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4:1-17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모세와 하나님이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할려는 모세, 그일을 감당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할려는 모세는 합당한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를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오랫동안 그들을 떠나 있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만났다는것을 그들에게 어떻게 증명합니까?'들어보면 타당한 이유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표징을 보여주십니다. 첫번째 표징은 모세의 지팡이가 뱀으로 바뀌는 것입니다(2-3). 두번째의 표징은 그의 손에 문둥병이 생기는 것입니다(6-7).
그럼에도 모세는 또 다른 이유를 대며 계속 사양을 합니다
' 나는 말을 잘 못하는 사람입니다(10)'
다른 사람을 보내시는 것이 낫겠습니다(13).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화를 내셨습니다(14). 모세는 하나님이 전능하신분임을 알았지만 아직 그분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것과 신뢰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아는것과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은 다른 것 입니다.
다른 말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빠져나 갈곳을 찾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아론을 붙혀서 그를 돕게 하십니다(13-14). 모세를 포하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얼마든지 모세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내실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모세를 계속 고집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택함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택하신자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 하나님의 고집을 꺽을 존재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그분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내가 나된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2013년 2월 7일 목요일
2013년 2월 6일 수요일
모세의 두려움
출3:1-2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 가운데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실려고 하십니다. 물론, 이들이 애굽에서 고난을 받은것 역시 하나님의 작정속에서 된 일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시간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도구로 모세를 선택하셨습니다.
지금 모세는 자신감으로 가득찬 애굽의 왕자가 아닌, 변방(邊方 )미디안땅에서 조용히 양을 치는 촌로(村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자 그가 한 첫 질문은 "내가 누구이기에"(11) 였습니다.
나는 살인자가 아닙니까? 나는 도망자가 아닙니까? 이전에 '이스라엘을 해방시킬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한 사람이 아닙니까?
당신은 사람을 잘못 선택하셨습니다. 내가 이일을 어떻게할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 "내가 누구이기에"에 포함된 질문입니다.
곧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는 누구냐'(13) 하면 어떻게 합니까? 하며 계속 핑계를 댑니다.
그는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2:14)- 거부당한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없었습니다. 자신은 이일을 감당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모세의 질문은 계속됩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내가 무슨 권한과 권위로 이 일을 할수 있습니까?(13)
사실 모세에게는 질문이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하면 될 뿐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실패의 경험이 그를 주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과거의 나쁜 기억이 나의 행동을 제한할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거의 실패의 두려움을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할려고 할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닌 두려움 때문입니다.
오늘 나에게도 이런 모세의 두려움은 없습니까?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 가운데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실려고 하십니다. 물론, 이들이 애굽에서 고난을 받은것 역시 하나님의 작정속에서 된 일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시간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도구로 모세를 선택하셨습니다.
지금 모세는 자신감으로 가득찬 애굽의 왕자가 아닌, 변방(邊方 )미디안땅에서 조용히 양을 치는 촌로(村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자 그가 한 첫 질문은 "내가 누구이기에"(11) 였습니다.
나는 살인자가 아닙니까? 나는 도망자가 아닙니까? 이전에 '이스라엘을 해방시킬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한 사람이 아닙니까?
당신은 사람을 잘못 선택하셨습니다. 내가 이일을 어떻게할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 "내가 누구이기에"에 포함된 질문입니다.
곧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는 누구냐'(13) 하면 어떻게 합니까? 하며 계속 핑계를 댑니다.
그는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2:14)- 거부당한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없었습니다. 자신은 이일을 감당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모세의 질문은 계속됩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내가 무슨 권한과 권위로 이 일을 할수 있습니까?(13)
사실 모세에게는 질문이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하면 될 뿐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실패의 경험이 그를 주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과거의 나쁜 기억이 나의 행동을 제한할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거의 실패의 두려움을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할려고 할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닌 두려움 때문입니다.
오늘 나에게도 이런 모세의 두려움은 없습니까?
2013년 2월 5일 화요일
하나님의 시간
출2:1-2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기전 모세는 왕성한 혈기와 민족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이스라엘 사람을 폭행하는 애굽을 사람을 목격하고 그를 죽입니다(12).
그는 자기 민족의 사정에 대해 누구보다 관심이 많았고 민족을 구하고 싶은 열정이 넘쳤습니다.
곧이어 두 히브리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그들의 싸움을 중재합니다(13).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그가 생각했던 것 과 전혀 다른것이었습니다.오히려 모세가 애굽을 죽인 사건을 이야기 하며 왜 남의 일에 참견하느냐 하는 태도를 보입니다(14).
모세는 자신의 일이 탄로난것을 알고 두려워 그 길로 도망을 칩니다. 모세는 애굽의 궁궐에 살았지만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열정은 누구 못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지도자로서 준비는 덜 된 상태였습니다.
그는 고집이셌고, 충동적이고, 폭력적이었습니다.
모세는 다시는 궁궐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은채, 그가 누렸던 모든 부귀영화를 뒤로 한채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모세의 마음과 기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목민들 가운데는 힘센자가 우물을 차지 했던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한 여자가 이런 불량배와 같은 목자들에게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고 도와줌으로 (17), 모세는 그집의 사위가 되어 목자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모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화려한 궁궐이 아닌 소박한 목자로서 삶을 살고 있습니다.그것도 40년이라는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는 참 답답한 시간입니다. 한창 젊은 나이에...
하나님은 때로는 나의 가던길을 막으실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인간적으로 답답함을 느끼게 되고 , 해야야 할 일이 많은데 왜 저를 이렇게 가두어 놓으십니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나의 시간과 다릅니다. 열정과 자질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열정이나 자질이 아닌 철저히 자기 부인이 이루어질때까지... 오직 하나님만 의지 하도록 하시기까지 기다리십니다. . 이 사실을 모세를 통해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기전 모세는 왕성한 혈기와 민족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이스라엘 사람을 폭행하는 애굽을 사람을 목격하고 그를 죽입니다(12).
그는 자기 민족의 사정에 대해 누구보다 관심이 많았고 민족을 구하고 싶은 열정이 넘쳤습니다.
곧이어 두 히브리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그들의 싸움을 중재합니다(13).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그가 생각했던 것 과 전혀 다른것이었습니다.오히려 모세가 애굽을 죽인 사건을 이야기 하며 왜 남의 일에 참견하느냐 하는 태도를 보입니다(14).
모세는 자신의 일이 탄로난것을 알고 두려워 그 길로 도망을 칩니다. 모세는 애굽의 궁궐에 살았지만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열정은 누구 못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지도자로서 준비는 덜 된 상태였습니다.
그는 고집이셌고, 충동적이고, 폭력적이었습니다.
모세는 다시는 궁궐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은채, 그가 누렸던 모든 부귀영화를 뒤로 한채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모세의 마음과 기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목민들 가운데는 힘센자가 우물을 차지 했던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한 여자가 이런 불량배와 같은 목자들에게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고 도와줌으로 (17), 모세는 그집의 사위가 되어 목자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모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화려한 궁궐이 아닌 소박한 목자로서 삶을 살고 있습니다.그것도 40년이라는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는 참 답답한 시간입니다. 한창 젊은 나이에...
하나님은 때로는 나의 가던길을 막으실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인간적으로 답답함을 느끼게 되고 , 해야야 할 일이 많은데 왜 저를 이렇게 가두어 놓으십니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나의 시간과 다릅니다. 열정과 자질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열정이나 자질이 아닌 철저히 자기 부인이 이루어질때까지... 오직 하나님만 의지 하도록 하시기까지 기다리십니다. . 이 사실을 모세를 통해 볼수 있습니다.
2013년 2월 4일 월요일
어떤 두려움
출1:1-2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애굽의 새로운 왕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동안 요셉으로 인해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에서 큰 환대속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게 되었습니다(8).
70명이었던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사람들이 통제할수 없을정도로 그 수가 불어났습니다(7).
이제는 가족 단위가 아닌 민족 단위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이들의 수가 불어나자 애굽왕은 전쟁이 일어나면 이들이 적군과 합세해 자신들을 치고 애굽에서 떠날수 있다는 생각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최고 권력자의 두려움은 곧 이스라엘을 압제함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을 노예로 부리며 그들의 노동력으로 두개의 도시를 지었습니다(11).
하지만 이스라엘은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의 은혜로 더욱 번성했습니다(12).
그러자 바로는 더욱 악한 꾀를 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인 남자는 혹독한 노동으로 괴롭게 하였고 남자 아이는 태어나면 산파들로 하여금 죽이도록 하였습니다(16).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을 말살할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산파들은 왕의 명령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계속 불어났고 왕의 명령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 했던 산파들을 하나님은 축복하셨습니다(20-21).
본문에는 두가지 두려움이 나옵니다. 첫째는 바로의 두려움이요, 둘째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산파들의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혜가 생깁니다. 그러나 사람을 두려워하면 나약, 비겁, 판단력을 상실합니다. 이것이 '바로'의 두려움입니다.
믿음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삶입니다.
나에게는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까?
애굽의 새로운 왕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동안 요셉으로 인해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에서 큰 환대속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게 되었습니다(8).
70명이었던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사람들이 통제할수 없을정도로 그 수가 불어났습니다(7).
이제는 가족 단위가 아닌 민족 단위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이들의 수가 불어나자 애굽왕은 전쟁이 일어나면 이들이 적군과 합세해 자신들을 치고 애굽에서 떠날수 있다는 생각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최고 권력자의 두려움은 곧 이스라엘을 압제함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을 노예로 부리며 그들의 노동력으로 두개의 도시를 지었습니다(11).
하지만 이스라엘은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의 은혜로 더욱 번성했습니다(12).
그러자 바로는 더욱 악한 꾀를 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인 남자는 혹독한 노동으로 괴롭게 하였고 남자 아이는 태어나면 산파들로 하여금 죽이도록 하였습니다(16).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을 말살할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산파들은 왕의 명령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계속 불어났고 왕의 명령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 했던 산파들을 하나님은 축복하셨습니다(20-21).
본문에는 두가지 두려움이 나옵니다. 첫째는 바로의 두려움이요, 둘째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산파들의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혜가 생깁니다. 그러나 사람을 두려워하면 나약, 비겁, 판단력을 상실합니다. 이것이 '바로'의 두려움입니다.
믿음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삶입니다.
나에게는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까?
2013년 2월 3일 일요일
생각해보십시오.
시54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누구나 주변 사람들로 부터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을 것 입니다. 특히 가장 믿었던 사람들로 받은 상처는 아픔이 더 합니다. 이런 아픔을 경험하는 상황에서 나를 위로 해줄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의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받으며 유다의 한 동굴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더 외롭게 만들고 아픔을 주는 것은 자신을 도와줄줄 알았던 사람들의 잇따른 배신이었습니다.
시편52편에서는 에돔사람 도엑이 배신을 합니다.
시편55편에서는 다윗의 친구가 그를 배신합니다.
본 시편에서는 십사람들이 그가 있는 곳을 사울에게 밀고를 합니다.
사실 유대의 남쪽에 살고 있는 십사람들은 다윗과 친척 관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배신이 다윗의 마음을 닫게 만들었고, 다윗은 그들을 가리켜 " 낯선 자들이 자신을 친다"고(3)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배신들은 가까운 친구들을 잃어버리는 아픔과 인간에 대한 신뢰감을 완전히 상실해버리게 만듭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다윗은 어떻게 행하고 있습니까?
과연 누구를 믿어야 합니까?
그러나 4절에 보면 전혀 다른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는 하나님은 자신을 돕는 분 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분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고난속에 있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옆에 늘 함께 하심을 느꼈습니다.
아니 다윗의 전생애를 통해 하나님은 항상 자신과 함께 하셨음을 수없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을 배신하였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그를 배신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안전한 장소이셨고, 그의 힘이셨습니다.
경우는 다르지만 우리도 다윗과 같은 상황을 만난적이 있었을 것 입니다. 그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호하셨고, 인도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나 주변 사람들로 부터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을 것 입니다. 특히 가장 믿었던 사람들로 받은 상처는 아픔이 더 합니다. 이런 아픔을 경험하는 상황에서 나를 위로 해줄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의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받으며 유다의 한 동굴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더 외롭게 만들고 아픔을 주는 것은 자신을 도와줄줄 알았던 사람들의 잇따른 배신이었습니다.
시편52편에서는 에돔사람 도엑이 배신을 합니다.
시편55편에서는 다윗의 친구가 그를 배신합니다.
본 시편에서는 십사람들이 그가 있는 곳을 사울에게 밀고를 합니다.
사실 유대의 남쪽에 살고 있는 십사람들은 다윗과 친척 관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배신이 다윗의 마음을 닫게 만들었고, 다윗은 그들을 가리켜 " 낯선 자들이 자신을 친다"고(3)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배신들은 가까운 친구들을 잃어버리는 아픔과 인간에 대한 신뢰감을 완전히 상실해버리게 만듭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다윗은 어떻게 행하고 있습니까?
과연 누구를 믿어야 합니까?
그러나 4절에 보면 전혀 다른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는 하나님은 자신을 돕는 분 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분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고난속에 있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옆에 늘 함께 하심을 느꼈습니다.
아니 다윗의 전생애를 통해 하나님은 항상 자신과 함께 하셨음을 수없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을 배신하였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그를 배신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안전한 장소이셨고, 그의 힘이셨습니다.
경우는 다르지만 우리도 다윗과 같은 상황을 만난적이 있었을 것 입니다. 그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호하셨고, 인도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2013년 2월 2일 토요일
참 유대인
롬2:17-2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간혹 자종차 뒤에 '물고기 표시(?)'를 붙이고 다닌분들이 있습니다. '물고기 표시'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표시하는 마크입니다. 이런 표시판을 붙히고 다니면서 과격한 운전이나, 교통법규를 위반한다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일이 아닐것 입니다.
이런 부담때문에 이런 마크를 붙히고 다니는것을 꺼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일것 입니다(제 생각으로)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요지가 바로 이것입니다(24).
바울은 율법을 가지고 율법을 자랑하면서 막상 율법을 지키지 않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고발하고 있습니다(17-24).
바울의 이 가르침은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것 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라는 자체만으로도 구원에 대해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그들의 마음이요, 내면적인 삶이었습니다(29).
마음이 변화되는 것은 율법의 조문(27) 이 아닌 성령의 사역입니다(29).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그리스도) 아래에 있습니다. 육신의 소욕을 좇지 않고 성경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옛사람이 아닌 새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변화된 삶을 통해 복음이 증거됩니다.
물고기 표지판(?)도 중요하지만 변화된 삶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증거됨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복음적 삶이요, 참 유대인인것입니다(28-29).
간혹 자종차 뒤에 '물고기 표시(?)'를 붙이고 다닌분들이 있습니다. '물고기 표시'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표시하는 마크입니다. 이런 표시판을 붙히고 다니면서 과격한 운전이나, 교통법규를 위반한다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일이 아닐것 입니다.
이런 부담때문에 이런 마크를 붙히고 다니는것을 꺼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일것 입니다(제 생각으로)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요지가 바로 이것입니다(24).
바울은 율법을 가지고 율법을 자랑하면서 막상 율법을 지키지 않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고발하고 있습니다(17-24).
바울의 이 가르침은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것 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라는 자체만으로도 구원에 대해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그들의 마음이요, 내면적인 삶이었습니다(29).
마음이 변화되는 것은 율법의 조문(27) 이 아닌 성령의 사역입니다(29).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그리스도) 아래에 있습니다. 육신의 소욕을 좇지 않고 성경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옛사람이 아닌 새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변화된 삶을 통해 복음이 증거됩니다.
물고기 표지판(?)도 중요하지만 변화된 삶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증거됨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복음적 삶이요, 참 유대인인것입니다(28-29).
2013년 2월 1일 금요일
판단
롬2:1-1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이 짓고 있는 죄들(1:18-32)로 부터 관심을 돌려 그의 독자들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주석가들마다 해석이 조금씩 다르지만 본문의 바울의 경고가 로마교회안에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말한것인지? 아니면 어떤 특별한 유대인들을 향한것인지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어찌되었던 자신도 죄를 지으면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나 이방인들처럼 부도덕한 죄를 짓는 사람(1:18-32)들이나 하나님앞에서는 같은 죄인들입니다.
이들 두 구룹은 하나님을 알지만(1:19;2:2), 둘 다 하나님을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1:28,32;2:4-5).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사람들이고, 죄의 질량을 따질것 없는 동등한 죄인들입니다(1:29;2:5)
본문을 읽으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때로는 남과 나를 비교하면서 그래도 비교적' 나는 괜찮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이 바로 그런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줍니다.
내안에 숨겨진 죄가 있으면서 겉으로는 안그런척 '외식' 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그분의 진노를 받을 수 밖에 없는 동일한 죄인들입니다. 하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2:16), 죄의 심판에서 면제된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쉽게 남을 비교하고 판단하지는 아니한지요?
남을 판단하기전에 먼저 나의 죄를 날마다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이 짓고 있는 죄들(1:18-32)로 부터 관심을 돌려 그의 독자들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주석가들마다 해석이 조금씩 다르지만 본문의 바울의 경고가 로마교회안에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말한것인지? 아니면 어떤 특별한 유대인들을 향한것인지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어찌되었던 자신도 죄를 지으면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나 이방인들처럼 부도덕한 죄를 짓는 사람(1:18-32)들이나 하나님앞에서는 같은 죄인들입니다.
이들 두 구룹은 하나님을 알지만(1:19;2:2), 둘 다 하나님을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1:28,32;2:4-5).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사람들이고, 죄의 질량을 따질것 없는 동등한 죄인들입니다(1:29;2:5)
본문을 읽으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때로는 남과 나를 비교하면서 그래도 비교적' 나는 괜찮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이 바로 그런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줍니다.
내안에 숨겨진 죄가 있으면서 겉으로는 안그런척 '외식' 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그분의 진노를 받을 수 밖에 없는 동일한 죄인들입니다. 하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2:16), 죄의 심판에서 면제된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쉽게 남을 비교하고 판단하지는 아니한지요?
남을 판단하기전에 먼저 나의 죄를 날마다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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