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30일 금요일

아름다움

아가서6:4-7: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한 여성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사랑과 감정을 실어서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녀의 육체의 아름다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품이 넘치는 자세(7:1), 그녀의 자체에서 풍겨나오는 매력(6:10)을 종합한 말입니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육체적인것에만 국한된것이 아니라,  기품과  자체의 매력, 모든 조화 속에서 우러나옵니다.

미(美)의 기준은 모든 아름다움의 조화입니다.

본문에서 아름다운 아내의 모습을 그린 이 사람처럼, 우리의 신랑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신부인 교회를 보시는 눈이 바로 이러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각자의 개성, 내게 속한 모든것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이렇게 아름답게 보시고 사랑하심을 깨달으십니까?

뿐만아니라 신랑되시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묵상하는 오늘 하루가 되십시오.

2012년 11월 29일 목요일

변함이 없으신

아가서5:2-6: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을 읽으면 흐름이 반전되어  무슨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알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느낌입니다.

남편이 집에 늦게 들어왔는가봅니다. 그의 머리는 이슬에 젖어있습니다(2). 아내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습니다(3).

그녀는 남편을 맞이할려고 벗었던 옷을 다시 입고싶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화가 났는지 문을 열어주지 않고 밖에 세워두었습니다.

남편이 문을 열어달라고 부르니까 그녀는 마음이 약해져 마침내 문을 열어주었습니다(4-5). 하지만 남편은 자취(?)를 남긴채 이미 다른데로 가버렸습니다(6).

그녀는 남편과 화해할려고 애를 썼지만  때는 늦었습니다.남편은 이미 가버린 상태입니다.

인간관계는 좋을때도 있고, 나쁠때도 있습니다. 살면서 남과 부딪힐때가 많습니다. 남편과 아내도 그렇습니다.

그럴 때 어느 한편이  먼저 화해 할려고 애를 쓰다가 거절을 당한다면 그 사람 역시 마음의 문을 닫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깨어진 관계가 회복하기가 힘들때가 있습니다.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지기전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을 연상케 해줍니다. 변덕을 부리는 쪽은 하나님이 아닌 바로 나입니다. 그럼에도 변함이 없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주는  본문입니다.
항상 변함이 없으신  주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2012년 11월 28일 수요일

나의 사랑하는

아가서4:1-5: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지금  두사람은 결혼을 했습니다(8-12,5:1).
본문은 신랑이 자신의 신부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가득 넘쳐 있습니다.

현대인의 귀로 들어도  부드럽고 아름다운 표현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 중 하나가 남녀 간에 사랑입니다.

어떤 시인은 사랑에는 다섯가지 표현이 있다고 합니다. 언어로  사랑을 표현하고, 시간을 같이 보내고, 좋은 선물을 줄려고 애를 쓰고,  섬기고, 육체적인 친밀감... 연애하는 젊은 연인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쉽게 볼수 있습니다.

본문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수려한 미사여구로 자신의 신부에게 사랑을 표현합니다. 결혼을해 한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남편과 아내사이에서 이런 표현이 쉬운일이 아닙니다. 결혼하면 오히려 서로에게 무감각해지기 쉽습니다.

 어떤때는  오히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쉽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가정, 특히 아내와 남편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아내와 남편을 서로가 더욱 귀히 여기며 살아가야함을 본문을 묵상하면서 생각하게 해줍니다.

오늘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남편이나 아내에게 
또한 하나님에게  나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시겠습니까?

2012년 11월 27일 화요일

나의 삶속에

아가서2:8-3:1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애틋한 감정을 주며 출발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집에 있고, 이 여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녀를 부르고 있습니다(8). 그러나 그녀는 그가 집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는 창살틈으로 그녀를 엿보고 있습니다(9).

그러나 반전이 되어 3장이 시작되면서 이 여인은 그 사람의 구애에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1-4). 도리어 그녀가 그를 찾고 있습니다(2).

그녀는 그를 자신의 어머니집으로 인도 하고 있습니다(4). 이것은 온가족이 그를 환영하는 의미이고, 이 여인이 그에게 '프로포즈'를 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또한 아주 섬세하면서도, 사려깊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고 있습니다(5).

드디어 이들이 결혼을 합니다.
 6-11절에는 이들의 결혼식 장면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말씀에 의하면 이 사람은 그녀를 자신의 신부라고 6번을 부르고 있습니다(4:8-12;5:1)

본문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는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를 표상해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녀의 가장 내밀한 방으로 이끄는 모습을 보십시오(4).

나의 사랑하는 주님을 나의 삶의 어느부분에 모시고 계십니까?

2012년 11월 26일 월요일

합당한 감사와 찬양

아가서1:1-2: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아가서는 한편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를 읽는 느낌을줍니다. 그러나 아가서는 깊은 영적의미가 담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에는 왕(솔로몬)으로부터사랑을 받는  한 여성이 등장합니다 (2-4). 이 여인은 왕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왕이 어떻게  자기 같은 사람을 좋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습니다.

그녀는 스스로가 핸디캡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5-6절을 요약하면 그녀의 피부가 검다는데 있습니다(원래 검은 것이 아닌 햇볕에 거슬림,6).

그녀는 예쁜모델과 같은  스타일이 아닌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로 부터 거절을 당할까봐, 어딘가에 숨과 싶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그녀를 향한 왕의 마음은 여전히 사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9-13).

본문이 주는 영적인 의미는 매우 깊습니다.
이 여인처럼 죄로 검게 거슬린 나를 과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수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은혜와 자비하심은 한이 없으십니다. 왜냐햐면  영원한 중재자이신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하나님과 나와의 대화록이라고  바꿔 생각해보십시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분께 합당한 감사와 찬양을 드리십시오.

2012년 11월 25일 일요일

신랑되시는 그리스도

시편45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 시편은 왕을 위한 말씀입니다. 이 왕은 특별한 사람인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복을 받고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2,7).

아가서와 같이 이 시편은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을 잘 보여줍니다.
특히 8절이하에는 결혼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결혼은 한마디로 웅장합니다(8-15).

세상의 모든 결혼식은 다 기쁘고 인생에서 특별한 행사 입니다. 결혼은 떠남을 의미합니다.
부모로 부터 떠남을 말합니다. 작년에 영국의 왕자 윌리암과 게이트 미들턴의 결혼식이 세계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왕자도 결혼을 하면 새로운 관계를 위해 그의 가족을 떠나야 합니다(10, 창2:24, 엡5:31).

신약성경은 신랑으로서 그리스도, 신부로서 교회를 말씀합니다(고후11:2,엡5:27, 계19:7,21:9)
본 시편도 신랑 그리스도와 신부인 우리와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신부인 우리를 사랑하시는 신랑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상상해보십시오.

2012년 11월 24일 토요일

내일 종말이..

막13:28-3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13장 전체는 두 사건이 얽혀져 있습니다. 그들중 하나는 과거의 사건 즉 예루살렘 성전 파괴(14) 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의 사건으로 주님의 재림입니다(26).

본문은 무화과나무잎의 비유를 드시면서 주님은 재림과 연관시키시고 계십니다. 무화과 나무 가지고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것은 여름이 가까워짐을 표시해줍니다(28).

무화과 나무잎의 징조 처럼 5-13절의 사건은 재림의 하나의 징조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십니다(32).

주님이 재림을 말씀하실때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삶의 변화입니다. 주님 재림 시기를 알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앞에서 합당한 삶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재림에 대해 우리가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갑자기 오실것이라는 사실입니다(35-36).

본문 말씀은 2천년전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경고의 말씀이지만 21세기를 사는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경고의 말씀입니다(31).

우리주변에는 항상 거짓 메시야, 굴절된 인간관계, 박해등이 항상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신지가 오래되었지만, 그분의 초림이 역사적인 사건임이 분명하셨듯이 재림도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 ' 깨어있으라'(31)가 2천년전이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고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만일 내일 종말이 온다는 것을 안다면 오늘 나의 삶에서 변화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왜 아직 변화되지 않습니까?

2012년 11월 23일 금요일

시대의 징조

막13:1-2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만일 내일 종말이 온다면 오늘 무엇을 할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주님은 그동안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경고 하셨지만 본문에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경고하고 계십니다.

본문의 대화는 4명의 제자들과 주님 사이에 이루어진 것 입니다(3).  제자들은 성전 파괴가 종말의 시작임을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시기를 알고 싶었습니다(4). 그러나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주님은 서로 다른 두가지의 일에 대해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하나는 성전파괴(주후 70년에 일어남), 다른 하나는 종말의 시간에 대한것입니다

종말이 언제 될지 주님도 그 시간을 모르십니다. 대신  제자들과 오늘 우리에게 무슨일이 일어나던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십니다.

무엇보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5). 종말의 때 일수록 미혹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정신을 바짝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자칭 메시야라고 하는 거짓 메시야들이 왔고 올것임을 말씀합니다(6).

또한 박해당할 시기를 위해 준비하라고 하십니다(9-11). 그때에는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할것입니다. 심지어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박해 할것 입니다(12-13). 그렇게해도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종말의 시간에 일어날 일들을 예견하셨지만 한편으로는 큰 소망을 주셨습니다.  땅에 속한 모든 권세가 힘을 잃게 될것이고(24), 그분이 영광중에 다시 오신다는 약속입니다(26-27). 그분의 약속을 기대하며 기다림은 그분이 성경대로 삼일만에 부활하셨고, 성경대로 다시 오실 것이기때문입니다.

오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모슬렘, 힌두교, 불교권, 북한등)이 박해를 당하고 있습니다.어떤 상황에서도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설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2012년 11월 22일 목요일

풍성한 마음으로..

막12:41-4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며칠간의 일이지만 성전에서 다양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성전에서 장사 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고, 종교지도자들이 주님을 죽일려고 모의하고, 함정에 빠트릴려고 하는 질문을 하고, 신학적인 논쟁과,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 등 ... 많은일들이 일어 났습니다.
지금 주님은 앉아서 헌금 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계십니다.주님은 양편을 다 보고 계십니다. 한편에서는 부자들이 헌금을 합니다. 겉보기에 많은 돈을 드렸겠지요(41).
뒤이어 가난한 과부가 헌금을 합니다(42). 이 여인은 너무 가난했습니다.
아마 주님이 말씀 하신것 처럼 지도자들에게 착취를 당했는지 모릅니다(40).
부자들과 가난한 과부가 드린 헌금!
주님이 보시는것은 헌금하는 액수가 아닙니다. 그녀의 마음을 보셨습니다(43).
가난한중에 드린 이 사람의 헌금이 부자들이 드린 헌금 보다 더 귀하게 보셨습니다(44). 하나님은 사람을 쓰실때에나 헌금을 드릴때나 언제나 그 마음을 보십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일관된 원칙 입니다.
헌금을 드릴려고 할때에는 웬지 모르게 인색한 마음이 들때가 많습니다.
항상 마음에 감사와 풍성한 마음이 있게 해달라고 기도 하십시오.
" 모든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29:14)

2012년 11월 21일 수요일

약한자들의 편

막11:35-4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듵는 이들은 즐거워했다고 했습니다(37). 주님의 가르치심은 탁월하셨고, 신령한 지혜가 넘쳤습니다.

주님은 시편110:1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만일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면 다윗이 어떻게 그의 자손을 주님이라고 불렀겠는가?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가 어떤분임을 그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주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당시 성경학자요, 선생님이라고 일컫는 서기관들의 자세에 대해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비판하시는 서기관들의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38-40). 그것은 단순히 그들의 교만에 대한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부정직하고, 사회적 약자인 과부의 재산을 착취하고 겉으로는 경건한척, 아닌척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40).

물론 주님은 서기관들을 비판도 하시지만 한편으로는  언제나 가난하고 약한자들의 편이 되셨습니다(눅1:52-53).

오늘 교회도  사회적 약자들의 편이 되어, 압제당하고, 가난하고, 약한자들을 도와야 되지 않을까요?

2012년 11월 20일 화요일

저의 삶속에

막12:28-3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계속  질문을 받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서기관이 던진 질문은 진심이 담긴 질문입니다.

서기관의 질문은 모든 계명중에 가장 중요한것이 무엇인가?(28) 하는 질문입니다.

 주님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시면서 바로 대답하셨습니다(29-31).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매일 아침과 저녁 기도시간에 신6:4-5을 암송하면서 기도 합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고,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삶에 절대적 중심임을 고백하면서... 바울 역시 롬12:2에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31). 이 말씀은 레19:8절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모든 바른관계의 출발입니다. 세상에 흉악한 일들, 범죄 등등 ... 모든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굴절된 결과입니다.

놀랍게도 이 서기관은 매우 흡족해합니다(32). 서기관이 주님의 말씀에 동의한것은 복음서를 통해 본문이 처음일것 입니다.

 그는 주님보다 한걸음 더 나갔습니다. 주님과 이 서기관은 성전안에 있었습니다. 서기관은 이 계명이 모든 번제물과 기타제물 보다 낫다(33)고 합니다.

주님은 그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다고 칭찬하십니다(34).

 그렇습니다. 말씀의 실천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장 신앙적인 행위입니다. 이것이 모든 번제물보다 모든 제물보다 즉 예배보다 우선입니다

시편기자의 기도가 생각이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시40:8)
주님, 오늘 저의 삶속에서 주님의 뜻을 즐겨 행하게 도우소서!!

2012년 11월 19일 월요일

나쁜 질문

막12:18-2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주님에 대한 도전은 한층 가속화 되고 있습니다. 유대주의에 속한 모든 지도자들이 주님을 향해 도전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11:28), 장로들(11:27), 바리새인과 헤롯당(12:13), 본문의 사두개인들(18)...

본문에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대한 조소 (嘲笑) 섞인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무신론자들 역시 사두개인들과 같은 질문을 할것입니다.

신25:5절이하에 보면 아이가 없는 과부는 그의 남편의 형제와 결혼을 해서 그의 남편에 대를 잇게 하는 '계대 결혼' 제도가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이를 바탕으로  질문을 합니다.

만일 이런일이 6번이나 되풀이 된다면 부활때에 이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19-23) 하는 질문입니다. 듣기에 따라 매우 그럴듯 한 질문 같습니다. 부활을 부인하는 그들의 생각이 저변에 깔린 내용입니다.

이에대해 주님은 즉각 대답을 하셨습니다. 만일 그들이 성경을 제대로 안다면(24-25), 부활 때에는 결혼이라는 것이 없음을 알것이다.

또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이 아직 살아 있음을 말씀합니다(26-27), 이것은 이들이 부활을 기다리고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 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죽음이란 영혼과 육체의 분리됨입니다. 영혼이 떠난 육체는 부패해지고 흙으로 돌아갑니다.그렇다고 죽은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영혼은 천국에서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지옥에서 육체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중간상태((Intermediate)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서 죽은자들은 죽은것이 아닌  영광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부활을  확언해주시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고 있음을 책망하십니다(24).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천지가 그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때 처럼  죽은자들을 향해 말씀하실때 그들은 그 말씀에 순종해 죽음에서 다시 일어날 것 입니다.

주변에 믿음이 흔들리는 형제, 자매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믿음이 견고하게 설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2012년 11월 18일 일요일

일어나 도우소서

시44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어려운 시간을 보낸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자연히 어려움에 관한 기도일것입니다.
힘든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마음도 여유가 없고, 생각도 혼란 스럽습니다.

믿음이 아주 좋은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은 하나님께 마음도 많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염려와 걱정이 더 앞서기 때문입니다. 어떤때는 그야말로 아무말도 하기싫고 모든것이 귀찮아질때도 있습니다.

본문의 시편기자도 아마 이와 같은 심정인것 같습니다. 본 시편은 민족적 절망 가운데 기록된 말씀입니다(9-10). 본문을 읽어가면서 시편기자가 현재 자신의 민족이 처한 상황에 대해 말하는것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당시 현실을 상상해보십시오. 거기서 그의 깊은 감정을 엿볼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현재 이웃민족에게 조롱을 당하고 있고(13-14), 그들의 지도자들도 그렇습니다(15-16). 하지만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4).

그는 모든 승리의 근원은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5-7). 또한 그는 하나님은 과거에도 신실하게 행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1-3). 그리고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 임을 알고 있습니다(21).

그는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에 이런 고난을 허락하셨는지? 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모든 촛점을 마추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정직하게 하나님께 말하고 있을뿐입니다(23-26).

본 시편은 어려움에 처한 개인이 그의 심중에 있는 말을 하나님께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저의 주목을 끈 말씀은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26) 입니다.

이 말씀으로 오늘 하루의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2012년 11월 17일 토요일

하나님보다

막12:13-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죽음과 세금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입니다.  세금을 좋아하는 사람은 세금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에는 세금에 대한 문제를 제기함으로 주님을 함정에 빠트릴려고 하고 있습니다.그래서  바리새인과  헤롯당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13). 바리새인과 달리 헤롯당은  친로마정부파들입니다.  본문에는 주님을 책잡을려고 서로 힘을 합하고 있습니다(14).

이들이 주님께 한 질문은 보통 사람으로는 금방 답하기 힘든 교묘한 질문입니다.
 세금을 로마정부에 바치는 것이 옳은가? 아닌가? 하는 질문입니다.

만일 주님이 옳다고 한다면 민족주의가 강한 유대인들로부터 강한 반감을 사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이 아니라고 한다면 로마정부와 로마인들에게도 책잡히게 됩니다. 교묘한 술책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간악함과 위선을 보셨습니다(14-15).
이에 주님은  가이사의 형상이 있는 동전을 가져와 보이라고 하셨습니다(주님은 왜  동전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지?...)

가이사의 형상은  그의 권위를 나타냅니다. 주님은 지혜로운 대답을 하심으로 (17)그들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를 분리하지 않으셨습니다.세상의 권위(통치자, 정부)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세상의 권위를 존중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것은 하나님의 권위입니다. 만일 세상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가 충돌한다면마땅히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해야합니다.

혹 하나님 보다 인간의 권위를 더 두려워하지는 않습니까?



2012년 11월 15일 목요일

권위

막11:27-3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 순종해야 합니까?
종교다원주의가 성행하는 이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성전에서의 주님하신 행동은 (15-17) 율법학자들과 대제사장들의 반응을 강하게 이끌어내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18). 하지만 본문에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할자들 뿐만 아니라 장로들까지 합세한 상황입니다(27).

이들은 71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유대주의에 골격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예상대로 이들은 주님께 ' 네가 무슨 권위로 , 또한 누가 네게 그런 권위를 주었는지'를 물었습니다(28).

이 권위에 대한 질문은 오늘도 계속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구원자이신가?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는가? 다원주의는  하나님과 인간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주님의 권위를 격감 시킬려고 합니다. 사탄의 계략입니다.

이들의 질문에 대해  주님은 오히려 다른 질문으로 역공을 하십니다(29-30).
주님의 질문은 상당한 기술적인면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지혜를 엿볼수 있습니다.

주님은 질문을 던지면서 자신과 세례(침례)요한과 연결을 시키고 있습니다.
즉 요한의 세례(침례)가 하늘로서 온것이냐 사람으로 부터 온것이냐? 하신 질문입니다(30).
이 질문은 이래도 걸리고 저래도 걸리는(31-32) 절묘한 것이었습니다.

높은 성경지식과 권위를 자랑하던 이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결국은 모른다고 대답함으로 (33), 그들 스스로의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참된 권위자이신 주님께 권위를 묻는것 자체가 얼마나 모순된 질문입니까?
나의 삶속에 주님의 권위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2012년 11월 14일 수요일

용서

막11:20-2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어제 본문에는 주님께서 성전을 정화 시키는 일을 하시기 전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이 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습니까? 주님이 단지 배가 고파서? 하지만 막상 열매가 없는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화가 나셔서 저주 하신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호세아9:10, 미가7:1-6,렘8:13,29:17).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보시고 주님의 한탄하심입니다.

다음날 베드로는 주님이 말씀하신것이 기억하며 그 나무를 보았을때 나무가 뿌리부터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20-21).

베드로가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한 것은 이번만이 아닙니다(14:72).

그러나 주님은 무화과 나무가 마른 사건을 오히려 믿음(22)과 기도(24)에 대해 가르치시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믿음과 기도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믿음은 기도의 능력을 더욱 증가 시키고 기도는 믿음을 북돋워줍니다. 하지만 기억할것은 믿음과 기도는 우리가 구하는 것 마다 받게 하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믿음으로 하는 기도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 할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25).

아직 마음에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2012년 11월 13일 화요일

분노

막11:12-1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두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는 사건, 다른 하나는 성전을 정화시키는 사건, 이 두사건속에서 주님의 모습은 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두사건은 당시 이스라엘의 시대상을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성전을 정화 시키는 사건이 본문의 중심주제입니다.예루살렘에 도착하신 주님은 성전에 들어가 먼저 둘러보십니다(11).

그런데 주님은 다시 성전에 오셨습니다(15). 그러면 무엇이 주님으로 하여금 다시 성전에 오게 했습니까?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15-16).

그것은 성전에 예배드리러온 자들이 희생제물을 사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관행화 되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성전을 관리하는 자 가 이방인 뜰에서 사고 파는 행위를 묵인해주고 있었습다. 묵인해주는 댓가로 댓가성 뇌물을 받았을것입니다.

희생제물을 파는 장사꾼들은 폭리(利)를 취했습니다. 이것이 예배자들로 하여금 큰 부담을 갖게 했습니다.

이장면을 본 주님의 분노는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분노가 극에 달하신 주님은 성전을 난장판으로 만드셨습니다.주님은 선지자들의 말을 인용하시면서(17, 사56:7;렘7:11)"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굴로 만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교회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예배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교회안에 세속주의, 소비주의, 물질주의,상업주의등 혼합주의가 들어와 이것이 복음인냥 일반화 되어 있지는 아니합니까?

만일 그렇다면 성전에서 분노하셨던 주님의 모습을 기억하십시오. 

2012년 11월 12일 월요일

이분이 가신 길

막11:1-1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주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주님을 보고 군중들은 매우 열광했습니다(8-10).

주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모습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10).
비록 마가는 마태와 요한처럼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이 장면은 스가랴9:9절과 연결된것입니다.

이렇게 환호를 하던 군중들은 얼마지나지 않아 그 열광적인 환호가 적개심으로 바뀝니다(막15:13-14). 열광주의는 금방 돌별할수 있는 위험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박수와 갈채를 좋아하며 사는 사람들은 얼마지나지 않아 큰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런면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들이 목회자들입니다.

또한 교회에서 행하는 많은 이벤트, 많은 프로그램등은 금방 실증을 느끼게 되고 공허함을 만들기 쉽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조용한 가운데, 말씀안에서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또한 순종과 신실함은 주님을 찬양하는 참된 증거입니다.

군중들과는 다르게 예루살렘을 향하는 주님의 마지막 여정은 웬지 쓸쓸함으로 가득찬 개선식과 같은 느낌을 갖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제자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제자의 도 라는 순간적으로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나귀를 타신 이분이 가신 모든 길을 조용히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이 아닐까요?

2012년 11월 11일 일요일

갈망

시42-43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이 두시편은 매우 인상적이고, 감동을 주는 말씀입니다.
본 시편기자는 매우 깊은 절망의 늪에 있었다가 그곳을 빠져나와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찬양으로 가득차 있는 아름다운 내용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런 고백이 나와야 되지 않을까? 하고 본문을 묵상하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42:5,11,43:5).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힘든 상황에서 마치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 상태에서 그는 자신에게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 하는 내가 왜 낙심하며, 불안해 하는가?

또한 그는 하나님의 인도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43:3). 그의 주변에 그를 향하여 조롱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은것 같습니다(42:3,10;43:1-2).

힘든일이 거듭되면 하나님이 마치 침묵하시는 것 같고, 멀리 계시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수가 없습니다(42:9;43:2).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께 항의하고 싶은 생각이 들때가 많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42:9) 하며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의 시련의 골짜기에서 벗어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합니다(42:11,43:5).
낙심과 절망의 느낌이 일시적으로 들지만 결국 찬송하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특히 이 두시편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첫부분입니다.
"내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42:1)
이 표현보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을 충분하게 표현할수는 없을것 입니다.

자신을 찾는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주님! 제 영혼이 오늘도 주님을 찾기에 갈급합니다.
주님을 갈망합니다. 저의 심령에 은혜를 더하여 주소서!!

2012년 11월 10일 토요일

요셉의 고백

창50:15-2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야곱은 죽으면서 자기가 죽은 후 혹시 요셉이 형들을 해할까봐 형들을 해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긴것 같습니다((16-17). 형들은 17년전 사건때문에 요셉이 자신들을 해할까봐 두려움속에 있었습니다.

야곱도 같은 상황을 맞이한적이 있습니다. 이삭이 죽을때가 되자 에서의 복수가 두려워 미리 도망을 쳤습니다(창27:4).

지금 아버지 야곱이 죽은 상황,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요셉은 얼마든지 형들에게 복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얼마나 감동적인 말입니까?
".. 두려워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19)

이 말은 사도바울이 로마서에 한 말과 같은 말입니다."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롬12:19).원수는 내가 갚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요셉의 그 다음말은 더욱 아름다운 말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오늘 같이 많은 생명을 구하셨습니다"(20).요셉은 모든 상황, 사건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어떤상황이든 그것을 다 사용하셔서  항상 선으로 바꾸십니다. 때로는 인간의 실수까지도 선으로 바꾸십니다.

힘들일, 상처받은 일, 좋은 일, 그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항상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그러므로 믿음의 삶이란 이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는 삶입니다. 

오늘 나의 삶에도 이 요셉의 고백이 있습니까?

2012년 11월 9일 금요일

항상 행복한 사람

창49:29-50:1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나이 많은 야곱은 죽음이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그의 죽음은 축복된 죽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둘러 싸인채, 자신의 장례에 대해 부탁을 하고, 그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다한채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는 매우 만족했고, 자신의 조상들이 잠든곳에 묻히고 싶었습니다(29).
우리도 때가 되면 죽음을 맞이 하게 될 것 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는 믿음으로 죽음앞에서 야곱처럼, 두려움없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주님앞으로 갈수 있음을 믿습니다.

평생 주님의 도구로 살다가 마지막 삶은 평화롭게 끝을 맺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믿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마음껏 축복하면서, 살아오면서 나에게 악하게 행한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면서, 주님과 더불어 앞서간 성도들을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주님앞에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죽음입니다.

바울은 사망이 쏘는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고전15:55-56). 하지만 주님이 십자가에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사망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우리 자녀들의 앞날을 예견할 수는 없지만, 비록 그들에게 많은 유산을 물려줄수는 없지만. 그들에게 줄수 있는 최고의 유산인, 그리스도께서 주신,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약속을 물려줄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살아 있으나 죽으나 항상 행복한 사람입니다.

2012년 11월 8일 목요일

회개

창49:1-2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야곱은 죽기전에 아들들을 모아놓고 그들을 위해 축복하며 예언을 합니다. 죽어가는 아버지가 나를 위해 축복한다면 참 아름다운 일일 것입니다.
특히 유다와 요셉은 아버지로부터 축복의 말을 들었습니다(8-12,22-26). 그들의 앞날이 번성할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벤냐민, 납달리, 아셀, 단, 스불론의 장래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 대한 예언은 좋지 않습니다. 이들이 과거의 지은 죄가 이들의 앞날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인 빌라와 동침을 했습니다(창35:22), 시므온과 레위는 누이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한 것에 대한 복수를 무자비하게 했습니다(창34). 이들이 과거에 저지른 죄에 대한 댓가를 장래에 치루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들이 받을 축복이 유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유다도 과거 며느리 다말과 동침을 한 부끄러운 일이 있었습니다(창38). 그러나 죄를 대하는 태도가 이들과 너무나 달랐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자신들이 한 행동을 정당화 시켰고(34:31), 유다는 깊이 뉘우쳤습니다(38:26).
즉 시므온과 레위에게는 '회개'가 없었고 유다는 '회개' 했습니다.

나의 과거의 행동은 반드시 장래에 영향을 줍니다. 문제는 회개 입니다. 회개는  죄를 씻는 통로일뿐만 아니라, 죄의 댓가를 바꾸어 놓습니다.

 무슨 죄를 지었던지  주님의 십자를 의지하며 회개하는 자를 다시 회복시키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012년 11월 7일 수요일

하나님의 선택

창48:1-2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세상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규칙이란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역할을 해줍니다.
야곱의 시대에는 장자권이 있었습니다. 장자는 가정의 제사장인 아버지의 축복을 받고, 아버지의 소유를 두배로 받을수 있고, 제사장 역할을 할 수 있는 축복된 특권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본문에는 야곱이 요셉의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들은 손자들이었지만, 야곱은 아들처럼 대하고 있습니다(5)

이상하게 야곱은 형인 므낫세가 아닌 동생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을 얹어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13-14). 이 장면을 본 요셉은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고 아버지의 오른손을 다시 므낫세에게로 옮기려 했습니다(17).

비록 장자라도 장자권을 잃어버리고 동생에게 장자의 축복이 넘어가는 예를 창세기를 통해 볼수 있습니다. 가령, 가인 대신 셋이 그러했고(창5), 이스마엘 대신 이삭(창21), 에서 대신 야곱(창27), 므낫세 대신 에브라임(본문).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기준으로 알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인간의 상식과 규칙을 넘어설때가 많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울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한 천국의 기업을 이어받을 자녀가 되었습니다(롬8:15-17).

인간의 기준과 상식을 뛰어넘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2012년 11월 6일 화요일

먼저 무엇을?

창47:13-3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현대의 최첨단의 기술 문명은 그 어느때보다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윤택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이런 기술문명의 혜택은 창조력의 산물입니다.

요셉은 지혜가 탁월한 사람입니다. 물론 그의 지혜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 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요셉과 같은 지혜가 필요하다고 더욱 느껴집니다.

본문의 요셉의 계획은 애굽사람들의 소유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취하므로 그들이 생활을 유지하게 만들었습니다. 먼저 그들의 돈을(15), 다음은 가축을(17), 다음은 땅을 마지막으로는 그들 자신(20-21)이었습니다.

이렇게 기근의 시대에 곡식을 얻는 것은 그 어떤것으로도 힘이 드는 상황입니다. 그러면 요셉은 왜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였을까? 얼마든지 자선적인 행동을 할 수가 있는데도..?

사실 요셉의 행동은 구약의 가르침에 기인한것 입니다(레25:14-43). 비록 요셉이 그들의 소유물들을 취하고,또한 땅의 소유권을 포기하게 하였지만 그들은 그것을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마치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처럼..

요셉은 그들에게 20퍼센트의 세금만 거두고 나머지의 이익은 그들이 가지도록 해서 그들이 풍족하게 살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애굽인들은 자신들의 소유물이나 자신들을 바로왕에게 바침으로 삶을 영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그들의 것을 바로왕에게 바침으로 삶을 영위해간것 처럼, 우리 소유와 삶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주실 풍성한 은혜를 위해 먼저 내가 무엇을 주님께 드려야할지를 생각해 봅니다.

나의 무엇을 주님께 드리겠습니까?

2012년 11월 5일 월요일

하나님의 인도

창47:1-1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창46장에서 야곱은 그의 아들들과 그들에게  속한 온 집안 식구와 함께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건너와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야곱의 가족이 바로왕을 만났을때 그들이 기대하지 않았던 환대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바로를 만나기전 해야할 말을 미리 준비 시켰습니다(46:33-34).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만 우리가 해야할 일은 최선을 다해 준비해야함을 다시 생각하게 해줍니다.

이런면에서 형들의 대답은 완벽한 것입니다(3-4).바로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바로는 이들이 요구한것 보다 더 많은 부분을 보너스로 주었습니다.

가장 좋은 땅을 주었을뿐만 아니라 그들을 신뢰해 바로의 가축들을 돌보는 관리인으로 취직을 시켜주었습니다(6).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넘치도록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삶의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때로는 좋은 길을 만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험악한 길을 만나고 심지어는 막다른 길목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럴때는 가던길을 멈추게 됩니다. 그러면 뜻밖에 다른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거기에서 험한길을 걸었던 과정속에서 힘들었던 것들이 회복이 되기도 하고,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분이 인도하시는대로 따라 가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2012년 11월 4일 일요일

늘 나를

시41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많은 얼룩이 있습니다. 본문의 시편기자도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원치않는 병에 걸리기도 하고(3), 때로는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하고 이렇게 육체와 정서의 고통을 당할때가 많습니다.

사람의 삶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언제든지 접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남에게 심한말을 듣기도 합니다(5-6), 때로는 남으로 부터 판단을 받기도 합니다(7).

심지어는 가까운 친구나 가족으로 부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9).

더욱이 영적인 고통을 당합니다. 죄가 생각이 나고. 나는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는 죄인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음에도.. 이런 깊은 영혼의 밤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삶속에 받는 여러가지 고통들을  그의 백성이라고 면제해준다고 하신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하나님은 이런 고통을 견딜수 있는 힘을 주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문제가 닥쳐와도, 어떤 마음의 상처를 받아도 문제 될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1-3),  삶에 일어나는 문제들보다 더욱 강하게,더욱 능력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탁하고 있습니다(11-12).

늘 나를 강건하게 하시고 능력으로 붙드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변에

살후3:6-18, 오늘의 묵상입니다.
현재 세계경제가 어려워짐으로 미국, 캐나다의 실업율이 증가 하고 있습니다. 일을 하고 싶지만 일자리 찾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안에 문제를 일삼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6-11).이 경고는 일을 하고 싶으나 할수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 일할수 있는 여건이 충분함에도 일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초대교회는 첫 출발때 부터 교회안에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구제제도가 있었습니다(행4:34-35, 6:1-2). 불행하게도 데살로니가 교회안에는 이런 교회의 제도를 남용하는 이 들이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일을 할 수 있지만 교회의 도움을 받으면서 게으르고 안일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노동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원리입니다. 노동은 타락으로 인해 생긴것이 아닌 타락이전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은(창1:28)은 노동의 명령입니다. 노동이 힘든것이 아니라 타락으로 노동이 힘들어 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일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직업을 천시하지 않고 신성하게 여기며 그 노동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노동관입니다.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벗어나는 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바울은 직업을 갖지 않고, 게으르게 살면서 문제를 일삼는 이들에게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6,12, 살전4:11-12;5:14). 하지만 교회에서 문제를 해결할 때에는 사랑으로 해결해야 합니다(6,14,15).

특히 바울은 친히 자신이 본을 보였습니다. 그도 역시 주야로 일을 하면서 교회를 섬겼습니다(7-9).

 주변에 일을 하고 싶지만 일자리가 없어서 경제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형제, 자매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2012년 11월 2일 금요일

나의 기도

살후3:1-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있고, 당할것입니다. 바울이 받은 고난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고후11:23-29).

 본문의 마지막절 5절을 보면 새삼스러운일이 아님을 더욱 느낍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1-2).

바울은 직면한 박해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때마다 자신을 도우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장 적당한 표현은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라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아무리 심약한자라도  기도할때에 그를  강하게 하시고, 상황을 바꾸어주시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늘 경청(傾聽)하시기 때문입니다(3).

본문에서 바울의 또 다른 기도제목을 볼 수 있습니다(1,2,5). 그는 자신의 안전보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고, 복음이 잘 증거 되도록 기도해달라고 합니다. 바울의 이런 자세는 오늘의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이 본 받아야할 모습입니다.

그리고 또하나의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한 기도는 그들을  고난으로 부터 구원해달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것을 견딜수 있는 힘을 달라는 것 입니다(5).

요즈음 나에게 힘든일이 있습니까? 그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인내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2012년 11월 1일 목요일

적그리스도

살후2:1-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적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적그리스도는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불법의 아들입니다(4).

바울은 여기서 그에 대해 더 이상 상세하게 묘사하지 않지는 않습니다(9-11).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적 그리스도가 나타날것을 예상하며 살아야 합니다(9,마24:11,12,23,24).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들의 도시에서 역사는 불법의 아들의 힘을 잘 알고 있습니다(7,행17:5-9). 어느때나 어디에서든지 사탄의 역사는 강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앞으로 나타날 적그리스도에 대해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마귀를 이미 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적 그리스도가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든지 두려워 하지 말고 더욱 힘써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이 흉흉하고 불법이 판을 치고, 사회가 더 악해진다 해도 그럴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견고하게 서야 합니다(16).

이것이 적그리스도를 이길수 있는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