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30일 일요일

악인의 형통

시73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 시편은 다윗 시대에 유명한 음악가중에 한 사람이었던 아삽이 쓴 시편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적 의문을 정직하게 표현합니다.

 그는 신앙적으로 거의 실족할뻔 했습니다(2). 이유는 악인의 형통함때문입니다(3).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악인들이 형통할수 있을까? 죽을때에도 고통 없이 죽는것 같고(4), 고난을 당하거나 고생하는 일이 없는 것 같고(5) 그러니 더 교만해질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6).

이들을 바라보는 그로서는 허무감에 빠질수 밖에 없었습니다.
 ' 내가 의롭게 사는 것이 헛된 것인가?(13) 악한 놈들은 고생도 않고 사는 것 같은데 나는 왜이렇게 고생하며 살아가는 가?(14)
마음에 심한 고통을 가졌습니다(16).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아삽의 고민을 해보았을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그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17).

그것은 율법이 있는 성소에서 말씀으로 해결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성도의 모든 가치 기준은 일시적인 세상의 것이 아닌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있음을 말씀합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이들에게 잠시 주시기도 하고, 갑자기 다 가져 가시도 합니다(19).

성도의 행복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있습니다(24)
하나님은 나의 영원한 분깃이고(26). 반석이시고,(26),  피난처 이십니다(28).

 하나님없이 악하게 살며 형통한것은 형벌입니다.

2013년 6월 29일 토요일

믿음은

요10:22-4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때는 겨울이었습니다. '빛의 축제'라고 일컫는 수전절(하누카,Hanukkah)을 맞이했습니다.
수전절은 안티오쿠스에 의해 성전이 더럽혀진것을 유다 마카비의  지도아래 성전을 탈환하고 성전을 정화 시킨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때는 12월이었습니다.

이시기에 주님은 성전안 솔로몬 행각에 계셨습니다(22-23). 예수님이 그곳에 계심을 보자 유대인들은   다시 에워싸며 주님의 정체를 물었습니다(24).

주님은 이들에게 주님의 양이 아니어서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26).
주님은 자신의 양된 자들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하셨고,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28). 구원받음의 불변함을 말씀하셨고 목자로서의 지키심을 말씀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구원을 빼앗을 존재가 없습니다. 주님의 구원은 불변합니다.
이 세상은 주님의 양된 우리가 살기에 너무 악합니다. 안전하지 않습니다.

양은 힘이 없지만 목자가 있기에 든든합니다. 나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그분의 섬세한 돌보심속에 살고 있음을 믿습니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 까지도 주님의 도우심이 있습니다.

 주님의 양은 스스로 양이 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주신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29).
내가 주님을 영접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끄셨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대로 믿음을 가진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내 믿음도 내 마음대로 안되지만 남의 믿음은 더욱 마음대로 할수 없습니다.

요한은 이에 대해 세례(침례)요한을 가리킵니다.
세례(침례) 요한은 아무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참되게 증거만 했습니다(40-41), 요한의 증거는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42).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참되게 전하기만 하면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입니다..

 믿음은 하나님만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29).

2013년 6월 28일 금요일

선한 목자

요10:11-2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 나는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셨습니다(11). 아이러니하게도 1세기 유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선 목자들을 좋은 시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8세기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에서 목자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겔34).그만큼 좋지 않은 목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역설적인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했던 사마리아인을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비유하셨고, 목자 역시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와 삯군을 비교하셨습니다(11-13)
삯군은 보수를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이리가 오거나 위험이 닥치면 양들을 팽개치고 자기 살겠다고 도망을 칩니다.

반면에 선한 목자는 위험을 무릎쓰고 양들을 지킵니다. 늘 양들의 사정을 살핍니다(14).
양들을 위해 희생합니다(15).

선한 목자와 삯군은 목적이 다릅니다.

교회가 불행해진다면 대형화, 물질화, 직업화 되는데 있을것입니다.
하지만 직업으로 일하는 사람은 목자가 아닙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와 삯군을 분명히 구분하셨습니다.

2013년 6월 27일 목요일

목자의 음성

요10:1-1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양떼를 치는 목자들은 양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양우리는 벽이 있고 문이 있습니다.
목자는 당당하게 문으로 들어가서 양들을 만납니다(2). 절도나 강도는 벽을 넘어 들어갑니다(1).

예수님은 당시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을 보실 때 목자로 보기보다는 절도나 강도로 보셨습니다(8). 또한 그들은 주님의 양들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고 싫어 했습니다(3-4).

목자의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릅니다(4).
목자가 아닌 타인의 음성은 따르지 않습니다(5).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르는 양들이 따로 있듯이 주님의 양들도 따로 있습니다.
목회자가 자신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양을 만들수 없습니다.
어떤 지혜와 노력과 힘으로 주님의 양을 만들수 없습니다.
주님의 양은 주님만이 만드십니다.

목회자는 말씀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연구해 전하면 됩니다.
주님의 양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모이듯이

목회자가 가감없이 순수하게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고 하나님의 양들은 모여들것입니다.


2013년 6월 26일 수요일

주여 내가 믿나이다

요9:35-4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을 변호하다 회당에서 출교를 당한 이 사람을 만나주셨습니다(35)
소경되었던 사람은 고침을 받고 주님을 변호했지만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매우 얕았습니다.주님이 선지자이고(17), 하나님께로 부터 온 분임을 (33) 확신했습니다.

본문에는 " 주여 그가 누구십니까? 내가 믿고자 합니다(36). 말할 때 그리스도가 인자이심을 고백하도록 주님이 이끄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발전되어 왔지만 그가 처음 경험한 것은 교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육체적 치유였습니다.

구원이 먼저 왔고, 거지생활과 절망과 좌절의 옛 생활이 아닌 새 새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이 먼저 옵니다. 옛 생활이 아닌 새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 다음이 교리를 알게 됩니다. 물론 신앙적 전통, 견해, 모든 체험,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성경의 조명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항상 적용 되는 것은 아닙니다.

파키스탄 같은 나라에서는 성경을 마음놓고 읽을수 없습니다. 교회도 쉽게 갈수 없습니다. 파키스탄의 그리스도인들의 성경 지식은 매우 얕습니다. 단편적입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때문에 이슬람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고, 심한 박해를 받으며 살지만 매일 주님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드립니다.

고침 받은 소경은  주님이 인자임을 고백하고 경배를 드렸습니다(38).
살아계신 주님은 우리의 예배와 경배의 대상이지 사색이나 교리적 논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절하는지라"(38)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합니다. 아-멘-

2013년 6월 25일 화요일

이때부터...

요9:13-3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고침을 받았으면 축하해야 할 일인데 시비가 벌어졌습니다.
시비의 발단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이일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14,16).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하면 회당에서 출교하기로 했습니다(22). 유대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회당에서 출교당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사회에서 추방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리새인들은 고침 받은 소경을 심문했습니다. 누가 눈을 뜨게 해주었느냐는 질문에 이사람은 거침없이 그분은 "선지자"라고 했습니다(17). 그분이 내 눈을 뜨게 해주었다고 말했습니다(30). 결국 그는 출교를 당했습니다(34). 그가 출교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입으로만 믿는것이 아닙니다. 머리로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살아계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그의 부모는 출교가 두려워 대답을 회피했습니다(21-22).
날때 부터 소경인 아들이 눈을 떴는데.. 죽을때까지 감사해도 모자랄 일인데.. 하지만 이들은 출교 당하는 것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소경이었던 사람이 소경 그대로 있었다면  아무 파장이 없었을것입니다.
갈등은 이 사람이 눈을 뜨기 시작한데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영적 소경은 아무 갈등없이 세상이 흘러가는대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고 영적 눈을 뜨면 문제가 시작됩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2013년 6월 24일 월요일

때가 아직...

요9:1-1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맹인을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 됩니다(1). 맹인을 보자 제자들은 누구의 죄(부모 혹은 자신)때문에 이 사람이 맹인이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2).
인간이 당하는 불행과 질병은 죄로 인해 오는 경우가 있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고난이 없이는, 질병이 없이는 너무 교만하기에, 주님을 만나기 위해 불행이 찾아 오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에서 당시 유대인들의 편협적인 생각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누구의 죄때문이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셨습니다(3).

주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실로암 못가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고 그의 눈을 고쳐주셨습니다(6-7).

맹인을 고쳐주시면서  "때가 아직 낮"이라고 하신 말씀이(4)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주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시간을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낮은 기회의 시간입니다. 낮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항상 낮은 아닙니다. 때가 되면 밤이(질병 혹은 죽음) 찾아옵니다.

오늘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면서 "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말씀으로 각오를 더 새롭게 해봅니다.



2013년 6월 23일 일요일

통치자를 위한 기도

시72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 시편은 이런 왕이 되게 하소서 아들 솔로몬을 위한 다윗이 기도로 지은 시입니다(20).
왕의 바른 통치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기에 그는 아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왕의 바른 통치는 공의로 나라를 이끌어감으로 부터 시작됩니다(2-3).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억울함이 없어야 합니다. 공의로 통치되는 나라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셔서 경제적으로도 융성해집니다. 백성들이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3).

왕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긍휼과 자비로 통치하는 자입니다(12-13).
지도자는 백성의 안전과 재산을 지키는 일이 중요한 책무입니다(14-15).
백성들은 왕을 위해 항상 기도하라고 했습니다(15).

어떤 통치자이던( 좋은 지도자이던, 나쁜 지도자이던)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이들이 행한 일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심판 하십니다.

우리의 할일은 정부와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공의, 자비, 긍휼, 정직, 정의롭게 나라를 통치할수 있도록..


2013년 6월 22일 토요일

믿음

요8:48-5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대화가 통하지 않는것 만큼 답답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과 유대지도자들의 대화를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향해 귀신들렸다고 했습니다(49,52). 이들이 귀신들렸다고 하는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51),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이 나기전 부터 계셨다고 하셨습니다(58).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눈앞에  30이 갓넘은 젊은이가 자신들이 가장 존경하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고 하니 미친놈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하셨습니다(54). 하나님은 아들에게 영광을 돌리십니다. 아들 또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십니다. 주님이 동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돌을 던질수 밖에 업습니다(59).

예수를 믿는 믿음이 얼마나 귀한것인지 본문을 통해 더욱 실감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을 주신 은혜를 찬양합니다.

2013년 6월 21일 금요일

진리에 속한 자

요8:42-4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거짓말은 사람이 쉽게 지을수 죄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떤때는 선한 뜻으로 거짓을 말할수 있지만 대부분 잘못된 동기에서 거짓을 말합니다.

5세기의 어거스틴은 거짓말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거짓종교의 가르침'이라고 했습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가르치는 것 만큼 심각한 것은 없습니다.
구세주가 아닌데 자신이 구세주라고 하는 것 만큼  큰 사기는 없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거짓에 속아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마귀를 거짓의 아비라고 하셨습니다(44).
서로 믿지 못하고, 사기를 치고, 속이고..  복음을  변절 시키고, 말씀을 바르게 보지 못하도록 영의 눈을 가리웁니다. 그 근원은 마귀에게 있습니다.

거짓(마귀)은 진리를 미워합니다.
 진리를 전하는 자들을 박해합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신악시대에 사도들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수세기 동안 교회와 진실한 성도들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왜곡된 복음을 전하지 않고 복음을 바르게 전하면 인기가 없습니다.

거짓과 왜곡된 세상에서 진실한 성도들은 박해를 받습니다. 진리에 속한자요 하나님에게 속한 자이기때문입니다(47).






2013년 6월 20일 목요일

자유

요8:31-4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큰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모슬렘들도 이런면에서선 같을 것 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지만 아브라함 처럼 의롭게 행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37,40). 주님께서 이들을 향해 죄의 종이라고 했습니다(34).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존심으로 살던 이들에겐 큰 충격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주님을 떠난 삶은 종의 삶입니다.
죄와  이런 저런 염려와 두려움의 속박되어 있습니다.
질병에 대한 두려움, 경제적인 걱정, 노후생활의 염려, 자녀들에 대한 염려.. 어디엔가 속박되어 있습니다.

어제 문득 잠자리에 들면서 믿음의 사람 죠지 뮬러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처럼  날마다 걱정없이 늘 행복하게 살아갈수 없을까?  그는 믿음 하나로 평생 자유인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주님은 오늘 아침에 이에대한 해답을  다시 제시해주십니다.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32)

이 말씀을 새기며 오늘 하루를 시작해봅니다. 샬롬!


2013년 6월 19일 수요일

새로운 공동체

요8:21-3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예수님과 유대지도자들과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들이 전혀 알아 들을수 없는 말씀만을 하십니다.
"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오지 못한다"(21)," 하늘에서 오신분"(23), "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죄가운데 죽을것"(24).

주님을 믿지 않는 자 들에게는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육적인 사람, 물질적인 사람은 영적인 말씀을 알아 들을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속한 마음으로는 주님을 믿을수 없습니다.

주님은 위에서 오신 분이십니다(23). 주님은 자신을 믿지 아니하면 죄 가운데 죽는다고 하셨습니다(24).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믿어도 되고 믿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어야 죄로 부터 구원을 얻습니다. 믿어야  영생을 얻습니다.

기독교가 독선적이다, 뭐다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았습니다(행4:12).

주님께서 위에 났듯이 우리도 위에서 난 자들입니다.
위에서 난  자들의 새로운 공동체 교회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새로운 공동체는 육적,물질적, 경갱적, 자기 중심적이 아닌  하나님의 중심의 예배 공동체임을 믿습니다.

2013년 6월 18일 화요일

유일하신 분

요8:12-2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7:53에 이어 장막절 기간에 행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12). 빛이신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장막을 치심) 오셨습니다(요1:14). 이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일수가 없었습니다(13). 애써 주님을  외면 하였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말씀마다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들은 육체를 따라 판단 하는 자 들이었습니다(15).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살아가는 단세포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육에 속한 사람이라 합니다. 죄와 허물로 영의 눈이 가려져 빛이 있어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할수 없었습니다.
주님이 목수였다는 것, 주님이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는 것 자체가 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하지만 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도 해는 떠오릅니다. 천체에 대해 아는바 없어도 밤 하늘의 별들은 빛을 발합니다. 주님은 생명의 빛이십니다(12).

일일이 열거 할수 없을 정도로 역사 가운데 위대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나폴레옹, 알렉산더등..그러나 주님은 위대한 분이시기  보다'유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분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시고, 생명의 빛이십니다.

"..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아-멘

2013년 6월 17일 월요일

너희 중에..

요8:2-1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현대 이슬람 세계에는  아직도 간음한 사람에게 돌로 쳐죽이는 형벌은 내립니다.
예수님이 살던 유대 사회도 그러했습니다.

유대지도자들은 간음중 현장에 붙잡힌 여인을 데리고 와 주님을  함정에 빠트릴려고 했습니다(3-4). 만일 요한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었다면 당시 현장의 긴장된 상황을 동영상으로 촬영해서 유튜브에 올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리는 유대지도자들의 모습과 예수님이 어떤 대답을 하실까? 흥미진지하게 바라보는 사람들...

유대지도자들의 질문은 매우 교묘했습니다(5).
만일 예수님이 돌로 치라고 한다면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는 법이 없는 로마법을 위반하게 됩니다. 돌로 치지 말라고 한다면 유대의 법을 어겨 산헤드린 공회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악한 지혜입니다.

이때 주님은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는  말씀으로 이들의 악한 지혜를 물리치셨습니다(9).

남을 쉽게 판단하고 비난하기 좋아하는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의 말씀은 동일 하십니다.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2013년 6월 16일 일요일

그분을 더욱

시71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떤 때는 하나님이 가장 가까이 계신것 같은 느낌이 들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때는 영적 침체에 빠져 하나님이 멀리 계신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이기에 신앙에도 기복이 있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도 가끔 영적 침체를 경험했습니다.

본 시편기자는 노인이었습니다(9). 그도 이런 경험을 한것 처럼 보여집니다.
그는 살아온  많은 시간들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셨던 일들을 되새겨 봅니다(5,6,17).

이전에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행하셨던 일들을 묵상하면서 그는 다시 새힘을 얻었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속에서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 확신은 하나님이 이전에 행하셨던 것 처럼 다시 그를 도우실것이라는 확신입니다(7,14,20,21).

요즈음에 힘든 시기를 보내는 분들이 있습니까? 조용히 앉아 이전에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셨던 은혜를 묵상해보면 어떨까요?

하나님의 성품을 더 깊이 묵상해보면 어떨까요?

나의 믿음은 기복이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사랑과, 긍휼하심, 자비와 은혜는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항상 동일 하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나의 도움이셨습니다. 나의 유일한 해결자이셨습니다. 힘이셨고, 피난처이셨습니다.

그분을 묵상하면 할수록 이런 고백이 나올것입니다.
"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14) 아-멘

2013년 6월 15일 토요일

그리스도의 마음

잠4:10-2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솔로몬은 그의 아들에게 지혜의 길을 가르쳤습니다(11). 그가 말한 지혜의 길이 무엇입니까?
언어에 관한것 입니다. 내가 하루중에 어떤 말들을 많이 하는지를 생각해본적이 있습니까(24). 한담, 자랑, 신실하지 못한 말, 일구이언(一口二言), 험담, 수다 등 언어를 보면 지혜로운자의 척도를 알수 있습니다. 야고보도 언어와 지혜에 대해 말씀했습니다(약3:1-12)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25)보아야 할것이 있고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영혼의 눈으로 늘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반면에  나의 마음을 더럽게 하는 것들을 보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이 더러워지면 자연이 영혼의 눈이 어두워집니다. 죄의 눈이 밝아집니다.

바른 길로 가야합니다(14,26). 바른 길은 하나님의 지혜로 선택한 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입니다.

듣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10,20).
부정적인것, 좋지 않는것을 많이 들으면 불신앙에 사로잡힙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롬10:17).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의 심령을 채우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23). 히브리인들은 마음(Heart)을 심장으로 생각했습니다. 몸의 중심이 심장이듯이 인격의 중심이 마음입니다. 생각, 감정, 의지의 중심이 마음입니다.

마음은 그의 사람됨을 결정합니다. 늘 마음을 살펴야합니다. 쉽게 부패해지고, 쉽게 거짓되고,
간사하고, 이중적인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을 지키야 합니다. 마음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채우는 것입니다(빌2:5)

그리스도의 마음은 올바르게 말하고, 보고, 듣고, 하는 모든것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지혜의 길임을 믿습니다


2013년 6월 13일 목요일

하나님을 신뢰하며..

잠3:1-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운동선수들은 시합에  승리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 훈련을 합니다. 시합을 앞둔 이들은 금욕에 가까운 생활을 한다고 합니다.

솔로몬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이와 같아야 함을 말합니다. 즉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신뢰해야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5-6). 내가 내려야 할 결정들, 내가 행해야 할 모든것들을  동심과 같은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입니다. 

또한 내가 가진 물질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9-10). 쉬운것 같지만 어려운 부분입니다.
이 세상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를 보기보다는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를 보고 가치를 판단합니다. 돈을 대하는 자세가 그 사람의 신앙입니다.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면 천마디의 말보다 그  신앙은 진짜일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훈련하심에 순종해야 함을 강조합니다(11-12). 훈련이란 사람들이 싫어하는 아이템 가운데 하나입니다. 훈련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삶 자체가 훈련입니다. 

신앙생활의 여정(旅程)도 훈련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훈련하심은 나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해서 곧은 길로 가기위하심 입니다(히12:9-13).

하나님의 훈련이 없이는  쉽게 교만해지고,쉽게 물질의 노예가 되고, 쉽게 어긋난 길로 갈 수 있는 소지가  있기에...  자녀된 나를 사랑하셔서  훈련 시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어떤 부분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루를 살지 생각해보십시오.

2013년 6월 12일 수요일

성적 유혹

잠2:1-2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섹스는 이 시대의 큰 화두(話頭) 가운데 하나입니다. TV, 영화, 잡지, 인터넷등 어디든지 넘쳐납니다. 강력한 유혹이기도 합니다.

섹스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하고 아름다운것인데 타락한 인간으로 인해 일그러졌습니다.
본문에서 솔로몬은 그의 아들에게 성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이 주신 성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지혜가 유혹으로부터 지켜줄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16).

누구든지 성적(性的)유혹을 받습니다. 경건한 사람에게도  성적 유혹은 찾아옵니다.
매력적인 여성이나 남성을 보면 성적 욕구를 느낍니다. 결혼 생활의 권태기가 찾아오면, 고독감을 느끼면 성적 유혹은 더 강하게 다가옵니다.

이 유혹은 '사망'과 '스올'로 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18-19).
유혹은 순간적으로 꿀과 같지만  곧 두 날 가진 예리한 칼이 되어 돌아옵니다.

성은 오직 결혼안에서만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요,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17).
또한 기쁨이요, 행복입니다(5:18;18:22;19:14).

성적인 유혹을 받을때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지혜(그분의 말씀)로 이기십시오(20).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11).

2013년 6월 11일 화요일

참된 지혜자

잠1:20-3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삶의 두 가지 길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의 길과 미련한 자의 길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현명한 선택을 합니다.
미련한자는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 자신의 지혜로 미련한 선택을 합니다.
자기 고집, 자기 자랑, 오만함 자기 세계에 갇혀 살아갑니다.
종교와 사상, 문화, 예술,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싫어합니다(24-25).

그럼에도 하나님의 지혜는 계속 사람들을 부릅니다(20-21).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고전1:22,30)
이 지혜(예수님)야말로 하나님앞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구원이요, 생명입니다.

본문은  분명한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싫어하면 영원한 멸망, 재앙, 근심, 슬픔뿐이지만(27),
하나님의 지혜(예수님)를  항상 나의 삶에 중심에 둔다면 안전과 평안과 기쁨의 길을 갈것입니다(33).

나의 삶의 모든 중심에 그분이 있습니까? 그분께 항상 묻고 그분의 인도를 구하며 살아갑니까? 그렇다면  참된 지혜자입니다.


2013년 6월 10일 월요일

바른 선택

잠1:1-1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우리는 매일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시시한 것에서 부터  중요한 것에 이르기 까지 선택해야 할것들이 많습니다. 선택을 잘하는 자에게서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그의 아들에게 선택의 중요성과 바르게 선택하는 것을 배우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지혜를 강조했습니다.

특히 젊은 아들은 나쁜 친구가 꾀이는 말에 저항하기 어려움을 알았습니다. 나쁜 유혹에 쉽게  넘어갈수 있음을 알았습니다(10-19).

 솔로몬의 아들만이 아닌 경험이 적은 젊은 우리 자녀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솔로몬은 올바른 선택을 하며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 큰 열쇠 하나를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나의 모든 생각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게 하는 것입니다(7).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에 절대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선택의 기준이고, 유혹많은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지혜입니다.

2013년 6월 9일 일요일

하나님만이

시70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많은 유대의 대적자들에 둘러 싸여 고린도 법정에 섰던 바울을 기억합니까?(행18:12-13). 분노로 가득찬 에베소 사람들이 연극장으로 몰려들어 소리를 질렀던 모습을 기억합니까?(행19:28-30). 이때 바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본 시편 말씀과 연관 시켜 생각해보았습니다.

본 시편도 원수들의 심각한 위협앞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절박한 기도로 가득차 있습니다.  다윗은 그를 죽일려는 대적자들에게 둘러 싸여 있습니다(2).

다윗의 어려운 상황을 잘 표현해주는 말씀들이 나옵니다.
" 속히 나를 도우소서"(1) "속히 내게 임하소서"(5) " 지체하지 마소서"(5).

본문에서  자신의 대적자들을 자기가 친히 물리칠려고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다윗의 신앙을 볼수 있습니다.

나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해결자이시고, 하나님만이 나의 방패요 도움이십니다.

" ... 주는 나의 도움이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5) -아멘-

2013년 6월 8일 토요일

복음은...

행19:23-4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의 에베소에서 사역으로 적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본문에는 뜻하지 않은 방해자가 등장합니다.

예베소에는 풍요와 다산의 여신인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신전을 중심으로 신상을 만들어 수입을 올리는 길드가 형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이 만든것은 신이 아니라고(26)고 했습니다.

신상을  만들어 막대한 수입을 올리던 이들의 사업에(24)  큰 위기가 닥치자 길드의 지도자 였던 데메드리오가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26-27).

에베소 도시 전체가 큰 소용돌이에 빠졌습니다(28-29).
조용했던 도시에  큰 소동이 일어난 것 자체가 바울이 전한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컸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데메드리오는 자신의 이익을 영원한 구원과 자유와 바꾸었습니다. 그는 노예였습니다.
물질의 노예였습니다. 소동이 일어난 에베소 사람들은 왜 자신들이 시끄럽게 외치는지 조차 몰랐습니다(32).

이들의 모습은 그리스도 없이 사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물질의 노예, 소동, 어리석음입니다.

복음은 소동이 아닌 조용히 전해집니다..
복음은 어리석음이 아닌 영적인 지혜를 줍니다. 빛입니다.
나를 환하게 해주고 주위를 환하게 해주고 온 세상을 환하게 해줍니다.
복음은 노예가 아닌 자유와 기쁨입니다.

에베소를 소동케 했던 바울이 전한 복음!
주님은 나에게도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만일 복음을 전해도 세상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복음을 그대로 전하지 않거나, 복음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1:16)

2013년 6월 7일 금요일

오늘도..

행19:1-2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바울이 에베소에 돌아와 복음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있는동안 아볼로가 그곳에서 사역을 했습니다(18:24).

아볼로는 바울이 에베소로 돌아오기 전 고린도로 갔습니다. 그도 후에  다시 에베소로 돌아옵니다(고전16:12). 바울은 열심이 복음의 씨를 뿌렸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고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습니다(고전3;6).

복음을 전한다고 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반드시 반대자들이 있습니다(9). 복음을 전하던, 목회를 하던 반응에 민감해서는 않됩니다. 예수님에게도 늘 반대자들이 있었고, 바울도 그리했는데 왜 늘 환영받기를 원합니까?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바울은 제자들을 따로 세워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쳤다고 했습니다(9).
교회안에도 신앙이 같지 않으면 분열만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하지만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같은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연합은 교리적인 연합입니다. 같은 믿음(복음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의 영적 연합입니다.

복음의 대적자들이 있었지만(9), 바울은 에베소에서 2년동안 사역을 하며 큰 열매를  얻었습니다(10-19).

 열심히 뿌리고 물을 주면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실것 입니다.

오늘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꾸준하게 신실하게 진실하게....

2013년 6월 6일 목요일

은혜로

행18:18-2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의 전도 여행은 멀고도 험한 여정이었습니다.
바울은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깍았습니다. 머리를 깍는것은 나실인의 서원처럼 복음전도에 자신의 전부를 바친다는 재헌신의 의미입니다(18). 바울이 복음전도를 위해 자신을 얼마나 불태웠지를 엿볼수 있습니다.

3차 전도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23). 바울은 1차 전도여행시 전도했던 성도들을 다시 방문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견고케 했습니다.

본문에서 눈여겨 볼 사람은 아볼로입니다. 아볼로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복음에 대한 지식이 매우 얕았습니다(25). 더 배워야 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아볼로를 자신에 집에 초청해 복음을 가르쳤습니다(26).
아볼로는 성경에 능한  성경학자였습니다(24). 성경을 많이 아는  학자가 평범한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입니다.아볼로는 겸손했습니다.

겸손한 아볼로는  "은혜로 믿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는 사람"(27)이 되었습니다.
그는 지식이 아니라  신령한 은혜로 남을 감화 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지식보다(물론 지식도 중요하지만) 신령한 은혜로 해야함을 아볼로로 부터 배웁니다 .

오늘도  주님의 신령한 은혜로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2013년 6월 5일 수요일

복음은

행18:1-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하는 내용입니다. 아덴은 철학의 도시였고 우상이 가득한 곳이었다면 고린도는 상업의 도시였고, 매우 부도덕한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아굴라 부부를 만납니다(2). 이들은 바울의 목숨을 위해 자신들의 목이라도 내놓았던 부부입니다(롬16:4).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 부터 고린도에 와서 바울과 합류했습니다(5).

이처럼 좋은 신앙의 동지를 만나고, 동역자들과 다시 만나 사역을 한다는 것은 바울에게는 큰 힘이 되었을 것 입니다

목회사역은 매우 힘들지만, 좋은 교인(?)을 만날때는 큰 위로를 받습니다. 목회자는 쉽게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자주 입에 오르는 말거리가 될 수 있지만  때로는  사람을 통해 용기를 얻고, 기쁨을 얻기도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위로하시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오랫동안 머물면서(4,11), 자비량으로 사역을 하면서(3),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5) 복음을 전했습니다.

거대한 상업도시 고린도, 하지만  성적으로  심하게 타락했고 방탕했던 도시에서 고군분투(孤軍奮鬪)하며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그리스도인은 유토피안(Utopian)이 아닙니다. 주님이 재림하시기전까지는 이 세상 어디에도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변화는 시킬수 있습니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도구는 복음전도입니다.복음은 사람을 변화 시키고 더 나아가 변화된 사람들이 사회를 변화 시킬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도 그러했고 이 세상도 그러합니다.

2013년 6월 4일 화요일

바울이 주는 도전

행17:16-3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오늘을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아덴은 철학의 도시로 이 도시 사람들은  철학적 논쟁을 하며 시간을 많이 보냅니다(21).

또한 우상의 도시였습니다(16). 우상은 원시 사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의 도시에도 현대에도 많은 우상들이 있습니다. 우상은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에게 적대감을 나타내는 가장  좋은 표현입니다.

철학을 논하고 우상을 숭배했던 이 도시 사람들은 공허했습니다.

이곳에 철학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에피쿠로스 학파 사람들은 그들의 신은 인간으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사람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고 생각습니다. 이들은 현재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현재의 쾌락만으로 만족합니다. 죽음 이후의 삶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대표적인 학파인 스토익파 사람들은 모든것에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모든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의 도움이 필요없다고 믿었습니다.

이 두 학파는 현대인들의 생각과 비슷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생각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여전히 동일합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증거하였습니다(24-28). 이들은 바울이 증거하는 복음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31-32).

바울은 이 도시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했다고 했습니다(16).

주님도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애통해 하셨습니다.

 죄와 수많은 우상(명성, 부, 권력, 섹스, 음식, 술, 일등)들속에 살아가는 주변을 보면서도 무감각 속에 살아갑니까? 아니면 바울처럼 이 시대를 보며 격분합니까?

바울이 주는 도전입니다.

2013년 6월 3일 월요일

하나님의 일

행17:1-1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주후 50년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약 20년 후의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최초로 유럽에 전해졌습니다(행16:12). 바울은 계속 유럽의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어느 지역을 가던지 항상 회당을 먼저 찾아 복음을 전했습니다(1-2,10).
복음이 전해지는 순서는 유대인이 먼저요 그 다음이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롬1:16).

데살로니가 유대인들과 베뢰아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고 보인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5,11-12).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은 마음이 강팍했고, 바울의 복음전파를 방했습니다(5-6).
심지어 베뢰아까지 와서 방해를 했습니다(13).

베뢰아 유대인들은 의외로  복음을 잘 받았고 이방인들 가운데도 믿는이들이 많았습니다(12).

바울의 사역이 어느지역(데살로니가)에서는 실패한것 처럼 보이고, 어느지역(베뢰아)에서는 성공적인것 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성공과 실패는 있을수 없고, 그것인 인간의 영역이 아닌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일에 신실한 사역자들을 부르시지 성공적인 사역자들을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충성하는 것이 곧 성공입니다.

2013년 6월 2일 일요일

수렁

시69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자동차로 여행을 할 때는 이륜 구동이 아닌 사륜 구동 자동차로 가야합니다. 이륜 구동은 진흙탕이나 모래안에 차가 빠질 위험에 있습니다.

본 시편기자(다윗)도 수렁에 빠졌습니다(2,14)
수렁이란  고난을 말하는데 그는   큰 고난속에서 어찌 할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까닭없이 미워하는 사람들이 머리털 보다 많다고 했습니다(4).
남에게 미움을 받아도 고통스러운데, 이유없이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널려 있다면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는 그때의 자신의 감정과 어려움을 그대로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그분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그는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보는 사람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간구하고 있습니다(6).
무고한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고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의심하며 절망할수 있기에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어떤부분은 다윗 자신에 대한 말씀이지만 많은 부분은  오실 그리스도의 대한 예언적 성격을 띤 말씀입니다.

까닭없이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은것(4) , 죄가 없으셨던 주님이 까닭없이 미움을 받으실것을  예언 하고 있습니다.

시편기자가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부터  외면을 당한것(8), 처럼  주님의 모친과 동생들도 주님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할것임을 예언합니다(막3:31-35).

본문의 다윗의 고뇌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고민을 예표하고, 십자가상에서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21, 눅23:36).

나를 위해 고뇌하셨던 주님!
그리고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던 주님!

오늘도 영적으로 깊은 수렁에 빠져 있는 분은 주변에 없습니까?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2013년 6월 1일 토요일

안전한 길

삼상17:55-18:16 오늘의 묵상입니다
골리앗을 죽인 소년 다윗은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사울왕은 일찌기 골리앗을 죽인 사람을 사위로 삼겠다고 약속한바 있습니다(17:25). 자연히 다윗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55-58).

다윗은 군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사울은 그를 군사령관으로 중용(重用)하였습니다(5).

다윗이 칭송의 대상이 될 때 가장 두려움을 느낄 사람은 요나단일것 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다윗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습니다(18:1). 요나단은 자신이 입고 있던 왕자의 옷을 다윗에게 입혀 주었고, 자기의 군복, 무기까지 주었습니다(18:4).

요나단이라고 질투가 전혀 없었겠습니까?그도 죄성을 가진 인간입니다.
요나단은 자신의 감정 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울은 이스라엘 여인들이 사울과 다윗을 비교하며 노래하는 것을 들은 순간 부터(18:6-7), 질투의 노예가  되었습니다(18:8). 그 순간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다른 사람에게 주실것이라는 사무엘의 말이 떠올랐는지 모릅니다(15:28).

사울은 하나님의 뜻 보다 자신의 감정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다윗에게 분노를 폭발했습니다(18:11).

다윗이 위험에 빠지게 된 것, 사울의 질투 심리를 자극한 것은 다윗을 향한 사람들의 칭송에서 비롯되었습니다(18:6-7).

사람에게 칭송을 받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누군가 대적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임을 기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