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30일 화요일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빌2:19-30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1:29)입니까?
바울은 그 실예를 디모데(21-22)와 에바브로디도(25-30)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특징은 복음전도를 위해 애를 쓰는 사람이요
자신의 유익보다 다른 이들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디모데는 진실한 사람이었고(20)
에바브로디도는 섬김의 사람이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감옥에 있는 바울을 돕기 위해 빌립보 교회가 파송한 선물이었습니다(4:18).
이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빌립보 교회로 돌려보낼려고 합니다(25).

착하고 진실한 신앙의 동역자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고독과 고난속에서 복음전도를 위해 분투했던
 바울에게 하나님은   이런 선물들을 주셔서 그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는 큰 격려 그자체입니다.

나의 주변에는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는 없습니까?

2014년 9월 29일 월요일

원망과 시비

빌2:12-18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
매일 우리 삶속에서 역사하신다고 했습니다(12-13).

욕심이 아닌 순수한 열정과 주님을 향한 강한 열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포장한 나의 욕심이나 야망이 아닌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사탄은 나의 감정도 속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 있다면
무슨일을 하던 분쟁이나 불평으로 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분쟁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조용한 가운데 순수함과 책망받을 것이 없는 행동으로(14-15)
이타락한  세대에 하나님의 자녀로 빛을 나타냅니다(15;요3:21).

요란하거나 칭찬과 갈채 속에는 늘 분쟁과 불평이 따릅니다.
이곳에서 사탄은 늘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것입니다.

모든일에 하나님의 자녀로 빛을 나타내기 보다는(15;요3:21)

원망과 시비가 있지는 아니합니까?

2014년 9월 26일 금요일

하나가 되는 비결

빌2:1-4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하나가 되기를 원했습니다(2).
하나가 되기위해서는 ' 하나가 됩시다' 하고 구호를 외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교회가 하나가 되기 위해 실제적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 일이던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자기 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했습니다(3).

요란하거나 시끄러운
다툼이나 허영,경쟁의식, 남에게 보이고자 하는(show up)..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요일2:16)

 조용하면서도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한 마음 이것이 하나 되게 하는 비결이요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의 마음을 치유해주기를 바랍니다.

2014년 9월 24일 수요일

하나님의 손길

빌1:12-26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아마 사형선고도 받았을 것입니다.
이일은 감옥에 있는 바울보다 밖에 있는 빌립보 교인들을 크게 낙담케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에 하나님의 큰 섭리가 있음을 바라보며 도리어 그들을 격려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무슨 일을 당하면 단순히 처한  상황만 보지만,
믿음의 사람은 그 상황속에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영적인 안목으로 봅니다.

바울은 자신이 처한 어려움이 도리어 복음전파의 진전이 되었다고 했습니다(12).
또한 이일은  결국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의 진보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목적이심을 그는 바라보고 있습니다(25).

모든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1세기의 그리스도인이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에게도 역시 동일합니다

고난이 있던 없던
항상 그분의 목적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동일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죽음까지도 그분의 선하신 도구로 사용하십니다(21).

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오늘도 믿도 따릅니다.

2014년 9월 23일 화요일

바울의 기도

빌1:7-11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은 빌립보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가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 내가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8) 말씀에서
그가 이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엿볼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사랑이 풍성한 교회가 되도록 기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지식과 분별력을 겸비한 사랑입니다(9-10).

하나님에대한 풍성한 지식은 그분에 대한 사랑도 풍성하게 해줍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가 빈약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대한 지식이 빈약해질때 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빈약해지는 것은 설교가 빈약할때 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에 대한 풍성한 지식을 드러내고 
이 하나님에 대한  풍성한 지식은 곧 그분에 대한 사랑과 찬양과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또한  분별력입니다.
분별력이 없는 사랑은 남의 죄를 키워주고 그를 잘못되게 할수 있습니다.

주님도 마7장에서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마7:1-2)하시고는
곧 이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고 하셨고(마7:6),
거짓 선지자들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마7:15).
남의 잘못을 트집잡는 것과 분별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사랑과 지식과 분별력

빌립보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가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도 역시 같은 기도임을 믿습니다.

2014년 9월 17일 수요일

본받는 자

주님은 산상 설교에서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말씀이지요.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그 해를 동일하게 비추시는(마5:45)
누구에게난 관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자는 하나님처럼  누구에게나 관대함을 나타냅니다.

관대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나의 눈으로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고
다른 사람의 눈으로 나를  봅니다(마7:5).

그러면 동일하게 행동하는 나를 보게 되고
 남의 잘못에 트집만 잡고
정죄하는 자가 아닌(마7:1)

우리의 관대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엡5:1)
라고 권면했습니다.

주님! 오늘도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게하소서.

2014년 9월 12일 금요일

위로

살다보면 낙심하는 일이 많습니다.
세상의 삶도 그러하고 주님의 일을 하는데도 만만치 않습니다.
때로는 절망하고 포기하고 싶은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기까지 했다고 했습니다(고후1:9).
마음에 내려진 사형선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가  얼마나 힘들어었는지를 가늠해볼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낙심했던 그 상황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깨닫고

자신이 낙심했던 것은  "같은 고난을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함"(고후1:6)이요

"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지 하기 위함"(고후1:9)이라고 했습니다.

때때로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그 가운데도 위로를 넘치게 주시는 하나님(고훈1:5)

어떤 상황속에서도 이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는 우리를 탄복하게 만듭니다


2014년 9월 9일 화요일

기도

하나님은 기도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기도를 향과 같다고 했습니다(계5:8).
하나님에게 아름다운 향기의 기도!
그러므로 그분의 뜻대로 구할 때 그 향내는 하나님의 코를 더욱 자극할것입니다. 그래서 응답하실것입니다.
요일5:14 "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2014년 9월 4일 목요일

권위에 순종

마22:15-2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바리새인들과과 헤롯당원들은(15-16)은 서로 극과 극의 사람들입니다.
헤롯당원들은  헤롯왕가를 지지하는 친로마파 사람들이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종교적으로는 보수적이면서 철저한  유대주의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둘이 뭉쳤습니다.

때로는 서로 극과 극의 사람들도 뭉칠때가 있습니다.
같은 목적일때 입니다.
이둘은 나쁜 목적으로 연합했습니다.

이들의 질문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코너에 몰아 넣기 위함이었습니다(17)

주님은 이들의 술책을 아시고
가이사에게 속한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21).

가이사와 하나님의 것
세상나라와 하나님 나라.

우리는 둘다 존중하고 존경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세상 나라에는 정직함으로
하나님 나라는 경외함으로

물론  먼저 선택하라면 당연히 하나님 나라입니다(마6:33).
하지만 가이사( 정부)의 권위를 존중하고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하나님의 말씀과 대치되지 않는다면)(롬13:1).

이렇게 위정자들을  존중해주고 존경하는 풍토가
교회에서 먼저 일어나야 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 본을 보여야 할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2014년 9월 1일 월요일

주님이 보시는 것은

마21:28-32절, 오늘의 묵상입니다.
본문의 비유는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말에 처음에 거부했다가  돌이켜 순종했던 맏아들과  하겠다고 해놓고 가지 않은 둘째 아들의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이 비유의 결론 부분에서 요한이 " 의의 길을 보여 주려고 왔다고" 했습니다(32).
자기 의에 빠져 있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요한의  멧시지를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소위 뻔뻔한 죄인들(?) 창기와 세리들은 요한의 멧시지를 믿었습니다
그결과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31).

본문의 포인트는 정직함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아직도 겉치레와 개인의 야망을 버리지 않았습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다를바가 없습니니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창기와 세리와 같이 단순함과 정직함일 것입니다.