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7일 일요일

경건의 시간에

시61편 오늘의 묵상입니다.
한주간 동안 주님의 고난과 부활하심을 묵상하였습니다. 그리고 본 시편 말씀을 읽으니까 더 마음에 와 닿습니다.

시편기자는 자신의 부르짖음을 들어달라는 기도로 본문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는 과거 하나님이 자신의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을 알고(5), 자신의 부르짖음을 들어달라는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1).

특히 그의 마음의 상태는 심리적으로 매우 약한 상태에 있습니다(2). 근심 걱정 때문에 마음이 약해지면 기도할 마음조차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큰 시간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 나보다 높은 바위"(2),견고한 망대임(3)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원히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 머물기를 갈망합니다(4).
또한 적극적으로 그의 간구를 아뢰고 있습니다(6-7).

본문은 우리에게 여러가지를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때에 우리의 소리를 들으심을 믿으며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기도에 늘 귀를 기울이십니다.

우리가 예배드릴때 하나님이 어떤분임을 앎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감사 드릴때에 하나님이 과거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생가하며 감사드립니다.

매일의 삶속에서 나타나는 힘들고,어려운일들에 대해 주님의 도우심을 체험하며 감사드립니다.

기도를 들으신다는 믿음, 예배, 감사, 간구 오늘 아침 경건에 시간에 빠질수 없는 요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2013년 4월 6일 토요일

너는 나를 따르라

요21:20-25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으로 부터 새로운 소명을 받은 베드로는 금방 다른 사람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궁금했습니다.

그는  사랑하시는 제자(20,요한)에게는 앞으로 무슨일이 일어날것인지를 주님께 물었습니다(21).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단순했습니다 "그를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 였습니다(22).

우리는 다른 사람과 쉽게 비교하며  자기의 상황에 대한 위안을 찾을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주님과 비교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자 입니다. 그분을 닮기를 원하며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그분이 인도하시는 삶을 살기를 원하며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제자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에게 포커스를 맟추고 사는 자 입니다.
교회가 교회끼리 비교하고, 저분은 저렇게 굉장하게 사역을 하는데 나는 이정도 밖에 일을 못하는가? 이런 남과 비교 의식이 은근히 교회안에도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얼마나 큰 교회를 하고, 얼마나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는 소위 성공한 목회자(?)가 아닌 나에게 게 맡기신 사명을 얼마나 신실하게 감당하는냐? 얼마나 착하고 충성된 종인가? 에 있습니다.

각자 부르심의 모양과 상급이 다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를 상관하지 말고 "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이 음성이 우리에게도 들리지 않습니까?

2013년 4월 5일 금요일

주님을 사랑한다면

요21:15-19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후 주님은 갑자기 베드로에게 세번에 걸쳐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 했던 것 처럼 주님도 세 번에 걸쳐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주님의 처음 두 번의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에서 주님은 아가페(Agape)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으로 부터 온 희생적 사랑입니다(15-16).

그러나 이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두 번 역시 필레오(Phileo) 사랑으로 대답합니다.

흥미로운것은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큰 소리 쳤던 베드로가(13:37) 아가페 사랑으로 대답하기를 주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또다시 실패할까 봐 두려워서 그랬던것입니다.

베드로의 응답에 주님은   " 내 어린양을 먹이라 ,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고 하셨습니다.

다른말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다른이들을  돌보고 섬김을 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말이 필요없이 오늘 다른 사람을 돌보고 섬겨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이 맡기신 양들을 주님처럼 사랑하고 주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목회도 출발하지 않을까요?

2013년 4월 4일 목요일

베드로 스타일

요21:1-1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옛 직업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결심을 합니다(3).
그와 함께 가겠다고하는 따라나선  다른 제자들 6명과 함께 디베랴 호수에서 고기를 잡습니다..

본문의 고기잡는 모습은 베드로가 첫 번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을때의 상황과 비슷합니다(눅5:1-11).

이 두 이야기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물을 던져야 할 곳을 가르쳐 주셨고, 주님이 가르치신곳에 그물을 던지자 많은 고기를 잡을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이야기에서 베드로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눅5장에서는 주님앞에서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눅5:8)라고 하였지만, 본문에서는 주님을 향해 물로 뛰어 들었습니다(7). 역시 베드로 다운 행동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던일로 늘 죄책감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마음이 불편해 피하고 싶을텐데  본문에 베드로는 주님을 보고 너무 반가워 물로 뛰어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주님이 자신을  용서 하셨음을 알았습니다.
또한 베드로가 주님을 향해 물로 뛰어든 순간 자유함을 느꼈을 것 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들과 떡과 생선을 함께 드셨습니다(12-13).
한편의 아름다운 서정적인 그림을 보는 것 같습니다.

본문을 보면서 오늘 '베드로의 스타일'로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2013년 4월 3일 수요일

보지않고 믿는 자

요20:24-3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도마는 매우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합리적이지 않을때 그는 매우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하자 그는 자신이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25).

도마의 상식으로는 죽은 사람이 다시 부활한다는 것은 납득이 않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드레가 지난 후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던  도마가 있는곳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몸을 도마에게 확인시키셨습니다.

결국 도마는 "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며 신앙고백을 합니다(28).
전에는 주님을 단순히 선생님으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시라는 확실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흥미로운것은 도마의 경배에 주님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29).

이 말씀은 도마에게만 아닌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여지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여지는 것만 믿는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것이 더 많고, 그 보다 한 차원 놓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것을 보이는것 처럼 믿는 것입니다.
 믿으니까  보여지는 것입니다.믿음은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인간의 논리로 설명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히11:1).

주님을 직접 본적은 없지만 믿음으로 주님을 보고, 찬양하고 경배할수 있는 믿음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아-멘-

2013년 4월 2일 화요일

평강과 기쁨

요20:19-23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 22절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많습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행동은 사도행전2장의 성령강림의 상징적인 행동이라고 보는 것이 옳은 견해입니다. 또한 성령님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심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요, 주님께서 내뿜으신 숨기운 때문에 성령님이 오신것이 아니라 주님이 약속하신 말씀때문에 오신것 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는
창2:7에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때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창조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요6:63).

성령님은 영적 생명을 주시고 죄로 인해 죽은 영혼을 살리십니다(엡2:1).

또한 주님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을 두 번 반복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기쁨으로 반응을 하였습니다(20). 이순간 주님은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열매인 기쁨과 평강이(갈5:22) 제자들이 모인곳에 충만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비빌리에 만나 그것도 문을 꼭 잠그고 있던 그곳에(19)에 부활하신 주님은 친히 나타나셔서 자신을 보이시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고, 평강과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처음 제자들에게만 그렇게 행하신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평강과 기쁨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이미 이런 축복을 주셨는데 우리는 매일 주님이 주신 이 축복을 충만히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까?

오늘 주님의 평강과 기쁨을 충만히 경험하시는 하루가 되기길....

2013년 4월 1일 월요일

임재하심

요20:11-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무덤에 머물러 있던 막달라 마리아는 울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무덤앞에 놓여 있던 돌이 옮겨졌고, 시신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시신이 도난당한줄 안 마리아는 어찌할바를 모른채 울고 있었습니다(11).

곧 이어 마리아는 한 남자를 만났는데 부활하신 주님인줄 모르고 동산지기인줄 알았습니다(14-15).

그녀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학자들을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이 다른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눅24:13-35).

아니면 마리아가 주님의 부활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아뭏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난 목격자였습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습니다(10).

우리의 삶속에 늘  임재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깨닫지 못하며 바쁘게 살아갈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이 세상 끝날때까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마28:20),
 주님의 함께 하심을 잊고  살아갈때가 많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 마리아야" 하며 다정다감하게 부르셨던 것 처럼
오늘도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까?

주님! 항상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의 임재함을 더욱 풍성하게 경험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