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1:1-2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가정은 역기능 가정 처럼 보입니다. 아내가 두 명이 있었습니다. 두 명의 아내중 한 아내는 남편의 더 큰 사랑을 받았지만 자녀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부인에게는 자녀가 있었습니다.그럼에도 이 여인은 남편의 사랑을 빼앗겼다는 질투심으로 늘 가득차 있었습니다(6).
분명이 이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아니었습니다.
자녀가 없던 아내의 이름은 하나였고, 이 여인은 늘 자녀를 갖고 싶은 갈망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한편 브닌나는 남편의 사랑을 늘 빼앗기며 산다는 피해의식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결국 한나는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로 가지고 갔습니다(10). 한나가 그의 괴로움을 가지고 오기를 하나님은 기다리셨는지도 모릅니다.
한나의 기도는 진지했고, 비장함이 엿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아들을 주신다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는 것을 보면...(11).
그녀의 간절한 기도와 오랫동안 입술만 움직이는 모습을 본 당시 제사장 엘리는 그녀가 술취한것으로 오해하기까지 합니다(13-14).
이렇게 영적으로 우둔한 제사장이었지만 하나님은 그의 입술을 통해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시겠다는 답을 주셨습니다(17).
절망과 낙심으로 가득찬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왔지 소망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18). 이것이 기도의 위력입니다.
마침내 한나는 임신을 하게 됩니다(20). 하나님은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에게 나온 한나에게 바라던 대로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한나는 서원대로 기도로 낳은 이 아들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축복하시기전 절망의 순간을 허락하실때가 많습니다. 그때에 그의 믿음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않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아니 기도를 하게끔 하십니다. 아픔이 없이는 간절한 기도가 나오지 않으니까요.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에게는 절망이 곧 축복의 기회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때가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2013년 1월 13일 일요일
잘못
시51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 시편은 매우 유명한 시편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의 남편을 죽인 후(삼하11) 회개하며 쓴 시편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가 늘 자신 앞에 있다고 했습니다(3). 인간은 죄성이 있어서 어떤 계기가 되면 큰 죄를 짓거나 아니면 늘 죄를 지을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감추지 않고 마치 벌거벗은 어린아이 처럼 하나님앞에 자신의 죄를 적나라하게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죄는 특성상 절대로 감추어서는 아니됩니다. 만일 감추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죄는 암덩어리가 순식간에 퍼져나가듯이 마음 전체에 퍼져 마음을 완전히 고장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감추지말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새로워짐의 출발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면 놀라운 일들이 생깁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아는 기쁨이 생깁니다(12).
하나님의 용서함의 경험은 곧 영적자유함으로 이끌어줍니다. 그리고 이 자유함의 경험을 남과 나눌려고 하는 갈망이 생깁니다(13). 더나아가 하나님의 신실함을 찬양하도록 만들어줍니다(14-15).
하나님의 용서함을 체험한 사람은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에게도 언제나 화해의 문을 열어놓습니다.
부모로서 잘못한 일을 자녀에게 말하는 것이 힘들때가 있습니다. '내가 잘못했구나' 하는 소리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 내가 잘못했구하" 하고 말을 하면 금방 편안해지고, 자유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회개가 바로 이와같습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적이 있습니까? 잘못한 일이 있습니까?
감추지말고 오늘중으로 그 사람을 찾아가서 잘못해노라 말하지 않으렵니까?
오래가면 말하기가 더 힘들어지고, 마음이 굳어집니다.
그러나 ' 잘못했노라' 말하기 시작할 때 부터 하나님의 축복은 이미 시작될 것입니다.
본 시편은 매우 유명한 시편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의 남편을 죽인 후(삼하11) 회개하며 쓴 시편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가 늘 자신 앞에 있다고 했습니다(3). 인간은 죄성이 있어서 어떤 계기가 되면 큰 죄를 짓거나 아니면 늘 죄를 지을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감추지 않고 마치 벌거벗은 어린아이 처럼 하나님앞에 자신의 죄를 적나라하게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죄는 특성상 절대로 감추어서는 아니됩니다. 만일 감추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죄는 암덩어리가 순식간에 퍼져나가듯이 마음 전체에 퍼져 마음을 완전히 고장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감추지말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새로워짐의 출발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면 놀라운 일들이 생깁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아는 기쁨이 생깁니다(12).
하나님의 용서함의 경험은 곧 영적자유함으로 이끌어줍니다. 그리고 이 자유함의 경험을 남과 나눌려고 하는 갈망이 생깁니다(13). 더나아가 하나님의 신실함을 찬양하도록 만들어줍니다(14-15).
하나님의 용서함을 체험한 사람은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에게도 언제나 화해의 문을 열어놓습니다.
부모로서 잘못한 일을 자녀에게 말하는 것이 힘들때가 있습니다. '내가 잘못했구나' 하는 소리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 내가 잘못했구하" 하고 말을 하면 금방 편안해지고, 자유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회개가 바로 이와같습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적이 있습니까? 잘못한 일이 있습니까?
감추지말고 오늘중으로 그 사람을 찾아가서 잘못해노라 말하지 않으렵니까?
오래가면 말하기가 더 힘들어지고, 마음이 굳어집니다.
그러나 ' 잘못했노라' 말하기 시작할 때 부터 하나님의 축복은 이미 시작될 것입니다.
2013년 1월 12일 토요일
이런 믿음
요4:43-5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지역을 떠나 처음 기적을 베푸신 북쪽 갈릴리 지역으로 여행길을 잡으셨습니다(43). 주님이 갈릴리 가나에 이르자 죽음의 문턱에 이른 아들을 둔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이 아버지는 주님의 소문을 듣고 가버나움에서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가나까지 찾아왔습니다.(46-47). 이때가 오후 1시경이었습니다.
깊은 절망에 빠진 이 사람의 간청에 주님의 반응은 냉담한것 처럼 보여집니다(48). 이 사람은 주님이 자신과 함께 가셔서 자신의 아들을 고쳐주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47,49).
그러나 주님은 " 당신의 아들이 살아있으니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50). 놀라운것은 이 사람이 주님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50).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자신의 아들이 살아났다는 소식을 접합게 됩니다(51).
아들이 낫시 시작한때가 주님이 말씀하신 시간과 동일한 시간(오후1시)이었음을 알게 됩니다(52-53).
주님의 말씀만 믿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사람!
어떤 증거나 표적이 없음에도 말씀만으로 족하는 믿음!
그렇습니다. 믿음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보지않고 믿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고 하면 그대로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믿음임을 오늘 본문을 통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오늘 나에게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주님은 사마리아 지역을 떠나 처음 기적을 베푸신 북쪽 갈릴리 지역으로 여행길을 잡으셨습니다(43). 주님이 갈릴리 가나에 이르자 죽음의 문턱에 이른 아들을 둔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이 아버지는 주님의 소문을 듣고 가버나움에서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가나까지 찾아왔습니다.(46-47). 이때가 오후 1시경이었습니다.
깊은 절망에 빠진 이 사람의 간청에 주님의 반응은 냉담한것 처럼 보여집니다(48). 이 사람은 주님이 자신과 함께 가셔서 자신의 아들을 고쳐주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47,49).
그러나 주님은 " 당신의 아들이 살아있으니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50). 놀라운것은 이 사람이 주님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50).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자신의 아들이 살아났다는 소식을 접합게 됩니다(51).
아들이 낫시 시작한때가 주님이 말씀하신 시간과 동일한 시간(오후1시)이었음을 알게 됩니다(52-53).
주님의 말씀만 믿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사람!
어떤 증거나 표적이 없음에도 말씀만으로 족하는 믿음!
그렇습니다. 믿음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보지않고 믿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고 하면 그대로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믿음임을 오늘 본문을 통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오늘 나에게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2013년 1월 11일 금요일
그리스도를 증거할 마음
요4:27-4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먹을것을 사러 동네에 갔다 돌아온(8) 제자들의 관심은 음식을 먹는데 있었습니다(31).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달랐습니다. 주님은 "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이의 뜻을 행하는데 있다"고 하셨습니다(34).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선포하셨습니다(눅4:18-19).
제자들의 관심과 주님의 관심이 달랐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나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본문의 제자들처럼 얼마나 잘먹고 잘 사는데 있습니까?
복음이 변질이 되어 어떤이들은 건강, 성공, 부를 쌓고, 소위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사는데 성경을 이용하는이들도 있습니다. 성경이 마치 웰빙책 처럼 취급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관심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얼마나 성공하느냐에 있지 않고 죄악 가운데 사는 죄인들이 구원 받는데 있습니다.
한편 사마리아 여인은 동네로 들어가서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28-29).
주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오는 것을 보시면서 추수할 밭과 추수할 때를 말씀하셨습니다(35-36).
여인이 전하는 말을 듣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분을 보러왔고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39).
이분이야말로 "세상의 구주가 아니신가"하는 고백을 했습니다(42).
사마리아야 여인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전했습니까? 단순합니다 "와서 보라"(29) 입니다.
'와서 보라'는 단순한 말이었지만 결과는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39-41).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하는일이 스스로 보기에 작게 보여도 그 결과는 우리가 생각지 못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문제는 그리스도를 증거할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주님!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간절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먹을것을 사러 동네에 갔다 돌아온(8) 제자들의 관심은 음식을 먹는데 있었습니다(31).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달랐습니다. 주님은 "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이의 뜻을 행하는데 있다"고 하셨습니다(34).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선포하셨습니다(눅4:18-19).
제자들의 관심과 주님의 관심이 달랐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나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본문의 제자들처럼 얼마나 잘먹고 잘 사는데 있습니까?
복음이 변질이 되어 어떤이들은 건강, 성공, 부를 쌓고, 소위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사는데 성경을 이용하는이들도 있습니다. 성경이 마치 웰빙책 처럼 취급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관심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얼마나 성공하느냐에 있지 않고 죄악 가운데 사는 죄인들이 구원 받는데 있습니다.
한편 사마리아 여인은 동네로 들어가서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28-29).
주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오는 것을 보시면서 추수할 밭과 추수할 때를 말씀하셨습니다(35-36).
여인이 전하는 말을 듣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분을 보러왔고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39).
이분이야말로 "세상의 구주가 아니신가"하는 고백을 했습니다(42).
사마리아야 여인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전했습니까? 단순합니다 "와서 보라"(29) 입니다.
'와서 보라'는 단순한 말이었지만 결과는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39-41).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하는일이 스스로 보기에 작게 보여도 그 결과는 우리가 생각지 못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문제는 그리스도를 증거할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주님!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간절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2013년 1월 10일 목요일
오늘 만일
요4:1-2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니고데모의 스토리와 또 다른 스토리입니다. 니고데모는 이름이 명확히 명기(明記) 되어 있지만, 본문의 여인의 이름은 알수 없습니다.
이름을 알수없는 여인이 가장 더위가 심하고 햇볕이 강렬한 정오에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6).
그리고 주님을 만납니다.
마지막 결론은 이 여인 뿐만 아니라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된 사실입니다(39-41).
주님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방법으로 사역하심을 쉽게 발견 할수 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금기시 하던 사마리아촌으로 들어가셨고,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셨습니다(7).
주님은 그 여인에게 생명의 물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10). 이 여인은 주님이 말씀하신 물에 깊은 관심을 나타냅니다(15).
유대인 남자의 신분으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접근해 말을 건넨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도저히 상상할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가지고 있는 깊은 아픔과 문제를 아시고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16).이런 모든 과정을 거친 후 주님은 오직 생명을 주실수 있는 분은 자신뿐임을 선언 하셨습니다(26).
아무 목적없이 소망없이 살아가던 사마리아 여인이 구원을 받는 순간 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무의미 하게 , 죄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만일 그런 사람들을 만난다면 그들을 생수가 되시는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 할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본문은 니고데모의 스토리와 또 다른 스토리입니다. 니고데모는 이름이 명확히 명기(明記) 되어 있지만, 본문의 여인의 이름은 알수 없습니다.
이름을 알수없는 여인이 가장 더위가 심하고 햇볕이 강렬한 정오에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6).
그리고 주님을 만납니다.
마지막 결론은 이 여인 뿐만 아니라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된 사실입니다(39-41).
주님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방법으로 사역하심을 쉽게 발견 할수 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금기시 하던 사마리아촌으로 들어가셨고,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셨습니다(7).
주님은 그 여인에게 생명의 물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10). 이 여인은 주님이 말씀하신 물에 깊은 관심을 나타냅니다(15).
유대인 남자의 신분으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접근해 말을 건넨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도저히 상상할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가지고 있는 깊은 아픔과 문제를 아시고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16).이런 모든 과정을 거친 후 주님은 오직 생명을 주실수 있는 분은 자신뿐임을 선언 하셨습니다(26).
아무 목적없이 소망없이 살아가던 사마리아 여인이 구원을 받는 순간 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무의미 하게 , 죄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만일 그런 사람들을 만난다면 그들을 생수가 되시는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 할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2013년 1월 9일 수요일
요한을
요3:22-3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세례(침례)요한은 사람들로 부터 큰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멧시지를 듣고자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젠 사람들의 관심이 점차 요한이 아닌 새로운 사람에게 향하기 시작했습니다(26;4:1).
더욱이 불행이 겹쳐 요한은 감옥에 투옥이 됩니다(마11:2). 그러나 요한은 동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말했듯이 신랑의 친구로, 주님을 증거하는 목소리로만 기억되기를 원했습니다(1:23;1:36;3:29).
요한은 자신의 사역이 목적이 무엇인지? 하나님으로 무엇에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이런 자세는 특히 목회자들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요한처럼 목회자들, 아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오직 사역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인도할수 있고, 그리스도만이 그분을 믿는 모든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역의 촛점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 입니다.
목회자들에게 다가오는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성공적인 사역(?)을 보고 스스로 만족해하며 기뻐 하며 아니면 자칫 사역을 통해 자신의 왕국을 만들수 있는 유혹 입니다.
이런 유혹이 오면 무엇보다 세례(침례)요한을 생각하십시오!!!
세례(침례)요한은 사람들로 부터 큰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멧시지를 듣고자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젠 사람들의 관심이 점차 요한이 아닌 새로운 사람에게 향하기 시작했습니다(26;4:1).
더욱이 불행이 겹쳐 요한은 감옥에 투옥이 됩니다(마11:2). 그러나 요한은 동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말했듯이 신랑의 친구로, 주님을 증거하는 목소리로만 기억되기를 원했습니다(1:23;1:36;3:29).
요한은 자신의 사역이 목적이 무엇인지? 하나님으로 무엇에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이런 자세는 특히 목회자들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요한처럼 목회자들, 아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오직 사역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인도할수 있고, 그리스도만이 그분을 믿는 모든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역의 촛점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 입니다.
목회자들에게 다가오는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성공적인 사역(?)을 보고 스스로 만족해하며 기뻐 하며 아니면 자칫 사역을 통해 자신의 왕국을 만들수 있는 유혹 입니다.
이런 유혹이 오면 무엇보다 세례(침례)요한을 생각하십시오!!!
2013년 1월 8일 화요일
늘 새롭게
요3:1-2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니고데모가 주님을 찾아오면서 본문이 시작 됩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요, 유대 지도자라고 했습니다(1).
자기를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성령의 역사로 인해 주어지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즉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는 말씀에 니고데모는 매우 당황합니다(4,9).
주님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해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어 물려 죽게 하였던 사건을 예로 들면서 그 때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달아 그 뱀을 본자가 다 살아난 사건을 자신의 십자가의 사건과 연결시키시고 계십니다(14;민21:4-9).
그렇습니다. 오직 구원의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것은 그분을 믿는 것이고, 그분을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16).
니고데모의 입장에선 주님의 말씀이 이해가 가질 않았겠지요? 이분이 도대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거듭나야 한다는 것도 무슨 의미인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단지 이 예수라는 분이 유명한 분인데 과연 이 사람의 신학적인 입장이 무엇인지? 선생으로서, 종교지도자로서 자질이 있는지? 거기에 관심이 있었습니다(2).
오늘날에도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구속하신 분 으로 보기보다는 단지 종교지도자, 위대한 선생, 아니면 성자로만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입니다.
예수를 올바르게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어떤 가르침으로 되는 것이 아닌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만 됩니다. 성령님만이 우리를 빛가운데로 인도 하십니다(19). 성령님만이 우리의 영안을 밝혀 주십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믿는것은 일회적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매일 매일 그분을 새롭게 바라보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성령님을 통해 오늘도 십자가의 주님을 새롭게 바라보고, 나의 믿음의 더욱 새로워지도록 기도하십시오.
니고데모가 주님을 찾아오면서 본문이 시작 됩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요, 유대 지도자라고 했습니다(1).
자기를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성령의 역사로 인해 주어지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즉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는 말씀에 니고데모는 매우 당황합니다(4,9).
주님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해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어 물려 죽게 하였던 사건을 예로 들면서 그 때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달아 그 뱀을 본자가 다 살아난 사건을 자신의 십자가의 사건과 연결시키시고 계십니다(14;민21:4-9).
그렇습니다. 오직 구원의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것은 그분을 믿는 것이고, 그분을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16).
니고데모의 입장에선 주님의 말씀이 이해가 가질 않았겠지요? 이분이 도대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거듭나야 한다는 것도 무슨 의미인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단지 이 예수라는 분이 유명한 분인데 과연 이 사람의 신학적인 입장이 무엇인지? 선생으로서, 종교지도자로서 자질이 있는지? 거기에 관심이 있었습니다(2).
오늘날에도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구속하신 분 으로 보기보다는 단지 종교지도자, 위대한 선생, 아니면 성자로만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입니다.
예수를 올바르게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어떤 가르침으로 되는 것이 아닌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만 됩니다. 성령님만이 우리를 빛가운데로 인도 하십니다(19). 성령님만이 우리의 영안을 밝혀 주십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믿는것은 일회적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매일 매일 그분을 새롭게 바라보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성령님을 통해 오늘도 십자가의 주님을 새롭게 바라보고, 나의 믿음의 더욱 새로워지도록 기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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