물' 입니다. 이 물은 마르지 아니하고 순전한 기쁨을 주는 물입니다.

우리가 이 우물에서 물을 먹을지라도 계속 이 물을 먹으며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더욱 깊이 알고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이 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도 말씀하시길 " ...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고 하셨습니다.

21세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 어느때 보다더 편리함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세상은 더욱 우리에게 갈증을 줍니다. 그리스도 없이 사는 사람은 세상이 발전하고 바뀔지라도 늘 메마른 광야에서 살아가는 것 입니다.

하나님이 이 물을 주셨습니다. 이 물은 과학의 힘으로 살수 없습니다. 돈으로 살수 없습니다. 권력으로 살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마실 수  있습니다. 그분(예수 그리스도)에게 오면 됩니다. 구원 뿐만 아니라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아있는 동안 살 수 있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며 이사야의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까?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사라지고 이제는 그들을 향한 치유와 위안이 있습니다(1).

좋지않은 시간을 보낸 후 금방 기쁨으로 바뀐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직도 않좋았던 기억과 여운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사야는 유다를 향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5-6).

우리가 기쁨으로 가득찰때 누가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고, 내 안에 기쁨의 소식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질것입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안에서 주신 구원의 기쁨속에 사십시오. 나를 구원하시고, 축복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012년 12월 29일 토요일

앞으로 일어날

사11:1-1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언의 말씅입니다.
이사야가 이 멧시지를 선포할때에 유다의 상황은  매우 어둡고 침울하고 소망빛이 보이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당시 유다처럼 어둡고, 침울한 세상에 살아갑니다. 좋은 소식 보다는 좋지 않는 소식이 더 많습니다. 테러, 자연재해, 어린아이들까지 죽이는 묻지마 총기사고, 국지전, 세계 경제 위기 등등... 하지만 세상을 보면 갈수록 흉폭해지는 것 같지만 우리의 눈은 항상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야 합니다.

이사야는  그런점을 그들(우리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 희망의 멧시지의 근원은 바로 이새의 줄기입니다. 육신적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그분을 통해서 시작 될 것입니다(1).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5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 이신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의와 공의 신실함을 대표하시는 분입니다.

추운 겨울이 되면 나무가지는 앙상해집니다. 겉보기는 마치 죽은것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겨울이 지나 때가 되면 그 나무가지에는 새싹이 나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열매가 맺게 될것 입니다.

현재  이 세상이 마치 앙상한 가지와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그분이 세우실 하나님 나라의  환상을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 합니다(6-9).

 주위의 환경을 보지 않고 그분과 함께할 미래의 시간을 보며 믿음안에서 굳건하게 설수 있기를 기도하십시오.

"물이 바다를 덮음 간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아-멘-

2012년 12월 28일 금요일

앗수르

사10:20-2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7:3에서 이사야의 첫번째 아들 '스알야숩'(남은자가 돌아오리라)을 통해 유다가 멸망할지라도 남은자가 있음을 압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고난을 주시지만 희망을 끈을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남은자는 소수입니다(22)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올것입니다.
교회가 박해를 받고, 교회가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은 항상 남은자를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새로운일을 하셨습니다.

중세의 교회가 타락을 하고 영적으로 암흑기였을때에도 하나님은 루터와 칼빈등 개혁자들을 남겨두셨습니다.

본문의 남은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지를 깨달았습니다(20). 그들이 의지했던 앗수르가 결국 자신들의 부메랑(Boomerang)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것을 의지하면 그 의지하는 대상이 결국 자신의  고통의 근원이 되고 맙니다.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십니다.

하나님께 돌아온 그들은 더 이상 이 흉악한 외국 침략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앗수르'가 있습니다. 때로는 이' 앗수르'가 우리를 두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의지 하는자는 앗수르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백성을 징계하는 징계의 막대기에 불과 합니다. 만일 앗수르가 크게 보인다면 그만큼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안에 어떤 '앗수르'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하나님께 가져가십시오.
하나님은 이 앗수를 이길수 있도록 영적으로 우리를 강건하게 하시고 은혜를 주실것 입니다.

2012년 12월 27일 목요일

무엇을 해야 할지를

사9:18-10: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9:12,17,21;10:4). 그럼에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기다림입니다(10:3).

하나님의 진노는 불의한 법을 만들어  기득권자들에게는 온갖 혜택을 주고 사회적 약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자 들  이들 지도자들을 향해 있습니다(10:1-2). 이렇게 이사야가 살던 시대는 악이 성행하던 시대였습니다.

우리는 불의한 법을 만들어 사회적적 약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이사야가 살던 시대가 아닌 민주주의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이번 대선에서 대선 후보들이 서로 질세라 경제민주화를 외치며 어떻게든 양극화 현상을 완화시키겠다고 공약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치인들이 경제민주화니 양극화를 완화시킬려고 해도 세상에는 항상 빈부의 격차가 있고, 사회적 약자는 여전히 불이익을 당합니다.

주님이 오실때까지는 이런일들은 계속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는 이런 사회적 책임을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 복음전도에는 사회적 책임이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믿습니다.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좀더 나아지기 위해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2012년 12월 26일 수요일

한 순간도

사9:8-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9:1-7의 본문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한 말씀이 나옵니다(6).
 하지만 본문은 하나님의 진노가 계속 되풀이 됨을 봅니다(12,17).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모습이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한 아기의 탄생을 예언했던(6)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진노하십니까? 그들이 회개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13).

이들의 교만한 생각이 9절과 10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징계하셔서 전쟁을 통해 모든것을 파괴하셨음에도 그들은 파괴된 이전보다 더 멋있게 복구할수 있다고 장담하고 있습니다(10).

이들은 하나님보다 이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인간 지도자들을 더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결국 그들을 더욱 큰 파멸의 길로 이끌었습니다(16-17).

나의 삶을 보십시오.
 날마다 주님을 의지하며 그분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갑니까? 아니면 그분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한 순간도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2012년 12월 25일 화요일

한 아기

사9: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예언이 명확히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가 세우실 왕국은 정의와 공의로 세워질 나라입니다(7). 9장까지 이르러 이사야는 세번에 걸쳐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예언을 했습니다.

이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은 당시 그가 살던 상황, 생각, 시간을 넘어선 일입니다. 아마 자신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며 하나님이 주신 멧시지를 선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사야 선지자의 시대보다 약700년 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본문 6절에서 앞으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아기의 모습을 말씀합니다.
주님은 구유에 누워 있는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것은 이 아기는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 이시고,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십니다(6).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줄 수 없는 평화를 주시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아기는(6)는 평범한 아기가 아닙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 죄악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죄로 부터 해방시키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 하는 아기입니다.

오늘날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아기는 필요합니다.
6절 말씀을 조용히 다시 묵상해보십시오.
이 아기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찬양하십시오.

2012년 12월 24일 월요일

하나님의 소망

사8:11-2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으로 부터 멧시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두려워해야 할 분임을 느끼며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13).

그는  환상을 본 영적 경험이 있습니다(6:3).  환상을 본 후 그는 마음으로 부터 우러나오는 멧시지를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강한 손으로 자신을  덮으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11). 하지만 더 이상 그 강렬하게 다가왔던 환상의 경험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습니다(17).

하나님은 그의 지성소가 되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않고 자신의 길로 간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것입니다(14-15).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힘으로 산다면  반드시 그 길을 막으시고 중간에 걸려 넘어지게 하실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사야의 아들에게 주신 이름 즉 '마헬살랄하스바스'는 이스라엘에게 행하실 징조와 징표가 됩니다(18). 그 이름에 따라 불길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앗수르가 그들을 약탈하고, 파괴시킬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가운데도 남은자를 남겨두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들이 비로 소수이지만 이들은 여전히 유다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비하면 소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에 존재케 하신것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나는 나의 이웃과 사회에 하나님의 소망이 되고 있습니까?

2012년 12월 23일 일요일

참된 부

시49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 시편기자는 찬양이나 기도 보다는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 멧시지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 할것없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2).

좋은 설교가 그렇듯이 그 역시 자신에게도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악한자와 부유한자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5-6).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그를 구원하실 분 이시기에 그러합니다(15).

본문에는 속전(贖錢), 속량(贖良)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이 두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본 시편은 큰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또한 독자들에게 큰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 부자들이 자신의 부를 치부하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지말라' 고 합니다(16). 다른말로 놀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왜냐하면 사람의 '부'는 일시적인것이기에 그러합니다.

부를 쌓고 또한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죽을때 아무것도 가지고 갈수 없기 때문입니다(17). 물론 부자들 가운데도 훌륭한 신앙인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그 부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돕는데 사용합니다.

그러나 현대의 물질주의 사회에서 사는 우리에겐 돈을 역시 위협적인 존재입니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에게 마음이 쉽게 기울어질수 있습니다.

서점에 가보아도 ' 부자가 되는법' 이라는 책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텔레비젼에서도 좋은 집에서 사는 유명인들을 소개하며 은근히 부를 자랑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아무리 좋게 보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영원한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뿐이십니다(15).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산다면 아직 짐승과 같습니다(20).

부유함은 편리함은 주지만 행복은 주지 않습니다. 행복은 만복의 근원이시고, 모든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안에 사는 것입니다.

2012년 12월 22일 토요일

이름

사8:1-1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이름을 짓습니다. 이름을 지을때는 이름속의 의미대로 아기가 자랐으면 하는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사야를 위해 이름을 지으셨습니다. 이사야의 아내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은 ' 마헬살랄하스바스' (1-3) 입니다. 그 의미는 ' 속히 노략하라' 는 말입니다.

이름치고는 최악입니다.
하지만 이 이름속에는 하나님의 예언이 담겨 있습니다. 즉 빠른 시간내에 앗수르가 다메섹과 사마리아를 노략할것입니다(4).

그리고 하나님은 이 이름을 이사야에게 쓰게 하시고(1), 두 명의 신실한 증인을 세우셨습니다(2).

이사야의 아들은 그 자체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멧시지입니다. 아들이 살아 있는한 절대로 무시할수 없고, 잊을수 없는 멧시지입니다.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워지는 우리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나의 삶속에 어떻게 표현되고 있습니까?

2012년 12월 21일 금요일

어떤상황에서도

사7:1-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유다의 아하스왕때 입니다. 시라아와 이스라엘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할려다가 실패했습니다(1).

이들은 재차 침략을 할려고 다시 동맹을 맺었고, 이 소식이 아하스왕과 백성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이들은 마치 "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큰 두려움으로 떨었습니다(2).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왕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는 자기의 아들을 데리고 왕을 만나 용기를 줍니다(3-7).

이사야는 왕을 만나 조용히 하라고 합니다(4). 위기의 때일수록 조용히 해야 할것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려운일이 생기면 마음이 혼란스러울수 있습니다. 조용히, 가만히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어떻게 이일을 해결하실지 조용히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이사야는 왕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했습니다(11).
아하스왕은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다고 거절을 합니다.(12). 그가 겉으로는 경건한척 하였지만 내심(內心) 하나님 보다 당시 유다와 가까운 강국이었던 앗수르를  더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징조를 주시길 원하셨습니다(14).
아하스는 이사야의 말을 듣고 무슨말인지 이해할수가 없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약속이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임을 알고 있습니다.

위기가 왔을때 아하스가 보여준 모습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어려움이 오면 조용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믿음가운데 굳게 서지 못하면 굳게 설수 없습니다(9).
어떤상황에서도 두려움 없이 굳게 설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2012년 12월 20일 목요일

준비가..

사6:1-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하심이 나타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지금 성전에 있습니다(1). 아마 평소와 같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려고 하였던것 같습니다.

그때에 갑자기 그의 영안이 열려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하심을 보게 됩니다.
또한 이해할수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들의 소리를 듣습니다(2-4).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앞에서 그는 자신의 죄를 보게 됩니다(5).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습니다(7). 더나아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합니다(8).그런후 그는 유다의 회복에 대한 질문을 하나님께 하고 있습니다(11).

본문에서 주의깊에 보아야 할 부분은 하나님은 이사야를 사용하시기전 그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셨다는점입니다(5-7). 즉 하나님은 깨끗한 그릇을 사용하신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의 입술을 깨끅하게 하신 후 그의 입술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쓰실려면 매일 우리의 심령을 성령으로 정화 시켜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하게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8).

2012년 12월 19일 수요일

십자가 앞으로

사5:22-3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분노에는 정당한 분노와 잘못된 분노가 있습니다.  인간도 의분과 옳지 않은 분노 둘 다 가질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항상 옳으십니다. 그분은 항상 의로우신분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유다의 죄악된 사회를 바라보시며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분노가 나타납니다. 그들의 죄에 대해 분을  발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입니다(25).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지 오래됩니다.  아예 그 말씀을 무시하며 살아갑니다(24). 온갖 죄악의 삶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시는 도구로 앗수르를 사용하십니다(26-30).

 유다를 향하신 하나님의 분노는 나에게 어떤 영적의미를 줍니까?
한 사물을 보고 서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 처럼, 하나님에 대해 생각할때에도 서로 다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떤이는 하나님은 무조건 사랑이시다.
어떤이는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 분노하시는 하나님에 촛점을 맟줍니다.

사랑과 분노는 서로 분리될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에 분노 하십니다. 사랑이 없다면 왜 분을 발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분의 분노는 곧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분노와 사랑을 완벽하게 표현해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분노와 사랑에 대한 바른 반응이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분노와 사랑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신 십자가 앞으로 오십시오.
나에게 감추어진 죄가 있다면 회개하십시오.

2012년 12월 18일 화요일

변화될 부분은

사5:8-2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유다의 죄악상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유다의 죄악상을 보면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살아가는 만큼 , 이들에게 닥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수 없을것입니다.

 이들 사회의 죄악상을 보십시오.
탐욕과 불의가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8-10).
방탕한 삶이 끝에 다다르고 있습니다(11-12).
심지어는 하나님을 비웃기까지 합니다(18-19).
도덕적 불감증이 사회에 팽배해 있습니다(20-21).

하나님을 향해 조롱하는 이들 백성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단호합니다.
이들의 탐욕은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바뀔것입니다(13). 이들이 얻을 수확은 아무것도 없을것입니다(9-10). 한나라의 경제적인 어려움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사치와 방종, 쾌락. 음란한 사회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역사가 증명합니다.로마가 멸망한 이유가운데 하나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본문에는 향락주의 삶은 결국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을것이라 했습니다(14).
이들의 교만은 이들을 비참한 신세로 몰락 시킬것 입니다(15).

이런 심판의 멧시지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소망도 있습니다(16-17).
하나님은 심판을 하시면서도 소망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유다의 죄를 보면서 오늘 내가 하나님앞에 고백할 죄는 없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나의 삶에 변화될 부분은 없습니까?

2012년 12월 17일 월요일

얼마나 많은

사5:1-7절, 오늘의묵상입니다.
본문에는 포도원 정경이 펼쳐집니다. 이 포도원은 기름진 산에 위치해 있습니다(1). 따라서 당연히 좋은 포도를 수확할수 있는 환경입니다.하지만 수확시기가 되어 수확을 할려고 보니 좋은 포도가 아닌 들포도가 맺여 있습니다(2,4).

왜 이포도원에서 좋지 않은 포도가 수확이 될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이 포도원 비유를 통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멧시지입니다.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7). 나쁜 포도를 맺었다고 하는것은 이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멸망이 그들에게 다가옴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좋은 포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좋은 포도를 맺는것은 말씀에 순종함을 말합니다. 얼마나 말씀을 많이 본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얼마나 순종했느냐입니다.

얼마남지 않는 올해를 넘기기전에 나의 삶속에 얼마나  많은 좋은 포도를 맺었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시95:7-8).

2012년 12월 16일 일요일

죽을 때까지

시48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어떤분이시냐? 하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1). 하나님은 자신을 보이셨습니다(3). 이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일들이 잘되어가고 , 환경적으로 평안할수록(4-7). 우리는 그분안에서 즐거워하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잘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번영할때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삿2:12).

솔로몬왕조차 성전을 지어놓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왕상11:4).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도 모든일이 잘되어갈때는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이 앞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대로 행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모든일이 잘될때 일수록 하나님의 인도를 더욱 구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며 살아가십시오.
무슨일을 만나던 좋던 나쁘던 그분과 나의 삶을 나누십시오. 그분은 죽을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14).

2012년 12월 15일 토요일

온세상의

행12:19-2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교만하고 오만한 사악한 권력자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미 10장에서 베드로가 고넬료가 만나는 장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는 만났을때 그 앞에 엎드렸던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10:25-26).
베드로는 고넬료의 이런 행동에 매우 당황해하며   즉각  만류했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태도와 본문의 헤롯의 차이점을 보십시오.
헤롯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을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줄 알고 한층 더 박해를  강화했습니다(12:3).

또한 가이사랴 사람들이 자신에게 아첨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습니다(22).
 이들은 헬라문화에서  신들이 사람들 사이에 강림한다는 신화를 사용해 헤롯에게 아첨을 부립니다.

헤롯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음을 당합니다(23).
사람에게 영광을 받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에게만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가는것 만큼 큰 죄는 없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런 어려운 환경속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가이사가 주님이고, 가이사에게 예배해야 한다고 로마정부가 요구했을때  오직 예수님만이 주님이시고 하나님이시라고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24). 하지만 대신 그들에게 찾아온것은 박해였습니다. 이들은 그 어떤 시련도 인내와 믿음으로 이겨내었습니다.

누가 이세상을 움직인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치가들 입니까? 재력가들입니까?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 세상의 주인이심을 선포하십시오.

2012년 12월 14일 금요일

하나님의 주권

행12:1-1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교회에 더 무서운 박해가 찾와왔습니다. 교회의 큰 기둥이었던 야고보가 순교를 합니다(2). 또한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투옥을 당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베드로입니다(3).

성도들은 하나님이 왜 이런 무서운 시련을 허락 하시는 것일까?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실까?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 입니다.

복음이 더 강하게 전파되고 교회가  평안이 든든하게 서가기를 바랬는데, 반대 세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들은 서로 하나가 되어 기도에 힘을 씁니다(5,12). 환난 가운데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더욱 축복을 받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교회가 평안하면 나태해지고, 부패해질수 있으니까? 고난을 허락 하십니다.

이런 박해로 인해 한 곳에만 모여 있던 그리스도인들을 흐트려서 새로운 곳에 가서 복음이 전해지도록 하셨습니다.

 이런 환난은 그들의 믿음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야고보는 순교를 하고, 감옥에 투옥된 베드로는 천사를 보내어 극적으로 구출하시는 하나님!
한쪽은 왜 순교를 허락하시고, 한쪽은 왜 안전하게 지키실까?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을 만나도 하나님의 주권앞에 순종하며 감사하십시오. 분명한것은 지나고 보면 거기에는 엄청난 축복이 있었음을 깨닫게 될것 입니다.

2012년 12월 13일 목요일

그리스도인

행11:19-3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이 초대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환난을 당하게 하신것은 그들이 한곳(예루살렘)에 모여 있지 않고 흩어져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데 있었습니다.

본문은 이 흩어진 사람들이 신실하게 복음을 전하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도우시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21-22).

그리고 성령님이 앞으로 일어날 흉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28).

잠시 무대에서 사라졌던 사울이 재등장을 합니다.
그가 회심한 후 아무도 그의 회심을 믿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그를 믿어주고  사도들과 성도들에게 변호해준 바나바(9:27)는 본문에서 사울을 찿으러 다소로 갑니다(25).

 두사람은 1년동안 안디옥에서 팀을 이루어 사역을 하고 이 교회를 견고하게 세워갑니다(26).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경멸의 대상이었던 그리스도를 사울은 열심히 가르쳤고 전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처음으로 ' 그리스도인' 이라고  불리워졌습니다(26).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하신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는 자체가 영광입니다.

성령님이 예언하신 대로 기근이 일어나자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난을 당하는 형제들을 돕기 위해 힘을 다했습니다(29).

초대교회는 조직적으로는 엉성한것 같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우는대로  살았습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것 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우는데로 살고 있습니까?

2012년 12월 12일 수요일

하나님의 일을

행11:1-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베드로는 유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이방인과 접촉했다는 것 입니다(1-3).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아직 유대적 사고와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그리스도인이 되기전에 가졌던 생각과 관습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어떻게 이방인에게 임했는지, 주님이 세상에 계실때 물이 아닌 성령으로 세례(침례)를 받을것이라는 하셨던  말씀을 연관시키며 증거하고 있습니다(16;막1:8).

유대인에게 성령이 임하였던, 이방인에게 임하였던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막겠느냐 하며 그들에게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17).

나의 좁은 생각, 경험에 갇혀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을때가 있습니다. 혹은 어떤 선을 그어놓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가 그어놓은 한계, 경험, 생각을 버리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나의 생각과 나의 경험안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가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역은 일정한 패턴이 있는것이 아닙니다.
가령, 거리에서 전도하는 사람들, 지하철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아니면 마약중독자, 알코올 중독자들에게 전도하는 사람들, 창녀들이나 호스티스에게 전도하는 사람들, 조폭들에게 전도하는 전직 조폭출신 그리스도인들.. 어떤때는 이들에게 좋지 않는 시선으로 볼 때가 있습니다. 기존 교회에서 이들을 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명한것은 하나님은 그들 역시 사용하신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유명한 교회 소위 ' 스타목사님'들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소중하게 사용하십니다. 각자의 은사와 사역의 현장이 다를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나의 좁은 생각이나 편견으로 제한하지 마십시오.

2012년 12월 11일 화요일

이 영광스러운

행10:34-4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복음증거자로서의 베드로는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그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과정이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선 고넬료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으며  시작합니다(29-33). 고넬료의 이야기를 듣자  하나님이 자신에게 환상으로 말씀하신것을 연관시키며 한 이방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더욱  느끼게 됩니다((34-35).

그런다음, 베드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명확하면서도 간단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36-43).

복음은 단순합니다.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재림하심(42), 또한  그분을 통하여야만 구원 받을 수 있음을 증거하기만 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람이 하지만  믿음을 가지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44).

욥바에서 베드로와 함께 온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에게도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워 합니다(45).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때 항상 좋은 반응이 있는것은 아닙니다.

물론 어떤때는 마음이 강팍한 사람이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는 드라마틱한 상황이 나타날때가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때는 아무리 열심이 증거해도 열매가 전혀없습니다.

죄인이 구원받는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하는 증거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2012년 12월 10일 월요일

누구를 만나든

행10:23-3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베드로는가 고넬료를 만나는 것 자체가 유대인의 관습에서 보면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명령이기에 일단 순종을 하며 고넬료의 집으로 향합니다. 가면서도 내심 왜 내가 이방인에게 가야하나? 하는 복잡하고 착찹한 마음으로 갔을것입니다.

 고넬료를 만나자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 자체가 있을수 없지만 하나님이 자신에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거나 깨끗하다고 하지말라(28)고 했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오기 싫었지만 하나님이 지시하셔서 이렇게 왔노라 한것이 그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그러면서도 베드로는 중요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하나님나라에는 인간이 한계를 그을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지만 우리도 한계를 긋고 사람을 대하지는 않습니까? 가령, 테러리스트, 마약판매상, 유괴범, 성폭행범, 조폭, 부패한 정치인들, 종교의 이름으로 사람의 인권을 유린하는  사이비 교주들..

그럼에도 이들 모두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 역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고 , 구원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누구나 제한없이  복음을 전해 구원을 받게 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만나자 엎드려 절했습니다(25). 베드로는 즉각 그렇게 하지못하게 했습니다(26).

베드로의 이런 자세는 우리에게  시사하는바가 큽니다.
아무리 훌륭한 영적지도자일지라도 그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가 필요한 죄인입니다.

사람을 대할때 선입견(先入見)을 가지고 대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누구를 만나든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도록 말입니다.

2012년 12월 9일 일요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시47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뜨거운 마음이 전달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외치라고 했습니다(1).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외치는 것은 누가 강요해서 되는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감격,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찬양을 할때 그 찬양이 메마르거나, 목에서 소리가 나오는것은 그 심령이 메말라있다는 증거입니다. 은혜가 충만한 심령에 나오는 찬양은 그 소리부터가 다릅니다.

노래를 잘부르거나 못부르거나가 문제가 아닙니다. 은혜의 소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끼칩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우리가 손벽을 치며 찬양하는 하나님은 어떤분이십니까?
그분은 온 땅의 왕이십니다(1,8)
지존자이십니다(1).

위대하시고 두려우신분입니다(2).
하나님은 만민을 나라들을 복종케하십니다(3)
그분은 우리하나님이시고, 우리를 만드시고, 아시고 사랑하시는 분입니다(4).

그러므로 가 하나님안에 있고 그분의 충만한 임재속에 살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것들은 지극히 작게 보일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삶, 이세상에 어떤것과도 비교할수 없는 크신 분 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분의 통치는 가장 즐거운일입니다. 그분의 통치를 싫어하는것 자체가 자신을 섬기는 죄악입니다.

오늘도 이 광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012년 12월 8일 토요일

이 영광스러운 일에

행10:9-2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서양속담에"듣고는 잊어버리지만, 보고는 기억한다. 그리고 행하면 이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길 .."모든 음식물은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막7:19). 3년동안 주님으로 부터 친히 가르침을 받고 훈련을 받았던 그것도 가장 사랑받았던 제자가운데 한 사람인 베드로는 아직  복음이 주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늘 정해진 기도시간에 따라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시간이 정오라 시장기를 느꼈습니다( 9). 그러다가 환상을 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취급하는 짐승들이었습니다(12,14).

하나님은 그것을 잡아 먹으라고 하십니다(13). 베드로는 거부합니다(14). 그럴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주의 문화권에서 살던 이 사람이 실천하기에는 어려운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것을 속된것이라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15).

하나님이 보여주신 이 환상은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를 만나게 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게는 부정한 짐승처럼 보였습니다.

베드로가 그 환상의 의미를 생각할때에 성령님께서 고넬료가 보낸 두 사람을 만나도록 도우셨습니다(19).

한 이방인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이렇게 치밀하게 일하셨습니다.환상을  보이시고, 성령께서 말씀하시고... 한 영혼의 가치가 천하보다 귀합니다.

 베드로가 머물고 있는곳이 가죽제품을 만드는 시몬의 집입니다(6,9:43). 시몬은 종교적관점(유대주의)에서 보면 부정한곳에서 하루종일 일을 합니다. 가죽제품을 만드니 죽은 짐승의 가죽을 취급해야 합니다. 죽은짐승도 유대인들은 부정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베드로 하여금 시몬에 집에 머물게 해서 그런 환경에 익숙하게 한것은 한 이방인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얼핏보면 과정이 복잡합니다. 천사가 고넬료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면 될텐데.. 환상을 보이시고  또한 고넬료에게 나타나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고, 그를 청하게 하시고(7,22).

왜 이리 복잡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복음 전도를 맡긴것은 천사가 아닌  사람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전도는 가장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이 영광스러운 일에 쓰임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2012년 12월 7일 금요일

무엇을 원하시는지

행10: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보기드물게 이방인으로서 경건하게 살며 선행에 힘을 썼던 사람의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고넬료로 그의 위치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으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을수도 있고, 힘으로 약자들 위에 군림할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난 그는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늘 선행에 힘을 썼던 사람입니다(1-2).
그것도 자신만 그렇게 한것이 아니라 그의 온집안 사람들에 선행에 힘을 썼습니다.

또한 늘 기도생활에 힘을 썼습니다(2).

하나님은 이런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어 만나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드라마틱한 장면입니다(4). 처음으로 천사를 만나는 영적 경험을 한 고넬료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곧 천사가 시키는대로 순종을 합니다(5-8).

구제를 하고, 남을 돕는것은 가장 실제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주님을 증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중에 하나입니다.

성경에 보아도 하나님은 과부와 고아들 즉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심을 가지셨듯이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사회의 약자들에게 역시 관심을 가지십니다.

나의 수입이 많든 적든, 상황이 어떻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남을 돕는다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물입니다. 하나님은  축복하실것입니다.

본문의 고넬료의 행동을 보면서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2012년 12월 6일 목요일

베드로를 보면서..

행9:32-4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의 촛점은 사울에게서 베드로로 바뀌었습니다. 베드로는 스데반의 순교후(행7:54-8:1) 흩어진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 사방으로 두루다녔습니다(32).

룻다와 욥바에는 비록 적은 숫자이지만 이미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32,38).

베드로가 행한 첫번째 이적의 대상은 그지역 성도들(32)에게 알려진 애니아였습니다. 이 사람은 8년동안 중풍으로 고생을 했는데 그를 고쳐주었습니다(33-34).

두번째는 욥바에서 일어났습니다. 도르가라는 여성도가 갑자기 병이 나서 죽게되었습니다.
이분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들로 부터 존경을 받아왔습니다(36). 베드로가 죽은 도르가를 살렸습니다(40).

이 두사 건은 두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많은 사람들을 전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35,42).

기적은 항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행하실때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도구로 사용받았습니다.

본문에서 특히한점은 이 두가지 엄청난 기적을 행하고 베드로는 그곳을 떠나지않고 여러날 그들과 함께 머물며 그들에게 믿음을 북돋아주었습니다(43).

그가 중풍병자를 고치고, 더나아가 죽은자를 살렸는데 요즈음 같으면 VIP 대접을 받았을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머문곳은 가죽제품을 만드는 집이었습니다. 아마 가죽 냄새가 늘 진동을 하였을것입니다.(43). 베드로의 겸손을 보게됩니다.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요즈음 목회자들이 너무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2012년 12월 5일 수요일

도우심이 없이는

행9:19-3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사울의 회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큰 혼란에 빠지게 했습니다.다메섹의 유대인들은 사울이 교회를 박해하는데 앞장섰울때는  좋아했지만  이제는  사울을 죽일려고 하였습니다.

사울을 따랐던 제자들이 급히 피신을 시켰습니다(25).

한편,예루살렘의 제자들 역시 사울의 회심을 의심했습니다(26).  그러나  후에는  사울의 진심을 알고 죽음의 위협 앞에 있는 사울을 피신 시켰습니다(25)/

 하나님은  때때로  복음을 전할때에  어려움을 허락하실때가 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일에는 어려움이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그때 절망하기 쉽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의  종들의 믿음을 굳건히 하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세상의 일도 그러하지만 특히 주님의 일은 내힘이 아닌  주님의 힘으로 하는것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늘 무릎을 꿇지 않고는 한순간도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사탄의 공격앞에 패하게 됩니다.

주님이 늘 깨어 있으라고 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도우심으로  초대교회는 든든히 서가고 구원 받는 숫자가 더해갔습니다(31).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수 없기에 오늘도 주님앞에 더욱 무릎을 꿇습니다.

2012년 12월 4일 화요일

마음의 벽

행9:10-1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아나니아와 사울의 만남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도우라는 어려운 책무를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내키지 않는, 싫은 일이었습니다(13).

주님은 사울을 도우라고 재차 말씀하셨습니다(15). 아나니아는 싫었지만  순종을 합니다. 결국  사울을 "형제"라고 부릅니다(17).

교회를 박해하는일에 앞장섰던 사울이 아니니아로 부터 형제라는 말을 듣고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요?

또한 본문에서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관계성을 엿볼수 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초대교회 성도들 같은 공동체 의식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인지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자신을 '오픈' 하는 것이 쉬운일이 아닙니다.

더우기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사울처럼)을 선뜻 돕는것이 쉬운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이 생각하는것과 다릅니다.
때로는 사람의 기준에 못미쳐도 하나님은 그를  변화시켜 그분의  택하신 그릇으로 사용하십니다(15).

 오늘 나의 마음의 벽을 허물고  신앙적으로 도와야 할 사람은  없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마음의 벽을 가지고 어떤이는  형제,자매처럼,어떤이는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지는 않습니까?

 마음의 벽이 있다면 그것을 허물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2012년 12월 3일 월요일

눈이 열려서

행9:1-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사울은 날카로운 지성, 높은 교육을 받은 유대인으로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대제사장으로 부터 위임을 받아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좇는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사람들처럼(눅24:18-20), 아마 사울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전에 주님을 본적이 있거나 아니면 주님의 대한 이야기를 들었음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당시 사울은 주님이 어떤분임을 알지못하였고, 이해할수도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의 영의 눈을 열기위해 육신의 눈을 멀게하셨습니다(8). 또한 마음의 문을 열기위해 그에게 " ..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4).

사울은 주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확실히 사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고 만났습니다. 그의 삶에 획기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입니다. 기독교 역사의 새로운장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대로 가던길을 막으시고 고통을 주실 때 가 있습니다. 예기치 않는 힘든일을 당할때가 있습니다.  그 모든순간이 하나님의 간섭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나의 영의 눈이 열려서 그것이 나와 생각이 틀려도
내가 보기엔 불편한 일일지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도록 기도하십시오.

2012년 12월 2일 일요일

가만히 있어

시편46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시편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고 힘이시라고" 하면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1). 또한 마지막절은 " 우리의 피난처" 라고 하며 끝내고 있습니다(11).

'우리'라는 단어가 두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반복되고 있음은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피난처가 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곧 하나님을 참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에 한하여 그러합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 ..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두가지 논점이 있습니다.
불확실하고, 뭔가 않좋은 상황을 만났을때 이 말씀은 큰 위로를 주는 말씀입니다.
마틴루터는 두려움이 올때마다  이 시편 말씀을 읽고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서 그분이 하나님됨을 알수 있습니까?

본문에서 시편기자는 자연의 엄청난 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2-3).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자연의 힘 앞에서는 인간은 힘을 쓸수가 없습니다.전쟁의 참상처럼(6,9)  지진, 수나미, 토네이도 등 .. 자연재해 참상을 자주 목격합니다.

그러나 시편기자의 촛점은 이런 참상이 아닌 그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맞추어져 있습니다(4-9).

TV, 신문, 인터넷을 통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알수 있습니다. 좋은일 보다 좋지 않는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그 가운데도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눈이 맞추어져야합니다.

본문의 키워드(Key word)는 '가만히 있어'(10) 라는 말씀입니다.
가만히 있으면서  어려움에 있었을때 나를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3절 말씀의 기도가 나올것입니다. " ...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2012년 12월 1일 토요일

그 어떤것도

아가서7:9-8:1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오늘 본문은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사랑에 대해 많은 의미를 주는 구절을 든다면 8:6-7절 말씀일것입니다.

 아가서를 묵상해오면서 이 부부가 서로에게 얼마나 사로잡혀 있는지,  서로를 얼마나 위하는지, 서로를 얼마나 사모하는지를 보아왔습니다(4:9-10).

한때는 서로에게  힘든시간도 있었지만(5장), 그럼에도 서로가  얼마나 강하게 묶여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 입니다(8:6)

본문에서 이 부부의 애정과, 애정 표현을 보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의 어떤 물로도  끌수 없는 하나님의 불과 같습니다(8:6-7).
또한  홍수와 수나미,같은 천재지변(天災地變)으로도  빼앗아 갈수 없습니다(7).

그래서 바울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로마서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빼앗아갈수 없습니다.

2012년 11월 30일 금요일

아름다움

아가서6:4-7: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한 여성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사랑과 감정을 실어서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녀의 육체의 아름다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품이 넘치는 자세(7:1), 그녀의 자체에서 풍겨나오는 매력(6:10)을 종합한 말입니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육체적인것에만 국한된것이 아니라,  기품과  자체의 매력, 모든 조화 속에서 우러나옵니다.

미(美)의 기준은 모든 아름다움의 조화입니다.

본문에서 아름다운 아내의 모습을 그린 이 사람처럼, 우리의 신랑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신부인 교회를 보시는 눈이 바로 이러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각자의 개성, 내게 속한 모든것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이렇게 아름답게 보시고 사랑하심을 깨달으십니까?

뿐만아니라 신랑되시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묵상하는 오늘 하루가 되십시오.

2012년 11월 29일 목요일

변함이 없으신

아가서5:2-6: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을 읽으면 흐름이 반전되어  무슨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알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느낌입니다.

남편이 집에 늦게 들어왔는가봅니다. 그의 머리는 이슬에 젖어있습니다(2). 아내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습니다(3).

그녀는 남편을 맞이할려고 벗었던 옷을 다시 입고싶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화가 났는지 문을 열어주지 않고 밖에 세워두었습니다.

남편이 문을 열어달라고 부르니까 그녀는 마음이 약해져 마침내 문을 열어주었습니다(4-5). 하지만 남편은 자취(?)를 남긴채 이미 다른데로 가버렸습니다(6).

그녀는 남편과 화해할려고 애를 썼지만  때는 늦었습니다.남편은 이미 가버린 상태입니다.

인간관계는 좋을때도 있고, 나쁠때도 있습니다. 살면서 남과 부딪힐때가 많습니다. 남편과 아내도 그렇습니다.

그럴 때 어느 한편이  먼저 화해 할려고 애를 쓰다가 거절을 당한다면 그 사람 역시 마음의 문을 닫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깨어진 관계가 회복하기가 힘들때가 있습니다.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지기전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을 연상케 해줍니다. 변덕을 부리는 쪽은 하나님이 아닌 바로 나입니다. 그럼에도 변함이 없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주는  본문입니다.
항상 변함이 없으신  주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2012년 11월 28일 수요일

나의 사랑하는

아가서4:1-5: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지금  두사람은 결혼을 했습니다(8-12,5:1).
본문은 신랑이 자신의 신부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가득 넘쳐 있습니다.

현대인의 귀로 들어도  부드럽고 아름다운 표현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 중 하나가 남녀 간에 사랑입니다.

어떤 시인은 사랑에는 다섯가지 표현이 있다고 합니다. 언어로  사랑을 표현하고, 시간을 같이 보내고, 좋은 선물을 줄려고 애를 쓰고,  섬기고, 육체적인 친밀감... 연애하는 젊은 연인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쉽게 볼수 있습니다.

본문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수려한 미사여구로 자신의 신부에게 사랑을 표현합니다. 결혼을해 한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남편과 아내사이에서 이런 표현이 쉬운일이 아닙니다. 결혼하면 오히려 서로에게 무감각해지기 쉽습니다.

 어떤때는  오히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쉽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가정, 특히 아내와 남편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아내와 남편을 서로가 더욱 귀히 여기며 살아가야함을 본문을 묵상하면서 생각하게 해줍니다.

오늘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남편이나 아내에게 
또한 하나님에게  나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시겠습니까?

2012년 11월 27일 화요일

나의 삶속에

아가서2:8-3:1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애틋한 감정을 주며 출발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집에 있고, 이 여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녀를 부르고 있습니다(8). 그러나 그녀는 그가 집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는 창살틈으로 그녀를 엿보고 있습니다(9).

그러나 반전이 되어 3장이 시작되면서 이 여인은 그 사람의 구애에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1-4). 도리어 그녀가 그를 찾고 있습니다(2).

그녀는 그를 자신의 어머니집으로 인도 하고 있습니다(4). 이것은 온가족이 그를 환영하는 의미이고, 이 여인이 그에게 '프로포즈'를 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또한 아주 섬세하면서도, 사려깊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고 있습니다(5).

드디어 이들이 결혼을 합니다.
 6-11절에는 이들의 결혼식 장면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말씀에 의하면 이 사람은 그녀를 자신의 신부라고 6번을 부르고 있습니다(4:8-12;5:1)

본문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는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를 표상해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녀의 가장 내밀한 방으로 이끄는 모습을 보십시오(4).

나의 사랑하는 주님을 나의 삶의 어느부분에 모시고 계십니까?

2012년 11월 26일 월요일

합당한 감사와 찬양

아가서1:1-2: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아가서는 한편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를 읽는 느낌을줍니다. 그러나 아가서는 깊은 영적의미가 담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에는 왕(솔로몬)으로부터사랑을 받는  한 여성이 등장합니다 (2-4). 이 여인은 왕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왕이 어떻게  자기 같은 사람을 좋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습니다.

그녀는 스스로가 핸디캡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5-6절을 요약하면 그녀의 피부가 검다는데 있습니다(원래 검은 것이 아닌 햇볕에 거슬림,6).

그녀는 예쁜모델과 같은  스타일이 아닌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로 부터 거절을 당할까봐, 어딘가에 숨과 싶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그녀를 향한 왕의 마음은 여전히 사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9-13).

본문이 주는 영적인 의미는 매우 깊습니다.
이 여인처럼 죄로 검게 거슬린 나를 과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수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은혜와 자비하심은 한이 없으십니다. 왜냐햐면  영원한 중재자이신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하나님과 나와의 대화록이라고  바꿔 생각해보십시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분께 합당한 감사와 찬양을 드리십시오.

2012년 11월 25일 일요일

신랑되시는 그리스도

시편45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 시편은 왕을 위한 말씀입니다. 이 왕은 특별한 사람인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복을 받고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2,7).

아가서와 같이 이 시편은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을 잘 보여줍니다.
특히 8절이하에는 결혼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결혼은 한마디로 웅장합니다(8-15).

세상의 모든 결혼식은 다 기쁘고 인생에서 특별한 행사 입니다. 결혼은 떠남을 의미합니다.
부모로 부터 떠남을 말합니다. 작년에 영국의 왕자 윌리암과 게이트 미들턴의 결혼식이 세계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왕자도 결혼을 하면 새로운 관계를 위해 그의 가족을 떠나야 합니다(10, 창2:24, 엡5:31).

신약성경은 신랑으로서 그리스도, 신부로서 교회를 말씀합니다(고후11:2,엡5:27, 계19:7,21:9)
본 시편도 신랑 그리스도와 신부인 우리와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신부인 우리를 사랑하시는 신랑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상상해보십시오.

2012년 11월 24일 토요일

내일 종말이..

막13:28-3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13장 전체는 두 사건이 얽혀져 있습니다. 그들중 하나는 과거의 사건 즉 예루살렘 성전 파괴(14) 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의 사건으로 주님의 재림입니다(26).

본문은 무화과나무잎의 비유를 드시면서 주님은 재림과 연관시키시고 계십니다. 무화과 나무 가지고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것은 여름이 가까워짐을 표시해줍니다(28).

무화과 나무잎의 징조 처럼 5-13절의 사건은 재림의 하나의 징조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십니다(32).

주님이 재림을 말씀하실때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삶의 변화입니다. 주님 재림 시기를 알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앞에서 합당한 삶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재림에 대해 우리가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갑자기 오실것이라는 사실입니다(35-36).

본문 말씀은 2천년전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경고의 말씀이지만 21세기를 사는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경고의 말씀입니다(31).

우리주변에는 항상 거짓 메시야, 굴절된 인간관계, 박해등이 항상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신지가 오래되었지만, 그분의 초림이 역사적인 사건임이 분명하셨듯이 재림도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 ' 깨어있으라'(31)가 2천년전이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고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만일 내일 종말이 온다는 것을 안다면 오늘 나의 삶에서 변화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왜 아직 변화되지 않습니까?

2012년 11월 23일 금요일

시대의 징조

막13:1-2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만일 내일 종말이 온다면 오늘 무엇을 할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주님은 그동안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경고 하셨지만 본문에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경고하고 계십니다.

본문의 대화는 4명의 제자들과 주님 사이에 이루어진 것 입니다(3).  제자들은 성전 파괴가 종말의 시작임을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시기를 알고 싶었습니다(4). 그러나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주님은 서로 다른 두가지의 일에 대해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하나는 성전파괴(주후 70년에 일어남), 다른 하나는 종말의 시간에 대한것입니다

종말이 언제 될지 주님도 그 시간을 모르십니다. 대신  제자들과 오늘 우리에게 무슨일이 일어나던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십니다.

무엇보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5). 종말의 때 일수록 미혹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정신을 바짝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자칭 메시야라고 하는 거짓 메시야들이 왔고 올것임을 말씀합니다(6).

또한 박해당할 시기를 위해 준비하라고 하십니다(9-11). 그때에는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할것입니다. 심지어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박해 할것 입니다(12-13). 그렇게해도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종말의 시간에 일어날 일들을 예견하셨지만 한편으로는 큰 소망을 주셨습니다.  땅에 속한 모든 권세가 힘을 잃게 될것이고(24), 그분이 영광중에 다시 오신다는 약속입니다(26-27). 그분의 약속을 기대하며 기다림은 그분이 성경대로 삼일만에 부활하셨고, 성경대로 다시 오실 것이기때문입니다.

오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모슬렘, 힌두교, 불교권, 북한등)이 박해를 당하고 있습니다.어떤 상황에서도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설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2012년 11월 22일 목요일

풍성한 마음으로..

막12:41-4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며칠간의 일이지만 성전에서 다양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성전에서 장사 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고, 종교지도자들이 주님을 죽일려고 모의하고, 함정에 빠트릴려고 하는 질문을 하고, 신학적인 논쟁과,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 등 ... 많은일들이 일어 났습니다.
지금 주님은 앉아서 헌금 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계십니다.주님은 양편을 다 보고 계십니다. 한편에서는 부자들이 헌금을 합니다. 겉보기에 많은 돈을 드렸겠지요(41).
뒤이어 가난한 과부가 헌금을 합니다(42). 이 여인은 너무 가난했습니다.
아마 주님이 말씀 하신것 처럼 지도자들에게 착취를 당했는지 모릅니다(40).
부자들과 가난한 과부가 드린 헌금!
주님이 보시는것은 헌금하는 액수가 아닙니다. 그녀의 마음을 보셨습니다(43).
가난한중에 드린 이 사람의 헌금이 부자들이 드린 헌금 보다 더 귀하게 보셨습니다(44). 하나님은 사람을 쓰실때에나 헌금을 드릴때나 언제나 그 마음을 보십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일관된 원칙 입니다.
헌금을 드릴려고 할때에는 웬지 모르게 인색한 마음이 들때가 많습니다.
항상 마음에 감사와 풍성한 마음이 있게 해달라고 기도 하십시오.
" 모든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29:14)

2012년 11월 21일 수요일

약한자들의 편

막11:35-4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듵는 이들은 즐거워했다고 했습니다(37). 주님의 가르치심은 탁월하셨고, 신령한 지혜가 넘쳤습니다.

주님은 시편110:1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만일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면 다윗이 어떻게 그의 자손을 주님이라고 불렀겠는가?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가 어떤분임을 그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주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당시 성경학자요, 선생님이라고 일컫는 서기관들의 자세에 대해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비판하시는 서기관들의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38-40). 그것은 단순히 그들의 교만에 대한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부정직하고, 사회적 약자인 과부의 재산을 착취하고 겉으로는 경건한척, 아닌척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40).

물론 주님은 서기관들을 비판도 하시지만 한편으로는  언제나 가난하고 약한자들의 편이 되셨습니다(눅1:52-53).

오늘 교회도  사회적 약자들의 편이 되어, 압제당하고, 가난하고, 약한자들을 도와야 되지 않을까요?

2012년 11월 20일 화요일

저의 삶속에

막12:28-3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계속  질문을 받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서기관이 던진 질문은 진심이 담긴 질문입니다.

서기관의 질문은 모든 계명중에 가장 중요한것이 무엇인가?(28) 하는 질문입니다.

 주님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시면서 바로 대답하셨습니다(29-31).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매일 아침과 저녁 기도시간에 신6:4-5을 암송하면서 기도 합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고,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삶에 절대적 중심임을 고백하면서... 바울 역시 롬12:2에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31). 이 말씀은 레19:8절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모든 바른관계의 출발입니다. 세상에 흉악한 일들, 범죄 등등 ... 모든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굴절된 결과입니다.

놀랍게도 이 서기관은 매우 흡족해합니다(32). 서기관이 주님의 말씀에 동의한것은 복음서를 통해 본문이 처음일것 입니다.

 그는 주님보다 한걸음 더 나갔습니다. 주님과 이 서기관은 성전안에 있었습니다. 서기관은 이 계명이 모든 번제물과 기타제물 보다 낫다(33)고 합니다.

주님은 그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다고 칭찬하십니다(34).

 그렇습니다. 말씀의 실천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장 신앙적인 행위입니다. 이것이 모든 번제물보다 모든 제물보다 즉 예배보다 우선입니다

시편기자의 기도가 생각이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시40:8)
주님, 오늘 저의 삶속에서 주님의 뜻을 즐겨 행하게 도우소서!!

2012년 11월 19일 월요일

나쁜 질문

막12:18-2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주님에 대한 도전은 한층 가속화 되고 있습니다. 유대주의에 속한 모든 지도자들이 주님을 향해 도전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11:28), 장로들(11:27), 바리새인과 헤롯당(12:13), 본문의 사두개인들(18)...

본문에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대한 조소 (嘲笑) 섞인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무신론자들 역시 사두개인들과 같은 질문을 할것입니다.

신25:5절이하에 보면 아이가 없는 과부는 그의 남편의 형제와 결혼을 해서 그의 남편에 대를 잇게 하는 '계대 결혼' 제도가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이를 바탕으로  질문을 합니다.

만일 이런일이 6번이나 되풀이 된다면 부활때에 이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19-23) 하는 질문입니다. 듣기에 따라 매우 그럴듯 한 질문 같습니다. 부활을 부인하는 그들의 생각이 저변에 깔린 내용입니다.

이에대해 주님은 즉각 대답을 하셨습니다. 만일 그들이 성경을 제대로 안다면(24-25), 부활 때에는 결혼이라는 것이 없음을 알것이다.

또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이 아직 살아 있음을 말씀합니다(26-27), 이것은 이들이 부활을 기다리고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 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죽음이란 영혼과 육체의 분리됨입니다. 영혼이 떠난 육체는 부패해지고 흙으로 돌아갑니다.그렇다고 죽은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영혼은 천국에서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지옥에서 육체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중간상태((Intermediate)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서 죽은자들은 죽은것이 아닌  영광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부활을  확언해주시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고 있음을 책망하십니다(24).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천지가 그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때 처럼  죽은자들을 향해 말씀하실때 그들은 그 말씀에 순종해 죽음에서 다시 일어날 것 입니다.

주변에 믿음이 흔들리는 형제, 자매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믿음이 견고하게 설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2012년 11월 18일 일요일

일어나 도우소서

시44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어려운 시간을 보낸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자연히 어려움에 관한 기도일것입니다.
힘든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마음도 여유가 없고, 생각도 혼란 스럽습니다.

믿음이 아주 좋은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은 하나님께 마음도 많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염려와 걱정이 더 앞서기 때문입니다. 어떤때는 그야말로 아무말도 하기싫고 모든것이 귀찮아질때도 있습니다.

본문의 시편기자도 아마 이와 같은 심정인것 같습니다. 본 시편은 민족적 절망 가운데 기록된 말씀입니다(9-10). 본문을 읽어가면서 시편기자가 현재 자신의 민족이 처한 상황에 대해 말하는것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당시 현실을 상상해보십시오. 거기서 그의 깊은 감정을 엿볼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현재 이웃민족에게 조롱을 당하고 있고(13-14), 그들의 지도자들도 그렇습니다(15-16). 하지만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4).

그는 모든 승리의 근원은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5-7). 또한 그는 하나님은 과거에도 신실하게 행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1-3). 그리고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 임을 알고 있습니다(21).

그는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에 이런 고난을 허락하셨는지? 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모든 촛점을 마추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정직하게 하나님께 말하고 있을뿐입니다(23-26).

본 시편은 어려움에 처한 개인이 그의 심중에 있는 말을 하나님께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저의 주목을 끈 말씀은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26) 입니다.

이 말씀으로 오늘 하루의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2012년 11월 17일 토요일

하나님보다

막12:13-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죽음과 세금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입니다.  세금을 좋아하는 사람은 세금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에는 세금에 대한 문제를 제기함으로 주님을 함정에 빠트릴려고 하고 있습니다.그래서  바리새인과  헤롯당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13). 바리새인과 달리 헤롯당은  친로마정부파들입니다.  본문에는 주님을 책잡을려고 서로 힘을 합하고 있습니다(14).

이들이 주님께 한 질문은 보통 사람으로는 금방 답하기 힘든 교묘한 질문입니다.
 세금을 로마정부에 바치는 것이 옳은가? 아닌가? 하는 질문입니다.

만일 주님이 옳다고 한다면 민족주의가 강한 유대인들로부터 강한 반감을 사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이 아니라고 한다면 로마정부와 로마인들에게도 책잡히게 됩니다. 교묘한 술책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간악함과 위선을 보셨습니다(14-15).
이에 주님은  가이사의 형상이 있는 동전을 가져와 보이라고 하셨습니다(주님은 왜  동전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지?...)

가이사의 형상은  그의 권위를 나타냅니다. 주님은 지혜로운 대답을 하심으로 (17)그들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를 분리하지 않으셨습니다.세상의 권위(통치자, 정부)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세상의 권위를 존중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것은 하나님의 권위입니다. 만일 세상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가 충돌한다면마땅히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해야합니다.

혹 하나님 보다 인간의 권위를 더 두려워하지는 않습니까?



2012년 11월 15일 목요일

권위

막11:27-3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 순종해야 합니까?
종교다원주의가 성행하는 이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성전에서의 주님하신 행동은 (15-17) 율법학자들과 대제사장들의 반응을 강하게 이끌어내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18). 하지만 본문에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할자들 뿐만 아니라 장로들까지 합세한 상황입니다(27).

이들은 71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유대주의에 골격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예상대로 이들은 주님께 ' 네가 무슨 권위로 , 또한 누가 네게 그런 권위를 주었는지'를 물었습니다(28).

이 권위에 대한 질문은 오늘도 계속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구원자이신가?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는가? 다원주의는  하나님과 인간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주님의 권위를 격감 시킬려고 합니다. 사탄의 계략입니다.

이들의 질문에 대해  주님은 오히려 다른 질문으로 역공을 하십니다(29-30).
주님의 질문은 상당한 기술적인면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지혜를 엿볼수 있습니다.

주님은 질문을 던지면서 자신과 세례(침례)요한과 연결을 시키고 있습니다.
즉 요한의 세례(침례)가 하늘로서 온것이냐 사람으로 부터 온것이냐? 하신 질문입니다(30).
이 질문은 이래도 걸리고 저래도 걸리는(31-32) 절묘한 것이었습니다.

높은 성경지식과 권위를 자랑하던 이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결국은 모른다고 대답함으로 (33), 그들 스스로의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참된 권위자이신 주님께 권위를 묻는것 자체가 얼마나 모순된 질문입니까?
나의 삶속에 주님의 권위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2012년 11월 14일 수요일

용서

막11:20-2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어제 본문에는 주님께서 성전을 정화 시키는 일을 하시기 전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이 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습니까? 주님이 단지 배가 고파서? 하지만 막상 열매가 없는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화가 나셔서 저주 하신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호세아9:10, 미가7:1-6,렘8:13,29:17).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보시고 주님의 한탄하심입니다.

다음날 베드로는 주님이 말씀하신것이 기억하며 그 나무를 보았을때 나무가 뿌리부터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20-21).

베드로가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한 것은 이번만이 아닙니다(14:72).

그러나 주님은 무화과 나무가 마른 사건을 오히려 믿음(22)과 기도(24)에 대해 가르치시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믿음과 기도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믿음은 기도의 능력을 더욱 증가 시키고 기도는 믿음을 북돋워줍니다. 하지만 기억할것은 믿음과 기도는 우리가 구하는 것 마다 받게 하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믿음으로 하는 기도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 할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25).

아직 마음에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2012년 11월 13일 화요일

분노

막11:12-1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두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는 사건, 다른 하나는 성전을 정화시키는 사건, 이 두사건속에서 주님의 모습은 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두사건은 당시 이스라엘의 시대상을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성전을 정화 시키는 사건이 본문의 중심주제입니다.예루살렘에 도착하신 주님은 성전에 들어가 먼저 둘러보십니다(11).

그런데 주님은 다시 성전에 오셨습니다(15). 그러면 무엇이 주님으로 하여금 다시 성전에 오게 했습니까?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15-16).

그것은 성전에 예배드리러온 자들이 희생제물을 사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관행화 되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성전을 관리하는 자 가 이방인 뜰에서 사고 파는 행위를 묵인해주고 있었습다. 묵인해주는 댓가로 댓가성 뇌물을 받았을것입니다.

희생제물을 파는 장사꾼들은 폭리(利)를 취했습니다. 이것이 예배자들로 하여금 큰 부담을 갖게 했습니다.

이장면을 본 주님의 분노는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분노가 극에 달하신 주님은 성전을 난장판으로 만드셨습니다.주님은 선지자들의 말을 인용하시면서(17, 사56:7;렘7:11)"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굴로 만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교회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예배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교회안에 세속주의, 소비주의, 물질주의,상업주의등 혼합주의가 들어와 이것이 복음인냥 일반화 되어 있지는 아니합니까?

만일 그렇다면 성전에서 분노하셨던 주님의 모습을 기억하십시오. 

2012년 11월 12일 월요일

이분이 가신 길

막11:1-1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주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주님을 보고 군중들은 매우 열광했습니다(8-10).

주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모습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10).
비록 마가는 마태와 요한처럼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이 장면은 스가랴9:9절과 연결된것입니다.

이렇게 환호를 하던 군중들은 얼마지나지 않아 그 열광적인 환호가 적개심으로 바뀝니다(막15:13-14). 열광주의는 금방 돌별할수 있는 위험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박수와 갈채를 좋아하며 사는 사람들은 얼마지나지 않아 큰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런면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들이 목회자들입니다.

또한 교회에서 행하는 많은 이벤트, 많은 프로그램등은 금방 실증을 느끼게 되고 공허함을 만들기 쉽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조용한 가운데, 말씀안에서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또한 순종과 신실함은 주님을 찬양하는 참된 증거입니다.

군중들과는 다르게 예루살렘을 향하는 주님의 마지막 여정은 웬지 쓸쓸함으로 가득찬 개선식과 같은 느낌을 갖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제자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제자의 도 라는 순간적으로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나귀를 타신 이분이 가신 모든 길을 조용히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이 아닐까요?

2012년 11월 11일 일요일

갈망

시42-43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이 두시편은 매우 인상적이고, 감동을 주는 말씀입니다.
본 시편기자는 매우 깊은 절망의 늪에 있었다가 그곳을 빠져나와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찬양으로 가득차 있는 아름다운 내용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런 고백이 나와야 되지 않을까? 하고 본문을 묵상하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42:5,11,43:5).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힘든 상황에서 마치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 상태에서 그는 자신에게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 하는 내가 왜 낙심하며, 불안해 하는가?

또한 그는 하나님의 인도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43:3). 그의 주변에 그를 향하여 조롱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은것 같습니다(42:3,10;43:1-2).

힘든일이 거듭되면 하나님이 마치 침묵하시는 것 같고, 멀리 계시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수가 없습니다(42:9;43:2).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께 항의하고 싶은 생각이 들때가 많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42:9) 하며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의 시련의 골짜기에서 벗어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합니다(42:11,43:5).
낙심과 절망의 느낌이 일시적으로 들지만 결국 찬송하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특히 이 두시편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첫부분입니다.
"내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42:1)
이 표현보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을 충분하게 표현할수는 없을것 입니다.

자신을 찾는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주님! 제 영혼이 오늘도 주님을 찾기에 갈급합니다.
주님을 갈망합니다. 저의 심령에 은혜를 더하여 주소서!!

2012년 11월 10일 토요일

요셉의 고백

창50:15-2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야곱은 죽으면서 자기가 죽은 후 혹시 요셉이 형들을 해할까봐 형들을 해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긴것 같습니다((16-17). 형들은 17년전 사건때문에 요셉이 자신들을 해할까봐 두려움속에 있었습니다.

야곱도 같은 상황을 맞이한적이 있습니다. 이삭이 죽을때가 되자 에서의 복수가 두려워 미리 도망을 쳤습니다(창27:4).

지금 아버지 야곱이 죽은 상황,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요셉은 얼마든지 형들에게 복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얼마나 감동적인 말입니까?
".. 두려워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19)

이 말은 사도바울이 로마서에 한 말과 같은 말입니다."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롬12:19).원수는 내가 갚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요셉의 그 다음말은 더욱 아름다운 말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오늘 같이 많은 생명을 구하셨습니다"(20).요셉은 모든 상황, 사건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어떤상황이든 그것을 다 사용하셔서  항상 선으로 바꾸십니다. 때로는 인간의 실수까지도 선으로 바꾸십니다.

힘들일, 상처받은 일, 좋은 일, 그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항상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그러므로 믿음의 삶이란 이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는 삶입니다. 

오늘 나의 삶에도 이 요셉의 고백이 있습니까?

2012년 11월 9일 금요일

항상 행복한 사람

창49:29-50:1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나이 많은 야곱은 죽음이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그의 죽음은 축복된 죽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둘러 싸인채, 자신의 장례에 대해 부탁을 하고, 그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다한채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는 매우 만족했고, 자신의 조상들이 잠든곳에 묻히고 싶었습니다(29).
우리도 때가 되면 죽음을 맞이 하게 될 것 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는 믿음으로 죽음앞에서 야곱처럼, 두려움없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주님앞으로 갈수 있음을 믿습니다.

평생 주님의 도구로 살다가 마지막 삶은 평화롭게 끝을 맺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믿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마음껏 축복하면서, 살아오면서 나에게 악하게 행한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면서, 주님과 더불어 앞서간 성도들을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주님앞에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죽음입니다.

바울은 사망이 쏘는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고전15:55-56). 하지만 주님이 십자가에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사망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우리 자녀들의 앞날을 예견할 수는 없지만, 비록 그들에게 많은 유산을 물려줄수는 없지만. 그들에게 줄수 있는 최고의 유산인, 그리스도께서 주신,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약속을 물려줄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살아 있으나 죽으나 항상 행복한 사람입니다.

2012년 11월 8일 목요일

회개

창49:1-2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야곱은 죽기전에 아들들을 모아놓고 그들을 위해 축복하며 예언을 합니다. 죽어가는 아버지가 나를 위해 축복한다면 참 아름다운 일일 것입니다.
특히 유다와 요셉은 아버지로부터 축복의 말을 들었습니다(8-12,22-26). 그들의 앞날이 번성할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벤냐민, 납달리, 아셀, 단, 스불론의 장래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 대한 예언은 좋지 않습니다. 이들이 과거의 지은 죄가 이들의 앞날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인 빌라와 동침을 했습니다(창35:22), 시므온과 레위는 누이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한 것에 대한 복수를 무자비하게 했습니다(창34). 이들이 과거에 저지른 죄에 대한 댓가를 장래에 치루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들이 받을 축복이 유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유다도 과거 며느리 다말과 동침을 한 부끄러운 일이 있었습니다(창38). 그러나 죄를 대하는 태도가 이들과 너무나 달랐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자신들이 한 행동을 정당화 시켰고(34:31), 유다는 깊이 뉘우쳤습니다(38:26).
즉 시므온과 레위에게는 '회개'가 없었고 유다는 '회개' 했습니다.

나의 과거의 행동은 반드시 장래에 영향을 줍니다. 문제는 회개 입니다. 회개는  죄를 씻는 통로일뿐만 아니라, 죄의 댓가를 바꾸어 놓습니다.

 무슨 죄를 지었던지  주님의 십자를 의지하며 회개하는 자를 다시 회복시키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012년 11월 7일 수요일

하나님의 선택

창48:1-2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세상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규칙이란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역할을 해줍니다.
야곱의 시대에는 장자권이 있었습니다. 장자는 가정의 제사장인 아버지의 축복을 받고, 아버지의 소유를 두배로 받을수 있고, 제사장 역할을 할 수 있는 축복된 특권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본문에는 야곱이 요셉의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들은 손자들이었지만, 야곱은 아들처럼 대하고 있습니다(5)

이상하게 야곱은 형인 므낫세가 아닌 동생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을 얹어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13-14). 이 장면을 본 요셉은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고 아버지의 오른손을 다시 므낫세에게로 옮기려 했습니다(17).

비록 장자라도 장자권을 잃어버리고 동생에게 장자의 축복이 넘어가는 예를 창세기를 통해 볼수 있습니다. 가령, 가인 대신 셋이 그러했고(창5), 이스마엘 대신 이삭(창21), 에서 대신 야곱(창27), 므낫세 대신 에브라임(본문).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기준으로 알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인간의 상식과 규칙을 넘어설때가 많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울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한 천국의 기업을 이어받을 자녀가 되었습니다(롬8:15-17).

인간의 기준과 상식을 뛰어넘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2012년 11월 6일 화요일

먼저 무엇을?

창47:13-3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현대의 최첨단의 기술 문명은 그 어느때보다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윤택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이런 기술문명의 혜택은 창조력의 산물입니다.

요셉은 지혜가 탁월한 사람입니다. 물론 그의 지혜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 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요셉과 같은 지혜가 필요하다고 더욱 느껴집니다.

본문의 요셉의 계획은 애굽사람들의 소유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취하므로 그들이 생활을 유지하게 만들었습니다. 먼저 그들의 돈을(15), 다음은 가축을(17), 다음은 땅을 마지막으로는 그들 자신(20-21)이었습니다.

이렇게 기근의 시대에 곡식을 얻는 것은 그 어떤것으로도 힘이 드는 상황입니다. 그러면 요셉은 왜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였을까? 얼마든지 자선적인 행동을 할 수가 있는데도..?

사실 요셉의 행동은 구약의 가르침에 기인한것 입니다(레25:14-43). 비록 요셉이 그들의 소유물들을 취하고,또한 땅의 소유권을 포기하게 하였지만 그들은 그것을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마치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처럼..

요셉은 그들에게 20퍼센트의 세금만 거두고 나머지의 이익은 그들이 가지도록 해서 그들이 풍족하게 살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애굽인들은 자신들의 소유물이나 자신들을 바로왕에게 바침으로 삶을 영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그들의 것을 바로왕에게 바침으로 삶을 영위해간것 처럼, 우리 소유와 삶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주실 풍성한 은혜를 위해 먼저 내가 무엇을 주님께 드려야할지를 생각해 봅니다.

나의 무엇을 주님께 드리겠습니까?

2012년 11월 5일 월요일

하나님의 인도

창47:1-1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창46장에서 야곱은 그의 아들들과 그들에게  속한 온 집안 식구와 함께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건너와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야곱의 가족이 바로왕을 만났을때 그들이 기대하지 않았던 환대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바로를 만나기전 해야할 말을 미리 준비 시켰습니다(46:33-34).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만 우리가 해야할 일은 최선을 다해 준비해야함을 다시 생각하게 해줍니다.

이런면에서 형들의 대답은 완벽한 것입니다(3-4).바로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바로는 이들이 요구한것 보다 더 많은 부분을 보너스로 주었습니다.

가장 좋은 땅을 주었을뿐만 아니라 그들을 신뢰해 바로의 가축들을 돌보는 관리인으로 취직을 시켜주었습니다(6).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넘치도록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삶의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때로는 좋은 길을 만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험악한 길을 만나고 심지어는 막다른 길목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럴때는 가던길을 멈추게 됩니다. 그러면 뜻밖에 다른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거기에서 험한길을 걸었던 과정속에서 힘들었던 것들이 회복이 되기도 하고,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분이 인도하시는대로 따라 가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2012년 11월 4일 일요일

늘 나를

시41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많은 얼룩이 있습니다. 본문의 시편기자도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원치않는 병에 걸리기도 하고(3), 때로는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하고 이렇게 육체와 정서의 고통을 당할때가 많습니다.

사람의 삶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언제든지 접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남에게 심한말을 듣기도 합니다(5-6), 때로는 남으로 부터 판단을 받기도 합니다(7).

심지어는 가까운 친구나 가족으로 부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9).

더욱이 영적인 고통을 당합니다. 죄가 생각이 나고. 나는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는 죄인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음에도.. 이런 깊은 영혼의 밤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삶속에 받는 여러가지 고통들을  그의 백성이라고 면제해준다고 하신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하나님은 이런 고통을 견딜수 있는 힘을 주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문제가 닥쳐와도, 어떤 마음의 상처를 받아도 문제 될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1-3),  삶에 일어나는 문제들보다 더욱 강하게,더욱 능력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탁하고 있습니다(11-12).

늘 나를 강건하게 하시고 능력으로 붙드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변에

살후3:6-18, 오늘의 묵상입니다.
현재 세계경제가 어려워짐으로 미국, 캐나다의 실업율이 증가 하고 있습니다. 일을 하고 싶지만 일자리 찾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안에 문제를 일삼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6-11).이 경고는 일을 하고 싶으나 할수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 일할수 있는 여건이 충분함에도 일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초대교회는 첫 출발때 부터 교회안에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구제제도가 있었습니다(행4:34-35, 6:1-2). 불행하게도 데살로니가 교회안에는 이런 교회의 제도를 남용하는 이 들이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일을 할 수 있지만 교회의 도움을 받으면서 게으르고 안일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노동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원리입니다. 노동은 타락으로 인해 생긴것이 아닌 타락이전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은(창1:28)은 노동의 명령입니다. 노동이 힘든것이 아니라 타락으로 노동이 힘들어 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일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직업을 천시하지 않고 신성하게 여기며 그 노동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노동관입니다.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벗어나는 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바울은 직업을 갖지 않고, 게으르게 살면서 문제를 일삼는 이들에게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6,12, 살전4:11-12;5:14). 하지만 교회에서 문제를 해결할 때에는 사랑으로 해결해야 합니다(6,14,15).

특히 바울은 친히 자신이 본을 보였습니다. 그도 역시 주야로 일을 하면서 교회를 섬겼습니다(7-9).

 주변에 일을 하고 싶지만 일자리가 없어서 경제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형제, 자매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2012년 11월 2일 금요일

나의 기도

살후3:1-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있고, 당할것입니다. 바울이 받은 고난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고후11:23-29).

 본문의 마지막절 5절을 보면 새삼스러운일이 아님을 더욱 느낍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1-2).

바울은 직면한 박해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때마다 자신을 도우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장 적당한 표현은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라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아무리 심약한자라도  기도할때에 그를  강하게 하시고, 상황을 바꾸어주시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늘 경청(傾聽)하시기 때문입니다(3).

본문에서 바울의 또 다른 기도제목을 볼 수 있습니다(1,2,5). 그는 자신의 안전보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고, 복음이 잘 증거 되도록 기도해달라고 합니다. 바울의 이런 자세는 오늘의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이 본 받아야할 모습입니다.

그리고 또하나의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한 기도는 그들을  고난으로 부터 구원해달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것을 견딜수 있는 힘을 달라는 것 입니다(5).

요즈음 나에게 힘든일이 있습니까? 그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인내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2012년 11월 1일 목요일

적그리스도

살후2:1-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적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적그리스도는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불법의 아들입니다(4).

바울은 여기서 그에 대해 더 이상 상세하게 묘사하지 않지는 않습니다(9-11).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적 그리스도가 나타날것을 예상하며 살아야 합니다(9,마24:11,12,23,24).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들의 도시에서 역사는 불법의 아들의 힘을 잘 알고 있습니다(7,행17:5-9). 어느때나 어디에서든지 사탄의 역사는 강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앞으로 나타날 적그리스도에 대해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마귀를 이미 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적 그리스도가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든지 두려워 하지 말고 더욱 힘써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이 흉흉하고 불법이 판을 치고, 사회가 더 악해진다 해도 그럴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견고하게 서야 합니다(16).

이것이 적그리스도를 이길수 있는 힘입니다.

2012년 10월 31일 수요일

이것이 사탄을 이기는..

살후1:1-1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2011년 8월,9월 30명의 나이지리아 사람들이 3명의 다른 나라에서 온 괴한들로 부터 습격을 받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간다의 이슬람을 믿던 14세 소녀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아버지로 부터 6개월동안 감금을 당한 일이 발생했습니다(출처: Open Doors). 같은달 인도의 한 목사가 반 기독교 단체로 부터 심하게 테러를 당했습니다(출처:Gospel for Asia).

본문의 바울의 말(4-11)은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처했던 것 처럼 오늘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가장 적절한 말인듯 합니다.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랑과 믿음이 계속 성장해 나갔습니다(3-4). 인간이 행하는 박해는 하나님의 일을 중단 시킬 수 없습니다. 그것은 1세기나 오늘 21세기나 동일합니다.

심한 박해가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자체가 바로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보여줍니다(5).

박해를 당하는 것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크게 고통 스럽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위로와 안식으로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6-7).

환경이 평안하지만 늘 걱정과 불안속에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면증으로 수면제를 먹어야 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진 박해와 압박 가운데지만 안식을 누리고 마음의 말할수 없는 평강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은혜입니다.

바울이 박해 받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해 기도한 것 처럼 오늘 우리도 이 세상에 주님을 위해 박해를 받는 형제, 자매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11-12).

또한 박해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말고 그들이 구원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8-9). 이것이 사탄을 이기는 것입니다.

2012년 10월 30일 화요일

그리스도인의 삶

살전5:12-2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데살로니가전서 마지막 부분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지만 또하나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 신앙을 평가 할수 있습니다(12-15). 그 관계성의 출발은 사랑과 존경입니다.

교회안에 신앙이 흔들리는 사람, 아니면 신앙적으로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 등등 여러모양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23-24).

 특히 사람과의 관계성에는 인내의 미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대하여 오래참으시는 것 처럼, 우리도 서로 인내해야합니다(14).

 누군가가 나를 무시하거나 좋지 않는 태도로 대할때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됩니까? 똑같이 대하고 싶지요. 자연적인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가르치신것 처럼 그들에게 선으로 복수를 하는것 입니다(15;마5:41-43). 우리의 본성을 거스리기에 힘든일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나도 계속힘들고 상대방도 힘들고 악한것이 계속 순환되지만 선으로 갚으면 악을 풀어놓는 자유가 임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거룩함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경건하지 못하게 사는 형제들을 권면해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그렇게 행하였습니다(4:11-12,5:14,살후3:6-14). 누군가를 권면하는 것은 어려운일이지만 그 권면은 결국 공동체를 거룩함으로 인도합니다(23).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큰 특징은 끊임없는 감사입니다. 그 감사의 원천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우리를 구원하심입니다(16,18).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시고 죄에서 자유케 하셨다는 것 하나만으로 평생 감사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 생활의 활력은 기도생활입니다. 기도하는 일에 힘을 다해야 하고(17), 기도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도 힘을 다해야 합니다(19-22).

오늘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렇게 살아보지 않겠습니까?

2012년 10월 29일 월요일

재림

살전5:1-1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종말'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나 그렇지 않는 사람들나 관심사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은 재림과 연결 시켜 생각을함으로 자연히 주님의 재림에 대해 관심을 갖습니다.  또한 주님의 재림에 대한 지나친 관심 때문에 '시한부 종말론자' 들이 생겨난곤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역시 주님의 재림을 준비 하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주님의 재림시기를 아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들의 관심사를 알고 주님의 재림에 대한 언급을 합니다. 그러면서 " 때와 시기에 관하여서는 쓸것이 없다"고 합니다(1). 바울은 주님이 재림에 대해 가르치신것 그대로 그들에게도 가르치기를 원했습니다(마24:36,37,42-44).

바울의 요지는 간단합니다. 주님의 재림 시기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재림은 생각지 않는 시간에 갑자기 임하시기 때문입니다(2-3).

그러나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빛의 아들,5)은 주님의 재림에 대해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햐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미 우리를 정죄의 심판으로 부터 분리 시키셨기 때문입니다(9)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날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는 것 입니다(8).

 나는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살아갑니까?

2012년 10월 28일 일요일

죽음

살전4:13-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죽음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막상 내 주변 사람이 죽음을 맞이한다면 당황하게 되고,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본문의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주님이 재림하시기전에 죽음을 맞이한 성도들을 어떻게 될까? 하는 의구심과 걱정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기전 죽은 성도들은 영생을 얻지 못하고 부활에 동참하지 못할까? 하는 오해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소망을 줌으로 염려를 불식시켜줍니다(15),(마24:23-31).

주님의 재림 사건은 전 우주적인 사건이 될 것입니다(16). 성도들(죽은 사람이나 살아 있는 사람,14,16,17)에게는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것입니다.

주님은 죽음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 이미 말씀 하셨, 바울은 죽음은 잠자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13).잠을 잔다고 표현한것은 죽음이란 임시적 상태임을 말해줍니다.

 물론 사랑하는 이가 죽으면 슬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슬픔은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소망이 없는 슬픔이 아닙니다

죽음에는 이별의 아픔이 있지만, 그것은 잠깐의 이별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다시 만나게 될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2012년 10월 26일 금요일

거룩함의 축복

살전4:1-12, 오늘의 묵상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믿음안에서 강건하였고(3:8), 복음의 위대한 증인이 되었습니다(1:8).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축복하였습니다(9-10). 하지만 바울은 그들이 바울에게서 배운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행하기를 원했습니다(1,10).

그리스도인으로서 경건한 삶을 산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치는 더욱 높습니다. 특히 경건하지 못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거룩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거룩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1,7).

그러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동참하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물어보십시오. 나의 행동, 말, 생각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몸은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고전6:19).이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하나님을 욕되게 할수 있습니다.

인간 생활속에 피할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성생활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건강한 성생활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의 내용이 나옵니다(3-6). 건강한 성생활, 성경적 성생활의 정의는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아내와 남편이 한몸을 이루며 평생 서로 사랑하고 의탁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서구사회, 심지어는 한국에도 성적으로 문란한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한국을 갈때마다 늘 보게 되는  도심지를 벗어난곳에  소위 러브호텔, 펜션들이  여전히 홍수를 이루고 있고, 가까운 유원지에는 좋은차를 타고온 나이든 사람과 젊은 여자가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TV 프로에 나오는 드라마, 음악,예능프로에도 서로 질세로 선정적인 장면들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있던 로마시대, 헬라의 문화 역시 문란한 성 문화가 범람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경건한 가정을 이루며 당시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거룩함은 나를 구별되게 만들어줍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2012년 10월 24일 수요일

굳건히

살전2:17-3:5,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서 복음 전파자의 감정 상태를 잘 알수 있습니다(17,19,;3:1,5). 본문에 비친 바울의 모습은 복음을 전하고 그냥 가버리는 그런 설교자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전한 복음을 들을 사람들에 대한 깊은 영적  관심을 한시도 잊어버리지 않는 목회자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또한 바울의 관심은 새로이 믿는 사람들을 넘어 광의(廣義)적으로 하나님의 가족에 대한 관심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넓은 의미로 하나님의 한 가족입니다

가족의 특징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서로 돌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서로 돌보아야 합니다.

특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받을  환난을 준비 시키는 데 관심을 가졌습니다(3-4). 초대교회때는 예수를 믿는다는 자체가 고난을 의미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말씀 하셨듯이 고난과 박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하나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눅14:27).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일이 없는 한국이나 북미주의 사는 우리에게는 이 사실이 현실감이 없어 보이지만 ,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때로는 손해를 당하는 일이 생겨도 감수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참아야 할 일이 생기는 일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고, 그 믿음을 반석 위에 올려 놓거나(3,5) 아니면 더욱 믿음을 강건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7-8).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지금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진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1-5). 세상을 살다 보면 믿음이 약해질 때가 있고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누군가 신앙의 용기를 준다면 큰 위로가 됩니다.

오늘 내가 용기를 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 입니까? 아니면 나를 격려해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이 일에 나를 쓰시기를 원하고 누군가를 나를 위해 사용하시는지 모릅니다.
주안에서 굳건하게 서십시오!!!

2012년 10월 23일 화요일

방해를 받을 때

살전2:1-1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할 때에 유대의 불신자들은 바울의 복음 전파를 최대한으로 방해 하였습니다(행17:5-15). 복음 전파에는 이렇게 방해가 큽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싸움입니다. 항상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목회 사역도 그렇고, 기도하는 일도 그렇고...

이들은  새로 믿는 신자들의 마음을 흔들려고 노력을 했는지 모릅니다. 영적지도자를 불신하게끔 하였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자신이 어떻게 사역을 했는지를 변호하는 것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3-5).

사탄이 가장 공격하기 쉬운 방법은 그리스도인이나 지도자들에 대한 나쁜 평판을 만들어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바울에 따르면(혹은 베드로도 역시 벧전2:11-12) 거룩하고 흠없는 삶을 살아서 그것을 이겨야 함입니다(10).

 지도자들의 삶의 기대치는 상당히 높습니다(2-12). 지도자는 성경적인 삶, 높은 수준의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지도자를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이 되도록(4),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유순하면서도 긍휼함(7-8)으로 희생적인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9)  지도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을 격려함으로 주님의 일을 잘 감당하도록 해야야 그들을 낙심 시켜서는 아니됩니다.

 많은 방해가 있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곳이나 어느때이든지 역사하심을 확확신 하고 있습니다(13-15).

복음을 전하다, 아니 하나님을 거스리스는 문화속에서 살면서 그리스도인답게 살 때 비난을 당할 수 있고, 부당함을 당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미리 아시고 주님 때문에 핍박을 당할때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정으로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음을 알려주는 표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5:1-12)

오늘 주위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흠없고 경건한 삶을 살아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또한 복음을 듣기 싫어 하는 사람들에게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도록 말입니다.

2012년 10월 22일 월요일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우리가..

살전1:1-10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고 세워진 데살로니가 교회는 여러면으로 부터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살해의 위협, 공개적 망신, 체포의 위협...

사실 복음을 전하던 바울과 실라도 숱한 방해 때문에 데살로니가를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박해를 받으면 교회가 흔들릴 수 밖에 없는데 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박해가 있고 방해가 있어도 복음 전파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는 그 어느 세력도 막을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4,5,6,7,8)

이들이 어려운 가운데도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인내력이 강해서 보기 보다는 그들의 믿음을 붙잡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교회지도자들이 죽임을 당하고, 도피하고... 교회가 이렇게 상당한 어려움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일은 중단 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최대 관심은 교회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주님이 세우신 교회마다 그 교회가 어떤 형편에 있던간에 하나님은 그 교회를 붙잡고 계심을 믿습니다. 무엇보다 성령님이 큰 확신을 주심으로 ...(5). 확신이 없으면 흔들릴 수 있지만 확신이 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굳건한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전적인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도리어 바울이  이들로 부터 큰 위로와 도전을 받았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신실하게 주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는 이들은 바울 뿐만 아니라 다른 믿는 자들에게도 큰 힘을  주고 있음을 상기 시킵니다(9).

박해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이 그들을 붙들고 계시고, 성령님이 확신을 주시고 주위에 기도하는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빚이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입니다. 또한  주변에 홀로 외로이 신앙 생활하는 분들에게도 신앙의 격려를  주지 않겠습니까?

2012년 9월 27일 목요일

거스리며

요일2:28-3:1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서 요한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 입니다(3:2). 얼마나 은혜스러운 선언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인 큰 이유는 주님이 오셔서 나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죄의 기록에서 모든 흔적을 없애셨기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아직 죄를 짓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습관적으로 짓는 죄는 없습니다. 가령 분노를 통제하지 못한다던가, 거짓말을 밥먹듯이 한다던가, 도박을 한다던가, 외도(外道)한다던가..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고(3:10),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3:6).

또한 하나님의 자녀는 미혹당하지 않는 의인입니다(3:7).  이 세상에는 미혹하는 요소들이 너무 많습니다.  도덕적 기준이 해이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 그것이 당연한 것 처럼 받아들여지는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의로운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스리며 나아가듯이 하나님의 자녀는 이런  세상의 흐름에 반(反)하여 성경적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흐름에 역행하며 사는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려움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거기에 계시며 도우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을 감사하십시오.
세상의 문화를 거스리며 살때 다가오는 어려움을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2012년 9월 26일 수요일

세상의 것들

요일2:15-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서 요한은 금욕을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금욕의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연은총을 즐기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스포츠를 즐기고, 좋은 소설을 읽고, 좋은 영화를 보고, 아름다운 음악을 보고 , 여행을 가고...
그러나 이것이 삶의 전부가 아님을 말합니다(15).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최신 유행하는 옷, 돈, 운동... 우상이 되어서는  않됩니다.

탐욕이나 정욕을 따라 살아서는 않됩니다(16). 사람들은 자신의 원하는 것을 가졌거나, 성취했다면 과시하거나 그것을 성공의 척도로 삼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는  최신 유행을 좇고 싶은 욕망, 자신이 중요한 존재임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이런 욕심들의 세상의 삶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요한은 이런욕망들은 하나님에게서 온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16).

신문, 음악, 텔레비젼, 인터넷 할 것 없이 탐욕을 자극하고 성적자극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탐심과 섹스와 이기주의에 흠뻑 빠져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강하게 말한것 처럼  본문 역시 이런 세상의 것들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 허무하게 만들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지나가고 없어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사는자에게 오는 행복과 축복은 영원합니다(17).

2012년 9월 25일 화요일

주님이 사셨던 것 처럼

요일2:1-1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서 요한은 먼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언급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의 죄와 세상의 모든 사람의 죄 때문이다고 강조합니다(2).

이어서 순종은 주님을 아는 열쇠임을 말합니다(3).주님을 안다고 하면서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가 무슨 말을 하던, 아무리 심오한 말을 한다고 해도 주님을 모르는 자 입니다(4).

만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문자 그대로 주님은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십니다. 따라서 주님이 사셨던대로 살아야 합니다(6). 요한은 남자, 여자, 청년, 노인 할 것없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함을 말하고 있습니다(12-14).

마22:37-39절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두가기 큰 계명을 주셨습니다. 마음을 다해,목숨을 다해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 몸 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입에 발린 말로 남을 기분좋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인도자가 시키는 대로 주안에서 사랑합니다 하며 포옹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우리 내면 깊은곳에서 나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인 순종을 말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나의 내면에서 나오는  자발적인 섬김입니다. 주님이 섬기신 것 처럼...
그러나 아주 힘든 일 입니다. 그러기에  의지적행동이요, 맑고 순수한 마음이 동반 되어야 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과장이 아닌...

주님이 사셨던 것 처럼 우리도  행한다면(6) 우리는 빛안에 거하는 자이고, 하나님과 영적으로 연합된 사람입니다.

주님이 사셨던 것 처럼 살게하소서!성령님 도우소서!!

2012년 9월 24일 월요일

그리스도의 교회

요일1:1-1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서는 사도요한이 기록한 서신입니다. 본서의 첫번 독자인 초대교회는 잘못된 가르침을 주는 거짓 선생들이 들어와 영적으로 교회를 혼란 시켰습니다. 소위 영지주의(Gnosticism)가 침투했습니다. 영지주의는 헬라어로 '지식' 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들의 가르침의 가장 큰 특징은 영과 육을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가르침입니다. 영적인것은 선한 것이고, 육신은 악한것이다. 따라서 극단적인 금욕생활을 강조 합니다.

또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몸은 진짜 몸이 아니라 몸처럼 보여진것이다.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으로 오신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분임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이런 영지주의 이단사상이 초대교회 누룩처럼 퍼지자 이대로 있다가는 안되겠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사도요한은 그들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펜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본서의 배경입니다.

먼저 그는 자신의 영적권위에 대해 말합니다. 그 권위는 자신이  주님과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 한 제자라는 사실에서 나옵니다(1). 주님은 하나님이시고 뿐만 아니라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분임을 그는 강조하고 있습니다(2). 그가 말하는 내용을 보아도 당시 영지주의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음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것 입니다(5). 그분은 완전히 성결하시고, 선하시고 거룩하신 분 입니다. 하나님의 빛은 모든것을 조명(照明)합니다.
그분에게는 어두움이 전혀 없으십니다(5). 어두움은  악한것, 죄를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앞에는 그 어떤 악한것이나 죄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운데 살면 하나님의 빛안에 거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고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읽는다고 해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영적 교제가 단절이 됩니다(6).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용서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럼에도 매일 알게 모르게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8). 그럼에도 늘 그리스도안에서 용서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7절하,9절)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해 죄를 자백하면 언제든지 하나님과 영적교제가 회복이 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됨을 회복합니다.

하나님가 하나됨은  어떤 교단에 속해있던 상관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영적으로 하나됨을 말해줍니다.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한형제요, 자매입니다. 교단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내교회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웃교회 더나아가  세계의 복음의 불모지에 세워진 약한 교회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만일 내교회만 생각하고 숫자만 불리는데 집중한다면 그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닐지 모릅니다.


2012년 9월 23일 일요일

괴롭히는 사람들

시35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 시편기자는 다윗입니다. 그는 그가 언급한대로 " 많은 적들로"(19) 인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에대해 거짓말을 말하고(20), 조롱합니다(16). 또한 함정을 파고(7), 말로 덫을 놓을려고 애를 씁니다(11).  그를 미워하고 무시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께 탄원드립니다(1). 그는  그의 정직한 감정을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것 처럼 그들도 고통 당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26).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들의 몰락을 보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4). 참 진솔한 감정표현입니다.

오늘도 무고히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어디에든 존재하고 있습니다. 학교, 직장, 대학 심지어는 교회안에도 존재 합니다. 이들은 남을 지배할려고 하고, 무시하고, ...
인터넷상에서도 존재합니다. 악성댓글을 달고, 이유없이 남에게 인격적, 정신적 테러를 가합니다. 어떤때는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현재 다윗의 심정도 이러했습니다. 그는 요즈음 신조어 처럼 '멘붕' 상태에 빠진 느낌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이 간구는 일시적인 것이 아닌 계속적입니다." 언제까지 이러한 일들을 보고만 계시렵니까"(17),"더 이상 가만히 계시지 마소서" " 나를 홀로 내버려 두지 마소서."(22) "나의 주여, 떨치고 일어나"(23)- 쉬운성경-
이런표현들은 소망중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내용들입니다. 어떤상황도, 어떤일도 해결자는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012년 9월 22일 토요일

믿음

막10:46-5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 주님은 한 맹인을 고치신 일 있습니다(8:22-26). 본문의 맹인을 고치신 일은 주님이 제자들과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마지막 여정에서 생긴 일입니다. 이 사람은 바디매오 라고 하는 사람인데 매우 솔직담백한 사람처럼 보여집니다.

그는 주님이 다윗의 자손임을 알았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름은 메시야임을  믿었습니다. 메시야이신 이분이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리라 믿었습니다(47).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때는 제자들이 제지했습니다(10:13). 이번에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며 소리치는 이 맹인을 다른 사람들이 제지합니다(48).

주님은 가던길을 멈추시고  이 맹인을 부르라소 하셨습니다(49). 주님의 음성을 들은 이 사람은  겉옷을 챙기는 것도 잊은채 벌떡 일어나 주님께 갔습니다(50). 그는 열정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한번 지나간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섬기는데 방해는 잘못된 습관이 있는데 버리지 못합니까?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합니까? 아직 머뭇거립니까? 기회가 지나가면 오지 않습니다. 바디매오 처럼 그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 나를 부르시는 주님앞으로 다가가십시오.

자신에게 다가온 바디매오에게 주님은 무엇을 해주길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51). 이 사람은 부자청년 같지 아니하고 그의 요구를 거침없이 말합니다(51). 아주 단순합니다.

주님은 그의 믿음을 칭찬해주시고  그의 시력을 완전히 회복시켜주셨습니다(52). 이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단순성.... 믿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2012년 9월 21일 금요일

과연

막10:32-4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고난에 대해 예언 하신것은 마가복음에서 세번째 입니다(33-34, 8:31, 9:31).
이번에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이 영광을 구합니다(35-37).

주님은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동상이몽(同床異夢) 이라 할까요?
이 두형제는 장래 자신들이 받을 영광의 자리만 생각합니다

이들의 대한 주님의 반응은 이들이 이해 할수 없는 요구를 하십니다(38-40). 이들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출세를 위해 뭐든지 하겠다고 하는 자세로 임합니다.

같은 제자들은 질투를 느껴 이들에게 화를 내었습니다(41). 본문을 읽으면 이때 제자들의 영적 수준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미 십자가를 생각하시는데 이들은 주님을 따르는 댓가로 누릴 영광을 생각하고 있으니 주님의 마음을 착잡하고 답답했을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바라는 이들에게 다시 한번 섬김의 도를 말씀합니다(43). 하나님의 나라는 파워게임을 하는 나라가 아니라 섬김과 자신을 주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도 섬기려 오셨고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하십니다(45).

주님은 섬김으로 오셨고 자신을 주시로 오셨다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 우리가 매일 매일 어떻게 살아야 함을 가르쳐주시고 계십니다. 오늘 내가 섬기는 교회와, 목회자들, 교회 지도자들이 과연 이 말씀에 부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2012년 9월 20일 목요일

헌신

막10:17-3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한 부자가 주님을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마태는 이 사람을 청년이라고 했고(마19:20) 누가는 관원(눅18:18)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부자가 된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으로 인정을 했습니다.

그는 출세도 했고, 신앙이 좋아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영적인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영생에 대한 궁금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릴적 부터 율법을 철저히 지켜왔고, 율법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살아왔지만(20), 뭔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그를 지배했습니다. 또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차에 주님의 소문을 듣고, 한편으로는 주님을 존경했습니다(17).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주님은 이사람에게 단호한 요구를 하십니다 " "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21).

하지만 이 사람은 주님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으로 슬픈기색을 띠며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22). 이 사람의 문제는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재물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재물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도 훌륭한 신앙인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헌신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마음이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귀한 일입니다. 물질이 많으므로 물질에 대한 애착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마음을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을 따르는 생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삶은 이 세상의 돈하고는 비교가 안되는 부요한 생활이요, 행복한 생활임을 주님은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오늘아침 헌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나에게 헌신이라는 것이 어떤의미를 주는지요?

2012년 9월 19일 수요일

이혼

막10:1-1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과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믿음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가까이 오셨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바리새인들로 부터 민감한 질문을 받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지식을 뽐내기 위한 동기가 많았지요. 본문의 바리새인들도 순수한 동기 보다 주님을 곤경에 빠트리기 위함입니다. 남을 곤경에 몰아 넣고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질문은 이혼에 대한 것입니다. 이혼하는 것이 옳은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2).
이혼에 대한 것은 당시 유대사회에 논쟁이 끊이지 않는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율법을 해석하는데 자유주의적인 힐렐파와 보수적인 솸마이파가 사이의 논쟁있었습니다. 힐렐파는 이혼에 대해 관대했고, 솸마이파는 염격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이 문제를 물어 어느쪽으로든 걸리도록 하였습니다. 이에대해 주님은 성경으로 돌아가 결혼에 대한 창조의 원리로 대응하셨습니다.결혼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고, 이혼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이라는 것입니다(5-9).

하지만 후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허락하신 이유는 사람들의 마음의 완악해져서(마10:5) 허락하셨지만, 단 배우자가 수치스러운 일을 했을 경우,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신24:1). 주님도 이 말씀에 근거해 배우자가 간음한 경우에만 이혼이 허락된다고 하셨습니다.(마19:9). 하지만 이혼을 통해 아이들이(13-16) 상처를 받는다면, 문제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혼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죄악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이혼을  쉽게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혼에 대해 가르치신 말씀과는 반대로 성격문제, 경제문제 등등.. 너무 쉽게 ..
드라마를 보아도 이혼은 아무것도 아니고 불륜을 그리는 막장 드라마가 비난을 당하면서도 인기가 있습니다. 왜 인기가 있는가 생각해보았더니 인간에게는 규정을 어기고 싶어하는 본능적인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아침 이혼에 대해  가르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가정이 경건하고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2012년 9월 18일 화요일

결심단행

막9:42-5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소금이 되라고 명령하십니다(50). 왜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까? 50절을 어떻게 마치는지를 살피면 알수 있습니다. ' 서로 화목하라'고 하십니다.
소금의 역할은 맛을 내는 것인데 즉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화평을 만들려면 무엇보다 겸손해야 합니다. 종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복잡하게 다른말이 필요없습니다 겸손과 종의 마음입니다.

또한 주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죄를 짓게 하는 것은 영적자살 행위라고 하십니다(42). 어린아이는 문자적인 의미보다, 신앙적으로 연약한자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인도하는자, 남을 가르치는 자들의 책임이 큼을 주님은 강조 하십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영혼의 가치는 주님이 피로 값주고 사신 영혼입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영혼이 지도자로 인해 실족케 된다면 주님이 반드시 책임을  물으실 것 입니다. 교회를 책임진 분들, 아니 한교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한국교회의 지도자 위치에 있는 분 들일수록  말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믿음이 연약한 자를 실족케 할 수 있고, 아니면....

또한 주님은 나의 어느부분이 죄로 이끈다면 그것을 제거하라고 하십니다.본문엔 손, 발, 눈이 나오는데 이것은 우리 신체의 대표적인 부분입니다. (43-48).물론 이것을 문자적으로 제거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죄로 이끄는 유혹이 무엇입니까?
잘못된 습관은 무엇인지?그것은 주님과 자신만이 아는 비밀일 것입니다.

손을 찍고, 다리를 찍고, 눈을 빼어내는 것은 결심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은 결심단행(決心斷行)하는 삶입니다. 결심하고 단행해야 신앙적 인격이 계속 성숙합니다. 신앙생활은 오래했지만 결심이 없고 행동이 없다면,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나를 죄로 이끄는 부분이 무엇이지 안다면 오늘 결심하고 단행하십시오.

2012년 9월 17일 월요일

주님을 따르는자

막9:30-4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두번째로 자신의 고난에 대해 예언 하십니다.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31-32). 아니 이해 할 수 가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들에게  큰 두려움을 주었습니다(32). 자신의 모든 장래를 주님에게 걸고 있는 그들로서는 감당 할수가 없는 말입니다.

 주님은 섬기는자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섬김과 고난은 서로 연결됩니다(35,10:45). 섬기지 않고는 고난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섬기지 않고는 희생 할 수 없습니다.

섬기는자의 실제 모델로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고 가르치셨습니다(36-37) 예수님 당시 어린 아이들은 보잘것 없는 존재로  취급 받았습니다.

하지만  내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의 하나를 영접하면 그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고 하십니다(37). 이것이 섬김입니다. 섬기는 자 는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섬기는 마음은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소유, 위치, 가진 힘등 대상을 따지지 않습니다.

섬기는 마음은 탐욕과 교만으로 가득차 있는 영혼을 치유 시켜줍니다.

주님이 섬김을 말씀하심에도 제자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여전히 다릅니다. 이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좇는 사람들을 경쟁상대로 생각하고 불평하는 모습을 보면...(38-41).

내 마음에도 경쟁과 질투와 교만은 없습니끼? 말로는 섬김을 말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높은 마음이 어느덧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김은  영적인 삶이요, 섬김은 성령의 삶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말보다  조용하고 작은 실천입니다. 작은 것에서 부터 섬김을 시작하십시오. 그것이 무엇입니까?

2012년 9월 16일 일요일

하나님의 눈

시34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 시편 말씀은 다윗이 기록했습니다. 표제에 보면 다윗이 아비멜렉 혹은 아기스 (아비멜렉은은 블레셋의 왕호,아기스는 그의 실제 이름)앞에서 미친체하다가 좇겨나서 지은 시 라고 되어 있습니다. 표제만 보아도 당시 다윗이 처한 상황을 잘 알것 같습니다.

그는 고난중에 처해 있습니다. 좇겨다니는 신세요, 오죽했으면 블레셋 왕 앞에서 미친 사람처럼 연극을 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는 어려움에서 건짐을 받은 그의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6).

무엇보다 그가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여호와' 라는 이름이 16번정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항상 그의 종들을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축복하시는 하나님! 본문의 흐름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윗의 신앙은 이론적인것이 아니고 체험적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라"(8),
"부족함이 없도다"(9) "찾는자"(10)"..

믿음은 체험적입니다.  체험이 없는 믿음은 형식적이거나, 추상적, 무능력합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것(체험)입니다.

또한 본 시편의 키워드는 '의' 입니다. 다윗은 이 단어를 여러상황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15,17,19,21). 물론 여기 ' 의'는 도덕적으로 완벽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의인은  하나님을 의지하지는 사람들에게 붙혀진 칭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넘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눈은 의인에게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십니다(15).

오늘도 내일도 아니 항상, 전능하신 하나님의 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늘 향하시고, 기도에 늘 귀를 기울이심을 믿습니다. 

2012년 9월 15일 토요일

믿음과 기도로..

막9:14-2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산에서 돌아온 주님과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율법 학자들과 논쟁을 벌이는 다른 제자들을 보았습니다.(14). 사건의 발단은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한데서 시작 되었습니다.

주님의 소문을 듣고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왔지만 주님은 산에 가셔서 만날 수 없고... 그래서 제자들에게 부탁을 했지만 연약한 믿음을 가진 그들은 고칠 수 없었습니다. 이 순간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조롱거리가 될 수 있고, 사탄의 능력이 더 나타 날수 있는 빌미를 주는 순간입니다.

절망에 빠진 아버지, 그를 동정하는 사람들.. 마가는 이 아이의 상태를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귀신들려 듣고 말할 수 없습니다(25). 자주 넘어져 발작증세를 보입니다(18). 넘어지는 것은 좋은데 그것때문에 큰 위험에 처하기도 합니다(22).

제자들이 아무리 귀신을 좇아 낼려고 애를 썼지만 허사였습니다(18). 허사일수 밖에 없습니다. 사탄을 이기는 힘은 기도인데 제자들은 그것을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28). 사탄이 역사 하는 이 세상에서 기도는 능력의 근원이요, 강한 무기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칠려고 하십니다.

여느 사람들 처럼 이 아버지도 주님이 고치신다는 믿음은 있었습니다. 믿습니다! 하고 소리는 쳤지만, 믿음은 연약했습니다. 믿습니다! 소리친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24).

주님은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고 아이를 고치셨습니다(25-27). 본문의 이야기는 드라마틱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은 단순합니다. 마귀를 이기는 것은 믿음과 기도라는 것입니다. 영적 권능은 기도를 통해 나타납니다(29). 이 기도의 능력은 믿음을 통해 효과가 발휘됩니다.

주님! 오늘 저의 삶이 오직  믿음과 기도로 일관(一貫)하기를 원합니다.

2012년 9월 14일 금요일

하나님의 현존

막9:2-1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등산을 하셨습니다. 세명의 제자들은 그곳(헐몬 산)에서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합니다. 산에 오르시자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셨습니다(2).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의 변화는 단순한 겉 모습의 변화가 아닌 내부로 부터의 변화를  의미 한다고 합니다.

사탄은 겉만 위장합니다 그러므로  겉만 보다가는 속기 쉽습니다.  겉보다는 중심이라고 알지만 그래도 겉모습에 잘 넘어갑니다.  화려한 건물, 잘연출된 예배, 겉모습만 보고 좇다가는  속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사두개인들은 애써 주님을 부인하고 인정하지 않을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됨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구약시대를 대표하는 두사람이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를 하였습니다. 엘리야와 모세였습니다(4). 이들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구약의 대표자입니다.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고 모세는 율법을 대표합니다

만일 제가 그 현장에 있었어도 너무 놀라운 광경이라 비몽사몽(非夢似夢)에 빠졌을 것 입니다.
베드로가 그러합니다. 베드로는 단순하면서도 순수한 사람입니다. 그는 산에서 내려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천막을 셋 짓고 모세와 엘리야와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5). 그러면서도  자신이 무슨말을 하는지 몰랐습니다(6).

그러자 구름가운데서 소리가 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의 말을 들으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7) 주님의 말을 들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는 주님이시기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산에서만 있어서는 않됩니다. 수도원이나 기도원에서만 있어서는 않됩니다. 세상에 나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열심히 사는 것, 열심히 일하는 것 (하나님이 주신 직업에 따라) 자체가 전도입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들에게 영적 체험이  중요했습니다.

 매일 하나님의 현존 속에  삽니다 하지만  바쁘고 열심히 살기전에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는 영적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얻는 영적 지혜와 힘으로  세상을 이기십시오.

2012년 9월 13일 목요일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8:27-9: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중요한 질문을 하십니다. 왜 주님이 그런 질문을 하셨는지? 제자들이 얼마나 훈련이 잘 되었는지를 알고 싶어서 인지? 주님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하십니다.

주님이 바다를 잔잔케 하신 후 제자들은 이미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4:41). 주님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십니다(27). 곧 이어서 사람들은 그렇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의외로 옳은 대답을 합니다." .. 주는 그리스도" 시라고(29).

하지만  베드로는 주님이 오신 목적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31절에 주님께서 자신의 고난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고난은 당하시고 버림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다시 부활한다. 이 말씀은 앞으로도 계속 되풀이 해서 말씀하십니다(9:31,10:33-34).

주님의  말씀은 베드로에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능력만 보았지, 그분이 오신 목적을 몰랐습니다. 주님이 왜 저렇게 약하게 말하실까?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32).

주님으로 부터  심하게 꾸짖음을 받았습니다(33). 칭찬 받은지 얼마후 꾸짖음을 받고...
인간의 한계요, 연약함입니다. 신앙적인 생각을 하다가도 순간적으로 인간적인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하루의 생각중 신앙적인 생각과 인간적인 생각이 수없이 교차되면서 살아가곤 합니다.

물론 베드로가 사탄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탄이 베드로를 통해 주님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게끔...(마4:1-11).

주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을 따르는자의 자세를 말합니다(34-38).
그것은  진실입니다. 진실은 바로 주님을 섬기는 자의 생명입니다.

진실이란 나의 요구사항 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순종함을 말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나의 일만 생각하지는 아니합니까?

2012년 9월 12일 수요일

영의 눈

막8 :22-2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벳새다에서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오병이어,칠병이어의 기적 처럼(6:30-44,8:1-13), 마가는 본문을 통해 영적 상징성을 보여줍니 다.

 주님은  이곳에서  맹인의 눈을 만지심으로  캄캄한 암흑속에 살았던 사람에게 광명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눈에 침을 뱉고 안수 하시자  맹인은 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걷는 것이  나무처럼 보였다고 했습니다(24).

주님이 두번째로 눈에 안수하시자 시력을 완전히 회복했습니다. 모든것이 밝히 보였다고 했습니다(25).

주님은 병든이들을 대할 때 그 사람의 믿음 따라 고치시는 방법도 달리하셨습니다. 이 맹인에게는  두 번 안수 하셨습니다. 주님의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맹인의 믿음이 부족함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본문의 맹인처럼 육신의 소경이 아닌 영적인 소경이 더 많습니다.
영의 눈을 밝혀주는 것은  성령님이십니다(엡1:18).

성령님은  영의 눈을 뜨게 하시고, 밝히시고,  식별력을 주십니다.  세상에는 가짜가 진짜인것 처럼 포장을 하는 가짜들이 많습니다. 교회도 잘못 선택하면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닌 도리어 믿음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영의 눈이 밝으면  그리스도의 충만한 임재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천국의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주변에  시들고 병들어 있는 영혼들을 보게되고, 그들의 영적 치유를 위한 성령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오래했지만 영의  눈이 밝지 않았습니까? 다시 한번 주님의 만져주심을 사모하십시오. 본문의 맹인처럼...

2012년 9월 11일 화요일

나의 믿음

막8:14-2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께서 4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베푸신 후 제자들은 남은 떡을 가져오는 것을 잊었습니다(14). 그런데 주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15).

바리새인의 누룩은  위선을 말하고 헤롯의 누룩은  세속화를 말합니다. 헤롯당은 세상의 권력과 타협하는 무리를 말합니다.

영적으로 정결해야 할 교회가 누룩에  쉽게 감염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위선에 빠질 수 있고, 세속화 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이용해서 이익을 누리고, 교회를 이용해서 유명해지고.. 

생명이 없는 교회일수록 눈에 보여지는 것에 집중합니다. 따라서 예배의식이 화려하고, 복잡하고 군더더기가 많습니다. 속화된 교회의 특징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철저히 경계하십니다..

또한 주님은 떡이 없다고 수군거리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시키면서 믿음을 요구 하십니다(16-20).

주님을 따라 다니지만 쉽게 불신앙에 빠질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제자들 처럼 환경에 따라 쉽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하나님이 나의 삶에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십시오.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동일하게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2012년 9월 10일 월요일

예수그리스도는..

막8:1-1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떠나  전도 여행중이십니다. 본문의 기적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비슷합니다(6:30-44). 두 기적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6장의 기적은 유대인들이  대상이었지만 본문의
4천명은 대부분 이방인들입니다.

주님은 두 사건에서  굶주린 군중들을 만나셨고, 긍휼함을 가지셨습니다(2). 없는 것으로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있는 것으로 축복하셨습니다(5-6).  내게 있는 것을 정성껏, 아낌없이 드리면  하나님은 그것으로 더 큰 축복을 주심을 배웁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떡 7개와 작은 생선 2마리로 기적을 행하시고  7광주리를 남기셨습니다(5,8). 성경에는 숫자가 의미하는 것이 큽니다. 일반적으로 7은 완전수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7병이어 기적으로  풍족히  먹이시고 7광주리를 남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을 예표해줍니다.

또한 주님은 6장과는 다르게 그들을 향해 '목자없는 양과 같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아직도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표적을 구합니다(11-13). 소위 종교지도자들이란 이들이 주님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차 있는것을 보면 믿음을 갖기가 이렇게 힘드는구나를 볼 수 있고,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실감합니다.

나에게 믿음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하나님만이 아닌, 세계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심을 찬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계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신 구원자이시고, 메시야이심을 찬양합니다.

2012년 9월 9일 일요일

신앙

시33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 시편 기록자는 미상(未詳)입니다. 하지만 본 시편은 하나님에 대한 찬송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분이 행하신 일', ' 공급', '보호하심', '창조물과의 관계'...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속성의  중요한 특성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실'' 옳으심' '진실'(4) '정의로우심' '공평하심'' 한결같은 사랑'(5).
그분의 계획은 한결같고 실패가 없으십니다(11).

둘째 시편기자는 어려움을 당할때 도움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보여줍니다(16-22). 세상의 힘은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힘을 믿거나 군대의 힘을 믿는 민족들은 다 패망했습니다(16-17). 로마제국을 비롯해, 히틀러 나치, 일본의 군국주의... 한때 세상을 일시적으로 흔들었지만 결국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셋째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창조에 감동을 받습니다(6-7).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분 입니다. 모든 나라와 민족들을 주관하십니다(8-15).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켜보십니다(13). 하나님을 경외 하는 자들을 보호하십니다(18).

그분은 전지(全知)하시고 전능(全能)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 한다는 말이 한 번 나오고(18), 바란다는 말이 세 번 나오고(18,20,22), 의지한다는 말이 한 번 나옵니다(21).

 경외하고 바라고 의지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행하는 것입니다.

2012년 9월 8일 토요일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룻4:13-2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보아스와 룻은 결혼을 했습니다.하나님은 룻을 임신하게 하셨습니다(13).하나님의 섭리는 분명했습니다. 그동안 룻이 겪었던 일들.. 기근, 빈곤, 수치, 외로움, 두려움 등등.. 이런 질곡(桎梏)의 세월을 벗어나 마침내 그는 아들을 낳았습니다(13).

어두움으로 둘러싼 환경이었지만 그의 삶은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또한 마라로 바뀌었던 나오미는  다시 나오미가 되었습니다(14). 하나님은 그녀에게 아픈 경험들을 허락하셨지만 다시 기쁨으로 바꾸셨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룻은 그녀가 낳은 아들 오벳을 통해 다윗왕의 증조 할머니가 됩니다(17).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조상이 됩니다. 이 이방여인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됨을 증명해줍니다. 하나님은 그분께 신실한자에게 신실하게 대하시고, 상급을 주시고,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주심을 룻을 통해 보게됩니다.

룻의 이야기는 한편의 감동적인 드라마 같고 한편으로는 예언적입니다.  룻의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게 되고, 룻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행하실 일을  보게됩니다.
룻기를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 보여는 아침입니다.

2012년 9월 7일 금요일

룻에게 임한 은혜

룻4:1-1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보아스는 사업이나 법적인 소송문제를 다루는 성문에서 결혼 문제를 의논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진행과정속에  하나님의 섭리, 룻에 대한 보아스의 사랑, 문제를  법적,이성적, 합리적으로  다루는 보아스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보아스는 법적으로 자기보다 나오미의 땅을 먼저 살 수 있는 친척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허락할 듯 하다가(4), 룻과 결혼을 해야 한다고 하니까 거절을 했습니다(5-6). 여기에 보아스와 룻의 결혼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2:3).

세상의 모든일, 사소한 일이던, 복잡한 일이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그 어느것 하나도 사람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드디어 보아스는 나오미의 땅을 사고, 룻을 아내로 맞이합니다(9-10). 나오미의 기도가 응답되는 순간입니다(2:19-20).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기도가 선행(先行)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지만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이 행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없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보아스가 나오미의 땅을 사고 이방여인 룻을 아내로 맞이 하는  장면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이던 이방인이던 그분의 피로 사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구원의  은혜를 예표해주고 있습니다.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아스를 통해 나타납니다. 유대인이던, 이방인이던 오직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주고 사셔서 신부로 맞이 하셨습니다. 나를 신부 되게하심을 찬양합니다.
룻의 삶속에 임하셨던 하나님의 은혜! 이 아침에 그 은혜에 감격하여 경배드립니다.

2012년 9월 6일 목요일

신실

룻3장, 오늘의 묵상입니다.
나오미는 룻과 보아스를 결혼시키려는 계획을 가졌습니다.  유대 전통에는 형제나 가까운 친적이 죽으면 그의 부인과 결혼을해 대를 잇게 해주는 '계대결혼'이라는 풍습이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 근거한 풍습입니다(신25:5-10).

나오미는 적임자가 친척중에 하나였던 보아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름을 알수 없는  더 가까운 친척이 있었지만(12), 나오미의 생각으로는 보아스야 말로 룻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임을 믿었습니다.

 나오미는 룻으로 하여금 보아스에게 프러포즈(Propose) 하게끔 용기를 줍니다. 요즈음도 여자가 먼저 프러포즈하면 좀 멋적지요. 룻의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룻은 보아스의 침실로 들어갔습니다. 물론 보아스의 도덕성을 믿었습니다(7). 아무리 보아스가 좋은 사람이라도 룻의 행동에는 큰 용기가 필요 했습니다.

룻은 나오미, 보아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의외로 보아스는 적극적인 반응을 보입니다(10). 보아스는 룻의 의도를 알아채리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젊은 과부가  젊은 사람을 배우자로 찾아 자신의 길을 가지 않고 죽은 남편의 대를 잇기 위해 늙은 자신과 결혼을 할려고 하는 마음..

보아스는 이스라엘사람이요, 남자요, 부자요, 힘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 네가 베푼 '인애'(kindness, NIV) .. 친절을 베푼것은 자신인데 룻이라고 말합니다.

친절(Kindness)은 히브리말로 '신실'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입니다 신실은 하나님에게 사용해야 할 단어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룻에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룻기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룻기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룻의 신실함, 보아스의 신실함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룻기를 묵상하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신실한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주여! 오늘 신실하고 진실하게 살게 하소서!!

2012년 9월 5일 수요일

나오미와 룻처럼..

룻2:14-2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룻은 매우 신실했습니다. 그녀는 시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쉼없이 일했습니다(7). 이런 룻의 모습이 보아스의 눈에 띄었습니다. 보아스는 그녀를 선대 했습니다.도리어 의아하게 생각 한것이 룻입니다. ' 나는 이방여인 인데 왜 나에게 친절을 베푸냐' 고 되물었습니다(10). 보아스는 룻의 신실함과  시어머니에게 행한 일들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11).

특히 인상적인 것은 보아스가 룻을 자기 식단에 초대 한 일입니다(14).그의 친절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곡식베는 일꾼들에게 룻을 책망하지 못하게 했고(15), 또한 벤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룻으로 줍도록 했습니다(16).룻에 대한 보이스의 친절은 단순한 인간의 친절이 아닌 룻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룻은 보아스가 자신에게 행한 친절 등 모든일을 나오미에게 이야기를 합니다(17-23).두 사람의 대화속에는 보아스에 대한 축복과 감사로 일관 했습니다. 사람들중에는 남에게 신세를 지고도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를 도와준 사람, 고마운 사람을 잊지않고 감사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지극히 단순하고 상식적이지만  인생사가 그렇지 못할 때 가 많습니다. 사람에게 고마워할줄 모르는 사람, 감사 할줄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산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마운 사람은 잘 잊어도 섭섭하게 한 사람은 더 잘 생각납니다. 고마운 사람을 늘 잊지 않고 축복하고 감사하는 것  작은일 같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입니다. 나오미와 룻처럼 말입니다....

2012년 9월 4일 화요일

절망을 넘어

룻1:19-2:1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나오미는 그의 며느리 룻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 왔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나오미를 알아봅니다. "나오미가 아니냐?"(19).  나오미는 자신을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고 합니다(20). 나오미는 ' 즐거움' 이라는 의미이고, 마라는 '괴로움' 이라는 의미 입니다.

나오미는 " 전능자가 자신을 슬프게 했다"고 했습니다(20). 나오미는 하나님을 '전능자'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샤다이(Shaddai) 즉 세상의 지배자 라는 뜻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의 주권과 연결 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만일 자신에게 일어난  고난이 우연이라고 생각한다면 , 우연을 바로 잡을 수 없는 인간으로서는 절망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고난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 고난을 거두어 가실 분도 하나님이시기에 소망중에 주님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나오미가 겪은 슬픔과 절망 가운데서도 한번도 그를 떠난적이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영혼의 깊은 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어떤 순간에도  나를  떠나신적이 없으심을 기억하십시오.

부지런한 룻은 밭에 나가서 이삭을 줍기 시작합니다(2:2-3). 나중에 일어날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나오미는 보아스와 룻이 맺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패배, 죽음,기근,  절망스러운 환경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
이제는 새로운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오미 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절망은 절망 자체가 아니라, 새로운 용기와 믿음의 힘을 발휘하는 기회의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느 시간, 어느 순간에도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2012년 9월 3일 월요일

평범속에..

룻1:1-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룻기는 사사시대에 일어난 일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룻기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사소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삶의 모든 부분을 자세히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분 입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사별(死別)한 과부들을 중심으로 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 독자들에게 많은 감동을 줍니다.

룻기에는  이름이  중요합니다. 특히 히브리 문화에서 이름은 그들의 인물됨을 말합니다. 이름은 곧 인격이었습니다.

엘리멜렉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의미인데  그가 살던 베들레헴(떡의 집)에 흉년(凶年)이 들자 가족들을 데리고 모압땅으로 이민을 떠납니다(1).  얼마후 엘리멜렉은 세상을 떠나고(3), 10년후에 두 아들 마져 세상을 떠납니다(4-5). 결국 시어머니, 두 며느리들만 남습니다.

흉년을 피해 모압으로 갔지만 거기에서 더 큰 환난을 만납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안에 있을때에만이 안식과 영적 평안이 있습니다.

나오미라는 이름은 쾌적함, 아름다움, 멋진'을 의미하지만 그의 삶에 닥친 가슴 아픈 일들은 그의 이름을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방 땅에서 슬픈 일을 당한 나오미를 볼 때,  이민생활을 하는 저로서는 나오미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 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나오미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올려고 결심을 합니다(6). 나오미  자신은 떠나지만 두 자부들은 모압에 남아 있기를 권했으나 결국 룻은 그의 시어머니를 따라 갈려고 결심합니다(16-18).

나오미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려는 마음,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 갈려는  마음,
한 가정의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습니다.

나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일속에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음을 믿습니다.그러므로  평범속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십시오.

 

2012년 9월 2일 일요일

회개

시32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은 롬4:6-8절에서 본 시편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안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의 완벽함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어떤 기록도 가지지 않으십니다. 세상에서 죄를 범하면 전과자가 되지만 하나님에게는 전과자가 없습니다.

본 시편은 명확한 구조를 보여줍니다.
#1.축복(1-2). 죄를 범하지 않는 것도 축복이지만(시1:1), 죄를 범해 회개하여 용서를 받는것도 축복입니다.
#2. 죄를 고백함의 실제성(3-4).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마음이 어둡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가만이 있어도 두렵고 불안합니다. 쉬고 싶어도 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함으로 마음의 평화를 누립니다.
#3. 하나님의 용서(5). 다윗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자 하나님은  그의 죄를 용서해주셔습니다.

사죄의 경험은 주님을 피난처로 삼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6-7). 생활속에 찬송이 넘쳐납니다. 찬송은 용서 받은 자의 기쁨의 표현입니다. 마음에 죄가 있을때, 회개하지 못할 때 찬송을 부를 수 없습니다. 찬양을 들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사죄의 경험을 한 다윗은 " .. 내 마음이 구원의 노래로 주님을 찬양한다"(7)고 했습니다. 그는 음악가였습니다. 그의 음악은 더욱 힘이 넘쳤고, 기쁨이 넘쳤을 것 입니다.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은 다윗은 자신과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조언할 수 있었습니다(8-9). 그것은 주님을 신뢰하고 죄를 고백한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경험입니다(10).또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입니다(11).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2012년 9월 1일 토요일

마지막 승리

옵1:17-2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오바다의 예언은 구약의 선지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네가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 심판의 약속', 이유', 내용'  또한 '구원과 회복' 이라는 패턴은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영적안목을  넓혀줍니다.

매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만나는 흉악한 범죄, 가슴아픈 일들, ... 잠시 악이 이기는 것 같지만 결국 무사히 넘어가지 않을 것 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세워 질것입니다. 선지서에서 보는 것 처럼 하나님의 '의' 는 악한 자 들에게 대한 무자비한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깊은 상징적인 멧시지가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 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은혜의 출발을 말씀합니다.

본문의 이스라엘(혹은 유대)의 회복 과 에돔의 멸망(17-18)은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를 상징해줍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사랑과 은혜의 법이 지배 하는 하나님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 날 천국 운동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세상을 보고, 성경의 안목으로 신문을 보면, 현재의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일어나는 일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도래하는 그 날,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며 오늘도 하나님과 동행 하기를 원합니다.

2012년 8월 31일 금요일

에돔을 보면서...

옵1:1-1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오바다는 유대에서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는 에돔의 운명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에돔은 에서의 자손입니다. 에돔(에서)과 유다(야곱)은 혈통적으로는 형제 관계였지만, 그들은 서로 오랫동안 적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유다가 외국의 침략을 받아 어려움에 빠졌을때 이들은 형제 나라인 유다를 돕기는 커녕, 도리어 그 침략에 협력하였습니다(10-14).

유다의 죄가 커서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 형제가 어려움을 당할때 그것을 외면하는 에돔의 죄도 큼을 하나님은 강조 하고 있습니다.

에돔은 남의 나라가 쉽게 침범할 수 없는 곳에 위치했습니다. 수 많은 바위와 산으로 둘러 싸여 있었고 그 산들은 험해서 사람들이 함부로 그곳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늘 안전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3-4). 그 지리적 위치는 하나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5-6).

이들이 형제 유다를 배신 한 것 처럼 에돔도 동맹국들로 부터 배신을 당합니다(7).  하나님으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행한대로 반드시 돌려 받게 하십니다(15).

결국 지리적으로 안전한 곳에 있다는 교만, 자기만족, 형제에 대한 무관심한  에돔은 멸망하고 맙니다(15-16).

오늘날 많은 사람들 역시 에돔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을 잊고 있습니다. 하나니님이 그것을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

내가 도와야 할 형제, 자매들이 있지만, 알고도 못본척 하지는 아니합니까?
남이 어려움을 당할 때 속으로 좋아한적은 없습니까?
에돔을 보면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2012년 8월 30일 목요일

하바국의 기도

합3장,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하바국의 기도 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과거 행하신 일을 회상합니다. 현재 그가  고민하는 현실을 떠나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묵상합니다.

하바국이 표현 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매우 극적(劇的)입니다. 지진, 재난, 홍수, 수나미 ... 때때로 일어나는  엄청난 자연의 위력 앞에 인간의 힘은  속수무책 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10). 하나님의 능력을 달리 표현 할수가 없어 인간적인 언어로 표현 할뿐 입니다.

하바국은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을 더욱 견고케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묵상 할수록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과, 교만한 사람,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 처럼 보일때도  무덤덤하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위대하신 하나님에 비하면 그런것들은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바국은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그분은  의로우시고. 그의 백성을 회복시키시고, 진노중에도 긍휼을 잊지 아니 하시는 분임을 더욱 인식하고 있습니다(2).

하나님을 묵상할수록 인생을 사는데 물질이 많고 적음이 행복의 기준이 아님을 더욱 알게 됩니다(17). 참 행복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습니다. 왜냐구요? 하나님은 나의 즐거움이시고(18), 힘이시기 때문입니다(19).

2012년 8월 29일 수요일

의인은..

합2:2-2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바국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이 대답하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자 들의 운명을 보여 주셨습니다.  부패, 오만, 부도덕, 폭력에 대해 심판 하시고, 그들의 악을 징벌 하실 것 입니다.

그동안 자기 영광을 위해 살아 왔습니다. 하지만 영광 대신 수치와 욕을 당하게 될 것 입니다(16). 사람들 눈에는 악인들이 오래 번영하는 것 같습니다. 속이는 사람들,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더 잘 되는 것 같습니다.  눈에 보여지는 것이 오래 가는 것 같지만, 지나고보면 잠깐 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이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우상이 얼마나 가치 없는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18-19). 반대로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에 대한 바른 자세는 경외함과 조용함으로 경배 하는 것입니다(20).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동요되지 않습니다.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세상을 본 받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삽니다(4).

매일 선택이 주어졌습니다.
믿음으로 살것인가?

그러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합니까?가정에서든, 일터에서든, 어디에서든  하나님의 표준에 맞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십시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2012년 8월 28일 화요일

기다림

합1:21-2: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부패한 유다를 보며 분개하며,  더욱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악한 바벨론을 사용해 그의  백성을 징계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에 의문을 품었던 하바국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돌아와 상황을 다시 살펴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는 하나님께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하바국은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를 알고 있고, 하나님이 어떤분이심을 상기하며 용기를 가집니다. 즉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정결하시고, 불멸하시고, 견고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12-13).  이것이 그로  새로운 소망을 갖게 했습니다. 이 하나님이 어찌 그의 백성을 악한 세력(바벨론)에게 계속 맡기시겠는가?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하바국에게 그분이 행하실 일을 보라고 명령했고, 그는 순종했습니다(1:5). 그는 신중하게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기다립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기도를 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하신 뜻에 따라 개입하실 때까지 신뢰하며 기꺼이 기다립니다.

참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섭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바국은 좋은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2:1).

어떤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기도하십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시고, 간섭하실지 믿음으로 기다리십시오.

2012년 8월 27일 월요일

믿음으로

합1:1-11,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바국의 이름은 포옹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요시야왕 시대에 활동했던(BC 650-627년)사람입니다. 본문의 하바국 선지자는 화가 나 있습니다.그의 분노는 그의 나라(유다)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며 일어난것입니다. 당시 유대는  폭력, 계층간의 갈등, 불의등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3-4). 더욱 이해가 않되는 것은 하나님은 이런 상황을 보고만 계시는지?
하박국에겐  강렬한 믿음의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선하신 분인데  왜 악이 번영 하도록 허용 하실까?
마지못해 그런 상황을 지켜 보아야 했지만(3),이것을 무시하기엔  너무 썩고 부패했습니다.

더욱 놀란것은 더 악하고 폭력적이고 불경건한 바벨론을 사용 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의 잘못을 징계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6-11). 하박국은 모든것이 혼란 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는다면 금방 오만해지고,  배타적, 이기적, 물질중심주의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바벨론 사람(세상사람)처럼 되는것을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게 됩니다.

거의 매일 일어나다시피 하는 성폭력,살인,묻지마 범죄, 국제적인 영토분쟁, 시리아의 무참한 학살 등등.. 이런 뉴스를  접하면서 하바국 같은 느낌을 가진적은 없습니까?하바국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세상은 절대로 악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주관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기에는 나의 이성은  한계가 있기에..
오직 믿음으로 살뿐입니다.

2012년 8월 26일 일요일

강하고 담대히..

시31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 보면 시편기자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상' '질병''대적자들, '교만, '오만' '거짓 '두려움' .. 하지만 다윗은 이런것들에 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기대와 소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간구 하는 것 들이 있습니다.
"구원해달라"(1).
"귀를 기울여 빨리 자신을 건져달라"(2).
"인도해달라"(3).
"덫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4).
"구해달라"(5).
그의 간구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위험, 모든 어려움들을 알고 있지만,동요(動搖)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앞날'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15).

또한 앞으로 받을 은혜를 믿음으로 내다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을 위해 쌓아두신 은혜가 있습니다(19). 하루가 멀다 하고  험악한 일 들이 세상에 일어나지만, 오늘을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은 나를 위해 쌓아두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힘든 난관(難關)을 당해도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로 해결 되는 것은 그분이 나를 위해 저장해두신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미래의 축복에 대한 믿음은 과거 받은 은혜를 생각하게 하였습니다(21-22).
그러기에 그는 강하고 담대하라고(24) 하면서 본 시편을 끝맺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강하고 담대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